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시민)공원.
2017년 말,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
111년 만에 용산은 한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1906년 4월에 일본은 한양 용산구 일대 300만평을
대한제국으로부터 사들여 조선 주둔군 기지를 건설
일제 패망 이후 70여년간 줄곧 주한 미군 기지로 사용.
우리나라 근·현대사 굴곡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용산에서 111년 만에 외국 군대가 떠나고 그 자리에
71만평짜리 초대형 용산(시민)공원이 만들어질 계획.
한·미는 지난 2003년 7월에 용산 주한 미군기지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는데 합의했으며 이에 따라
주한 미 8군사령부 선발대가 지난 5월 평택 기지로 이전.
내년 말까지 미군 본대 모두 평택으로 이전 예정.
다만, 한미연합사령부는 용산 기지에 남게 된다.
북의 어떤 도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한·미 동맹.
그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수의 연합사사령부
인력과 시설이 용산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은 1987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 공약으로 공론화.
2007년 3월 평택 미군기지 건설 계획
그해 12월 평택기지 기공식이 열렸고
그후 9년 공사 끝에 용산기지 이전 시작.
1882년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 군대가
한양 주변 4곳에 주둔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흥선대원군은 지금의 용산 기지 내
캠프 코이너 자리인 청군사령부로 끌려와
동작진에서 배에 실려 청나라로 압송되었다.
구한 말, 둔지미 마을 등 주민 거주지와
청국 병영이 혼재되어 있던 용산은 1906년
일본에 의해 완전히 외국 군사 기지로 변했다.
대원군 납치 사건을 비롯해 용산 기지에는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은 역사적 사실이 많다.
6·25직전 육본 작전상황실로
여기서 박정희·김종필도 첫만남.
용산기지 내에 위치한 육본 지하 벙커는
6.25 당시 한강다리 폭파를 결정한 곳이다.
국방부가 펴낸 건군사에도 이 내용이 언급.
백선엽·김종필 회고록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49년 6월 29일 미 군정이 철수하자
서울 을지로 신한공사(옛 동양척식회사)
건물을 사용하던 우리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6·25 전쟁 때까지 일본군 사령부를 사용했다.
이곳 벙커는 육군본부 정보국
사무실 겸 작전상황실로 사용.
현재 용산 미군 기지엔 1173동 건축물과 시설이 있다.
이중 국토부가 보존· 재활용 검토 중인 건물은 80여 동.
그러나, 용산 기지에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숱한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어 공원 개발에 앞서
이곳에 얽힌 문화· 역사적 배경부터 조사해야 할 것.
이곳은 일제 강점기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도.,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던 곳이기도 하다.
...............................용산(龍山).........................
龍山은 한성 서쪽 무악(母岳)의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 남쪽으로 한강변을 향하여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龍이 몸을 틀어 나아간 것 같고, 또 한강변
용산구와 마포구 경계에서는 용이 머리를 든 것 같아 얻어진 지명.
龍 같은 형체의 산줄기가 있는 데서 유래된.,용산동.
1947년 6월 서울시령 제2호로 동회제도를 시행하면서
용산동회가 설치되어 용산동을 관할, 1949년 6월 이전에
해방동회로 개칭되어 용산동1가와 용산동2가 일부, 그리고
용산동3가・4가・5가・6가 일원 관할, 1955년 4월 18일 동회 폐지.
해방동이 설치되어 용산동2가에서 산2번지를 제외하고 관할하였다.
1959년 10월 31일 해방동은 용산동으로 개칭.
1970년 5월 5일에는 용산2가제1동으로 개칭되었다.
1977년 9월 1일 용산2가 제1과 제2동이 통폐합 용산2가동.
용산(龍山) 지명에서 비롯된 마을.,용산동(龍山洞)
용산 글자 그대로 용(龍) 같은 형체의 산을 의미한다.
'구 명칭' 용산은 도성 서쪽, 모악(母岳)의 남쪽 산줄기.
만리현을 지나 한강변을 향해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
마치, 용이 몸을 틀어 나간 것 같고, 또한 한강변에서는
"머리를 든 용의 형상 같다." 하여 용산동 1· 2 ·3 ·4 ·5 ·6가.
............................................................................
용산동은 구한 말, 고종때 만 하더라고 수림과 잡초가 무성해
인가가 드물던 곳이었기에 조선시대 사적 유물이 별로 없던 곳.
오늘날, 용산동 1, 2가를 일반적으로 해방촌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8·15 해방과 함께 많은 해외동포와 월남한 동포들이
이 부근 산록에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고 살게된 데에서 유래.
한양가(漢陽歌)에서 서울의 산세를
"북악산은 서방이요, 남산은 각시인데
서방이 각시를 크게 끌어안고 있는 형국."
조선시대 용산구는 남산의 남쪽 사면.
동쪽에는 성동구,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동작구·서초구, 서쪽은 마포구, 북쪽은 중구
면적은 21.87㎢이고, 인구는 23만 6224명(2008년)
16개 동이 있으며, 구청은 용산구 이태원동 34-87).
남산의 연봉(連峰)에서 남서쪽 사면과 산록을 차지하며
남쪽으로 한강, 남산 주변을 제외한 대부분 해발 50m 이내.
남산 서쪽 효창운동장 뒷산과 마주하며, 만초천(蔓草川)이 남류.
하구에 소규모 삼각주를 형성했으나 현재는 부지로 조성되어 있다.
옛 용산 미8군기지 내.,만초천.
한강 제방이 없던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한강 범람때 물이 신계동과 삼각지까지 미쳤고,
하안에는 이촌동 넓은 범람원이 백사장을 형성했다.
용산구의 북쪽은 남산이 있어 그 지맥인 둔지산 줄기가
구 중앙을 지나며, 응봉 줄기가 구 동쪽에서 성동구와 경계
서쪽으로는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는 용산 줄기가 뻗어 있다.
둔지산은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 있는 산으로,
표고 65.5m와 48m 봉우리로 이루어진 구릉산지.
그 남쪽 평원은 미8군기지였고, 국방부가 있는 일대.
조선시대 와서(瓦署) 서빙고(西氷庫) 등
관아와 청파역 이태원 등 교통시설이 있어
공공 비용을 조달하는 둔전(屯田)이 있었기에
여기에서 둔지산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이에 만초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
따라서 한강이 구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둔치에 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용산강·
노량진· 서빙고나루· 한강진 등 포구가 발달.
