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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족이 정말로 동족인지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흉노-훈족 동족설의 뽀족한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 다룬 전문적인 글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80년 대 후반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것이라 최근의 인류학적 성과 등이 빠져있고, 또 고고학적 측면도 다소 모자름이 있지만, 문헌 사학면에선 잘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원문은 넷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해도, 이 논문의 러시아어 번역본을 넷상에서 보고 좀 놀랐었다. 원저자 여태산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중인 서역 전문 연구가의 하나인데, 특히 사료비판 능력이 탁월하다. -이상 역자-
『文史』第33輯(1990年), 頁57~73. (北京 : 中華書局)
흉노-훈족 동족론 따져묻기
匈奴與Huns同族論質疑
余太山(YO Tai-Shan)
(中國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
중국 사료상 BC 3 ~ AD 1세기에 걸쳐 대막(大漠, 고비사막) 남북에서 활약한 유목부족인 흉노(匈奴)와 서방 사료상 AD 470년 무렵에 유럽을 100년 가까이 누비던 유목부족인 Huns[훈족]이 동족(同族)일까 하는 문제를 두고, 동•서방 사학계는 2백년 넘게 토론을 거듭했다.1 지금에 이르러, 적어도 중국에서는, 동족론자가 확연히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2 그렇지만 꼼꼼하게 낱낱이 검토해 본다면, 논거에서 깊은 생각이 덜한 곳을 찾을 수 있거니와 흉노와 훈족이 동족이라고 결론내기는 몹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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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론자의 중요한 한가지 논거는 “匈奴”와 Huns의 발음이 서로 같다는 것인데, 심지어 훈족(Huns)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에 이르기 전에도 서방에는 이미 Huns 혹은 이와 발음이 비슷한 명사가 중국사료에 보이는 흉노(匈奴)를 가리키는데 쓰였다고 했다.
1. 스트라보(Strabo)『지리지(Geography)』3 (XI,11~1)에 따르면, 아폴로도루스(Apollodorus, 약 BC 200)의 기록에 그레코-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의 영토는 세레스(Seres)와 휘류니(Phryni)까지 뻗었다고 적혀있다. 세레스란 중국을 가리키고, 휘류니는 마땅히 흉노를 가리킨다.4 지금 검토해보니 이 설은 불안하다. AD 3세기 말, 흉노의 세력은 꽤 약소했었고, 그 서방에는 강대한 유목부족인 월지(月氏)가 있었다. 월지의 세력범위는 동쪽 하투(河套)부터 서쪽 천산(天山)과 알타이산까지 아울렀었다.5 따라서, 당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세력범위는 근본적으로 흉노와 마주할 수 없다.6 바꿔말하면, 휘류니는 흉노가 결코 아니다.
2. 플리니(Pliny)의『자연사(Natural History)』7 (VI, 20)는 토차리(Tochari) 부근에 휴니(Phuni) 사람이 살았다고 했다. 디오니시오(Dionysius)의 서술(Periegisis)8 또한 토차리와 세레스 이웃에 휘류니(Phryni)가 살았다고 했다. 여기서 휴니, 휘류니는 다 흉노를 가리키는 것이다.9 지금 검토해본다.: 플리니(AD 23~79 년)와 디오니시오(AD 3~4 세기)가 흉노를 두고 객관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들이 말한 휴니(Phuni)와 휘류니(Phryni)가 과연 흉노를 가리킬 지는 아주 미심쩍다.
첫째, 플리니의 휴니(Phuni)와 디오니시오의 휘류니(Phryni)는 응당 아폴로도루스의 휘류니(Phryni)인데, 후자는 앞에서 흉노가 아니라고 했거니와, 따라서, 전자의 둘 또한 흉노가 될 수 없다.
둘째, 서방의 옛책에서 보이는 세레스(Seres)란 일반적으로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그 주된 까닭은 거기가 실크가 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리니의『자연사』(VI, 24)는 세레스 사람을 두고 “금발에 푸른 눈”이라 했는데, 즉 실크를 만든 사람이 중국인이었음을 모른채 글을 썼다. 또한 같은 책(VI, 20)에 따르면, 세레스 사람은 대체로 스키타이[Scythae] 동쪽에 살고있는데, 그 남쪽은 인도라고 했다. 또한 세레스와 인도 사이에는 아타코라에(Attacorae), 휴니(Phuni), 그리고 토차리(Tochari) 따위가 있다고 했다. 앞서 인용한 그레코-박트리아의 여러 왕의 세력범위가 세레스까지 뻗어있었다는 아폴로도루스의 기록과 함께 살펴보면, 세레스 사람이란 당시 실크무역을 중개하던 부족 혹은 부락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있고, 그 거주지는 대체로 지금의 신강(新疆)지역이다.10 그렇다면, 휴니(Phuni) 또한 마땅히 타림[塔里木]분지 곳곳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정확한 지점은 짚어내기 힘들지언정, 결코 흉노는 될 수 없다. 토차리(Tochari)사람의 경우, 플리니가 묘사한 시대에선, 하서(河西)지역으로부터 타림분지를 거쳐 파미르고원[葱嶺] 서쪽 너머까지 골고루 그 종적이 있거니와,11 이들과 휴니(Phuni)의 이웃 또한 반드시 흉노라곤 할 수 없다.
