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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메소포타미아 신화(Mesopotamian mythos)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두 강의 사이에 땅라는 뜻인데 두 강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가리킨다. 두 강의 하류에 도시 국가들이 생겨났고, 이 시기가 기원전 3300년경이었다. 이곳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성벽을 쌓고 도시국가를 형성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에서는 수메르 이전의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유적도 몇몇 발견되어 기원전 5000∼4000년경부터 농경민이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세계 각국의 신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찬란하게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강을 끼고 있는 지역적 특성상 외부인의 침략이 많았고 홍수가 잦았다. 수메르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에 셈족이 쳐들어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2대 제국으로 나누어 건설했다. 그 뒤로 페르시아인이 침략하였고 페르시아인의 뒤를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거치며 7세기 후반부터 아랍인에 의한 이슬람화가 형성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서도 최초의 역사시대를 거쳐 수메르 우루크 왕조기에는 문자 문화와 지구라트 유적, 외벽 신전 대리석상 여성 두부 등의 유적을 남겼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초기의 수메르 신화가 그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최초 문명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러 도시 국가가 건설되었다가 망하고 하는 역동의 역사를 거치며 많이 훼손되었다.
수메르 신화 속의 신들은 셈족으로 넘어가며 그 이름이 바뀌거나 이야기가 달라져 토판에 기록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불규칙적으로 범람하는 홍수에 대처하기 위해 운하와 수로를 만들었고, 홍수가 실어 나른 비옥한 흙에 곡물을 경작해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수메르인들은 물체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를 이용하여 교역과 생활을 기록했는데, 인류의 문자 문명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
처음 하늘에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던 시절, 밑에 있는 땅도 이름이 없었고 단지 두 신만이 있었다. 최초의 바다 신 아프수와 바다의 화신인 티아마트 그 둘뿐이었다. 그 둘로부터 태어난 신은 라흐므와 라하무, 다시 안샤르와 키샤르 그리고 하늘 신 아누가 생겼으며, 아누에게서 에아가 태어났다. 이렇게 태어난 신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신들은 티아마트의 뱃속을 엉키게 했고 신전을 뛰어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바다 신 아프수는 티아마트에게 낮에는 쉴 수가 없고 밤에는 잘 수가 없으니 신들을 쫓아버리고 조용히 좀 살게 해달라고 했다. 티아마트는 어머니였기 때문에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혜와 지하수의 신인 에아는 바다 신 아프수가 시종과 함께 신들을 쫓아낼 계획을 세운 것을 알아차리고 아프수와 그 시종이 잠에 빠진 순간 그들을 죽여 버렸다. 에아는 아프수의 허리띠와 왕관, 광채가 나는 망토를 자기 것으로 하고 만족하여 돌아갔다.
에아는 아내인 담키나와의 사이에서 모든 면에서 최고인 마르두크를 낳았다. 태양신의 송아지라는 뜻을 가진 마르두크는 자신감이 넘쳤으며, 눈매는 날카로웠으며 태어날 때부터 힘이 셌다. 아버지인 에아는 마르두크의 모습을 보며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게다가 하늘 신 아누가 마르두크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 마르두크는 늠름하게 자라 낡은 질서를 파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아프수의 아내 티아마트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는지 마르두크의 성장을 두려워했다.
티아마트의 편에 선 신들은 티아마트에게 아프수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티아마트는 무시무시한 괴물들로 한 떼의 병사를 만들어 마르두크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티아마트는 뿔 달린 뱀과 광포한 개, 전갈인간, 호전적 악마, 어류인간, 황소인간 등 열 하나의 괴물과 티아마트의 유일한 연인 킨구를 앞세워 싸움에 맞섰다. 티아마트는 운명의 서판을 킨구에게 주었다. 운명의 서판을 소유한 자는 최고의 권력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에아는 자신의 편에 선 신들에게 티아마트의 거대한 뱀을 비롯한 열 하나의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불안에 떨던 에아가 전쟁에 나갔으니 패하는 것은 불 보듯 했다. 그 뒤로도 전쟁에 나간 족족 패하자 모두들 실망에 넋을 놓고 있었다. 이때 에아의 아들 마르두크가 나서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마르두크는 전쟁에 나서며 자신이 티아마트와 싸워 이기면 최고신의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신들이 응하자, 마르두크는 전투를 대비했다. 활과 화살, 철퇴, 번개, 불길, 그리고 티아마트를 잡기 위한 그물을 만들고 티아마트의 몸 안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바람을 모았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했음에도 마르두크는 티아마트를 보자 두려움을 느꼈다. 그때 티아마트가 비웃는 것을 보자 용기가 되살아나 티아마트에게 일대일로 싸우자고 했다.
티아마트와 마르두크는 정면 승부를 위해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마르두크는 그물을 펼쳐서 티아마트를 에워싸며, 사나운 바람을 일으켜 티아마트의 얼굴에 날려 보냈다. 티아마트는 바람을 삼키려고 입을 벌렸다. 바람이 그녀의 뱃속을 부풀리자 마르두크는 활을 쏘아 티아마트의 배를 관통시키고 몸을 두 동강냈으며 심장을 쪼갰다.
마르두크가 티아마트의 시체를 넘어뜨리고 그 시체 위에 우뚝 서자 티아마트의 괴물 병사들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마르두크는 운명의 서판을 빼앗아 자신의 인장과 봉인한 후, 티아마트의 시신을 둘로 나누어 몸 반쪽을 하늘의 지붕으로 삼고, 나머지 반쪽은 지하수가 새지 않게 땅으로 만들었다.
계속해서 마르두크는 우주의 나머지 부분을 만들었다. 한 해의 열두 달에 이름을 붙이고 각각의 달에 별을 주었으며 신들을 위해 자리를 만들었다. 초승달을 만들어 날을 재기 위한 밤의 보석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르두크는 티아마트의 침으로 날아가는 구름과 바람, 비를 만들었다. 티아마트의 독으로는 크게 굽이치는 안개를 만들고, 그녀의 눈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열었다. 신들은 고마움에 취해 환영회를 준비하고 마르두크에게 최고신의 왕위를 수여했다.
에아는 수메르 시대에 엔키라고 불렸으며, 땅 밑에서 단물이 흐르는 곳의 지배자였다. 에아는 신비스러운 마법을 부렸으며 인류의 창조자였고 수호신이었으며, 예술과 기술을 가르쳤다. 압수 신이자 지혜의 신인 에아를 통해 지하에서 흐르는 물을 지배하는 신을 지혜의 신으로 섬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처음 신들이 살던 시절, 지위가 낮은 신들은 노동을 했고 큰 신들은 편히 쉬고 있었다. 작은 신들은 갈수록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는 홍수를 방지하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밑바닥에 쌓인 침적토를 파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작은 신들이 큰 신들을 비난하며 연장을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지혜의 신 에아가 작은 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어 작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할 사람을 만들었다. 천정에서 점토를 떼어내 속에 이름이 있는 피를 섞어 사람을 만들었다. 먼저 출산 여신들을 만들었고 그 출산 여신들이 사람의 몸 형체를 만들었다.
출산 여신들이 사람들을 만들고 난 뒤 이 일을 자축하는 연회가 열렸다. 산파역을 담당하는 어머니 신 아루루는 맥주를 많이 마시고 자신이 사람 몸의 형체를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할 수 있으며 운명도 자신이 정한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지혜의 신 에아에게 자신과 한 번 겨루어 보자고 했다.
아루루는 기형적인 장애인 여섯을 만들었다. 아루루는 첫 번째로 손을 펴기만 하고 구부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들었는데, 에아는 그에게 왕의 종이라는 직업을 주었다. 아루루가 만든 두 번째 사람은 장님이었는데, 에아는 장님에게 노래하는 재능을 부여했다. 세 번째로 아루루가 만든 사람은 다리를 절뚝거렸는데, 에아는 그에게 금속을 주조하는 일을 하게 했다.
아루루는 네 번째로 멍청이를 만들었다. 에아는 멍청이에게 왕실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했다. 다섯 번째로 만든 사람은 오줌을 줄줄 싸는 사람을 만들었는데, 에아는 주문으로 목욕을 시켜서 그를 낫게 했다. 여섯 번째로 만든 사람은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는데, 에아는 그녀를 왕비의 곁에 두고 베를 짜게 했다.
이렇게 계속 에아는 만들어진 인간에게 특별한 운명과 숙명을 주었다. 아루루와 에아의 경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혜의 신 에아는 자기가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여 조산아를 만들었다. 출산의 여신 아루루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자 이로써 지혜의 신 에아가 이기게 되었다.
아눈나키(Annunaki)라고 불리는 큰 신들은 50명이었으며 고메소포타미아의 풍요와 저승의 신들이었다. 후일 저승에서 심판관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
큰 신들이 만든 사람들은 들판에서 짐승들과 어울리며 잘 살았으며 점점 그 수가 많아지자 도시를 세웠다. 사람들은 노동을 하여 수로를 파서 물을 잘 흘러가게 하고, 그 대가로 배급을 받아 살았다. 그리고 노동의 양을 늘리면서 점점 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의 강도가 점차 심해지자 사람들의 불평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큰 신들은 불평소리 때문에 살 수가 없다며 사람들을 없애자고 했다. 신들은 사람들의 불평소리에 이미 노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동의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신들 중에서 지혜의 신 에아가 모임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또한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우트나피시팀( Utnapishtim)은 앞일을 알려주는 신상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며 말씀을 듣기 위해 두려워하며 신의 소리를 기다렸다.
매일매일 제사를 드린 던 어느 날, 지혜의 신 에아가 찾아와 우트나피시팀에게 곧 신들이 대홍수를 일으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대홍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재산에 미련을 두지 말고 집을 부수어 배를 만들고 그 배에 생명의 씨앗을 태우라고 조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바람과 거친 폭풍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엿새 낮 엿새 밤 동안 땅을 휩쓸었다. 무시무시한 대홍수로 이레째 되는 날에는 폭풍우와 홍수가 더 맹렬해졌다. 잠시 후 바다가 고요해지고 바람은 잠잠해졌으며, 홍수도 멈추었다. 세상은 온통 적막뿐이었다. 모든 인간이 진흙으로 변해 버렸고, 홍수가 진 바다 수면은 지붕처럼 보였다. 배의 지붕을 열자 햇빛이 쏟아졌다.
우트나피시팀은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리고 육지가 보이는지 알기 위해 첫 번째로 비둘기 한 마리를 날려 보냈으나 되돌아왔고 두 번째로 제비를 날려 보냈으나 되돌아왔다. 우트나피시팀은 세 번째로 날려 보낸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홍수가 진 큰물이 어느 정도 빠진 것을 알았다.
우트나피시팀은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올렸다. 큰 신들은 살아남아 제사를 지내는 우트나피시팀을 축복하여 신처럼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편 현재의 바레인 지역 딜문 땅에 가서 살게 했다.
