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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天과 地와 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CG없이 대규모 전투를 재현하고, 야리와 화승총을 이용한 전투를 잘 보여준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려 했지만, 생뚱맞은 기마전투-닥돌씬을 넣어 용두사미가 된...
일본에서 방영중인 풍림화산이 신겐 휘하의 간스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반면, 天과 地와는 겐신이 주인공입니다. 개인적으론 드라마 풍림화산과 비교해볼때 이쪽 배우들이 더 나아 보이는군요.
(신겐진영에서 애꾸눈의 절름발이가 보이는데 간스케인 듯)
-가와 나카지마 전투 -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1541년 21살의 나이로 가신들의 추대를 받아 아버지인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영주의 자리에 올랐다. 신겐은 그가 불교에 귀의 하고 얻은 이름이었고, 이시기에는 하루노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케다 신겐>
하루노부는 영주가 된 직후부터 시나노평정을 시도, 1542년부터 1552년까지 시나노의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하루노부에게 밀려나 시나노에서 추방당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비롯한 시나노의 호족들은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이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에게 원조를 요청하였고, 가게토라는 이를 받아들여 하루노부에게 시나노에서의 퇴거를 요구하게 된다. 하루노부는 이를 거부 양자는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들의 전투는 서로의 영토간의 거리등을 고려하여 요충지인 가와나카지마(川中島)를 중심으로 잇달아 벌어졌다.
1553년 4월, 겐신은 5,000명의 군을 이끌고 가와나카지마에 진출해 온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하루노부도 겐신도 미지의 상대를 대상으로 군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양자는 특별한 전투를 치루지 않고 5월에 함께 철퇴하게 된다.
같은해 8월 겐신의 지원을 받은 다케다의 오오이 오부히로가 모반을 일으키지만, 하루노부는 즉각 진압했다.
1554년 봄 하루노부는 겐신을 무력화시키고 시나노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슨푸성의 이마가와 요시토모, 오다와라성의 호조 우지야스와 삼자 동맹을 맺었고, 후방의 위협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1555년 4월, 다시금 다케다군과 나가오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다.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전과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양국은 10월에 화친하고 철퇴한다. 하루노부는 나가오군이 에치고로 철퇴하자마자, 군을 돌려 기소씨를 공격했고, 기소씨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시나노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진출한다.
1557년 우에스기 겐신이 가와나카지마로 진출해 옴에 따라, 재차 다케다군과 나가오군이 대치하기 시작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양군 모두 전과 없이. 더욱이 겐신이 없는 사이에 가가, 엣츄에서 일향종의 일규가 일어났기 때문에 우에스기군은 철퇴한다.
1559년 하루노부는 불가에 귀의 이름을 신겐으로 개칭하였고, 1561년 4월 겐신은 관동관령이던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개칭하고 관동관령직을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8월 1만8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가와나카지마로 진출했다. 이에 호응하여 신겐또한 2만의 병력으로 대응 양군이 다시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게 되고 5차례의 전투가운데 가장 격렬했던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건 신겐이었다. 신겐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요충지인 가이즈산성에 3천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두고 있었고, 이 성을 이용해 우에스기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본군과 협공을 할수도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점은 우에스기군도 알고 있었고, 겐신의 부하들은 겐신에게 이점을 지적했으나 겐신은 어쩐 일인지 그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전군 부동(不動)"을 명령했다. 그는 후방이 차단되어 가스가야마 성으로의 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걱정마라. 만약 신겐이 가스가야마 성을 친다면, 우리는 고슈를 칠 것이다." 이에 겐신측의 동요는 수습되었다.