1800년대 용산.
마치, '밤 모양으로 구획된.,용산구(龍山區) 지도.
조선시대 밤섬 여의도 주민들을 용산구로 이주 시키고
그 영역 울타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잠령, 동룡단, 백석리, 흑석리, 와리 마포 등지에서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훤히 바라다보이는.,밤섬 마을."
- 1506년 6월 25일 전교-
조선시대.,밤섬(율도)마을 & 여화도(汝火島)
"여화도(汝火島) 율도 마을을
'다류목'으로 철거를 시키고
다류목에 빙 둘러 담을 쌓으라."
"이거(移居)시킨 지역이 비좁으면
광흥창동 안에 담을 쌓고 살게 하며
창동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아
누구도 통행 못하게 하라." - 연산군 12년 -.
잉화도는 양화진과 율도 사이에 있는
별도의 구역으로 조종조 때부터 돼지와 양을
방목해 가축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어 왔던.,섬.
-1556년(명종 11년 4월 4일 -
간원이 명종 왕에게 아뢰기를
"'전생서'와 '사축서' 관원으로 하여금 관장해 와
그 전복들이 관원에게 지공할 가축을 기르기 위하여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족친끼리 서로 혼인하고
홀아비와 과부가 있으면 마음내키는대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잉화도 출입을 위해 샛강을 건널때 깊으면 예사로 벗고
얕은 곳에서도 벗은채 남자는 끌고 여자는 붙들고 가는데
그들의 추잡한 행실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섬의 인가를 모두 철거 이주시키고
관원에게 제공하는 것과 가축을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가 하게하여 추잡한 폐단을 근절 시키소서."
-1788년(정조 11년) 10월 16일 -
한성부가 정조 왕에게 아뢰기를
"북부(北部) 아현계, 세교리 (1계, 2계)
연희궁계, 가좌동(1계 2계).성산리계, 수색리계
휴암리계, 여화도계를 하나의 방으로 만들었읍니다."
정조(1777~1800 재위) 때에는 조선 최대 조선소
밤섬의 배목수는 전국적으로 솜씨를 인정받았다.
정조는 효심이 깊어 父 (사도세자) 묘를 자주 찾았다.
정조가 '수원 화산' 헌륭원에 가려면
그때마다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아야 했다.
마포 경강상인들은 노량진배다리에 배를 제공.
조선시대 한성으로 왕래하는 도로변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군사보호지역이자 그린벨트 지역.
조선 왕조 묘역이자 특권층 만 출입이 허용된 풍류처.
...................................
....................................
고려시대 지방을 잇는 22도의 하나인 청교도(靑郊道)의 한 역
청파역(靑波驛)이 있었는데, 이 역은 한성과 삼남지방을 잇는 역.
충숙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용산강에 행차하여 풍경을 즐겼다.
그리고, 행궁에서 용산원자(龍山元子)를 낳기도 하였고
한편 공민왕은 홍건적 침입을 피해 안동지방으로 피난 때
한강변 나루 사평도를 건넜던 용산은 고려 말 과주(果州) 속.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서부의 용산방(龍山坊)
1789년 용산지역에 해당하는 용산방·한강방·둔지방 호구와 인구는
용산방 4647호 1만 4915명, 한강방 406호 1145명, 둔지방 1241호 3589명
한성부 인구의 약 20만 명의 1할에 해당하는 인구가 분포되었던 곳이었다.
성종 7년 용산강 북쪽 언덕 귀후서 뒤편의 폐사지를 중수하여
용호독서당 개설, 사가독서를 실시, 홍문관 학사들을 공부했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퇴각을 차단하는 전장터,
원효로 심원정을 회담장소로 하여 조선측을 외면한 채
명나라 군사와 왜군이 화전교섭을 벌이기도 했던.,용산강.
용산강은 초기 수로전운소가 설치되는 등 한강수운 중심지
조선후기에는 마포에 그 기능을 넘겨주었고 효창공원 일대는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효창원이 마련되어 왕실묘역으로 이용
한강변 서부이촌동 모래사장은 새남터라 하여 군사 연무장과 사형장.
그뿐만 아니라 와서·귀후서·전생서·서빙고 등의 관아가 있었고,
청파역과 이태원, 노량진·서빙고나루터·한강진이 있던 주요 교통로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한강방·둔지방으로 1910년 10월 경기도 경성부
1911년 4월 5부 8면제 실시에 따라 용산면·한지면이 되었다.
1914년 4월에는 용강면·한지면이 경기도 고양군에 속하였다.
1914년 9월 다시 경성부 용산출장소를 설치해 용산일대 관할.
1931년 경성부 직할 후에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팽창해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해 용산구역소 설치.
원효로 방면을 구용산, 한강로변을 신용산이라 부르는데,구용산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 무대였고, 각국 인들 거류지 조성
지금도 효창·청파동과 원효로에는 일본식 목조의 낡은 가옥이 남아 있다.
즉, 1884년(고종 21) 10월 외국인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된 후,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
원효로 중심으로 프랑스·중국·일본인 등이 종교 및 상업활동.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용산 지역은
조선시대까지 홍수피해가 잦아 낮은 지대에는
인가가 거의 없는 벌판이었으나 도심과 가깝고
한강 수운을 이용해 인천과의 연결이 용이하며
평탄하고 넓어 일제의 식민통치 군사기지로 이용.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운항되었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용산신학교가 설립되고
1900년 1월에 서계동~청파동~원효로4가 전차 개통.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와
철도기지가 세워져 식민통치와 대륙침략 거점이 된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신용산 지역에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06년 들어 미군기지의 이전과 더불어
민족공원 조성, 육군본부 이전 자리에는 전쟁기념관 조성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다.
용산 일대는 철도시설과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용산동2가는 일명 해방촌
한국전쟁 전후 월남 피난민 집단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마을.
2001년 확정된 서울특별시 지구단위 개발계획에 따라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100만 평의 개발이 추진
용산역은 경부고속철도 중앙역사와 신공항철도 출발역.
한강로 일대에 최첨단 업무시설과 컨벤션센터,
외국인전용 주거시설, 공원 녹지시설 등이 개발.
용산구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부도심으로 자리매김.
41개국의 대사관이 위치하여 한국 현대 외교의 중심.
...............
...............
구의 북쪽 경계 남산에는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이 축조
1395년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여 팔도 인원 20만 명을 동원
축성한 18km 도성은 경상도지역 주민들이 동원되어 축조되었다.
