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마치 연애는 없고 ‘썸’만 있는 것 같다.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명확한 관계 정의 없이 감정을 나누고 육체를 섞는다. 병아리가 닭이 되듯이 썸이 연애가 되는 과정은 아니라는데. 그래서 물었다. 당신에게 썸이란?

썸은 공짜 스킨십 티켓이다. 일단 서로 호감이 있다는 건 증명된 사이이기 때문에 단순히 감정만 나누는 게 아니라 육체도 공유할 수 있다. ‘썸녀’를 침대로 데려가는 기술은 개인 차가 있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참고로 내가 만난 썸녀 중에 나와의 섹스를 거부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28세, 남)
썸은 계륵 같은 관계다. 남 주기엔 아깝고 내가 가지기엔 뭔가 부족한 사람과 썸을 탄다. 밥처럼 매일 먹을 필요도 없고 한 번씩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맛볼 수 있으니까 부담이 다. 함께 다니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외모의 소유자라면 더 좋겠지. 노출을 즐기는 여자도 환영이다. (30세, 남)
썸은 바람에 대한 면죄부다. 홍보 일을 하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과의 술자리가 잦다. 긴장이 풀어지는 술자리에선 임자 있는 몸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종종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이 정도면 썸 탄 거 아닌가? 하룻밤인데 바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하다. 이럴 때 적당한 말이 바로 썸 아니겠나. 썸은 죄책감 없이 바람을 피울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35세, 남)
썸은 건강 검진이다. 지독하게 사랑했던 오빠와 헤어진 후 몇 년간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연애 불구자라고 부르면서 내 몸속 어디에도 연애 세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연히 영어 스터디에서 만난 연하남과 미묘한 기류에 휩싸였다. 돌처럼 굳어 있던 내 심장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물론 그와의 썸은 아주 잠깐으로 끝났지만 내 호르몬 체계가 아직 정상이란 건 확실했다. 앞으로도 연애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분비되는지 확인할 겸 한 번씩 썸을 탈 생각이다. (28세, 여)
썸은 용기 없는 자의 변명이다.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 적당한 선을 지하면서 썸만 탄다. 메시지를 주고받고 데이트 정도는 가능하니까. 섣불리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면 영원히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썸녀로라도 남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33세, 여)
썸은 연애의 한 종류다. 예전보다 연애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면서 쉽게 만나고 언제든지 끝낼 수 있는 관계가 하나의 연애 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스킨십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발전해도 두 사람이 갑자기 연인이 되는 건 아니다. 단지 썸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다. ‘깊은 썸’이라고나 할까? 썸을 탈지 진지한 연애를 할지는 선택 사항인 것이다. (31세, 남)
썸은 게임이다. 승자를 가려야 끝나는 게임처럼 밀당과 ‘떠보기’를 쉼 없이 반복한다. 썸 타는 관계에서 좋아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집착하게 되면 썸은 쌈이 된다. 결국, 쿨하지 못해지는 순간 게임 오버란 뜻이다. (29세, 여)
썸은 보험이다. 선톡 빈도와 답장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등을 종합해 썸녀의 호감도를 판단한다.나의 고백을 받은 즉시 OK를 외칠 것 같다는 확신이 서면다른 여자와 또 썸을 탄다. 이런 식으로 썸을 즐기다 보면 적어도외로울 일은 없거든. 그렇게 오늘도 보험 가입은 늘어간다. 생명보험, 암보험, 자동차보험…. (27세, 남)
썸은 간 보기다. 주로 늦은 밤에 ‘자니?’, ‘뭐해?’ 라는 식의 선톡을 보내는 것으로 상대방이 내게 얼마나 호감이 있는지 알아본다. 만약 상대가 즉시 답장을 보내거나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면 썸이 시작되는 거다. 물론 연인으로 발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 단지 간만 봤을 뿐 내 마음을 다 보여준 게 아니기 때문이다. (23세, 여)
썸은 문화다. SNS와 스마트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썸 타기가 쉬워졌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썸 타실 분 선톡(먼저 메시지를 남기는 것) 주세요’라는 글을 올리고 썸 상대를 찾으면 된다. 어떤 경우에는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썸톡(썸을 타기 위해 사용하는 카카오톡 메시지)’으로 시작해 ‘읽씹(메시지를 확인하고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끝나버리기도 한다. (25세, 남)
썸은 설렘이다. 상대방이 날 좋아하는지, 그렇다면 그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관계에서 썸은 시작된다. 일단 썸 타기 시작하면 상대가 보낸 메시지, 이모티콘 하나에서도 숨은 의미를 찾고 보낸 의도를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썸남’ 생각을 자주 하게 되고 ‘케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또 썸남의 행동들이 그린라이트라면 연인 관계로발전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설렘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24, 여)
썸은 중독이다. 처음 썸을 탈 땐 연애의 진정성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몇 번의 썸이 반복됐고 이젠 그 맛을 알게 됐다. 썸녀는 나를 구속할 자격이 없다. 나 역시 썸녀와의 관계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 동시에 여러 명을 만나도 ‘네가 뭔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앞으로도 뒤끝 없는 썸만 타면서 부담 없이 연애를 즐길 거다. (29세, 남)
썸은 호구 양산 과정이다. 한참 동안 썸 타던 여자애가 생일 선물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다. 누가 봐도 ‘지금이 내게 고백할 타이밍이야!’라는 눈빛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답변은 반전이었다. 부담스럽게 굴지 말고 좋은 오빠로 남아달라는 것. 단, 오빠를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아달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계속해서 썸만 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군대 간 남자친구 대신에 나와 시간을 보낸 거였다. 밥 사주는 사람, 심심할 때 놀아주는 호구가 안 되려면 썸, 함부로 타는 거 아니다. (30세, 남)
썸은 연애의 시작이다. 새로운 사람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성 간에 썸은 항상 존재해 왔다. 단지 ‘썸씽이 있다’에서 ‘썸 탄다’로 표현법이 바뀐 것뿐이다. 신 썸 타는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 긴 썸은 없다. 남자는 ‘이 사람이다’ 싶으면 빠르게 진도를 나가고 싶어 한다. 마음껏 표현하고 사랑해 줄 시간도 모자란데 모호한 감정으로줄다리기만 하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게 어장관리와 썸의 차이기도 하고. (34세,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