이렇게 되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건 신겐쪽이었다. 신겐은 겐신보다 병력이 더 많았고 본국에서 병량을 보급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에 있어서 우에스기군보다 더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로인해 장기전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투를 단기전으로 끝내기 위해 겐신쪽이 먼저 공격을 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겐신은 병력을 대기시킨체 움직이지 않았고, 더욱이 전군 1만 8천가운데 5천을 선광사주변에 배치하고 있었고 1만 3천만으로 2만의 다케다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신겐은 이 5천의 움직임이 신경쓰여 겐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겨울철이 다가옴에 따라 퇴로가 차단됨에도 겐신이 움직이지 않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다케다군의 병참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자 선제공격에 나서기로 결정을 하였다.
신겐은 군사인 야마모토 간스케의 조언에 따라 탁목조 전법을 채용하였다. 결전 전날 신겐은 고사카 마사노부와 사나다 유키타카가 지휘하는 1만2천의 별동대가 밤중에 출발하여 동이 트기 직전에 겐신의 본진을 기습하기로 하였고, 신겐 자신은 8천의 본군을 통솔하여 우에스기군의 퇴각로상에 위치한 하치만바라에 대기 퇴각하는 우에스기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미 다케다군의 군영 주변에 첩자들을 풀어놓은 겐신은 평소보다 많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다케다군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즉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다케다군보다 앞서 군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텅빈 본영에는 100명의 무사들을 남겨두어 병력이 남아있는것 처럼 위장을 했고, 작전이 실패했음을 알고 본진으로 돌아오는 별동대가 강을 건너야 하는 도하지점에 1천명의 별동대를 남겨두어 별동대의 본진합류를 지연시키게 하였다.
때마침 생겨난 짙은 안개는 우에스기군의 움직임을 감춰주었고 겐신은 가와나카지마 주변에 있는 다케다군의 밀정을 모조리 잡아 죽임으로써 전투직전까지 자신들의 의도를 다케다군이 알지 못하게 했다.
안개가 겉힘과 동시에 우에스기군 1만 2천은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8천의 다케다군을 공격(차현)했고, 2만의 병력을 겐신을 포위섬멸하려던 신겐의 작전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전군이 각개격파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허를 찔린 신겐은 황급히 공격형인 어린진을 바꾸어 학익진으로 전환. 겐신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 순식간에 방어진이 뚫리고 신겐의 동생이자 유능한 장수였던 노부시게. 신겐의 곁에서 전략을 보좌했던 군사 간스케등이 겐신의 공격을 막다 전사했다. 신겐은 죽음직전까지의 위기에 몰렸으나 다행히도 그들의 희생으로 시간을 벌어 별동대가 도착하여 우에스기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상황은 역전하여 우에스기군이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우에스기군은 신겐의 바로 앞까지 진출해있었고, 겐신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신겐을 목전에 두고 퇴각을 했다. (이 때 겐신이 신겐의 진영에 단기로 돌입. 신겐과 1 대 1 결투를 벌이고 신겐은 부채로 막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에스기
겐신>
겐신은 다케다군의 추격을 막으며 주력을 가와나카지마에서 퇴각시켰고, 전국시대 최고의 명승부라고 불리는 가와나카지마전투가 종결되었다.
이전투에서 양군합쳐 6천여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양군의 병력손실은 80%에 육박했다. 다케다군은 다수의 중신들을 잃었으나 시나노장악에 성공함으로써 목표달성에 성공하였다.
이전투 이후 다시금 양군은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였으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우에스기군이 시나노에서 완전히 철퇴함으로써 신겐이 상락도중에 죽을때까지 대규모전투는 가와나카지마에서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글출처 : http://blog.naver.com/vonmusel?Redirect=Log&logNo=50019002552
첫댓글 저도 이영화 소장하고 있는데 자막이 없어 아쉽더군요
영화의 단점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창병대의 모습이군요.. 예행연습은 하기나 한건지.. 전국시대 기준으로 본다면.. 전혀 훈련받지 못한 부대네요..ㅋㅋㅋ 창병대의 움직임이 허술한것이 단점인것 같습니다.. 캬~ 마지막에 그 유명한 우에스기 겐신의 에치고 기마대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야리는 저렇게 쓰는 것 아닌가요?