조선 말 대원군 쇄국정책으로
천주교도 처형지 이촌동 새남터.
순교성지에는 천주교성당이 건립.
청암동 한강변에는 구용산수위관측소(舊龍山水位觀測所)
1924년 한강변에 최초로 건립된 철근코크리트조 자기관측소.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수위 12.71m가 지금까지의 최고기록.
문화유적지로 군자감터, 귀후서터, 용호독서당터, 서빙고터,
심원정, 제천정터, 전생서터, 전환국터, 와서터, 이태원터 등.
용산구의 한강변을 따라 부군당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수운의 안녕을 기원하는 민속과 관련있는듯 보여진다.
서빙고동부군당(西氷庫洞府君堂, 서울 민속문화재 제2호)은
조선 태조 내외를 주신으로 모신 350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재.
향토민속문화재로 남이장군사당, 김유신장군사당(명화전),
이태원부군당, 동빙고부군당, 산천동부군당, 한남동부군당,
보광동부군당 등의 부군당이 있으며 남이장군사당을 중심으로
1973년부터 서울 시도무형문화재 제20호 남이장군사당제를 올린다.
조선 전기부터 한양 각 관청에 설치하고 신을 모신 부군당.
중종 때는 ‘부근(付根)’이라 하여 사방 벽에 남자 성기(性器)
모양의 나무로 깎은 것을 걸어놓고 한 번 비는 비용이 수백 금.
그러한 폐단이 생기자 이를 모두 없앴으나,
그 후 다시 일어나 헌종 때에도 성행하였다.
부군당은 서울에 만 1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서빙고동(西氷庫洞) 등에 있는
당(堂)에서는 대개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용산문화원 옆에는 수령 500년 가량
천연기념물 제6호 원효로백송이 있다.
옛날 용문동에는 체구가 당당한 장사들이 많이 살았는데,
매년 정월 초에 만리현에서 석전(石戰)을 벌일 때 크게 활약.
용문동 동명은 이곳이 용산 지형의 용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龍’자와 예전 이 마을을 동문외라 칭하였는데 여기에 ‘門’자를 합성.
설날의 윷놀이·널뛰기·연날리기, 정월대보름날의 불놀이·지신밟기,
삼짇날의 화전놀이, 초파일의 관등놀이·탑돌이, 단오날의 그네뛰기·
씨름, 추석 강강술래·거북놀이·소놀이, 중양절 단풍놀이 등이 행해졌다.
민간에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즉
재수굿, 병굿, 내림굿, 지노귀굿, 대수대명굿,
주당맞이굿, 살풀이굿, 노망굿 등이 있다.
특히 부군당 제의에 유교풍의 제사가 끝나면 굿을 진행한다.
남이장군사당에서는 가망청배, 부정거리, 신장거리, 호구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제석거리, 군웅거리, 황제푸리, 뒷전으로 이어지는 이런 굿은
이태원부군당, 산천동부군당, 보광동부군당, 보광동무후묘,
동빙고동부군당, 서빙고동부군당 등에서도 행해지는데,
근래 유교식 간략하게 제의를 마치고 있는 실정이다.
남이장군사당제는 서울특별시 대표적 축제의 하나
조선 전기에 젊은 나이로 요절한 남이(1441∼1468) 장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의가 오늘날 마을 축제로 정착했다.
남이장군당이 생기게 된 내력은, 500여 년 전 남이장군이
이곳 용문동에서 병사들을 육성했는데 그 부하가 후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다는 설이 있으며 일설에는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가
1818년(순조 18) 충무공 시호를 받았을 때 함께 국봉서원에 향배
이때 그를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 용문동 사당에 모셨다고 한다.
원래 당은 원효로 2가 당고개라는 거제산에 있었는데,
장군이 현몽(現夢)해서 190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남이장군무신도, 부군대감 내외, 최영장군, 정추정씨와 부인상,
산신령 내외, 토지관장, 천신대감, 맹인 내외 등 무신도가 걸려 있다.
1972년 일시 대제행사가 중단되고 제사만 모시다가
1983년 11년 만에 대제행사 복원하여 제1회 행사 후
남이장군사당제보존회 주관으로 매년 지내고 있다.
전에는 매년 음력 4월 1일과 10월 1일 당제,
3년마다 4월 1일에 대규모 당제를 지내고 굿,
지금은 음력 10월에 대제와 당굿을 거행한다.
이태원(梨泰院) 일대는 임진왜란 이후
외국군이 머물던 곳으로 황학동이란 곳에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은 비구니 사찰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 운종사에 들어가서 그 절의 여승들을 겁탈하고
얼마동안 머물러 지내다가 떠날 때 태워버린 운종사.
그 때 왜병들에게 겁탈당한 여승들은 갈 곳이 없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았는데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집이., ‘이태원’(異胎院)이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우리나라에 귀화
여기 모여 살았는데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리웠다.
지금의 이태원으로 쓰인 것은 효종 때인데.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이었다.
도림동 일대는 인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거리
민요인 ‘창부타령’ 등의 경기잡가가 널리 유행된 곳.
조선시대 주성동에서는 솥을 만들었고,
도원동에서는 메주를 만들어 성 안에 공급
한강로3가에는 기와공장인 와서가 있었던 곳.
한편 한강변을 이용한 경강상인 상업유통이 발달.
.
........................................
........................................
용산 미군기지 자리에 생기는 초대형 국가공원을
향후 어떻게 꾸밀지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학계와
시민 중심으로 구성된 ‘용산공원 시민포럼’이 발족했다.
2016년 6월 2일 오후 2시 용산공원 시민포럼은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발족식 및 토론회 개최.
서울 용산구 용산동 1~6가 일원(약 300만㎡)
근대 120여년 격동의 역사를 목격한.,용산공원.
한국 내 있었지만 한국이 아니었던 치외법권지대.
국토교통부는 최근 용산공원에
미래창조과학부의 국립과학문화관,
여성가족부의 국립여성사박물관,
경찰청의 국립경찰박물관,
문화재청의 아리랑무형유산센터,
산림청의 아지타트 나무상상놀이터
등을 집어넣겠다는 초안을 발표했다.
“부처간 자리 나눠주기”란
비판과 함께 논란이 일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를 두고
“건물만 때려짓는 난개발” 비평.
