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朝鮮王) ‘만(滿)’이 살았던 상하장(上下鄣)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장수(漳水)=장천(漳川)’ 양안(兩岸)
2023년 07월 14일
○ ‘전한서(前漢書)=한서(漢書)’에 의하면 :【漢書 : 동한(東漢) 반고(班固)【AD 32-92年】가 명제(明帝)[後漢]의 명(命)을 받고, 장제(章帝) 건초(建初) 연간(AD76-83)에 완성(完成)했다 [西漢 漢高祖 元年[BC206年]∼新朝 地皇 四年[AD23年] : 229年 歷史]고 전해진다. 곧 2000년 전(前)의 기록(記錄)이라는 이야기다.】 즉(卽),
前漢書 28 下 志 8 下 『遼西郡·遼東郡·玄菟郡·樂浪郡』 기록(記錄)을 보면 :
1. 《遼西郡,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屬幽州.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縣十四: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渝·絫. : 요서군(遼西郡), [진(秦)에서 두었다. 작은 물길(河川) 48개가 있어, 함께 3,046리를 간다. 유주(幽州)에 속(屬)했다] 호(戶)는 72,654, 구(口) 352,325명이다. 현(縣)이 14개다. : 차려(且慮)·해양(海陽)·신안평(新安平)·유성(柳城)·영지(令支)·비여(肥如)·빈종(賓從)·교려(交黎)·양락(陽樂)·호소(狐蘇)·도하(徒河)·문성(文成)·임투[臨渝:임유(臨渝)]·루(絫)이다.》
호수(戶數) : 72,654
인구(人口) : 352,325
작은 하천(河川:小水) 48개가 흐르는데, 그 물길이 합해 3,046리를 흐른다.
➨ “요서군(遼西郡)”에서 눈여겨볼 만한 현(縣)은, “림투현[臨渝縣=림유현(臨渝縣)]”이다. 왜냐하면 이곳에 2,000미터가 넘는 험준(險峻)한 “림유산(臨楡山)”이 있고, 그 아래에 “림유하(臨楡河)”가 흐른다고 했기 때문이고,
‘투관(渝關)=림유관(臨楡關)=산해관(山海關)’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석산(碣石山)이 없다. 왜냐하면 ‘투관(渝關)=림유관(臨楡關)=산해관(山海關)’은,
갈석산(碣石山)의 지맥(地脈)이 바다로 들어간 곳에 산해관(山海關)이 있다고 했기 때문인데, 실제(實際)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그 어디에도 “수천(數千) 미터의 산봉우리가 삐쭉삐쭉 솟아있다는 림유산(臨楡山)도 없고, 림유하(臨楡河)도 없다.” 또 갈석산(碣石山)은 요동(遼東)에 있다고 하였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인가?
다른 땅에 있었던 것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에 이동(移動)시켜 놓고 보니 이런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➊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 《낙랑군(樂浪郡)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봐도 : 낙랑(樂浪)은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이 아닌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어야 맞다.
➋ 통전(通典)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장성(長城)이 이 산(山)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장성(長城)의 동(東)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高駒驪)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봐도 : 낙랑(樂浪)은,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이 아닌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어야 맞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 어디에도 옛 장성(長城)의 유지(遺址)는 없다. 현존(現存)하는 장성(長城)은 한참 후대(後代)의 것일 뿐이다. 또한 림유관(臨楡關)이니, 림유산(臨楡山)이니, 림유하(臨楡河) 등이 없다는 것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또한 옛 요서군(遼西郡)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 위의 글 “➊+➋”에서 설명(說明)하는 말에 따르면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통전(通典)】 : ‘갈석산(碣石山)은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하였으니,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로 보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은, 옛 낙랑군(樂浪郡) 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요수(遼水), 패수(浿水), 압록강(鴨綠江) 등이 없다.
“갈석산(碣石山)”과 “산해관(山海關)=유관(渝關:투(渝)관)=림유관(臨楡關)=림투관(臨渝關)”은 조선(朝鮮) 영토(領土)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오늘날의 만주(滿洲)의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하북성(河北省) 땅은 ‘고전(古典) 원전(原典)’에 기록(記錄)된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땅이 될 수 없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들이다.