아트라하시스의 태초와 홍수 이야기
작은 신들이 노역에 힘들어 반란을 일으키자 에아가 나서 점토를 떼어 사람을 만들었다. 남자 일곱 명과 여자 일곱 명이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호미와 삽을 만들어 수로와 운하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자 신들은 사람들을 없애기로 하였다. 에아가 몰래 아트라하시스에게 사람들을 없애려 하니 배를 만들어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아트라하시스는 매우 지혜롭다라는 뜻이었다. 아트라하시스는 배를 만들어 살아남았다.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Epoth)
길가메시는 키가 4미터나 되는 수메르 우루크 왕조의 힘센 왕으로 우루크의 젊은이들을 억압한 폭군이었다. 길가메시는 젊은이들에게 성벽과 신전에서 일하도록 강요하며 본인은 결혼적령기에 다다른 모든 여성들에게 영주의 권리를 행사했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길가메시에 대항하기 위해 어머니 신 아루루에게 호소했다. 아루루는 그 호소를 듣고 흙으로 엔키두를 빚었다. 엔키두는 몸에 털이 덥수룩하게 나고 머리가 길었는데,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짐승들과 같이 살았다. 야생에서 자란 그의 힘은 견줄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엔키두를 찾아 창녀와 결합하게 하여 도시인처럼 보이게 하였다. 여섯 날과 일곱 밤 동안 사랑을 나누자 짐승들은 엔키두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엔키두는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수메르의 우루크로 향하는 일에 동의했다.
길가메시도 그 무렵 자신에게 강한 적수가 나타날 것이라는 암시의 꿈을 꾸었다. 결국 엔키두가 먼저 길가메시를 막아섬으로 둘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거리에서, 장인의 집 문에서, 광장에서 맞붙어 싸웠는데 문틀과 벽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둘은 막상막하였으므로 누구도 이기지 못하였고 그 뒤로 죽음도 가를 수 없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길가메시 이야기가 써진 토판본은 여러 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몇 개에는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시종으로 그려지고 있다. 수메르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고 노예에게 어느 정도 신분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는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시종이었다 해도 길가메시에게 있어서는 절친한 친구 같은 시종이었던 듯하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시종의 신분이 보장되었으며 주인과의 관계는 상호 의무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길가메시는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사악한 훔바바가 산지기로 있는 삼목산(杉木山, 레바논으로 추정)으로 가 삼목을 베어오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훔바바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어서 아무도 삼목산에 발을 디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길가메시는 태양신 샤마쉬에게 기도했다. 태양신 샤마쉬는 길가메시에게 일곱 용사를 동반자로 보내주었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와 일곱 용사들을 데리고 삼목 산에 들어갔다. 일곱 번째 산을 넘자 마음에 드는 삼목나무를 베고 가지를 쳤다.
이들이 일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산지기 훔바바를 깨웠다. 훔바바의 울부짖음은 홍수를 일으켰다. 훔바바가 하는 말은 불이었고 그의 숨결은 죽음이었다. 훔바바의 마력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저녁에 깨어난 엔키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엔키두는 길가메시에게 말했다.
훔바바가 우리들을 알아채고 노여워하는 것 같으니 우루크로 다시 돌아가세.
길가메시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일축했다.
둘이 같이 있으니 무서울 게 무엇인가? 걱정 말게.
길가메시는 고집을 내세우며 훔바바의 집으로 찾아가기 위해 앞장섰다. 그러나 훔바바를 보자 길가메시 역시 두려움으로 뒷걸음질조차 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산지기 훔바바는 길가메시와 엔키두를 작은 거북이 같다고 비웃었다. 길가메시는 목숨을 살려주면 아내와 여동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훔바바는 아내와 여동생을 얻을 생각에 자신의 힘 일곱 개를 모두 길가메시에게 주었다.
훔바바가 힘을 잃고 오두막으로 돌아갈 때 길가메시가 뱀처럼 쫓아가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엔키두가 훔바바를 묶었다. 훔바바가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길가메시에게 애원했다. 태양신 샤마쉬도 길가메시가 훔바바를 살려줄 것을 원했다.
그때 엔키두가 나서 훔바바를 살려주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듣고 있던 훔바바가 엔키두를 품팔이라며 비웃었다. 엔키두는 화가 나서 훔바바의 목을 쳐 죽였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훔바바의 목을 유프라테스 강에 떠 있는 뗏목에 실었다.
길가메시가 훔바바를 죽이고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씻고 좋은 옷과 장식 띠로 치장하자 아주 매력적인 남자로 보였다.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길가메시를 눈여겨보고 금 바퀴와 구리 뿔이 달린, 유리와 금으로 만든 마차를 주겠다며 길가메시를 유혹했다.
길가메시는 이슈타르에게 솔직하게 이슈타르의 옛 연인들이 맞이했던 참혹한 운명을 얘기하며 거절했다. 이슈타르는 모욕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하늘 신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이길 수 있는 하늘 황소를 달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산 자의 숫자를 능가하도록 죽은 자를 살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협박은 신들에게 있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에 신들은 이슈타르에게 하늘 황소를 내주었다.
이슈타르는 하늘 황소를 이끌고 우루크로 쳐들어갔다. 하늘 황소가 콧김을 내뿜자 강 옆 아래쪽으로 우루크의 청년들이 100명이나 떨어져 죽었다. 하늘 황소는 우루크의 젊은이를 200명, 300명을 계속 떨어져 죽게 했다.
엔키두가 강 아래쪽에 빠졌다가 살아나와 하늘 황소의 뿔을 움켜잡고 길가메시에게 황소의 목을 찌르게 했다. 둘은 힘을 합쳐 황소의 내장을 도려내자 이슈타르는 화가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저주의 말을 했다.
길가메시가 나를 욕보이고 하늘 황소를 죽였다.
엔키두가 그 말을 듣고 황소의 어깨를 베어 이슈타르에게 던지며 맞받아 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네 팔 위에 황소의 창자를 매달아 놓는 것이리라!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는 창녀들을 모아 황소의 어깨를 위해 눈물을 흘리도록 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대장장이들을 불러 모아 황소의 뿔에 경의를 표하도록 시켰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손을 씻고 우루크의 거리에서 승리의 행진을 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승리에 도취되어 아주 기뻐했으나 신들은 하늘 황소가 죽은 일을 몹시 노여워하고 있었다.
길가메시와 이슈타르의 또 다른 이야기
유프라테스 강변에 훌루푸라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풍이 불어 나무가 뿌리 째 뽑혀 강물 위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보고 집에 가져다 심었다. 그런데 그 나무에 뱀과 새와 여자 허깨비가 살기 시작해 이슈타르는 태양신 샤마쉬 오빠에게 쫓아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다시 이슈타르는 길가메시에게 가서 부탁했다. 길가메시는 나무를 베어 이슈타르가 원하는 대로 가구를 만들어주고 뿌리와 가지로 공과 나무막대를 만들어 공놀이를 했다.
도시의 젊은이들이 공치기 놀이에 빠져 있자 젊은 여인들과 과부들의 원성이 자자해지고 공과 나무막대는 저승으로 떨어졌다.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저승으로 내려가 공과 나무막대를 건져냈다. 길가메시는 돌아왔지만 엔키두는 저승에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엔키두의 죽음
신들은 하늘 황소가 죽은 일에 격분하여 길가메시와 엔키두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태양신 샤마쉬도 산지기 훔바바를 살려주지 않은 일로 둘을 노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에 나서지 않았다. 신들은 길가메시 대신 엔키두를 죽이기로 했다.
엔키두는 하늘 황소가 죽은 날 꿈을 꾸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엔키두는 병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죽음을 몹시 비통해 하며, 온 나라에 있는 구리, 은, 보석, 금으로 엔키두의 상을 만들게 했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상을 만들고 나서도 친구를 잃은 슬픔을 다스리지 못했다. 결국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다시 살리기 위해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트나피시팀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이 여행은 몹시 위험해 사자들이 있는 위험한 산과 전갈 인간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야 했다. 길가메시는 신의 술을 빚는 여인의 도움을 얻어 뱃사공 우르샤나비를 찾아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뱃사공 우르샤나비의 도움을 얻어 강을 건너 딜문에 도착한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게 되었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시팀에게 대홍수 이야기를 들었다. 우트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대홍수가 지속되었던 시간의 길이인 여섯 낮과 일곱 밤을 자지 않는 시련을 견디어 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길가메시는 그 정도는 쉬운 일이라며 엔키두를 위해 잠을 자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결국 잠들고 말았으며 이에 극심한 낙담에 빠졌다.
우트나피시팀은 영생을 얻지 못한 길가메시에게 젊어지게 하는 식물을 선물로 주었다. 길가메시는 젊음의 식물을 가지고 가던 중 차가운 웅덩이에서 목욕을 하였다. 그때 뱀 한 마리가 향기로운 식물의 냄새를 맡고 빼앗아 달아나 버렸다. 길가메시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영생을 포기하고 우루크로 돌아왔다. 길가메시는 자신이 세운 우루크의 성벽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뿌듯함으로 위로를 얻었다.
길가메시는 여러 신들을 찾아다니며 엔키두가 저승 세계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엔키두는 풀려나 친구인 길가메시에게 어두운 저승 세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길가메시와 악카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왕으로 있을 당시 우루크의 흙벽돌은 당대에 이름난 벽돌이었다. 북쪽 메소포타미아의 키쉬에는 악카가 왕으로 있었는데 우루크에서 만든 흙벽돌로 신전을 지으려고 길가메시에게 협박 섞인 서신을 보냈다.
길가메시의 신하들은 그냥 흙벽돌을 키쉬 왕국에 보내자고 했으나 길가메시는 반대했다. 길가메시는 거절의 답신을 보냈고 악카는 키쉬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길가메시가 속임수를 쓰자 키쉬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악카는 길가메시에게 잡혔다.
악카는 본래 길가메시 누이의 아들이었다. 길가메시는 지난 날 훔바바에게 여동생을 주겠다고 약속한 일을 생각해 내고 악카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악카 왕을 풀어준 일로 지난날의 일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Ishtar)
수메르 시대에는 인안나라고 불렸던 이슈타르는 사랑과 성적 매력 그리고 전쟁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슈타르는 120명의 연인들조차도 지치게 할 수 있는 존재였다고 묘사되며 사자가 그녀의 상징 동물이다. 이슈타르를 숭배한 성소들은 우루크, 키쉬, 아가데, 그리고 아르바일에 있었다.
양치기와 결혼한 이슈타르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는 매년 성혼례가 치러졌다. 이는 도시의 통치자와 간택된 여사제가 짝이 되어 열흘을 지내는 행사였다. 이 행사 때 사람들은 지구라트(Ziggurat) 계단을 올라가며 풍요와 안녕을 기도했다. 도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즐겼다.
