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선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터전이 없이 주어진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노예의 길로 들어서라는 요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전에는 끌려와서 노예가 되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가서 노예가 되라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자유민주주의 사회 속에서도 노예가 생기는 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소위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그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말입니다. 재력은 그렇게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 있습니다. 구태여 강제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가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불법도 범법도 아닙니다. 어찌 보면 합법이지요. 누가 오라 가라 했습니까?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이 주인에게서 나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아마도 그래서 멀리에 미개척 땅을 분배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족이 모여서 힘을 모아 긴 여행을 떠납니다. 그 땅을 향해. 그런데 공짜다 싶은 노동력을 잃는 농장주들은 어디서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습니까? 그런 싸구려 노동력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전과 같은 재산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총잡이들을 고용하여 나간 종들을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라 합니다. 무방비 여행길에 있는 그들을 찾아 공격합니다. 무차별 살육도 벌어집니다. 가진 것 빼앗고 불 질러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합니다.
그래도 한번 얻은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만이라도 희망의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합니다. 그들도 아껴 두었던 비상금을 털어 자기네를 안내해줄 총잡이를 고용합니다. 다행히 같은 유색인으로 그 일을 감당해줄 사람을 구했습니다. 마음도 통합니다. 그렇게 여행길에 올랐지만 쉽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인종주의자 무법자들이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릅니다. 그 위험을 감내하며 희망을 안고 느린 여행을 지속합니다. 몇 명을 해치우고 ‘벅’이 일단 자리를 피합니다. 도중 지친 말을 교체해야 합니다. 마침 누군가 물가에서 한가롭게 쉬는 것을 발견합니다. 말은 필수품, 누가 주겠습니까? 그래서 강제 교환합니다. 그리고 달아납니다.
남겨둔 그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섭니다. 그 말을 아는 무법자들이 잡아 다그칩니다. 마침 나도 그 작자를 찾는 중이라고 합니다. 자기 말을 빼앗았으니 말이지요. 차림새가 목사입니다. 그들도 행색과 그 하는 말을 아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찾으면 어디에 있을 테니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대장이 제의한 그 보상도 꽤 큽니다. 홀로 광야를 가다가 마차 행렬이 그 무법자들에게 습격을 당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무법자들의 정체와 하는 짓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마을을 떠나 여행 중 다시 벅을 만납니다. 이상한 동행을 합니다. 그리고 벅이 맡아 하는 일을 알게 됩니다. 마차 행렬을 다시 수습하고 방책을 찾으려 다시 자리를 떠납니다.
이상하다 싶더니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입니다. 목사는 죽었다 생각했겠지요. 일단 벅이 시키는 대로 잠잠히 그들을 따릅니다. 인디언들에게 그 지역 통과 허락과 필요한 물품을 거래합니다. 이런 재주가 있었나? 놀라지요. 거래는 하지만 보호해주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은 자기 땅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보호구역이라는 곳에 한정되어 삶의 터전을 잡고 있지만 백인들에게 원망과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부족의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고 벅과 일행은 몸을 빼앗겼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겨우 자유를 찾아 가려는데 목숨을 건 위험한 여정입니다. 뭔가 통하는 이 감정은 나중에 매우 필요한 도움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구태여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지만 벅은 일단 맡은 책임을 끝까지 지키려 합니다. 게다가 자칭 목사가 곁에서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떠돌이 목사도 그만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처지에서 거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로 변하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무리가 훼방을 하며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제 함께 그들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던 자금을 모두 빼앗겼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네 잡으려고 마을을 모두 나온 틈을 이용하여 그 마을의 은행을 털기로 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는 무리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법을 지켜보려 하던 보안관은 무법자의 손에 살해됩니다. 그런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 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시대였다는 말이지요. 자유를 선포 받았지만 정작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난의 길이 놓여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사는지 생각해봅니다. 무엇에 매여 있지는 않은가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재사고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영화 ‘벅 앤 프리처’(Buck and the Preacher)를 보았습니다. 1972년 작입니다.
첫댓글 자유로워야한다
먹을 것 걱정 없는 자유 말이지요. ㅎㅎ
늘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님에게도 행복 배달합니다. ^&^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주말 휴일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