더불어 “만주사리(曼珠師利)”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시는 곳은 네팔(Nepal)에도 현존(現存)한다. 서장(西藏)에서 “만주(曼珠=滿洲)”라는 말이 기원(起源)한다는 것으로 볼 때 : 서장(西藏)의 “만주(滿洲)”라는 말이 일만(一萬) 리 동(東)쪽 땅의 지명(地名)이 되었다는 것은 참 웃기는 이야기다.
2. 《遼東郡,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요동군(遼東郡)은, 진(秦)에서 두었는데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戶)는 55,972, 구(口)는 272,539이고, 현(縣) 18개 : 양평(襄平)·신창(新昌)·무려(無慮)·망평(望平)·방(方)·후성(候城)·요대(遼隊)·요양(遼陽)·험독(險瀆)·거취(居就)·고현(高顯)·안시(安市)·무차(武次)·평곽(平郭)·서안평(西安平)·문(文)·번한(番汗)·답씨(沓氏) 현(縣)이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 험독(險瀆)은 조선왕(朝鮮王) 만(滿)이의 도읍(都邑)으로, 물의 험한 곳에 의지하였으므로 험독(險瀆)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臣) 찬(瓚)이 이르기를 :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東)쪽에 있다. 이게 나의 주장으로 험독(險瀆)이다.]
➨ ‘응소(應劭)’의 주장(主張)과 ‘신(臣) 찬(瓚)’의 주장(主張)이 서로 맞서고 있는데, ➊ ‘응소(應劭)’는, “험독(險瀆)은 요동군(遼東郡)에 있다”는 것이고, ➋ ‘신(臣) 찬(瓚)’의 말에 따르면 :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 동(東)쪽에 있는 것이 험독(險瀆)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호수(戶數) : 55,972
인구(人口) : 272,539
험독(險瀆) : ➊ ‘응소(應劭) 曰’ : “험독(險瀆)은 요동군(遼東郡)에 있다”는 것이고, ➋ ‘신(臣) 찬(瓚) 曰’ :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 동(東)쪽에 험독(險瀆)이 있다”
험독(險瀆)이 왕험성(王險城)인가? 왕검성(王儉城)인가? 아니면 험독(險瀆)과 왕험성(王險城)은 같은 곳이고, 왕검성(王儉城)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인가?
3.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1].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2],上殷台,西蓋馬. : 현토군(玄菟郡)은, 무제(武帝) 원봉(元封)4년【BC 109年】에 개설되었는데, 고구려(高駒驪)는 왕망(王莽)이 하구려(下句麗)라고 불렀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戶)는 45,006, 구(口)는 221,845, 현(縣) 3 : 고구려(高句麗)·상은태(上殷台)·서개마(西蓋馬)이다.》
[一] 應劭曰:故真番,朝鮮胡國 :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 옛 진번(眞蕃)은 조선(朝鮮) 호국(胡國)이다. [二] 應劭曰:故句驪胡 :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 옛 구려(句驪)는 호국(胡國)이다.
『옛 진번(眞番) 곧 조선(朝鮮)』은 호국(胡國)이었고, 『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 또한 호국(胡國)이었다는 뜻이다.
호수(戶數) : 45,008
인구(人口) : 221,845
현토(玄菟) : 진서 재기(晉書 載記) 曰 :
《晉書 卷 101 : 然則燕築造陽之郊,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 : 연(燕)에서 조양(造陽)의 밖으로 성(城)을 쌓은 것은, 진(秦)이 임조(臨洮)의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支脈)을 단절(斷絶)하여, 현토(玄菟)를 싸고돌아 황하(黃河)에 이르게 한 것은, 이적(夷狄)의 난동(亂動)으로부터 중화(中華)를 막아주는 것이며, 이는 미리 방비(防備)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기록(記錄)을 보면 :
원전(原典)에서는 : “현토(玄菟)는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고 하였다.
곧 “천산(天山)➨현토(玄菟)➨하(河)”의 순서(順序)로 : 『가장 서(西)쪽에 천산(天山)이 있으니, 그 산(山) 또는 산맥(山脈)을 끊어 지맥(地脈)을 단절(斷絶)시키고, 현토(玄菟)를 감싸고 돌아, ‘하(河)=하새(河塞)’에 닿도록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것이다.