이슈타르가 여사제였고 성혼례 짝은 양치기 탐무즈였는데, 이슈타르에게 반해 잠자리를 하자고 졸랐다. 이슈타르는 여자답게 튕기며 농부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탐무즈는 이슈타르의 마음을 알아채고 농부보다 좋은 혼인 선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태양신 샤마쉬는 누이 이슈타르와 탐무즈의 혼인을 적극 권했다. 이렇게 하여 탐무즈와 혼인한 이슈타르는 새색시처럼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이슈타르는 시댁 식구들에게 잘하라는 어머니의 염려를 들으며 탐무즈와 함께 시댁으로 갔다. 탐무즈는 누이동생과 사이가 무척 좋았다. 누이동생 역시 오빠인 탐무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집으로 돌아온 탐무즈는 이슈타르에게 집에 남으라고 하고 누이를 데리고 양 우리로 가서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탐무즈는 누이와 색정적인 시간을 보내느라 이슈타르를 잊어버렸다.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이슈타르는 격분했다.
저승으로 내려간 이슈타르
이슈타르는 하늘과 땅을 버리고 저승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일곱 개씩이나 있는 신전들도 다 버리고, 이슈타르는 저승을 향해 떠났다. 그녀는 따라온 시종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친정 식구들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시켰다. 이슈타르는 저승 입구에 다다라 저승 문지기에게 저승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했다.
이슈타르가 저승에 들여보내 달라고 하자 문지기는 이슈타르에게 큰 왕관을 달라고 했다. 이슈타르는 왕관을 벗어주었다. 두 번째 문의 문지기는 귀걸이를 달라고 했고, 이슈타르는 귀걸이를 떼어 주었다. 세 번째 문의 문지기는 홍옥 목걸이를 달라고 해서 주었으며, 네 번째 문의 문지기는 가슴에 있는 비녀장을 달라고 했고, 다섯 번째 문의 문지기는 탄생석으로 만든 허리띠를 달라고 했다.
여섯 번째 문의 문지기는 손목과 발목의 장식을 달라고 했고, 일곱 번째 문의 문지기가 옷을 달라고 했기 때문에 저승의 여주인 에레쉬키갈을 만났을 때 이슈타르는 벌거숭이의 모습이 되었다. 이슈타르를 본 에레쉬키갈이 놀라 소리를 지르자 신들은 이슈타르를 고깃덩어리처럼 두들겨 담장에 걸어놓았다.
이슈타르가 돌아오지 않자 시종은 즉각 이슈타르의 식구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지혜의 신 에아는 이슈타르를 살려내 세상으로 데려 오기 위해 아름다운 남자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남자를 본 에레쉬키갈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이틈을 타서 에아는 이슈타르를 살려냈다.
아름다운 남자에게 유혹 당했던 에레쉬키갈이 정신을 차리자 그녀는 이 남자에게 끔찍한 저주의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남자에게 이후부터 도시의 경작지에서 주워온 음식을 먹고, 도시의 하수도에서만 물을 구하며, 성벽의 그늘에서만 서 있고, 문간의 계단에만 앉게 되며, 난쟁이와 목마른 자들에게 뺨을 맞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큰 신들은 이슈타르에게 저승에 내려간 이상 온전히 살아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하며, 대신할 사람을 보내라고 했다. 신들은 이슈타르를 믿을 수 없다며, 옆에 저승사자들을 딸려 보냈다. 이슈타르는 저승의 문을 나서 돌아오면서 자신이 문지기에게 내주었던 물건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되찾았다.
남편을 저승사자에게 내준 이슈타르
저승사자들이 이생으로 오는 도중 만난 시종과 그녀의 두 아들을 데려가려고 하자 이슈타르는 반대하면서 남편 탐무즈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탐무즈는 저승사자들이 잡으러 오자 놀라 이슈타르의 오빠인 태양신 샤마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샤마쉬가 그를 뱀으로 변신시켜 도망하게 해주자 탐무즈는 도망쳐 자신의 누이를 찾아갔다.
저승사자들이 누이에게 탐무즈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탐무즈의 누이는 탐무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부탁했다. 저승사자들이 계속 탐무즈를 찾자 이슈타르와 탐무즈의 누이도 탐무즈를 수소문했다. 이슈타르는 자기 목숨 대신 탐무즈를 저승 여신 에레쉬키갈에게 꼭 주어야 했고, 탐무즈의 누이는 어떻게 해서든 탐무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파리가 한 마리 나타나 자신들이 탐무즈를 찾아내면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이슈타르는 술집과 과일 집에 살게 해주겠다고 했으며, 탐무즈의 누이는 술집에서 제일 좋은 몫을 가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리들은 당연히 이슈타르가 제안한 것을 택했다. 탐무즈의 누이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챘다. 그녀는 들판을 헤매며 탐무즈를 위해 약초를 캐고 우유로 크림을 준비했다. 저승길에 가지고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슈타르의 또 다른 이야기
신혼생활의 단꿈에 빠져 있던 이슈타르(인안나)는 양치기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섰다. 이슈타르는 남편의 양을 다른 사람이 몰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남편의 양을 끌고 다니는 이들은 약탈자 할머니 비룰루와 그의 아들이었다. 약탈자들이 이슈타르의 남편 탐무즈를 들판에서 때려죽였던 것이다.
이슈타르는 격분하여 들판의 할머니는 물 담는 가죽부대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들판에서 쓸쓸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주었다. 이슈타르는 남편 탐무즈의 죽음이 애달파 저승 세계로 내려갔다. 이슈타르가 저승에 내려가며 자신에게 있는 것을 모두 문지기에게 주었기 때문에 저승에 도착해 에레쉬키갈을 만났을 때는 벌거벗고 있었다. 땅에서는 그동안 모든 성행위가 중지되었다.
에레쉬키갈은 이슈타르를 죽였다. 그러나 지혜의 신 에아가 나서 플레이보이를 만들어 에레쉬키갈을 매혹하게 만들고 이슈타르를 살려냈다. 에레쉬키갈의 마음이 플레이보이에게서 떠나자 그녀는 플레이보이에게 몹시 화를 냈다. 그래도 에레쉬키갈은 이슈타르를 용서했다. 하지만 탐무즈는 이슈타르를 풀어준 대가로 저승에 남게 하였다.
강물에 빠져 죽은 탐무르
탐무즈는 자신의 양 우리에서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서성거렸다. 그의 양과 염소가 끌려나가자 몰래 숨어 있던 탐무즈는 벌판의 강가까지 저승사자들을 피하여 도망쳤다. 탐무즈는 강 건너 편에 있는 어머니와 누이를 보고 강을 헤엄쳐 건너려고 했다.
그 때 아내인 이슈타르가 소리를 치자 거센 물살이 밀려와 탐무즈를 저승으로 붙잡아 갔다. 탐무즈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며 애달프게 그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를 사랑했던 그의 누이는 자신의 살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뽑았다.
수메르에서는 매년 6월과 7월 같은 날을 정해 탐무즈를 위한 의식이 행해지는데, 이를 타클림투 의식이라 불렀다. 이 의식은 이슈타르를 대신해 저승으로 간 탐무즈를 기리기 위한 것이며,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탐무즈의 상을 물에 담가 기름을 바르고 니네베에 안치하였다. 이 의식이 치러지는 6월과 7월을 탐무즈의 달이고 부른다.
에라 신의 분노
에라 신은 대기의 신인 엘릴각주1) 의 아들로 전염병의 신이자 저승의 신이다. 에라 신의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한 것으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에라 신의 이야기를 부적 형태로 만들어 집 벽에 매달아 놓곤 한다.
네르갈 신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에라 신은 전쟁을 일으키라는 압력을 받으면서도 집에서 빈둥빈둥 거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진취적이고 무서운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자신의 무기들을 벽장에 두고 문도 열어 보지 않았다. 이를 보고 일곱의 전사 무기 신들 중에 가장 앞선 인물인 세비티가 에라 신에게 전쟁을 일으키게 하려고 빈정대며 놀려댔다.
어째서 에라 신이 허약한 노인처럼 도시에 머무르며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처럼 여자가 만들어 주는 빵을 먹으며 전쟁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야 합니까?
그리고는 자신들은 금방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투덜거렸다.
길들을 알고 있던 우리들이 길을 아주 잊어버리게 되고, 우리들의 무기 위로 거미줄이 드리울 것이다. 우리의 화살촉은 무디어지고 검은 아무것도 죽일 수 없게 되겠지.
결국 에라 신은 마르두크와 전쟁을 치르기로 마음을 굳히고, 옆에 있던 시종에게 앞장을 서도록 지시했다. 에라신은 바빌론에 있는 마르두크의 신전 에사길라에 들어가서 마르두크에게 말했다.
당신의 화려한 옷이 더럽혀지고 왕관은 거칠게 녹슬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마르두크를 신전 밖으로 보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에라는 살살거리며 마르두크의 지난 날을 보여주는 화려한 상징물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이 지하의 압수에 있어서 위로 올라올 수 없으니 내려가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마르두크가 없는 동안 에라 자신이 하늘과 땅을 지배하고 잘 다스리며 있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마르두크는 망설이지 않고 출발했다.
에라 신의 활약
에라 신은 마르두크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도시를 파괴하고 왕궁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성전들의 신성을 더럽혔다. 가족들 사이에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세 번째 시도 때에는 바빌론의 파멸을 무시무시하게 얘기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시종 이슘이 끼어들어 에라 신의 마음을 바꾸어보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슬퍼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바빌로니아 전역과 시파르, 우루크 그리고 데르에서 사람들은 전쟁을 하고 나라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에라 신은 여러 신들에게 말했다.
내가 진정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나는 화가 나면 사람들을 해칩니다.
시종 이슘은 에라 신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모든 이들이 에라 신이 노여워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알았으며, 모든 나라가 에라 신의 힘을 두려워하며 찬미하였다.
에타나 왕의 모험(Etana)
옛날 옛적 포플라 나무에는 한 마리의 뱀과 새가 같이 살았다. 둘은 태양신 샤마쉬가 정해준 경계를 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뱀과 새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교대로 경계를 넘나들며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수리가 악한 마음을 품고 친구인 뱀의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지혜로운 새끼 독수리가 아버지 독수리에게 뱀의 새끼를 잡아먹지 말라고 말하며 태양신과의 약속을 되새겨 주었다.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밑으로 내려가 뱀의 새끼들을 잡아먹었다. 뱀이 먹이를 가져와 새끼에게 먹이려 했을 때 새끼가 없어진 걸 알고 태양신 샤마쉬에게 애원했다.
저는 뱀에게 도움을 주었건만 독수리는 제 둥지에 내려와 새끼를 잡아먹었습니다. 당신의 올가미는 땅만큼 하늘만큼 넓으니 독수리가 당신의 그물을 빠져나가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태양신 샤마쉬는 뱀의 슬픔을 듣고 뱀을 야생 황소의 뱃속에 넣어주었다. 야비한 독수리가 황소를 뜯어 먹게 될 것이고, 그때 뱀이 독수리의 날개를 잡고 부러뜨리면 독수리는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 받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약속했다.