시민포럼은 “용산공원은 서울의 마지막 대규모 공원 부지이며,
규모나 위치면에서 도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의 땅이다.
국민 모두가 누려야할 자산이기에 충분한 소통이 필요하다.”
용산공원 부지 내에는 현재 약 1,200동 건물이 존재하며,
문화재청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80여동은 보존 및 재활용.
2027년까지 부지 98%는 생태·녹지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남산-용산공원-한강을 잇는 녹지축이 조성되며,
'북한산~관악산' 서울 남북녹지축 중심.,용산공원
생태환경 및 야생동물 서식처 환경 개선에도 기여할 것
건천으로 방치되어 있던 만초천을 복원하고
숲속계곡, 중앙호수, 수목원, 잔디광장을 조성
자연을 즐기고 휴식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가 계획.
역사적 이야기를 간직한 시설물들을 보존·복원하여
역사성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서울시는 용산공원 주변 관리를 위한 용역을 발주.
한편, 용산공원은 지난 2012년 국제 현상공모를 거쳐
네덜란드 도시·조경분야 전문설계사인 'WEST8'에서
전체적인 공원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예정 부지내
근대문화재 수준 건축물과 일제 시설물 보존· 활용을 위해
국내 건축회사 이로재(대표: 승효상)가 공동으로 설계 진행중.
국토부는 앞으로 관계기관 협의, 국민 의견수렴 등을 거쳐
내년 말까지 공원조성계획을 완료하고, 실시계획 수립 후
당초 예정대로 2019년 공원조성을 착수하고 종합기본계획상
단계별 조성계획에 따라 2027년까지 공원조성을 완료할 계획.
.
1단계(2019~2021년) 일부착수)→
2단계(2022~2024년) 본격 조성→
3단계(2025~2027) 녹지축을 완성.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가족공원 일대는
역사 학습과 나들이를 겸하기에 좋은 장소.
도심 녹지 속 민족문화 전당 국립중앙박물관.
평일에도 학생들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모른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보신각 동종(보물 제2호)이 있는
가족공원으로 들어서면 청둥오리와 잉어 연못과 산책로.
조각공원 풀밭 유치원생들의 웃음소리가 해맑다.
태극기 공원에는 50봉의 태극기가 둥그렇게 서있고
깃대 사이로 무궁화도 심고 무궁화 형상 잔디밭도 있다.
민족혼을 되살린다는 취지가 여기에 담겨있다.
근대와 일제강점기, 현대까지도 이 일대는 줄곧
용산공원은 우리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누군가가 특정 공간을 점유하면 동시에
다른 세력이 그 공간을 활용하지 못한다.
외국 군대가 머무는 곳이면 배타성이 크다.
조선시대 "이타인"이라 불렀던., 외국인.
임진왜란 동안 '가토 기요마사' 군사 주둔지.
주한 왜군들이 겁탈했던 이곳 운종사 비구니들.
가토 기요마사는 철군하며 운종사에 불을 질르자
갈 곳이 없어진 운종사 여승들과 왜군 2세.,"이타인"
운종사터 인근으로 모여들어 차츰 마을을 형성.
이 마을에는 원래 배나무가 많아서.,'배나무 마을.'.
병자호란 이후에는, 환향녀들이 모여살았던.,이태원.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항왜 거주지.,이태원.
병자호란 전후에서 청일전쟁 전까지 청군 거주지
한국전쟁 이후 용산 주한 미군들의 주거지로 변모.
그리하여, 호로자 등 '외국인 2세' 이태인(異胎人).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역원(驛院)'이.,이태원(梨泰院).
그후, 일본군, 중국군, 미군 등 외국인 주둔지.,이태원.
역사적으로 용산은 13세기부터 외국군 주둔지였다.
한강을 통해 서울에 상륙하기 좋고 남산과도 가까운
지정학적으로 전략적인 군사 요충지인 외국군 주둔지.
13세기 말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 병참기지.,용산(龍山)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왜군이 현재 효창공원 부군에
보급기지를 운영했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등은
이곳에서 명나라 군대와 화친교섭을 벌이기도 한 왜군 주둔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오장경 부대병력 3,000명이
용산지역에 머물며 대원군을 납치한., 청나라 군사 주둔지.
일본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용산에 자리잡았다.
일제는 1908년 이 지역에 조선군사령부를 설립.
대륙 침략을 본격화해, 용산기지 내 조그만 야산인
둔지산(屯之山)이 한때 왜둔산(倭屯山)으로 불렸다.
남영동(南營洞)이란 지명도
이 산 남쪽에 일본군 병영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용산에 터를 잡았고,
미군 24사단이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하면서
이곳에 머물다가 미·소합의에 따라 1949년 한국을 떠났으나
6·25전쟁 발발로 다시 유엔군의 중심이 돼 돌아왔고, 그 이후
미군 본거지가 되어, 1955년 일본 도쿄 유엔사가 용산으로 이전.
서울 강남 반포에서 동작대교로 한강을 건널 때마다
다리 북단이 잘린듯 직각으로 우회하던 미군용산기지.
그후,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공원이 들어섰지만
그 전까지 미군용산기지 골프장 부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1992년 11월 이태원로 남쪽과 북쪽의 기지도 2012년 반환.
정부(국토해양부 용산공원 조성 추진기획단)는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에 따라 국민 의견을 수렴해
공원 명칭을 공모하고 남산과 한강, 관악산과 연계된
녹지축 생태공원 조성할 계획이며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은
동작대교와 곧추 연결될 수 있는 도로를 예상하고 세웠다.
하지만, 그 도로가 도심 속
꿈의 생태공원을 관통하려면
시민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래저래 동작대교 북단은 맘 놓고
달리지 못하는 도로일 가능성이 크다.
용산은 한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학적 이점으로
조선시대 삼남지방 조운선이 모이는 포구로 발전.
100년전 용산 나루터 & 포구.
한강에서 활약하던 경강상인의 본거지로
조선시대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의 시발지였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외국군 주둔지가 되고 만다.
용산은 역사적으로 군사 전략적 요충지.
한강과 접해 있고 남산과도 가까워 고려 때
몽골 침략군은 이 지역을 병참기지로 이용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7년 전쟁 당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각각 원효로4가, 청파동 일대에 주둔했다.
임오군란 전 & 후.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군 주둔지.
조선 내란 평정 명분으로 오장경(1833~1884) 부대를
수행해 조선 역사에 등장한 인물이 위안스카이(1859~1916).