➨ 고대(古代)의 천산(天山)은,
오늘날의 『한텡그리산[Khan Tengri Mt. 6,995m]=한등격리산[汗騰格里山]』이다. : 이시크쿨호(湖) 동(東)쪽 160km, 아극소[阿克蘇] 북(北)쪽 130km, 천산산맥[天山山脈] 중앙(中央)에 있는 산으로,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이라고도 한다.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과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중부지방(中部地方)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수천(數千) 리(里) 되지 않을까?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 현토군(玄菟郡) 조를 보면 :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하여 《亡命東走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였다.
4.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縣二十五:朝鮮·俨邯[讑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東暆]·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 낙랑군(樂浪郡)은,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BC108年】에 개설되었는데,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戶) 62,812, 구(口) 406,748이고, 운장(雲鄣)이 있다. 25 현(縣) : 조선(朝鮮)·언감(俨邯)=엄한[요한讑邯]·패수(浿水)·함자(含資)·점선(黏蟬)·수성(遂城)·증지(增地)·대방(帶方)·사망(駟望)·해명(海冥)·열구(列口)·장잠(長岑)·둔유(屯有)·소명(昭明)·누방(鏤方)·제해(提奚)·혼미(渾彌)·탄열(呑列)·동당[東傥=東暆)]·불이(不而)·잠태(蠶台)·화려(華麗)·사두매(邪頭昧)·전막(前莫)·부조(夫租) 현(縣)이다.》
호수(戶數) 62,812
인구(人口) 406,748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 바로 “有 雲 鄣”이라는 구절(句節)이다.
● 『운장(雲鄣)』이란 : “진(秦) 나라의 운장(雲鄣) 땅”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장(鄣)”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나라 이름 “장(鄣)”이다. 【필자(筆者) 주(注) : 본문(本門) 글 중에서 “有雲鄣”이라고 하였는데, 『有 兩 ‘鄣’』 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云 “鄣”』 이라는 것인지… …하는 것이다. 곧 “장(鄣)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는 뜻이다.】
(1) “장(鄣)”은 : 춘추시대(春秋時代) 제후(諸侯) 장국(鄣國)【都城 : 山東省 東平縣 鄣城村】땅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동평현(東平縣) 일대(一帶)를 지칭(指稱)한다고 하는데, 장국(鄣國)의 사실(史實)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즉(卽),
그 기원(起源)을 보면 : 본시(本是) “장(鄣)”이란 : ‘장(章)’으로 부족(部族)에서 온 성씨(姓氏)로, 황제(皇帝)의 후예(後裔)라고 전해지는데, 이들이 살던 곳은 ‘장천(漳川)=장수(漳水)’로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장현(漳縣) 일대(一帶)로, 한대(漢代)의 전략적(戰略的) 요충지(要衝地)로 “서수병장(西陲屏障)”이라고 하여 그 이름으로 인해 ‘장현(障縣)’이 되었고, 장현(漳縣)의 옛 이름은 장천(漳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현(縣) 내의 장수(漳水)는 흘러 지나가다가 돌고 돌아 위수(渭水)로, 뒤에는 황하(黃河)에 들어간다고 하였다.【出處 : 維基百科】
➀ 漳河(榜沙河):榜沙河支流,發源於甘肅省漳縣木寨嶺,於孫家峽流入天水市武山縣
➁ 榜沙河 : 榜沙河位於肅省東南部的一條河流,為渭河右岸支流。源頭稱閭井河,發源於定西市岷縣東南部閭井鎮新莊村魚池溝以南的岷峨山北麓,一說發源於閭井鎮林口村東南西秦嶺直拉梁北側,蜿蜒向西北流至蒲麻鎮磚塔寨村轉東北流後又稱黑虎河,經漳縣東南部和武山縣西北部,於武山縣鴛鴦鎮以東匯入渭河。榜沙河是渭河支流中水量最大、泥沙最少、水質最好的一條。
곧 “장하(漳河)=장천(漳川)=장수(漳水)”의 하천(河川)에서 “장(鄣)”으로 변화(變化)된 것인데, 위수(渭水)의 최대지류(最大支流)인 “방사하(榜沙河)”의 지류(支流)가 바로 ““장하(漳河)=장천(漳川)=장수(漳水)”이고, 이 하천유역일대(河川流域一帶)가 “장(鄣)” 땅이다.