새끼 독수리가 아버지에게 야생 황소를 먹지 말라고 말렸지만 독수리는 이를 뿌리치고 야생 황소를 먹고 날개가 부러져 지옥에 떨어졌다. 독수리는 지옥에서 태양신 샤마쉬에게 매일 자신을 가엾게 여겨달라는 기도를 했으며, 태양신 샤마쉬는 독수리에게 호통을 쳤다. 그래도 벌 받는 독수리를 불쌍히 여겨 한 사람을 보내니 그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태양신 샤마쉬
수메르 시대에는 우투라 불렸으며, 하늘과 땅 전체의 심판관이었다. 샤마슈라고도 하며 태양이라는 뜻이다. 샤마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의로운 이가 호소하면 적에게 심판을 내려 벌을 주었던 정의의 신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을 내려준 것도 샤마쉬였다. 샤마쉬를 숭배했던 성소는 시파르와 라르사였고 사랑과 미의 여신인 이슈타르의 오빠로도 알려져 있다.
에타나(Etana), 독수리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다
수메르 에타나 왕은 자신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신에게 매일 기도를 드렸다. 태양신 샤마쉬는 버림받은 독수리를 찾아가라고 가르쳐 주며, 독수리가 탄생의 식물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에타나는 지옥으로 독수리를 찾아가 탄생의 식물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독수리는 먼저 자신을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에타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독수리에게 여덟 달 동안 다시 나는 법을 가르쳤다.
먹이를 잘 먹어 튼튼해진 독수리는 사자만큼이나 강해졌고 에타나를 위해 탄생의 식물을 찾기 위해 날았다. 독수리는 탄생의 식물을 찾지 못하자 자신의 등 위에 에타나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독수리는 에타나에게 바다가 어떻게 보이는지 물었다. 에타나는 바다가 양우리보다 크지 않다고 말하자 더 높이 올랐다.
다시 물었을 때 에타나는 바다가 물통보다도 크지 않다고 말했으며 세 번째 물었을 때 독수리는 더 높이 오를 수 없다고 했다. 독수리와 에타나는 다시 한 번 더 날아올랐으며 결국은 아누의 하늘에 닿았다. 둘은 탄생의 식물을 찾아 돌아왔으며 에타나는 자신의 대를 잇는 바리라는 아들을 낳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남풍을 부러뜨린 아다파(서기apa)
아다파는 에리두에 있는 성전에서 지혜의 신 에아의 사제로 있는 자였다. 아다파는 매일 빵을 굽고 제단을 준비했으며 매일 의식에 참여했다. 아다파는 또 성전의 어부로서 일했는데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다.
어느 날 아다파가 고기를 잡다가 남풍을 잡아 날개를 부러뜨리겠다고 호되게 위협했다. 그날로부터 7일 동안 남풍은 아다파가 무서워 땅쪽으로 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늘신 아누는 남풍이 불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 시종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시종은 아다파의 일을 하늘 신아누에게 고했으며, 아누는 에아의 사제인 아다파를 불렀다. 아다파가 소환되어 가기 전 지혜의 신 에아가 아다파에게 말했다.
하늘 신 아누 앞에 서서 신들이 준 죽음의 빵과 죽음의 물을 마셔서는 안 되오.
아다파는 하늘의 신 아누 앞에 나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신이여, 전 바다 한 가운데서 저의 하늘이신 에아를 위하여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풍이 불어와 폭풍우로 바다를 부풀려 저를 바다에 처박았습니다.
옆에 있던 큰 신들이 아다파의 편을 들어주었고 하늘 신 아누는 냉정을 되찾아 아다파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이때 아다파는 지혜의 신 에아의 말을 들어 빵과 물을 거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욕심쟁이 새였던 안주(Anzu)
안주는 하늘 신 아누의 아들로 독수리의 몸 형상과 사자머리를 하고 있었다. 안주는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격이 격정적이었다. 지혜의 신 에아가 바람 신 엘릴로 하여금 안주를 그의 경호원으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엘릴은 안주에게 자신의 침실을 지키게 했다. 엘릴은 자주 안주 앞에서 성수로 목욕을 했는데, 안주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를 동경했다.
안주는 엘릴의 권력을 상징하는 당당한 왕관과 신성한 옷, 운명의 서판을 응시하며 그의 권능을 빼앗기로 작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주는 엘릴이 침실 입구에 서서 옷을 벗고 목욕을 시작하자 운명의 서판을 훔쳐내 신의 상징물들을 가지고 도망쳤다. 화가 난 하늘 신 아누는 안주의 암살을 명했는데, 첫 번째로 아들인 날씨의 신 아다드를 불러서 번개로 일격을 가하라고 시켰다. 성공할 경우에 신들의 회의에서 최고의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첫 번째로 지목된 아다드는 안주를 해치는 원정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거절하고 물러갔다. 두 번째는 불을 무기로 가지고 있는 게라를 불렀다. 게라로 하여금 안주를 불태워 달라고 했으나 게라도 안주를 잡는 원정길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세 번째로 부른 이슈타르의 아들마저 안주를 해치는 원정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지혜의 신 에아가 위대한 어머니 신을 불러 가슴이 넓은 닌우르타를 만들어내게 하였다.
길을 만들고 시간을 정해 내가 창조한 신들을 위해 새벽을 밝히게 하라. 강력한 병사들을 소집하고 사악한 바람들로 하여금 안주를 지치게 하여 높이 날고 있는 안주를 붙잡아라. 땅을 범람시켜 안주의 집을 파괴하고 머리 위로 공포가 휩싸이게 하며, 그의 마음이 흔들리게 하며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게 하여라. 활에 화살을 고정시키고 화살에 독을 발라라.
위대한 어머니 신은 영감을 불어넣어 가슴이 넓은 최상의 연인인 닌우르타에게 위와 같이 호소했다. 닌우르타는 기세등등해져 일곱의 사악한 바람들과 무시무시한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산허리에서 만난 안주와 닌우르타는 서로를 마주보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안주는 악마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망토로 산을 뒤덮었으며 화난 사자처럼 포효했다.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닌우르타는 활을 팽팽히 당겨 화살을 쏘았으나 운명의 서판을 쥔 안주가 닌우르타의 화살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닌우르타는 지혜의 신 에아에게 조언을 구했다. 닌우르타는 에아의 조언대로 되풀이하며 사악한 일곱 바람을 불러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닌우르타의 화살이 안주의 심장과 폐를 관통해서 사악한 새, 안주를 죽였다. 그동안 세상에는 타는 듯한 더위와 혼란이 들끓었다. 닌우르타는 운명의 서판을 다시 되찾아 적들을 무릎 꿇게 했으며, 기쁜 승리의 소식을 신들에게 전했다.
네르갈(Nergal)과 에레쉬키갈(Ereshkigal)의 결혼
저승의 여주인 에레쉬키갈은 매년 신들의 연회에 올라갈 수도 없었고, 신들이 모두 그녀에게 내려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에레쉬키갈의 심부름꾼이 신들의 연회에 대신 와서 에레쉬키갈의 몫을 가져가도록 해야 했다.
이번에도 하늘 신 아누는 에르쉬키갈에게 연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심부름꾼을 보냈다. 심부름꾼은 저승에 있는 문을 통과하는 동안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 심부름꾼은 저승에 도착해 에레쉬키갈의 땅 바로 앞에 입 맞추고, 하늘 신 아누의 말을 전했다.
저승의 여주인 에레쉬키갈은 심부름꾼과 다정한 말을 주고받으며 시종인 남타르 를 보내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에레쉬키갈의 시종 남타르가 신들 앞에 도착했을 때 전쟁과 전염병의 신 네르갈각주2) 이 시종 남타르(Namtaru)를 모욕했다.
이에 지혜의 신 에아가 나서 네르갈을 에레쉬키갈에게 보냈다. 에아는 저승에 가는 네르갈에게 어떤 의자에도 앉지 말고, 빵과 고기도 먹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발도 씻지 말고, 무엇보다도 에레쉬키갈의 매력에 절대 유혹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네르갈이 저승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가 그를 기다리게 해놓고 에레쉬키갈에게 알렸다. 그 사이 시종 남타르가 저승문 가까이에 서 있는 네르갈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승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네르갈을 본 시종 남타르는 저승의 여주인이며 자신의 주인인 에레쉬키갈에게 달려가 네르갈의 못된 행동에 대해 말했다. 에레쉬키갈은 시종 남타르의 말을 비웃으며 전쟁과 전염병의 신 네르갈을 데려오게 했다.
네르갈은 일곱 개의 문을 통과하고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는 예를 표했다. 에레쉬키갈은 네르갈에게 의자를 주었지만 네르갈은 앉지 않았다. 네르갈은 저승의 여주인 에레쉬키갈이 주는 빵과 고기, 술 등을 거절하고 발도 씻지 않았다.
에레쉬키갈은 목욕하러 가서 그녀의 몸을 흘끗 쳐다보는 것을 허락했다. 네르갈은 그녀의 유혹에 저항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한 번 더 에레쉬키갈이 몸을 보는 것을 허락하자 네르갈은 유혹에 굴복했다.
네르갈과 에레쉬키갈은 엿새를 열정적으로 보냈고 일곱 번째 날이 되어 네르갈은 다시 하늘의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네르갈을 떠나보내고 저승에 남게 된 에레쉬키갈은 눈물을 흘렸다. 시종 남타르가 하늘 신 아누에게 부탁해 그곳에 있는 네르갈을 붙들어 다시 데려오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에레쉬키갈은 시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네르갈을 빨리 데려오고 싶었던 에레쉬키갈은 신들에게 네르갈을 다시 보내지 않을 경우 죽은 자가 산 자의 숫자를 능가하도록 하겠다는 위협을 했다. 시종 남타르가 하늘의 긴 계단을 올라가 에레쉬키갈의 말을 전했다. 이에 지혜의 신 에아는 시종 남타르가 네르갈을 찾아내도록 하면서 동시에 네르갈을 다른 신으로 변장시켜 못 알아보도록 했다.
깜빡 속아 네르갈을 데려오는 데 실패한 남타르는 에레쉬키갈에게 몸을 움츠리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한 명의 신에 대해 말했다. 에레쉬키갈은 남타르에게 당장 돌아가서 그 신을 데려오라고 시켰다. 마침내 네르갈의 모습이 밝혀져 네르갈은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저승의 긴 계단 길을 내려갔다.
그는 내려가면서 저승의 문지기를 때려눕혔다. 그리고 안마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에레쉬키갈에게 웃음을 보이고 왕좌에서 무례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네르갈과 에레쉬키갈은 또다시 엿새 동안을 침대에서 보냈다. 에레쉬키갈이 네르갈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제 남편이 될 수 있어요. 전 당신의 부인이 되겠어요. 당신이 광활한 땅을 지배하는 왕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겠어요. 당신이 지혜의 서판을 가지도록 해 주겠어요. 당신은 주인이 되고, 난 여주인이 될 수 있어요.
