그 다음 요14장15절을 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척도가 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keeping하는 몸부림으로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 정도를 나타내는 겁니다. 쇼펜하우어처럼
천국은 무료하다는 말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겁니다.
오래 전에 제가 어떤 이에게 무얼 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잊어버렸대요.
그 ‘잊어버렸다’는 말속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싶다는 말을 하면 3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장면 먹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염두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의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계명을 항상 가슴으로 끌어안고 있습니다.
축구의 골키퍼가 공이 날아오면 온 몸을 던져 막고 끌어 안 듯이 말씀을 붙잡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는 100장이면 100장, 1,000장이면 1,000장을 고이고이
다 차곡차곡 모아둡니다. 그러나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 불에 태워 버리고 맙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의 계명을 꼭 끌어안고 지킵니다.
또 요14장16절 보십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드디어 보혜사가 등장합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등장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육적인 인간을 영적으로 만드실
분은 오직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파라클레토스의 ‘파라’란 말은 옆에서란 말입니다.
그래서 “Para church”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교회 옆에 따르는 교회란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주님과 같으나 다른 분으로 우리 옆에서 충고하고 권면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이 그런 것 아니야 이런 것이야 하고 영적 시어머니 노릇을 합니다.
바로 성령님이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는데 성령님이 오신 이후부터는 성령님이 그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14장17절을 보십시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의 영, 곧 보혜사를 통해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는데
‘너희는 저를 아나니 그러나 세상은 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이름을 달았다 할지라도 진리의 성령을 모르면 세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아버지가
이러하시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신 이후에는 택한 백성들에게만
성령을 통해서 비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아버지를 보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한 번 보여 봐’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성령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생명의 빛을 가진 우리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한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요14:12)
그리고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일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임하시면
주께서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 말씀이 엄청나게 크게 보이고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앞에서는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16) 그리고 진리의 영(요14:1717)이
오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누가 오신다고 하는가요? 주님이 직접 오신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하나님은 삼위가 일체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아버지 안에서 아들이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고 예수님 당시는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함께 하시고 성령을 통해 일하시고,
지금은 성령안에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일하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삼위일체입니다.
그 분들은 한 번도 따로따로 떨어져 계신 적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그 다음에 요14장19절입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과 빈 무덤을 육안으로
본 베드로가 그때 제대로 부활 주님으로 봤을까요? 아니지요 육안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체까지도 육안으로 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고도 고기를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님이 그에게 임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보았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눈으로 부활체이신 주님을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다른 어드벤테이지(advantage)가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성음성을 듣고 육신을 보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어떤 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절대 우리 것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약의 이야기를 주야장천 해대는 겁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말씀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0)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환상이나 표적만 본 사람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증거 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자신의 삶은 안 됩니다. 말씀이 존재화 곧 체화되지 않습니다.
요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제대로 보질 못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과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제 3일에 하늘을 오라락 내리락 하시는 은혜와 진리라는 사실까지는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율법의 마당에 서 있는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 이후부터 천국을 침노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육신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죽을 때 까지
사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공연히 쓸데 없이 정치의 부정에 개입하다고 목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거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너는 시몬이니 장차 게바가 되리라’(요1:42)고 하신 그 말씀대로 결국 반석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은 변화가 되는데 예수님을 본 사람은 변화가 안 됩니다.
요한일서에 가보면 사도요한이 어떻게 증거하는가요?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듣고 보고 주목하여 만진 바 된지라(요일1:1)라고 간증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만난 사건을 두고 한 말이 아니고, 진리의 성령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을 만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주님을 보고 만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