청군이 임오군란을 평정하자
군영으로 답방하러 온 대원군을
군함으로 압송해 톈진에 연금한다.
위안스카이는 이 작전과
대원군 잔당 토벌에도 참여.
...............위안스카이............................
임오군란 뒤 14년간 조선 총통 노릇한.,원세계.
중국과 한국의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탐욕과 교활, 치밀한 인맥 관리와 탁월한 외교적 수완
허난(河南)성에서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삼촌의 양자가 된 그는 글 읽기를 싫어하여
누차 과거에 낙방했고 숙부의 주선으로 23세 때
1882년부터 한성 방위 책임자로 조선에 들어온다.
사사건건 내정 간섭을 했던 그는 인생의 황금기 중
14년을 조선에서 보냈고 이를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10 처첩 사이에 17 아들을 포함 32명 자식을 두었다.
청나라 황제의 전권대사로 조선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 행사
그무렵 왕족을 포함해 3명의 조선 여인을 첩으로 삼기도 했다.
1886년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인.,의료 선교사 출신 미국 공사 알렌
의료 선교사 출신 '미국공사' 알렌
그런데 위안스카이는 알렌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다.
알렌을 비롯한 일본과 서양의 외교관들은 걸어서 입궐
유독 위안스카이 만 가마타고 입궐해 알렌이 문제삼는다.
고종에게 모든 외교관이 가마를 타고
입궐할 수 있게 조치해달라는 최후통첩
그러나, 알렌 제의는 고종에게 거절당했다.
고종의 말년 사진.
위안스카이만 여전히 가마를 타고 입궐.
상국(上國)에서 조공국 조선에 왔으므로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각국
공사나 총영사들보다 자신이 높다고 여겨서
그들과의 국제회의에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오만한 태도를 모두가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종과 민비는 그 때문에 몹시 불안할 정도였다.
서울 주재 외교관들은 그를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 호칭.
청나라 황제의 권한 대행, 즉 조선총독 노릇을 했던 것이다.
용산, 인천, 부산, 원산에 경찰을 배치해 청상(淸商)을 지원.
청상(淸商)들은 순풍에 돛단듯 상권을 확대할 나갈 수 있었다.
남대문과 종로 일대까지 중국인 거리가 생겨나고
종로 시전을 비롯한 한성의 조선 상가는 몰락할 위기.
청일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동학 잔당들이 위안스카이 암살 첩보
그러자 그는 서둘러 변장 하고 야반도주.
미국 공사 알렌 역시 을사늑약 직후
미련 없이 원세계처럼 조선을 떠난 점이
고종때 라이벌 같았던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
위안스카이는 인맥 관리의 귀재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서태후(1835~1908)의
신임을 얻어 톈진에서 신식 군대를 양성하고 훗날
베이양군벌(北洋軍閥)이라 불리는 심복들을 양성했다.
1911년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군권을 다시 장악.
그는 청 왕조를 배신한 채 쑨원(1866~1925)과 막후 협상을 통해
마지막 황제 푸이(1906~1967)를 퇴위시키고 그가 대총통에 올랐다.
1916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고치고
대황제에 올랐으나 국내외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친 그는
3개월여 만에 군주제를 철회하고 두 달 만에 병으로 죽었다.
................................................................................
임오군란이 평정된 뒤 청나라 오장경 부대는
조선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서울에 주둔.
1884년 오장경이 조선을 떠나자 위안스카이는 본색을 드러냈다.
이후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 증원 전력도 용산에 자리 잡았고
민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때도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이 개입했다.
1985년 8월 20일 새벽 민비시해 .,을미사변.
일제는 1904년 이곳에 조선군사령부 설립
그것을 발판 삼아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남영동 지명도 조선군사령부 남쪽병영 의미.
2016년 3월 사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 제24사단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용산 기지에 주둔,
용산미군8기지 내 만초천과 홍예교.
111년만에 드러난., 조선시대 문화유산
한국 속의 미국.,용산 미군기지.
용산미군기지 내 골프장
용산 미군 기지는 서울시민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8군의 밤무대는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을 선도하는
록밴드들의 활동 무대였고 이를 통해 많은 대중 스타들을 배출.
삼각지는 한국 현대미술의 성장 거점이다.
삼각지 화랑가는 한국전쟁 직후 미8군 주둔과
더불어 초상화, 이발소 그림이 양산되었던 곳이다.
가난뱅이 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과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등이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던 곳 용산 미군 기지는 총 81만 평.
화가 이중섭.
주한 미군사령부와 8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가 있는 메인 포스트
주거 시설, 학교, 병원이 있는 사우스 포스트.
일부 시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간이 반환된다.
머지않아 이곳에 계획된 도심 속 꿈의 공원이 태어난다.
도심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독서를 하고, 수영과 스케이팅.
용산공원의 롤 모델.,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
센트럴파크 없는 뉴욕을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뉴욕 시민들에게 맨하탄 센트럴파크는.,작은 천국.
뉴욕의 가을. 러브 스토리. 나 홀로 집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의 영화에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가 등장한다.
2010년 1월 27일 타계한 샐린저의 명저 『호밀밭의 파수꾼』
방황하는 청소년 홀든은 “겨울이 와 센트럴파크 호수가 얼면
오리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곤 하는데 그야말로 호수가 얼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겨울 오리 신세와 다를 게 없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군사력은 세계에서도 강군으로 손꼽히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안에 외국 군대를 들이고 있다.
용산공원이 서울과 한국의 상징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1988년 미국 보스톤에서 열린
세계조경인 연합회 모임(IFLA).
필자는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
주 목적은 용산미군기지가 철수한 이후 그곳에
뉴욕 센트럴파크를 롤 모델로 하는.,공원조성 계획.
아울러, 한국의 신도시 수립 계획을 위한.,미국 여행.
워싱턴, 보스톤, 뉴욕, 시카고,
센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등
총 20여 일이 넘는.,단체여행 일정.
당시 미국 단체여행을 한 대도시 대부분
조경가 팀장 주도에 의해 설계된 계획도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대도시가 아니었다.
보스턴에서 세미나에 참석차 일주일 남짓 머물며
하버드대학을 방문했을때 그곳 조경학과 학생들이
'도시설계' 수업과 실습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깊었다.
미국의 역사보다 창립연대가 앞선 하버드대학.
하버드대학의 조경학과는 세계 최초이기도 하다.