네르갈은 에레쉬키갈의 말을 듣고 난 뒤 그녀를 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결국 네르갈은 저승 신의 남편이 되어 그 또한 저승 신이 되었다.
신앙의 중심지는 쿠타로, 그 곳에서는 메슬람타에아(Meslamtaea)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여름 태양의 신이자 병의 신이다. 여신 에레쉬키갈에게 무례를 저질러 그녀에게 살해될 위기에 있었는데, 이때 역병의 마왕 14명을 데리고 지하계를 습격, 평화를 원하는 여신으로부터 그의 아내가 되겠다는 승낙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파괴와 싸움의 신으로부터 저승의 신이 되었다. 엔릴의 장자라고도 하며, 죽음과 공포뿐만 아니라 생명과 식물을 가져오게 하는 신이기도 하다. 상징은 커다란 라이온과 검이다.
사르곤 왕의 전설(Sargon)
사르곤은 북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 한 도시 악하드(Akk서기)를 건설한 왕이다. 본래 사르곤 왕의 어머니는 여사제였는데, 몰래 임신하여 아기를 낳은 후 아기를 갈대 바구니에 담아 유프라테스 강에 떠내려 보냈다. 한 사람이 물을 긷다가 아이를 주웠으며, 그 사람은 아이를 이슈타르의 정원에 데리고 가 정원사로 키웠다. 사르곤은 잘 자라 이슈타르 여신의 사랑과 관심을 얻어 왕의 시종이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사르곤은 꿈을 꾸었다.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그를 피의 강에 빠뜨리려는 무서운 꿈을 꾼 것이다. 그가 악몽에 시달리며 소리를 지르자 왕이 꿈을 얘기하라고 말했다. 사르곤은 자신의 꿈을 상세하게 얘기했다. 당시의 왕 우르자바바는 피의 강에 빠지는 이가 자신임을 느꼈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르곤을 용광로에 넣어 자기 대신 해치려고 하였다.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는 우르자바바가 해치려는 사르곤을 지켜주고 결국 왕위를 사르곤에게 물려주었다. 이렇게 사르곤은 왕이 되어 55년 동안 왕위에 앉아 현재의 터키 중심부까지 악카드 상인들이 무역업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지중해 쪽으로는 무역도시였던 에블라를 장악했으며, 북쪽의 아시리아 지역과 동쪽의 엘람과 마르하시, 남쪽으로는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했고, 배를 타고 지금의 바빌론까지 장악하였다.
수메르의 쐐기문자
쐐기문자(cuneiform) 또는 설형 문자(楔形文字)는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용했던 상형문자로, 현재 알려진 것 중 가장 최초의 문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형 문자적인 요소는 줄어들고 점점 추상화되었다. 쐐기문자는 점토판에 썼으며, 철필(스타일러스)이라고 부르는 갈대 가지로 만들었다. 철필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썼다. 수메르 문자는 아카드어, 에블라어, 엘람어(Elamite), 카사이트어(Kassite), 고대페르시아어(Old Persian), 히타이트어(Hittite), 루비아어(luwili), 후르리어(Hurrian)에도 쓰였으며, 고대 페르시아어와 우가리트 문자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은 경제활동에 관한 것인데 문자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문자의 사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과학적 60진법
바빌로니아 숫자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된 육십진법을 기반으로한 수체계이다. 갈대로 만든 첨필을 이용하여 점토판에 쐐기 문자를 새겨 나타내었다. 육십진법은 수메르나 에블라와 같은 메소포타미아 여러 문명에서도 사용되었다. 바빌로니아 수체계의 일부는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1시간을 60분으로 나누는 것이나 원을 360도로 나누는 것 등이 그것이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오늘날 약 11.2 km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를 사용하였다. 흔히 바빌로니아 마일로 불리는 이 단위를 사용했을 때 하루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평균적으로 12 바빌로니아 마일이었고, 그래서 바빌로니아 인들은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단위는 너무 커서 일상생활에서는 한 시간을 30 등분으로 세분하였다. 당시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하루에 한 번씩 지구 주위를 원운동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태양이 한 바퀴를 돌았을 때 12 x 30 = 360 등분이 되었다. 이것이 원 한바퀴를 360도로 나누게 된 기원이다.
바빌로니아 숫자는 기원전 2000년 무렵 형성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된 아카드어는 셈어파로 숫자를 부르는 명수법 역시 다른 셈어파의 언어와 같이 십진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수의 표기는 수메르어에 바탕을 둔 육십진법을 따랐다
수로(水路)와 바퀴의 발명
카나트(Qanat)는 중국의 고대 수로로 투르판과 같은 고온 건조한 지역에 나타난다. 연간 내리는 강수량은 부족하고 물은 필요하기 때문에 증발을 막는 구조로 형성한다. 즉, 수로를 지하에 건설하여 증발을 최대한 막는 것이다. 이란에서는 카나트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까지 이른다.
카나트는 페르시아어인 카나트(qanāt)에서 유래되었고, '카나트'라고 발음을 하며, 파슈토어 지역의 아랍어로는 '카레즈'라고 발음을 한다. 카나트는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란에서는 '카나트'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는 '카레즈'로 중국에서는 카레즈를 한자 음역하여, '칸얼칭'이라고 발음한다. 요르단과 시리아 지역은 '카나트 로마니'라고 하며, 모로코에서는 '케타라', 스페인에서는 '갈레리아', 아랍에미리트와 오만 지역에서는 '팔라즈', 볼로냐에서는 '칸'이라고 발음을 한다. 프랑스의 번역인 '포가라'는 아랍의 카나트를 번역한 것이며, 북아프리카에서는 어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지하 송수로 카나트의 경로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에서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서부에 이른다. 이 송수로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귀중한 샘, 호수, 시냇가, 대수층의 물을 저지대의 건조한 평야로 운송하는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수동 굴착 작업과 정기적인 수동 유지보수가 필요한 이 송수로의 시작은 3,000년 전부터 유래하며 대다수가 지금까지도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건조한 지역에서는 식량을 재배하는 것이 언제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10,000여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작물 경작 방법을 터득한 이후로 강수량이 적은 지역의 농부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고랑에서 충분한 용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먼 곳에서 발생한 장마와 산의 용설로 생긴 물이 강으로 흐른 뒤 범람하여 경지를 덮는다. 이집트의 나일강을 따라 이러한 범람이 천년간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으며, 현재는 아스완 하이 댐으로 방지되고 있다. 강의 범람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농경지에서도 주요 용수 공급 수단이었다. 두 지역 모두 초기의 기술자들이 용수 조절 및 보존을 위해 운하, 수로, 유역의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을 비롯하여 기타 고온 건조 지역에서는 운하, 수로, 유역에서 공통적으로 근본적인 증발 문제가 발생한다. 뜨거운 태양은 무서운 속도로 지표수를 증발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물이 매우 희귀했기 때문에 기술자들이 수고스러운 방법을 대신할 획기적인 해결책을 고안해 냈다. 이 해결책이란 중력을 받도록 기울인 지하 터널에 물을 모아 물의 근원지로부터 건조한 농경지로 물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카나트를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연구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카나트는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에 있는 고지대 또는 오만 산으로부터 유래했을 수 있으나, 현재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가설에 따라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지역은 오늘날 쿠르디스탄이라는 터키 및 이라크에 인접한 이란 북서부 지역이다. 이 지역의 산지에서는 초기 기원전 천년에 만들어진 지하 용수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고대의 광부들도 이 산지에서 작업을 하였으며 터널 건설에 대해 많은 지식을 보유했을 것이다. 오클라호마 주 대학교의 지리학자이자 초기 용수 시스템 연구자인 데일 라이트풋은 이 지역에서 송수로가 유래했기 때문에 이 관류 시스템에 대한 노하우가 오늘날 일부 35개 국가를 구성하는 동부와 서부로 모두 확산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랍 땅에서 카나트(이 용수 관리 시스템은 현재 이란과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기존의 페르시아 이름인 카레즈(또는 카리즈)로 불리기도 하며, 더욱 엄밀히 구분하자면 이 이름은 더 큰 규모의 지하 송수로로 흐르는 소규모의 공급용 터널에 주로 사용되는 건축 용어이다.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및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이 송수로를 카나트(수로)라고 부르며, 이 아랍어는 현재 이러한 유형의 관류 터널 네트워크에 가장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일반 용어가 되었다. 오만과 아랍에미리트연합국에서는 "분배" 또는 "배열"이라는 뜻의 팔라즈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와 같은 북아프리카 국가에서는 포가라라는 단어가 흔히 사용되며 모로코에서는 케타라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또한 전파 지역 중 동쪽 끝인 중국 북서부 내 튀르크 위구르인들 사이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페르시아 기원을 반영하여 카레즈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이란 내에 있는 대부분의 카레즈는 5∼10킬로미터(3∼6 mile)이지만 일부 카레즈는 70킬로미터(44 mi) 이상의 길이를 자랑하기도 한다. 아마도 현재 약 20,000여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이 카레즈들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약 275,000킬로미터(171,000 mi)에 달한다. 그 중 다수는 광활한 이란 고원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서쪽의 자그로스 산맥부터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약 2,000킬로미터(1,250 mi)에 이르며 연간 평균 강수량은 15∼25센티미터(6∼10")에 불과하다. 카레즈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란의 전체 용수 공급량 중 최대 1/3을 조달하였다.
어느 지역에서든 카나트 터널의 단면은 보통 높이 1.5미터(5인치) 및 폭 1미터로써 겨우 손으로 굴착 및 유지보수할 수 있는 크기이다. 수직 통로는 대개 50∼100미터(164'∼330')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10∼100미터(32'∼330') 깊이에 물이 담긴 터널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카나트도 고대의 카나트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아랍어로 무깐니라고 불리는 전문 굴착꾼들은 흙과 바위를 지표로 끌어내어 양동이에 담으며 첫 번째 수직 통로를 굴착한다. 운이 좋으면 약 15미터(50') 깊이에서 물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더 깊이 굴착해야 한다. 그 후 굴착꾼들은 수평 통로 작업을 시작한다. 수평 통로의 경사는 측량사가 결정한다.
때때로 토질이 불안정한 경우에는 무깐니가 구운 찰흙 또는 돌로 축이나 터널을 보강할 수 있다. 이 작업에는 위험이 따른다. 전통적으로 무깐니들은 통로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를 올리며, 일부 무깐니들은 불운하다고 판단되는 날에 지하 작업을 거부하기도 한다.