➤ 『장(鄣)』은 : “장(章)-장(漳)=장(障)=장(鄣)”등으로 돌고 돌아 변천(變遷) 과정(過程)을 거치는데, 이게 자연적(自然的)인 것인지, 인위적(人爲的)으로 지명(地名)을 왜곡(歪曲)시킨 것인지는 판단(判斷)하기 어렵다.
또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땅의 ‘장수(漳水)=장천(漳川)’ 일대(一帶)에서 살던 부족(部族)들이 수천(數千) 리를 이동(移動)하여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동평현(東平縣) 일대에 자리 잡고 장국(鄣國)을 세웠다는 것도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 중요(重要)한 것은 : 운장(雲鄣)의 “장(鄣)” 자(字)는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글자로 본래(本來)의 땅은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일대(一帶)였다”는 사실(事實)이다.
(2) 그렇다면 『운장(雲鄣)』이란 무슨 뜻일까? 많은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보면 “운장(雲鄣) 땅”이라고 하였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모두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운장(雲鄣) 또는 상하장(上下鄣) 지역을 위만(衛滿)이 병합(倂合)하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➊ 기언(記言) 32권 외편 / [서(序)] 동사(東事) 서(序) : 《衛滿本亡人。據朝鮮幷古秦雲障地。以兵威財物。拓地千餘里。作衛滿世家。: 위만은 본래 망명해 온 사람으로 조선을 점령하고 옛 진(秦)나라의 운장(雲障) 지역을 병합하여 군사력과 재력으로 1,000여 리의 지역을 개척하였다고 하였다.》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운장지(雲鄣地) 곧 운장(雲鄣) 땅”이라고 기록(記錄)하였다.
➋ 《衛滿者。燕亡人。魋結爲蠻夷服。聚儻千餘。逐王準。據朝鮮。以兵威財物。幷古秦雲障地。拓地數千里。: 위만은 연(燕)에서 도망 온 사람으로 상투를 짜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왕(王) 준(準)을 몰아내고 조선(朝鮮)을 점령하여 군사의 위력과 재물을 가지고 옛 진(秦) 나라 땅인 운장(雲障) 【필자(筆者) 주(注) : 장(鄣)】을 병합하고 수천(數千)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역시(亦是) “운장(雲鄣) 땅”이라고 하였으며, 이곳 주변 수천(數千)리 땅을 개척(開拓)했다고 하였다.
➌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9권 / 경사문(經史門) 우거(右渠) : 《東國通鑑載衛滿朝鮮事多踈畧.按漢書滿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注樂浪有雲鄣浿水出塞外南至樂浪西入海此指鴨綠也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려져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사실은 소략한 데가 많다. 한서(漢書)를 상고하니, “만(滿)은 패수(浿水)를 건너 옛날 진(秦) 나라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와서 살았다.” 하였고, 그 주(注)에는, ‘낙랑(樂浪)에 운장(雲鄣)이 있고 패수(浿水)는 출새(出塞)에서 시작해서 서남(西南)으로 낙랑(樂浪)에 이르러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는 압록강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 현토군(玄菟郡) 조를 보면 :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하여 《亡命東走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등에서는 『상하장(上下鄣)』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곧 “장(鄣)”의 위(上)쪽과 아래(下)쪽에서 살았다고 하였으니, 곧 ‘양장(兩鄣)’과 같은 뜻이다.
『진(秦) 나라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이라는 말은, 즉(卽)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에 있는 『“장하(漳河)=장천(漳川)=장수(漳水)”의 양안(兩岸) 일대(一帶) “장(鄣)” 땅에서 살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하장(上下鄣)”이라는 말에서 확실(確實)한 것은 “장(鄣)”이란 땅 이름이자, “장하(漳河)=장천(漳川)=장수(漳水)”의 양안(兩岸) 일대(一帶)를 지칭(指稱)하는 것이다.