당시 일본의 장창은 천과지 영화같이 쓰는거 맞는데요 일본전국시대에 관한책을본적있는데 당시 일본장창은 찌르기와 함께 내려치는 동작도 매우중시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좀 부러운 전쟁영화이긴 하죠 우리나라는 저런 고대전쟁영화가 하나 없으니
갑양군감을 보면 내리치기가 주용도입니다. 그것도 집단인 대가 일사분란하게 말이지요.. 영화속에서는 그런 부분이 없어서.. 엉성하다고 평가한것입니다.
밀리터리 나그네님이 맞긴 합니다만 사실 신단수님도 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장창대가 일사분란하게 할 여건이 위 영화, 하치만바라 전투에서는 아예 할수조차 없었습니다. 2만 가까이의 사람들이 말 그대로 칼질부터 하는 말 그대로 에네르기가 밀집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장창을 일제히 내리찍거나 찌르다간 다 죽고 말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아쉬운 것은 아직 3단철포대 전술이 나오기 8년 전인데 (사실 3단철포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독창적인 전술이 아니라 네고로, 사이카 철포대가 1570년 처음 실전응용) 벌써 3단철포대의 모습이 나온다는 점이죠. 또한 하치만바라 혈전은 검술전이 대다수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동원한 철포 숫자는 아마 실제 전투와 거의 비슷할 겁니다. 양측 합쳐서 한 4백정 이상은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아직 30만정까지는 생산이 안 된 1561년이기 때문)
그 3단 철포술에 대해서는.. 좀 말이 많더군요.. 일본에서 말입니다.
스와 대명신의 사제단 나름대로 고증이 잘 된 영화입니다. 글 올리신 분께서는 기마전투가 별로인 듯 합니다만. 전 대단히 맘에 드는군요. 뭐 개인 차이긴 합니다만. 확실히 잘 만든 영화 중 하나이고 카케무샤까지 비교한다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에스기 하타모토 기마대가 적진을 돌파하는 장면은 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1천 5백명이 동군 7만 5천명을 돌파해버린 '시마즈의 돌격'을 보는거 같습니다.
2천명 병력이 아니었던가요? 세키가하라때 시마즈 요시히로의 그 유명한 시마즈의 후퇴 말입니다. 기록에는 분명하게 시마즈의 후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기록한것으로 압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적어도 일본 전국시대에는 전장에서 기마돌격이란게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일본 지형이 산지가 많아 기마전투에 불리하다는 점도 있지만, 일본 토종말이 너무 왜소하고 힘도 약해 기마로 쓰기에는 부적합합 한 이유가 가장 크다고 하더군요. 기마대로 유명한 다케다군도 전장에서 기마를 사용할 때는 예비대로 대기해있다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타고 목표지점으로 신속히 이동한 다음 下馬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신속한 이동과 함께 전장으로 달려가야 할때 들 체력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지요.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시마즈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주인의 난 때문에 1천 6백명만 파견합니다. 그리고 시마즈의 후퇴가 아니라 돌격이라고 전 들었는데 뭐 서로 용어 파악에 오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겠고요.
시마즈의 후퇴,,라는게 맞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이 우세해지자 상대방 진영을 돌격을 해서 돌파한 뒤에 그대로 자기 영지로 퇴각한 거니까요. 즉 퇴각을 위해서 돌격을 한 것이니 시마즈의 후퇴라는 말이 옳을 겁니다.
카이사르님의 말도 사실입니다. 일본의 토종마는 너무 빈약해서 청일전쟁때 평양공략전 당시 기병대가 전멸하는 바람에 정찰없이 전투를 벌였고 결국 오시마 혼성여단이 마옥곤의 의자군에 밀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족이지만.. 또 다케다 군단의 기마대도 평소에는 대체적으로 그 방식대로 싸웠지만 가와나카지마나 나가시노 철포전에서는 예외적으로 기마상태 그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