카나트 건축에 대한 최초의 문서 기록 중 하나는 기원전 8세기로부터 유래하며 아시리아에서 발견되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가 페르시아 내 군사 작전 중 북서부의 우르미아 호 근처에서 지하 용수 시스템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고 한다. 기원전 7세기를 통치했던 사곤의 아들 세나셰립은 페르시아의 기술을 사용하여 수도 니네베뿐 아니라 아르벨라 도시에도 카레즈를 건축하였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는 파라오의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는 카리아의 그리스인 탐험가인 카리안다의 스킬락스에게 서쪽 나일 계곡부터 리비아 사막을 지나 수익 좋은 이동식 상점의 통상로인 다브 알 아라빈(Forty Days Ro서기, 40일 길)의 주요 쉼터인 카리자 오아시스까지 이르는 160킬로미터의 카레즈 시스템을 건축할 것을 요구하였다. 후기의 한 철학자인 H.E. 울프는 1968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서 "남아 있는 카나트들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 기술은 "분명 이집트인들이 정복자들에게 호의를 보여 주고 다리우스에게 파라오의 칭호를 수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부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후 무역과 정복은 동부와 서부에서 모두 카나트 기술을 보다 확장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로마의 토목 기사들은 로마의 뛰어난 송수로 기술이 적합하지 않았던 점령지에서 카나트를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요르단의 경우 약 10년 전에 굴착된 로마식 구조의 가다라 송수로는 정통 송수로가 아니라 오히려 지하 용수 터널인 카나트이며 고대의 유사 터널들 가운데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는 170킬로미터(105mile)에 달한다. 카나트 피라운 또는 "파라오의 카나트"라 불리는 가다라 시스템은 서기 약 130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이후 건축되었으며 이 시스템의 일부는 이보다 앞서 건설된 헬레니즘 시대의 터널 경로와 이어집니다. 로마식 버전은 해체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나 미완료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북아프리카의 최초 카나트는 기원전 천년 후반기로부터 유래한다. 고고학자들과 기타 전문가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기술은 이집트부터 가라만테스가 거주했던 리비아 남서부 페잔 지역까지 전파되었고 이곳을 기점으로 사하라 사막을 지나 오늘날의 알제리와 모로코까지 동쪽으로 보급되었다.
알제리의 오아시스에서는 포가라라고 알려져 있는 카나트 덕분에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와의 통상 관계를 구축했던 남북 간의 새로운 통상로가 개발되었다. 중서부 사하라 사막의 포가라를 연구했던 옥스포드 대학교의 고고학자 앤드류 윌슨은 오아시스가 “오늘날 이란 외부 어느 지역에서든 가장 고차원적으로 개발된 포가라의 활용 지역”이라고 전했다. 윌슨은 전통 학문에 근거했을 때 포가라가 확립된 시기는 서기 11세기로 비교적 최근이지만, 알제리 포가라와 리비아의 가라만테스 포가라 사이에서 확인되는 "구조 및 명명법의 강력한 유사성"을 고려하면 “최소한 7세기부터 유래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근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티미문은 알제리의 구라라 사막 지역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 마을로서 붉은 황토 건물뿐 아니라 현재 대추 야자와 기타 작물 관류를 위해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포가라 시스템으로도 유명한다. 이 곳의 포가라 수는 2001년 마지막 공식 집계 시 약 250개였으나 점점 더 많은 지역 농부들이 전기 펌프 우물을 사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포가라는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 이 우물들은 대수층을 고갈시키며, 포가라와 달리 훨씬 더 깊이 굴착이 가능하다. 이러한 추세는 알제리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국제연합 수자원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알제리에서는 과거에 사용되던 포가라 수가 얼마 전 약 1,400여개에서 현재 약 900여개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7세기 이슬람 이전 시기로부터 유래하는 일부 포가라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농부들이 더 많은 현대식 용수 공급 방법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서기 7세기 및 8세기 이슬람 문명과 아랍 문명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를 지나는 북부를 비롯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서부로 확장되었는데 이는 가라만테스 시대 이후 두 번째로 가장 큰 카나트 기술의 확산을 야기하였다. 카나트 건설은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와 서부 카나리아 제도에서 이루어졌다. 오스틴에 위치한 텍사스 대학교의 지질학자 폴 워드 잉글리쉬는 스페인이 멕시코의 파라스, 캐니언 와스테카, 테카마찰코, 테화칸을 정복한 이후 신세계에도 카나트가 구축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란의 카레즈는 반대쪽 방향인 동쪽으로도 영국을 지나 아프가니스탄, 실크로드 오아시스 정착지인 중앙아시아, 중국 북서부까지 전파되었다. 다만 "이러한 확산이 아케메네스 왕조 때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이후 페르시아 왕조 때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신장의 오아시스 도시인 투르판은 서부로부터 유래한 통상로의 주요 쉼터로서 훌륭한 역사를 자랑한다. 산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해수면보다 저지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내륙 분지인 투르판 분지이다. 이 도시는 분수령의 범람으로 용수가 공급되는 중력 기반의 지하 수로를 건설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투르판의 여름은 매우 뜨거우며 건조한 바람에 의해 근처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가 운반된다. 카레즈는 2,000년 이전의 서부 한 왕조 이후 이곳에서 거주자들과 지나가는 이동식 상점에 물을 공급해 왔다. 투르판은 전 세계 카나트를 사용하는 지역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게도 실제 19세기 이후로 이러한 용수 시스템이 발달해 왔다.
1845년 중국에서 도덕적인 통치자의 롤 모델로 인정받던 유명한 중국 관료이자 학자였던 임칙서는 중국 연안을 따라 발생했던 두 차례의 영국군 습격 사건의 주모자로 모함을 받아 먼 곳의 신장으로 추방되었다. 임칙서는 북서부에 거주하였지만 카레즈 기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마침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카레즈를 투르판 이외 지역까지 더 널리 확산시킬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1944년까지 투르판 지역에는 379개의 카레즈가 사용되었으며 1952년에는 투르판 분지 내 지하 수로 시스템이 800여개에 이르렀다. 이것을 모두 합친 길이는 총 2,500킬로미터(1,555 mi)에 달했으며 이는 베이징부터 항저우에 이릅니다. 이는 전 세계에 있는 가장 긴 인공 수로 대운하의 길이와 같다. 오늘날 이 전체 길이가 두 배로 더 길어졌으며 투르판 분지 내 카레즈의 개수는 1,000여개를 훨씬 넘는다.
카나트는 이베리아부터 중국까지 수많은 건조 지역에서 농사를 비롯하여 문명화를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1968년 울프가 주장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란의 카나트는 로마 제국의 훌륭한 송수로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건설되었다. “로마의 송수로는 현재 흥미로운 역사의 일부”이지만 카나트 기술은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이란과 북아프리카의 카나트는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카나트의 길이와 수가 모두 증가하고 있는 중국 북서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변함없이 각 지역 내에서 태양을 피해 지하에 귀중한 용수를 보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맨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2000년경의 북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히타이트 등지이며, 기원전 1600년경에 힉소스인에 의해서 이집트로 전래되고, 기원전 1500년경에는 크레타 ·미케네 등지에도 전래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사용된 것은 기원전 1300년경 은(殷)나라의 전차였다. 바퀴살이 있는 바퀴의 출현과 함께 육상교통은 급속히 발달하였다. 바퀴살의 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일정했으나, 시대와 함께 12, 14, 16으로 증가하고,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쇠로 만든 타이어를 단 2륜전차가 사용되었다.
이 도시국가에서는 정치나 경제구조가 생겨나서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병사, 상인, 무역상, 토목기술자 등의 전문 직업인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나무를 이용할 줄 알았고 바퀴도 수메르인이에 의해 처음으로 발명되었다.
차륜이라고도 한다. 바퀴는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것중 하나이며, 모든 차량의 기본적인 부품으로 사용된다. 바퀴의 역학적 원리는 미끄럼 마찰을 굴림마찰로 변화시켜서 물체가 이동할때의 저항을 감소시키는데 있다. 바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굴림대'와'썰매'가 결합하여 생겼다고 한다. 굴림대는 무거운 짐을 옮길때 그밑에 넣고 굴리는 통나무로 짐이 이동하면 뒤에 남는 풀편함과 통나무 이기 때문에 무겁다는 불리한점이 있으므로 이것을 개량하고자 연구하던 중에 막대 같은 굴대의 양쪽끝에 원판을 붙이는 착상이 탄생하여 바퀴의 형태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발명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오래 되었다고 하는 바퀴는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에서 발굴된 전차용 바퀴로 기원전3500년 경의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은 통나무를 둥글게 자른 원판 바퀴이다. 이로부터 1000년 후의 우르의 왕릉 등에서는 영구차로 사용된 2륜차나 4륜차를 볼수있다. 이무렵의 바퀴는 바퀴살이 없는 합판 바퀴이며 보통 3장의 널빤지를 잘라 맞추어 가장자리를 둥글게 다듬고, 여기에 2개의 가로장을 박은 것이었다. 바퀴테 둘레에는 가죽으로 만든 타이어를 구리로 만든 못으로 고정시킨 흔적을 볼수 있으며, 기원전2000년 경의 전차의 바퀴에서는 구리로 만든 테두리 쇠도 볼수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종교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종교적 믿음과 그 행위들에 연관 짓는데, 특히 기원전 3500∼서기 400년 사이의 수메르(Sumer), 아카드(Akk서기), 아시리아(Assyria)와 바빌로니아(Babylonia)에서 행해지다가 이후 시리아 그리스도교(Syriac Christianity)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발전은 다양한 민족의 유입에 의해 특별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오히려 일관되고 조리 있는 체계로 원주민들의 요구에 부합되며 발전해 왔다. 기원전 제4천년기 부터 삶의 공급자로서의 자연의 힘에 대한 숭배가 이어져 오며 기원전 제3천년기에 이르면 숭배의 대상은 각기 그 특성에 따라 개별화된 신으로 자리하고 각기 나눠지며 확장되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자리하게 된 메소포타미아의 다신교는 기원전 제 2∼1천년기에 이르러서는 그 마지막 단계로 개인적인 종교가 크게 강조되고, 신들이 군주제적 계급제도와 결합되며 판테온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신이 자리하게 된다. 그러다 메소포타미아 종교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Dynasty, 기원전 559∼330) 동안 이란 종교의 확산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그리스도교화로 인해 사라지고 만다.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기원전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빌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이다. 아카드어가 사용되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남무 법전 등 100여년 이상 앞선 수메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1901년에 프랑스와 이란의 합동 발굴팀이 이란의 서남부, 걸프 지역 북쪽에 있는 고대 도시 수사에서 발굴하였다. 높이 2.25m의 검은 현무암의 돌기둥으로 윗부분은 부조가 새겨져 있고, 아랫부분은 아카드어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다. 설형문자의 고전기(古典期)의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1000년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법전은 서문, 본문 282개조, 맺음말로 되어 있다. 고대 법전으로서는 희귀하게 사법(私法)의 영역에서 종교를 떠나 법기술적인 규정을 발달시켰으며, 특히 채권법은 내용적으로 진보된 것이었다. 형법에서는 ‘눈에는 눈으로’의 탈리오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거의 원형대로 발견되었으며, 돌기둥에 설형문자로 씌어져 있어 “설형문자법계”의 연구를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12표법이나 헤브라이 법 등 여러 고대법의 비교법사적(比較法史的) 연구를 발달시켰다.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 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땅에 있는 나무를 베었다면 그에 대해 변상해 주어야 한다.