미국의 대도시 대부분 조경가들이 설계 시공한 작품.
.
특히, 1988년 보스톤 IFLA
한국대표단 미국 단체여행 일행은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에 관해 집중 탐구.
뉴욕이 인구 10만일 때 도시 설계도면과 공원 도면.
뉴욕인구 100만일 경우를 가정해 완공한 센트럴파크.
1988년 이미 세계의 수도가 된 뉴욕 인구는 1000만 up.
이 공원을 처음 기획한 조경가는 뉴욕이
거대한 공룡 도시가 될 것을 예측하고 설계 시공.
현재 뉴욕 시민은 센트럴파크를 뉴욕의 심장이라 한다
그당시 한국 IFLA 대표단 단장은 오휘영 교수였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한국조경을 대표하는 조경가.
그는 청와대에서까지 "조경 대통령"이라 부르는 인물.
당시 센트럴파크 문제점과 보완책을 강구.
현재, 용산공원의 청사진을 일행들과 함께
구상하면서 토론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용산미군기지는 100만평에 가까운 알짜배기 노른자 땅."
"부동산 투자 개념이 아닌, 시민을 위한 공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 현장에서 용산미8군기지를
장차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그 방안을 찾는 것이 여기 온 목적."
우리나라 국내 조경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조경인연합회 국제모임에 참석했던
한국 IFLA 대표 경력자들이 사실 상 주도.
한강시민공원, 일산신도시 호수공원, 여의도공원. 서울숲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 동탄신도시.,센트럴파크.
한국 IFLA 대표들이 뉴욕 센트럴파크를 롤 모델로 만들었다.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는 어떠한 곳일까?'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
1856년 조경가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와
건축가 칼베르트 보가 설계했던.,센트럴파크
맨하튼 섬 가운데,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고 있다.
하도 넓다 보니 공원을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 치안 상태도 다르다.
그 이전에는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돼지농장과
무단 입주자의 판자촌들이 널려 있었던 땅이었다.
1850년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브라이언트가 <뉴욕포스트>지에
공원건설의 캠페인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1856년 뉴욕시 소유의
843에이커의 땅을 공원으로 조성해 100000수레 돌과 흙을 퍼부었고
500000그루가 넘는 나무와 관목을 심었고 언덕과 풀밭, 호수까지 조성.
조경가 '로 옴스테드'의 설계 개념이 매우 확실하다.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시간 탈출"이라는 것이였고
이는 이후 전세계적으로 도시공원설계의 전형적 표본.
가운데 큰 호수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
(Jacqueline Kennedy Onassis Reservoir)라 부른다.
센트럴 파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지면보다 높게 떠 있는 인공호수이다.
뉴욕 맨하탄의 고층 빌딩과 푸른 숲이
호수에 비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특히 이 호수 주변을 따라 만들어진
조깅 패스는 러너들에게 인기 있는 곳.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약 2.5Km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어
조깅하는 이들을 손쉽게 볼 수 있으며 이 공원을 설계할때
최초로 입체통과 방식으로 썼으며 산책로와 마차 통로를 분리.
그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것은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1853년 7월 21일 뉴욕 주 의회에서 맨하튼에
약 3㎢ (여의도 면적) 첫 공공 공원 조성을 결의.
1934~1960년까지 공원 관리자였던 로버트는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대규모 센트럴파크 보수.
한때 센트럴파크가 관리되지 않자 쓰레기, 낙서, 폭력
등이 난무하는 불법적인 사회적 문제 장소로 변화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공원은 곧 폐쇄 될 것이라고 우려.
뉴욕시도 골치덩어리가 된 공원을 폐지하고는 의견.
1974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공공시스템을 연구하던
조지 소로스, 리차드 길더 교수가 기부금을 활용하여
센트럴파크를 다시 재건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1979년 엘리자베스를 공원 관리 최고경영자로 추천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센트럴 파크' 재건을 위해 노력.
1980년 센트럴 파크는 성공적인 개선이 진행되어졌다.
.
이러한 협회의 노력에 의해 민간기업, 민간인 등
많은 분야에서 센트럴파크 보전과 보호를 위해서 기부.
미국 억만장자 폴슨, 센트럴파크에 1억불(1100억 원 기부)
'미국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의
롤 모델은., 영국 런던 하이든 파크.
영국 런던.,하이든 파크.
인천., 송도신도시 센트럴파크.
롤 모델은 뉴욕 맨하탄 센트럴파크.
국립중앙박물관
설립 1908년 9월
용산구 서빙고로 137 .
우리나라의 박물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립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08년 9월 발족한 창경궁 내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부터 출발했다.
이왕가박물관은 왕실의 뒷받침으로 미술품 수집
1909년 11월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 내에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고 1915년 12월
총독부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일부 구입품 외에 고적 조사
습득한 매장 문화재, 사찰 기탁품 등 자료를 수집, 전시하였다.
한편, 1915년부터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신라시대의 유물을 전시해 오던 경주의 전시관이
1926년에는 총독부박물관의 경주분관으로 편입되었다.
부여와 공주 고적보존회가 이끌어 오던 유물전시관들이
1939년과 1940년에 각기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
광복 전까지 총독부박물관 산하 3개소 분관이 설치, 운영.
일본인에 의해 독점되었던 박물관도
1945년 광복후 같은 해 9월에 인수받아
국립박물관으로 개편되었고 그리고 곧이어
3개의 지방 분관도 국립박물관 분관으로 운영.
1946년에는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으로 편입되는 등
국립박물관 기능이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
1950년대 6·25전쟁으로 박물관이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이 기간 중 북한에 의한 문화재의 북송은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물을 보관한 경복궁 전각이 폭격받아 수천점 유물 소실
9·28 서울 수복 후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다시 불리.
서둘러 유물 대피에 착수하여, 중요 문화재 2만여 점을
부산으로 긴급 피난시켰으며 그곳에 임시 사무실을 설치.
서울 환도와 함께 남산에 있던 민족박물관 자리에
박물관 임시본부 설치, 다시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
이전한 박물관은 한동안 마비된 기능을 되찾기 시작.
1969년 문화재관리국에 소속되어 있던 덕수궁미술관이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어 두개 전시 시설이 일원화되면서
대폭적인 소장품 확충이 이뤄졌고 1971년 부여박물관 신축.
1970/80년대에는 국립박물관 시설이 크게 확충된 기간이었다.