➍ 海東繹史 제2권 / 세기(世紀) 2 위만조선(衞滿朝鮮) : 《동이(東夷)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鄣)과 하장(下鄣)에 살았다. 사기(史記) 색은(索隱)에,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낙랑(樂浪)에 운장(雲鄣)이 있다.” 하였다.》하였으니,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➌’과 같은 “상장(上鄣)과 하장(下鄣)” 땅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곧 ‘양장(兩鄣)’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 ‘상장(上鄣)이니 하장(下鄣)’이니 하는 지명(地名)은 곧 ‘상규(上邽)와 하규(下邽)’와 같은 예(例)이다. 상규(上邽)·하규(下邽)는, 천수(天水) 일대(一帶)의 옛 지명(地名)이다.】
“패수(浿水)는 곧 위수(渭水)다”
➎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대목 중의 하나는 “패수(浿水)는 곧 위수(渭水)다” 라는 것이다.
『동이(東夷)의 옷을 입고 동(東)쪽으로 달아나 요새(要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가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鄣)과 하장(下鄣)에 살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상장(上鄣)과 하장(下鄣)』은, 곧 양장(兩鄣) 땅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장하(漳河)=장천(漳川)=장수(漳水)의 ‘양안(兩岸) 일대(一帶)’』를 지칭(指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라면 : 감숙성(甘肅省)의 중부지방(中部地方)이다. 이곳으로 ‘수천(數千) 리(里) 땅’을 개척(開拓)했다고 하면 그 한계(限界)는 과연(果然) 어디까지에 미칠까?
‘수천(數千) 리(里)’라는 말은 2-3 천리(千里)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2-3천리(千里) 서(西)쪽은 알타이산맥[Altai, 山脈)을 넘고, 동(東)쪽으로 수천(數千) 리(里)는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과 하남성(河南省)을 관통(貫通)한다.
【渭河水系 : 渭河 - 葫蘆河 - 榜沙河 - 涇河 - 洛河(北) - 灃河 - 灞河 - 滻河 - 黑河 - 石頭河】
【漳縣位於甘肅省定西市南部,東連天水市武山縣,西鄰甘南州卓尼縣,南靠定西市岷縣,北與定西市隴西縣、渭源縣接壤】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
➤➤➤ ‘고전번역원’의 설명(說明)에 의하면 : ➊ 공지(空地)인 상장(上鄣)과 하장(下鄣)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지 아니한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鄣)은 상하 2개소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 북안(北岸)에 비정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한서(漢書)에 의하면 :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障 : 所以自鄣蔽也.’라 보임.》라고 주석(註釋) 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으나, 즉 ‘장(障)’은 가로막을 ‘장(障)’ 자(字)를 말하는 것이고, ‘장폐(障蔽)란 가로막아 덮다’는 뜻이다.
➨➨➨ 즉(卽)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장(鄣)』 자(字)와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설명(說明)이다.
이런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라면 :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나라의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서 와서 살았다”고 하였으니,
『한반도(韓半島) 대동강(大同江) 북안(北岸) 지대가 “진(秦)나라 땅이었다”는 이야기가 전개(展開)되는데, 이런 주장(主張)을 하는 견자(犬子)들은 진짜 쪽팔리는 놈들이다.』
생각해 봐라! 반도(半島) 대동강(大同江) 주변에서 수천(數千) 리 땅을 찾을 수 있겠냐? 조선왕(朝鮮王) “만(滿)”이 수천(數千) 리 땅을 개척(開拓)했다고 하지 않느냐?
『장(鄣)』 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나라 이름 ‘장(鄣)’ 자(字)다.
조선사(朝鮮史)의 많은 사료(史料)들을 보면 “장(鄣)” 자(字)를 “장(障)” 자(字)로 기록(記錄)해 놓은 것들이 많다. 본래(本來)의 것인지, 후대(後代)에 가필(加筆)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전원문(古典原文) 사료(史料)에서는 “장(鄣)”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를 혼동(混同)하면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즉(卽) 『대륙(大陸)의 감숙성(甘肅省) 중부지방(中部地方) 곧 위수(渭水)의 최상류(最上流) 지방(地方)의 땅 이름인 “장(鄣)”』자(字)가 전혀 다른 뜻인 요새(要塞)로 번역되는 “장(障)”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조작(操作)이고, 왜곡(歪曲)이다.