•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논에 물을 대려고 하다가 부주의한 사고로 다른 사람의 논에 물이 차게 만들었다면 그는 자신이 망가뜨린 곡식에 대해 변상해 주어야 한다.
•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쫓아내고 싶다면 먼저 재판관 앞에 가서 "더 이상 내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하고 말해야 한다. 재판관은 그 이유를 살펴보고 합당하지 않으면 아들을 내쫓을 수 없다.
•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만 두 번째로 나쁜짓을 하면 아들을 내쫓을 수 있다.
•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중 하나라도 훔쳤더라도 그 값의 열 배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돈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의 손은 잘릴 것이다.
• 건축가가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무너져 주인이 죽음을 당하면 건축가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집주인의 일가족이 죽었을 경우에는 목수의 가족중 해당되는 이가 죽어야 한다.
• 강도가 어떤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면 그 구멍 앞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 만약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만하다고 하여 고소하고도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고소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 궁중의 남녀 노예 혹은 자유민의 남녀 노예를 성문 밖으로 도주시킨 자는 사형에 처한다.
• 만약 새로이 아내를 들이고도 그에대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인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 어느 노예라도 그가 주인에게 "이 자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주인은 자기 소유의 노예임을 입증하고 그 귀를 자를 권리를 가진다.
•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두 손을 자른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기원전 640년경 이전)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혹은 배화교(拜火敎)가 창시된 시기는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으로 다양하다. 이 종교는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수슈트라가 세웠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그리스어에서 변한 게 조로아스터다. 기원전 600년경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때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미 그리스 지방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sda)를 중심으로 선과 악 이분법으로 세계를 구분한 게 특징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본명 자라수슈트라 스피타마)의 출생 연대는 대개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기원전 1000∼1400년경에 살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의 생애는 전설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로아스터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서른 살에 이르러 천사장을 만났다. 이 천사장은 참된 신은 아후라 마즈다이고 너 조로아스터는 그의 예언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조로아스터는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고, 때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가 하면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나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조로아스터가 77세가 되었을 때 큰 전쟁이 있었는데, 그는 거룩한 불(聖火) 앞에 서 있다가 적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 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때 파르티아 동부에서 번영했던 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중동에서 몰락했다.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으로 몰려 탄압 당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처음에는 아랍 정복자들도 이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속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상 유대교,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교에 해당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나 유대교와 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근친혼 풍습까지 허용해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취급 받던 마즈다크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 사람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拜火敎)로 불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 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 아후라 마즈다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종국적으로 모든 예배가 지향하는 창조하지 않은 창조자로 일컬어진다. 이 종교는 선한 생각, 선한 언어와 선한 행위를 통하여 인생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게 행복을 보장하고 혼란을 막는데 필요하다고 설교한다. 이 능동적인 참가는 조로아스터의 자유 의지 개념에서 중심적인 요소이며, 또 조로아스터교는 모든 형태의 수도원 생활을 거부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아후라 마즈다는 궁극적으로 사악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혹은 아흐리만(Ahriman)에 승리할 것이며, 그 시점에서 우주의 혁신을 경험하고 시간이 끝난다는 사상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은 시작과 끝이 없고 무한대로 순환한다고 여긴다. 니체가 언급한 영겁회귀와 순환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는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결혼식 때 주고받는 반지에 나타난다. 반지는 링으로, ‘영원히 사랑으로 순환하면서 살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 문양도 자연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요소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를 신성시하고 잘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2,500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 이란의 전통마을 아비아네(Abyaneh)에는 십자가 문양이 문과 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어떤 종교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테헤란 조로아스터교 신전에서 모베드와 일문일답한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간호사로 이란에 취업하러 갔다가 이란 남자와 결혼한 뒤 40여 년 간 이란에 살고 있는 경북 고령 출신의 한국인 가이드 이성주씨의 통역으로 진행했다.
“조로아스트가 살았던 시기를 기원전 8,000∼6,000년 혹은 기원전 600년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탄생은 기원전 1768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하다. 이는 페르시아에 서사시가 많이 있는데, 거기서 유추해 보면 이 시기가 나온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는 천문이 매우 발달해 있다. 천문에 대한 지식으로도 이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란 국내외 자료들을 비교 연구했을 때도 이 시기가 타당하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며, 그 중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왜,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는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이 바르다는 것도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다. 조로아스터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이란인들은 ‘물⋅불⋅땅⋅바람’을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신성시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에 있는 불은 수 천 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네 요소를 더럽히지 않고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4요소 중에서도 특히 불을 더 중시했다. 불은 모든 불결한, 정(淨)하지 않은 것들을 깨끗이 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오염되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삐뚤어지지도 않고 똑 바로 위로 향해 타오른다. 인간에게 따뜻함과 깨끗함을 주고 어둠을 밝히고, 음식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이로움이 매우 많다. 그래서 불을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지금 야즈드(Yazd)의 불사원(Fire Temple)에 모셔진 불은 1,500년 이상 됐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기도할 때 한 곳으로 바라본다. 야외에서는 아침에는 동쪽, 오후에는 서쪽으로 향한다. 빛이 있는 태양과 같은 방향이다. 실내에서는 빛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집에 불을 모신 곳이 기도하는 방향이었다. 이슬람 도래 이후엔 불을 쉽게 모실 수 없어 각 직종별로 모시던 불 16가지를 한데 모아 지금의 성지 야즈드에 모시게 됐다. 테헤란 불사원에 있는 불은 야즈드에서 갖고 왔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됐다. 불은 상징이지 불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아니다. 나치의 심볼, 불교의 만(卍)자, 십자모양 등이 4요소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조로아스터교를 한자어로 ‘배화교(拜火敎)’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때 우리 교과서에도 배화교로 소개됐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을 이원론으로 나눈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하느님을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h)’라 부른다. 아후라는 ‘생명을 주다’, 마즈다는 ‘학식, 지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아후라 마즈다는 ‘큰 지식의 창조자’란 의미다. 선하고 참되며 공평하고 지혜로운 아후라 마즈다는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창조했다. 아후라 마즈다가 계획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에게 바른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조로아스터교의 역할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주의 질서를 지키는 역할로, 두 가지의 보석 같은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바로 선(善)과 악(惡)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나 우주에도 서로 끌거나 미는 힘, 또는 반대의 힘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 두 반대의 힘은 창조주의 질서에 꼭 필요한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창조에 나쁘거나 못나거나 악한 것이라고는 없다. 다만 사람 생각의 선택에 따라 선과 악이 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로 사는 일에 노력한다. 무지한 사람은 바르지 못한 나쁜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한다. 자연을 신성시하므로, 거스르지 않는 그대로의 자연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도 선한 일에 속한다.”
∎ 조로아스터교의 제1 성지
“Pir-e-Chak Chak(피레 착착)이라는 곳이 제1 성지다. pir은 ‘늙은, 오랜된’이란 뜻이고, Chak Chak은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말한다. 야즈드 북동쪽 52km 떨어진 경사 가파른 깊은 계곡에 위치해 있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 야즈드게르드 3세의 딸인 ‘Nik Banu(니크 바누)’가 아랍군의 침입을 피해 이곳에 와서 숨게 된 후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부터 바위사이에서 똑똑하고 물이 떨어지는데, 그녀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이 성지는 조로아스터교가 생기기 전에도 사람들의 성소로 사용했다. 매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이란 국내외의 조로아스터교도 1천여 명이 참석해서 아베스타 경전을 읽으며, 아후라 마즈다를 예배하며 음식을 만들어 참석한 사람들과 나눠먹는 행사가 있다. 이 시기가 여름이 시작되는 때다.”
∎ 조로아스터교 신자들
“이슬람 도래 이후 많은 불 신전들이 파괴됐고, 신도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이스파한이 수도였던 사파비왕조 때만 해도 400만 명이 됐다. 당시 이란 총인구가 1,0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요즘은 이란에 15만 명, 인도에 20만 명, 전 세계 합쳐 약 40만 명으로 추정한다.(다른 책에는 전 세계적으로 15만 명 정도 되며, 테헤란에 1만 명, 야즈드에 4천명 등 이란에 2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 신전은 영국에 하나, 미국에 6개, 캐나다에 2개 있다. 이슬람 도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도로 넘어갔다. 그들을 인도의 페르시안이라 부른다. 인도의 상류층에 속하며, 이란 국내에 있는 조로아스터 교도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조로아스터교의 주경전은 아베스타(Avesta)인데 이것은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Veda)와 같이 지식(知識, Knowledge)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베스타 경전이 쓰여진 언어를 아베스탄(Avesta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베다 경전이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와 동일한 어족인 동시에 같은 시대에 자매어로써 존재하였다.
하아겐 폴(Haagen Paul)에 의하면 지금 전해지고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젠드 아베스타(Zend Avesta)는 원전 아베스타의 잔존본에 주석(Zind)을 합한 것이라고 한다. 원전 아베스타는 21권으로 된 큰 경전인데 기원전 400년경에 편찬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다행스럽게도 단 한 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서기 220년부터 서기 641년까지 계속된 사산 왕조(Sassan Dynastry)의 아르타 크세르크스(Arta Xerxes, 서기 226∼240) 때 경전 편수 사업이 실행되었는데, 오늘의 아베스타는 그때 결집된 것이다. 이것이 그 후 서기 1771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프랑스인 펠론에 의해서 영어로 번역 간행된 후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소개되었다.
∎ 대 아베스타(The Great Avesta)
대 아베스타는 야스나(Yasna), 비스파르드(Vispard), 벤디다드(Vendid서기) 등 3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야스나는 희생 제사(sacrific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야스나(Yasna) 제 17장은 신께 드리는 다양한 기도와 조로아스터가 신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교훈으로 다섯 가타(Gatha) 혹은 찬가(Psalams)로 되어 있다. 비스파르드 역시 야스나와 비슷한 제사적 예배에 사용하는 기도문으로, 천상의 권위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24기도가 있다. 벤디다드는 아베스타의 레위기라 할 정도의 의식적 율법과 우주론, 역사, 종말론으로 가득차 있다.
∎ 소 아베스타(The Little Avesta)
대 아베스타가 제사장들의 제사적 예배 의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것은 평신도들의 기도서이다. 이것은 야슈트(The Yashts), 아프링간(The Apringan), 시로자(The 냐갴모), 가쉬즈(The Gashs), 니야위시(The Nyayish) 등 5종류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파르시(Parsi) 신학 중에는 특별한 신격들과 천사 숭배의 21가지 찬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야슈트(The Yashts), 자연의 능력들을 찬송하는 니야위시(The Nyayish), 하루 다섯 번 드리는 기도문인 가쉬즈(The Gashs), 한 달 30일 동안 경건한 생활을 해나가도록 지도해 주는 역서(曆書)의 일종인 시로자(The Sirozah), 기독교의 구약성경 중 레위기와 같은 의식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아프링간(The Apringan)이 있다.