1972년 8월에는 서울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내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쳐 새 면모를 보였다.
한편, 공주에서는 1971년에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엄청난 유물의 전시를 위한 박물관 신축이 절실.
이에 따라 1973년 10월 공주박물관을 신축, 개관하였다.
........................공주박물관..........................
충청남도 공주군 중학동 28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4,200평 대지 건물 총면적 615평, 전시실 면적은 261평
소장유물은 백제문화재를 중심으로 7,000여 점이 있다.
..........................................................................
경주 지역에서도 1973년부터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실시된 미추왕릉지구발굴에서 출토된
유물 등 새로운 문화재를 전시하기 위하여,
1975년에 새로이 경주박물관을 신축, 개관했다.
..........................경주박물관..............................
마치 과거 신라인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지붕은 봉분, 전시관은 숱한 유물이 묻힌 옛 무덤 속 같다.
경주역사유적지구 안에 신라 1000년 역사를 집약해두었다.
전시의 밀도와 유물의 가치로 '한국 박물관'의 정수를 보여준다.
.....................................................................................
또한 1979년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중국 원나라의 난파선으로부터 인양된
방대한 도자기 & 중국 유물을 보관, 전시용
광주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호남 문화의 연구와
전시의 중추적 구실을 맡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지금까지 문화재관리국 소속으로 남아 있었던
한국민속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통합, 개편.
경복궁.,'추억의 거리' 한국민속박물관
1984년에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새로운 조명을 위한
가야문화 연구가 각광을 받으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해
진주박물관이 개관되었고 또한 1987년에는 중원 지방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자, 이 지역의 문화재 전시와
그 연구를 위하여 청주박물관이 새로이 문을 열었다.
..........................국립청주박물관..............................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우암산 기슭에 1987년 10월 개관했다.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한국 현대건축의 기념비적 작품.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문화유적이 분포.
삼국시대 전략 요충지 중원지역 문화유산을 수집·관리·보존·전시
중원문화 형성과 발전과정 역사교육현장으로서 문화교육 기능 담당
'선사시대~조선시대' 2,300여점의 유물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야외에는 진천 석장리유적에서 조사된 백제시대의 제철로와
청주 용담동유적의 통일신라시대 무덤이 복원ㆍ전시되어 있다.
.....................................................................................
중앙박물관은 국민과 정부의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 증진과 민족 문화 정립의 시급함을 인식하고,
또한 그 사이 늘어난 유물의 분량과 함께 지금까지의
체제로부터의 탈피가 절실하던 때에 마침 정부 청사의
이전 계획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구 중앙청사로의
박물관 이전 문제가 제기되어 구 중앙청사를 대폭 개수
1986년 8월 21일 새 청사로 이전, 개관하여 박물관으로 사용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잃어버렸던
우리의 역사를 되찾고 짓밟힌 민족정기와
파괴·훼손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여야 한다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역사적 결단을 내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바로 옆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개축하여 1996년 12월 13일 이전, 개관하였다.
21세기 통일 한국과 세계화·문화 시대를 대비하고
5,000년 문화 민족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열기 위해
2005년 10월 28일 용산 가족 공원 내 1만 6,000 평의
대지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능과 역활>
소장 유물은 우리나라 역사·고고학·미술·민속
등에 관한 전시품 자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에 평양 지방에서 발굴, 수습된
낙랑 유물과 중앙아시아에서 수집된 서역 유물 소장
최근 신안 해저에서 인양된 원나라 중국 유물을 확보.
유물의 전시는 우리나라의 고고학·미술사·역사 전반을 통한
우리 문화 발전의 큰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국내 전시 외에도 우리 전통문화를 해외에 알리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외 전시가 이뤄졌다.
1957~1961년까지 미국 전시와 유럽 전시가 있었다.
1976~ 1984년까지는 일본과 미국 및 유럽 등지에서
대규모의 ‘한국미술5천년’ 전시가 있었고 1992년에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가야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대규모 ‘가야문화전’이 기획되어 일본의 도쿄[東京]·
오사카[大阪]·후쿠오카[福岡] 등 3개 박물관 순회 전시.
전시 이외에도 유적에 대한 계획적 발굴 조사와
지역 사찰, 개인 소장 문화재에 대한 연차적인 실물
자료 조사와 지표 조사 등 학술조사 결과를 보고서로 간행
1946년에 실시한 경주 호우총(壺玗塚) 발굴 조사는
한국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최초 발굴 조사.
1960년대에는 7년간 진행된 전국의 지석묘에 대한 발굴.
그 결과가 『한국지석묘연구』라는 방대한 보고서로 간행.
또한 동삼동·고성·시도패총과 서울 암사동 유적에 대한 조사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부터 실시한 부여 송국리와
1980∼1984년까지 모두 5차에 걸쳐
조사된 춘천 중도 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문화 실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
그밖에도 의성탑리, 경주의 서악리 그리고
울릉도 등의 고분 조사와 함께 감은사지·금강사지
등 절터의 발굴은 우리나라 역사 고고학의 새로운 업적
1964년부터 1977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9차에 걸쳐 실시된 강진 대구면
청자 요지에 대한 발굴 또한 도자기 역사의
규명에 중요한 뜻을 지닌 방대한 사업으로써
미술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1980년과 1982년에는 청자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강진군의 용운리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최근 보고서로 간행
우리나라 청자 연구의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각 지역 박물관에서도
연차적인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해마다 계획·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밖에 현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공사에 따른 구제 발굴에 참여하고 있다.
전시·조사 기능 외에 사회 교육 또한
박물관의 주요 기능 중의 하나이다.
박물관특설강좌를 비롯한 어린이·청소년·주부·노인·
교사 강좌와 전통염색교실, 도자기교실 등 각종 사회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전통 문화의 올바른 실체를 통한,
민족의 실체에 대한 인식에 튼튼한 초석을 마련하고 있다.
........................
.........................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 유물이 약 33만점.
관람객 수 기준으로는 아시아 1위, 세계 10위.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가 꽤나 기구하다.
그 연혁의 시작은 순종황제가 지은 제실박물관으로 상정.
사실, 컬렉션의 기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
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설립되어
처음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 개편하여 1946년에 덕수궁 안의
석조전 건물에서 개관한 것으로 설명하였으나 최광식 관장 취임 이후
이왕가박물관이 1909년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
2009년을 한국박물관 100주년으로 선포하고 몽유도원도 등 유물 특별전 행사.