(3)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위만(衛滿)은,
➊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동평현(東平縣) 일대(一帶) 땅 1,000 여리(餘里) 또는 수천(數千) 리를 병합(倂合)했다는 것일까? 그러나 미안(未安)하고 아쉬운 이야기지만 산동성(山東省) 땅을 다 뒤져도 수천(數千) 리를 갈 수 있는 곳이 없다. 아니면
➋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일대(一帶) 땅 1,000 여리(餘里) 또는 수천(數千) 리를 병합(倂合)했다는 것일까? 뭔가? 문제(問題)는 낙랑군(樂浪郡) 내에 “운장(雲鄣)”【필자(筆者) 주(注) : 또는 장(鄣)】이 있었다는 것이다.
○ “운장(雲鄣)” 또는 “상하장(上下鄣)” 또는 “상장(上鄣)과 하장(下鄣)”이라는 곳은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중부지방(中部地方)에 있는 땅(地)의 이름이다.
곧 『“장하(漳河)=장천(漳川)=장수(漳水)”의 양안(兩岸)을 지칭(指稱)하는 말이고, 이 하천(河川)은 방수하(榜沙河)로 들어가고, 방수하(榜水河)는 위수(渭水)의 가장 큰 지류(支流)로 위수(渭水)의 최(最) 상류(上流) 땅의 이름(地名)이다.』
이러한 중대한 지명의 ‘장(鄣)’ 자(字)를 ‘가로막을 장(障)’ 자(字)로 만들고, 또 장(鄣) 땅을 반도(半島) 평양(平壤) 주변(周邊)에 갖다 놓는 사학자(史學者)들은 사학자(死學者)들 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자신(自身)들의 가족(家族)들 보기에 얼마나 민망(憫惘)하고, 쪽팔리겠는가?
2023년 07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감숙성 정서(定西)에서 장안(長安)까지는 겨우 1천리(400km)에 불과하고,
장액은 524km, 주천는 겨우 705km,
신장자치구 하미(합밀)까지는 1200km, 투르판까지는 1550km, 타림강 주변일대까지는 1520km 에 해당되는데,
조선왕 "만(滿)"은, 진(秦)나라 공지였던 "상하장"에서 살면서 '1천리 또는 수천리의 땅을 개척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왕" "만(滿)"이 개척한 땅은 과연 어디까지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예전 젊었을 적에 감숙성(甘肅省) 기본설을 주장했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리운 느낌입니다.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ㅎㅎ
라오스 남부의 팍세에서 동쪽으로 위치하는 '볼라벤 고원'인데, 커피 나무를 보는게 신기합니다.
그 곳은 황토 고원이라서 마치 가을처럼 시원하고 모든 작물을 심으면 잘 자라는 좋은 땅입니다.
"玄朝"님! 감사합니다.
늘 접해 왔던 것들을 하나 하나 재정리 하다보는 시간을 갖다가 이런 중요한 단서를 찾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시간제약 때문에 시간을 걸리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보자는 희망적인 조그만 목표는 그런대로 성과를 봤다고 스스로 위안삼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조상님들이 살았던 땅에 대한 역사관을 심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소망은 "발상전환의 역사관을 가진 대통령이 선출되어 새로운 역사관을 정립하자는 바람이 불어야 가능한 것이고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친일사관을 가진 윤석열"이나 "가야를 부르짖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같은 사고를 가진 분들에게서는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자주와 자립을 부르짖는 분들이 많아지고,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국가관을 가질 때, 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봅니다.
지금의 신생국 대한민국은 제2의 식민지 국가라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닐정도로 '미국과 일본'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입니다. 허기야 국가방위의 핵심인 작전권도 남의 나라인 미국에 줘버리는 주제에 무슨 국가관 타령일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의 새로운 국가관을 성립하자는 분이 나타나는 것을 계기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조선사를 새롭게 바라봐야 하는 시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장마철에 피해가 없으신지...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