∎ 종교시
조로아스터교의 예배 의식은 젠드아베스타의 찬가들에만 발견되지만, 교리와 일상생활의 교훈은 시인들이 쓴 시(詩) 가운데 많이 남아 있다. 페르시아 기후와 산천 자연은 매우 아름답고 시적인 분위기였다. 한가로이 펼쳐진 포도원과 여기저기 아름답게 피어 있는 장미꽃과 아름다운 기화요초들, 황금빛 꾀꼬리의 노래와 호랑나비. 범나비들의 화사한 춤 이슬 위에서 영롱히 빛나는 햇빛이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불러 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시아에는 종교시가 유난히 많다. 페르시아 시인들은 영원한 세계의 동경심을 아름다운 현재 세계의 시어(詩語)에 담아서 노래하고 있다.
창천(蒼天)은 사람을 위한 신의 애찰(愛札)이요, 백일(白日)은 대기(大氣)의 봉함에 찍은 인이로다. 밤의 은밀한(confidential) 장막을 걷으니 신이 기록하신 숭엄한 성서(星書)가 드러나도다.
∎ 팔라비(Pahlavi) 문서들
조로아스터교에 관련된 문헌 중 팔라비어로 쓰여진 후대 발견 문서의 양과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이 중에 한 무리의 문서는 근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의식서들이다. 아베스탄과 팔라비는 현대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죽은 언어(死語)로서 소수의 학자들과 파르시 다스투르스(Parsi Dasturs)라고 하는 대제사장들만이 알고 있는 문자이다. 그들은 그런 문자로 써진 경전을 현대어로 번역해서 출판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반인은 아베스타 3권과 막스 뮬러에 의해서 출판된 『동방의 성전(The Sacred Books of the East)』 49권에 포함된 팔라비에 관한 책(The selections of Pahlavi) 5권이 전부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는 독일 실존철학자이자 조로아스터와 불교연구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4부로 구성된 철학적 산문시다. 주인공 차라투스트라(Zaraϑuštra)는 조로아스터교 창시자이자 예언자로 약 3,600여년전 고대 이란, 즉 옛 페르시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차라투스트라, 페르시아어 차르토쉬트(زرتشت), 그리스어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이지만 우리에겐 영어 조로아스터(Zoroaster), 독일어 차라투스트라가 더 가깝다. 차라투스트라는 기독교의 예수, 세례 요한과 비슷한 형상이다. 또 긴 수염, 동양풍 온화한 얼굴, 긴 흰옷에 양치기같이 지팡이를 들고 있고 머리 주위에 성스러운 후광이 있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 잡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싫어, 홀로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명상에 들어갔다. 10년 후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그는 ‘선하고 자비로운 신은 사고력을 가진 인간에게 화내거나 징벌하지 않는다.’는 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를 무시해 그는 고향을 떠나 포교했고 77세에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따르고 그의 뜻을 이어 나갈 자가 나쁜 생각, 말과 행동하는 자들과 싸워 이길 것이다. 처음에는 나쁜 자들이 이기는 거 같지만 결국 아후라 마즈다가 그들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심판할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영원한 진리의 법 아샤(Asha)가 온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너의 귀로 최고의 진리를 듣고, 가슴으로 그 진리를 생각하고, 선과 악 두 길 중 하나를 택해라. 심판의 날이 오기 전 아후라 마즈다의 말들을 전하려 노력해라.’였다. 그래서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세계와 인류의 운명을 점쳤다. 조로아스터가 방랑할 때 천사가 나타나 만물의 창조주 아후라 마즈다를 알리고 그의 예언을 전했다. 당시 잡신을 숭배했던 고대 페르시아 인들에게 조로아스터는 유일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바른 생각, 옳은 말, 옳은 행동’이 인생에 행복과 축복을 준다고 알렸다. 또한, 아후라 마즈다가 마침내 악을 물리치고 우주의 변혁을 경험하면서 모든 시간이 영원히 끝나게 될 것이라 했다. 이 종교는 유일신과 이원론을 추구하는 지구상에서 오래된 종교 중 하나로 후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아브라함의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바빌론의 유대인 포로들에게 천사. 사탄. 부활. 낙원, 지옥. 종말. 선악 등의 개념을 가르쳤다. 성경에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찾아온 동방박사도 조로아스터교 사제 장이었다. 아베스타(Avesta)는 아후라 마즈다가 조로아스터에게 예언한 우주 창조, 율법, 교훈, 가르침 등이 들어있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이다. 아베스타란 지식을 뜻하는 중기 페르시아어로 문자화되기 이전까지 수 세기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왔다.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 아베스타 경전을 모두 불태웠다. 그래서 남아있는 아베스타는 사산 제국 초기인 3세기에 옛날 단편들을 모은 21책이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 일부인 벤디다드(Vendid서기)뿐이다. 현존하는 아베스타는 5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종교적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제례의식문자 야스나(Yasna)다. 가타스(Gathas)는 조로아스터의 언행과 17개 찬송가다. 가타스는 야스나 중에서도 조로아스터가 직접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로 주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천사, 불, 물, 땅에 대한 존경의 기도와 찬가로 구성됐다. 둘째, 비스프라드(Visparad)는 조로아스터교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내용이다. 셋째, 쿠르다 아베스타(Khrda Avesta)는 아베스타 요약본으로 교인을 위한 기도문과 축복의 글을 담았다. 넷째, 야슈츠(Yashts)는 천사들인 ‘야자타스(Yazatas)’와 고대 영웅들에게 바치는 다양한 신화가 들어있는 21편의 찬가다. 다섯째, 벤디다드(Vendid서기)는 조로아스터교 주요 제례 절차, 법, 천지창조와 최초의 인간 이마(Yima)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또, 주로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아베스타 원본에 대한 해설서 젠드 아베스타(Zend-Avesta)와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는 조로아스터 달력이 기록된 시오르자(Siroza) 등이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拜火敎)다. 불은 지혜를 상징한다. 모든 빛엔 스스로 지혜를 밝히는 에너지가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하라, 하지 마라’ 등의 계율이 없이 자신의 지혜로만 판단한다. 조로아스터가 불의 사원을 처음 세운 후 불은 한 번도 꺼진 적 없다. 불의 사원에 불을 안치한 이유는, 불이 악을 물리치고 더러움을 정화해주기 때문이다. 불에서 나오는 열과 에너지는 생명의 근원이다. 이란에는 조로아스터교 불의 사원 아타쉬 카데(Atash K서기eh)가 있다. 서기 470년에 점화된 불은 두세 곳을 거쳐 1934년부터 이 사원에서 최고의 성스러운 불 아타쉬 베람(Atash Behram)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곳은 현재 종교기관을 넘어 복합 문화공간으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으나 불의 방은 조로아스터 교인에게만 가능하다. 이란에서는 양력 3월 21일 봄의 시작을 알리는 노루즈 페르시아식 새해 축제가 열릴 때쯤 집 안을 청소한다. 그리고 밀, 보리 같은 초록색 식물, 빵, 푸딩, 말린 올리브, 마늘, 사과, 석류, 각설탕, 식초, 향신료 수막(Sumac), 초, 거울, 달걀, 장미 수, 동전, 꽃, 아베스타 경전을 제례대에 올린다. 이 노루즈도 조로아스터교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아후라 마즈다의 성스러운 여섯 개 빛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불, 철, 흙, 물, 식물, 가축이다. 따라서 먼저 아후라 마즈다 초상화와 아베스타 경전 그리고 첫째 촛불, 둘째 동전과 구리 그릇, 셋째 흙, 넷째 정화수, 다섯째 푸른 식물, 여섯째 우유, 요구르트, 치즈 등을 올려야 하지만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노루즈(Nowruz)의 노우는 새롭다, 루즈는 날을 뜻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스러운 이 날은 3,000년 전부터 흑해와 카스피해 주변의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새해 민속축제다. 조로아스터 교인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데, 이 의식을 이슬람교가 받아들였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 가타스 첫마디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도 이슬람교 기도의 첫마디 ‘비스밀라(سملة)’와 같다. 노루즈 축제는 생명이 시작하는 봄에 열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초록색 옷을 입는다. 이 기간 사람들은 부모·형제와 친지를 방문하고 음식을 나눈다. 이슬람교의 색도 초록색이다. 이란인인 시아(Shia) 이슬람교도는 노루즈 축제를 중요한 종교적인 축일로 여긴다. 조로아스터교는 조장(鳥葬)을 한다. 교리에 따르면 악령인 아리만이 죽는 순간 시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땅이 더럽혀지면 안 되고, 신성한 불에 닿아서도 안 된다. 그래서 조로아스터교도는 매장과 화장을 할 수 없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축복을 받은 시신은 사제에 의해 침묵의 탑으로 운반된다. 사제는 시체를 해체해 탑 바닥에 놓으면 독수리와 까마귀 등이 파먹는다. 나중에 남은 뼈는 탑 가운데 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보통은 신분에 따라 망자가 들어가는 탑은 5개다. 죽어서도 신분에 차별을 받는다. 그러나 약 40년 전부터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인 조장은 점차 공동묘지에 매장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인도 뭄바이 지방에서는 탑에서 조장(鳥葬)을 한다. 이란은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는 아니지만, 세계 최초로 페르시아제국을 세웠다. 그래서 화려했던 고대의 명성을 못잊어 ‘페르시아(Persia)’라는 명칭을 지금도 사랑한다. 페르시아란 남부 파르시 지역에서 형성된 국가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1935년 팔레비 왕정이 아리안(Aryan)족의 후예라는 뜻인 이란으로 바꿨다. 최초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에 살다가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했다. 남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페르시아에 정착했고,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유럽 아리안의 시조로 지금 독일인의 선조다. 아리안족의 순수혈통을 지킨다는 히틀러의 나치 표식과 불교의 만(卍), 십자 모양의 문양 등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순환의 형태이자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라는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에서 따왔다. 니체는 그의 저서에서 삶의 매 순간과 모든 순간이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 된다는 영겁회귀(Ewige Wiederkunft)가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사상이라 했다. 조로아스터교는 마즈다교 또는 마즈다이즘(Mazdaism)으로도 불린다. 현재 지구상에 조로아스터 교인은 약 20만 명 정도다. 조로아스터교가 쇠퇴한 것은 서기 600년대 이란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자 박해를 피해 야즈드 등 동북쪽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8세기경 인도 중부 뭄바이 쪽으로 피신해 현재 14만여 명으로 가장 많고 교인은 페르시아에서 온 후예라고 파르시(Parsee)로 불린다. 교인들은 개종도 다른 종교와 결혼도 금한다. 야즈드에 4,000명 등 이란에는 약 25,000명이 있다. 국내에도 서울에 예배소가 있고 신자는 이란인과 뭄바이 출신 인도인이 대부분이며 한국인 신자도 몇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