이후 경복궁 경내의 총독부박물관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는데 한국전쟁 때에는
서울 점령 인민군이 유물을 다 가져가려 박물관 직원들을 협박.
직원들은 일부러 유물 포장 작업을 지연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자세한 일화는 박물관 초창기 직원이자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일대기
결국 서울이 수복되면서 대부분 유물을 부산으로 옮겼는데
이때 미처 옮기지 못한 대형 중국 벽화나 양나라 미라는 훼손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오면서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으나
그해 10월에 경복궁 부지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청)에
넘어가자 1954년 2월부터 남산 구 국립민족박물관 건물에 보관
그해 6월 남산 건물이 연합참모본부로 쓰이자
그해 11월 덕수궁 석조전 이전 이듬해 2월 개관
덕수궁 시절인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미국 8개 도시에서 처음 국보급문화재 해외전시회
1961년 3월부터 1962년 5월까지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중요문화재 해외순회전시를 하여
일제 식민사관에 매몰된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소개
1968년 7월 문교부 소속에서 문화공보부 소속으로 직제 개편.
1972년에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좁고 디자인이 유치하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1986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로 이전하고 그 해에
구 중앙청 후생관(1979년 건립)을 사회교육관으로 개편.
1995년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소장품들이 임시로
근처 벙커에 들어가 있다가 국립고궁박물관 개축 이전.
이후 미군 용산기지 골프장을 돌려받아
조성된 용산가족공원 내에 건물을 지어서
2005년에 안착하여 세입자 신세를 벗어났다.
현재 앞마당에 국립한글박물관이 2014년 10월 개관
차후 주변 부지도 기증 받아 국립민속박물관을 이전하고
전쟁기념관까지 연결해 거대한 뮤지엄 파크를 만든다는 구상.
과연 언제쯤 완성될지?
현 위치가 저지대인지라
대규모 홍수가 닥쳤을 경우
문화재 피해 우려가 예상된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차관급 기관이며
산하에 12개의 지방 국립박물관(경주, 공주, 광주,
김해, 나주, 대구, 부여, 전주, 제주, 진주, 청주, 춘천)과
1개의 전시관(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거느리고 있는 기관.
참고로 국립민속박물관은 문화체육관광부 직속의 별도 기관,
국립고궁박물관은 문화재청 산하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과 무관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재청 산하),
대한민국역사박물관(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전쟁기념관(국방부 산하), 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산하),
국립현대미술관(문화체육관광부 산하)과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앞 국립한글박물관 역시 마찬가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별도 기관이다.
건물 모티브는 한국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볼수 있고
귄위적이거나 사치스럽게 느끼지 않는 성벽에서 따왔단다
하지만, 대한민국 박물관의 역사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
이곳에는 역사책에 나오는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등 야외에서 훼손될 만한 유물도 많다.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중앙아시아 유물 오타니 컬렉션도 소장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 니시혼간지(西本願寺) 당주이자
백작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위그르 지역
베지클릭 석굴사원 등에서 도굴해온 벽화 및 온갖 예술품들.
동일한 종류 유물이 베를린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소실되어 세계 유일본으로서 가치가 높다.
위구르, 즉 동투르키스탄 독립 망명정부도
"중국에게 돌려줘야 서북공정으로 써먹을테니,
한국이 그냥 보관하길 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위구르족은 유목민족이며 이들은
당나라 후반부터 이 지역에 정착했다.
투르판 지역에서 온 유물들도 상당수지만
조상으로 받드는 위구르인들이 만든 건 아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고대 토카리인들.
고구려 벽화에서 자주 나오는 서역인들이
이들로서 금발, 홍발 벽안의 전형적인 백인.
토카리인들은 불교를 숭상했으며
남북조시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불교史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들 중 하나인 구마라습의 출생지도
바로 토카리인들의 오아시스 국가들 중 하나였던 쿠차였다.
서역유물은 둔황석굴과 오르도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일부유적.
위구르인들이 도래하기 전 한나라~당나라 사이에
중국과 실크로드 도시국가문명이 남긴 유물이 대부분,
위구르 족은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한 이후 이 유물들을 파괴.
위구르족은 유목민족이며 이들은 당나라 후반부터 이 지역에 정착.
투르판 지역에서 온 유물들도 상당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의 위구르인들이 사는 곳에서
온 유물들일뿐이지 그들의 조상이 만든 건 아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고대 토카리인들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자주 나오는 서역인들이 이들로
금발, 홍발 벽안의 전형적인 백인들이며 위구르족들이
푸른눈에 서양인 비슷한 외모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위구르족이 9세기 오아시스 도시들을 파괴후 재정착과정에서
강간과 통혼 등의 과정으로 그들의 피가 뒤섞인 연유 때문이다.
6.25 전쟁 때 하마터면 잿더미가 될뻔했으나
이걸 알아본 유엔군 장교가 귀중한 문화재라 하여
잘 보관하여 겨우 남아 미국에서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소장품이 하도 많다보니,
때로는 "없어졌다던 유물이 요기있네?" 하는 경우도
가끔 있으며 다 관리하지 못하는 것도 잘하는 건 아니다.
소장품 중에 당연이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많다.
몽유도원도, 훈민정음 해례본, 천마도 등 평소
보기 힘든 유물들도 100주년 축하를 위해 전시해
이 특별전이 무려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었다.
특히, 몽유도원도는 1인당 1분만 볼 수 있도록
관람을 제한할 만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다.
그러나 유물의 수준에 비해서는 또 많은 것이 아닌데,
가끔보면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물도 국보나 아닌 경우
아무리 좋은 문화재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전문적인 관리를 받은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보관되었으니
유물 지정의 시급성이 떨어져서 후순위로 밀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는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이가 안좋기 때문
비슷한 일을 하는 두 기관이 서로 기싸움을 하는 탓.
문화재청이 1992년 국립고궁박물관을 만들면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왕실유물을 대규모로 빼가
두 기관의 사이가 그후로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두 기관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
문화재청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여기에 협력한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지만
이건 두 기관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또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 박물관이자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이곳 관람료가 무료라 찾는 관람객이 많지만
규모가 생각보다 상당히 방대해 사전 조사 없이
찾아오신 분들이 대충 둘러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국립중앙박물관.
보물창고에서 보물찾기 수준의 관람객들이 대부분.
'향후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떻게 운영돼야 바람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