3. 프톨레미(Ptolemy)의『지리지(Geography)』12 (VI, 13)에 적힌 Gyrnaei는 마땅히 시르-다리야(Syr Darya, 錫爾河) 북쪽 강가부터 발하슈호[Balkhash, 巴爾喀什湖] 물가 일대에 자리하는데 마땅히 흉노를 가리키는 것이다.13 지금 검토해 본다: 연대상에선 프톨레미(AD 2세기)가 흉노에 대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은 확실히 있긴해도, Grnaei가 흉노일지는 불안정하다. 때문에 Gyrnaei의 위치는 프톨레미가 말한 이른바 사카라(Sacara)지역일 것이다. 이 지역의 범위는 소그디아나(Sogdiana) 동쪽 너머, 파미르고원[Pamir, 帕米爾] 서쪽 너머, 시르-다리야 남쪽 너머, 그리고 힌두-쿠쉬[Hindu Kush, 興都庫什山] 북쪽 너머다.14 흉노사람의 활동범위와 함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4.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성 예로니모(St. Hieronymus, 약 340~420년)의 라틴어 지도를 보면 Seresoppidum(중국) 근처에 Huniscite(Huniscythae, 흉노스키타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는 AD 4 ~ 5세기 초에 작성된 것인데, BC 7년 8월에 제작된 로마지도와 아그립바(Agrippa, 약 BC 62~12)의 Orbispictus(세계지도)를 근거로 한 것이 전해내려온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기원전의 유럽인은 이미 중국 곁에 흉노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들을 후니(Huni)라고 불렀었다.15 지금 검토해 본다.: 이 설 역시 불안정하다. 성 예로니모가 근거로 본떴다는 지도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가 없다. 정작 Huniscite란 말이 반드시 있었다고 할 수 없음은 스트라보, 플리니, 그리고 프톨레미가 흉노를 꼽지않았던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지도상의 Huniscite는 성 예로니모가 지도를 작성하던 당시의 지식에 근거하여 덧붙였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버릴 순 없다. AD 4세기 말~5세기 초까지의 흉노는 더 이상 몽골고원에서 독립정권을 이루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 지도에선 지난날 흉노의 통치지역에 해당하는 방위를 표기했을 따름이거나, 흉노의 뒤를 이어 몽골고원에서 발돋움한 다른 유목부족을 가리킬 가능성 또한 전적으로 있다. 아마도 당시의 Huni(Huns)란 유럽사람이 동방 유목부족을 어떤 뜻으로써 통틀어 부르는 말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5. 스타인(A. Stein)은 돈황(敦煌)의 한대(漢代) 봉수대 유적에서 발견한 소그드문자 서신(제2봉)에 당시의 흉노를 xwn (chwn)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고했다.16 지금 검토해 본다.: 소그드인이 흉노를 xwn (chwn)라고 불렀다고 해서 유럽사람이 진작부터 흉노를 Hun(Chuni)라고 불렀다고 명확하게 증명할 순 없거니와, 둘 사이는 필연적인 연계가 없다.17
6. “匈”자의 중고음(中古音)은 xiowon인데, 그 중간음(中間音) -i-는 상고(上古)적엔 -l-, -r-로 쓰였다. 이 점을 두고 시노-티벳어의 비교연구로서 설명하자면, “匈奴”의 상고음(上古音)은 χbrong-no로 재구성될 수도 있겠는데, 이것과 Φρουνοι (Φρυνοι)는 서로 딱 들어맞는다.18 지금 검토한다.: “匈奴”의 상고음이 χbrong-no로 재구성 될 수도 있다함은 오류가 아니겠지만, 그렇다해서, Φρουνοι 따위가 흉노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19
간추린다면, 훈족(Huns)이 유럽에 나타나기 이전에, 중국역사에 관련된 서방 역사에서, 이미 흉노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 즉, 앞에서 열거한 Φρουνοι (Φρυνοι) 따위가 전부 중국북방의 흉노를 가리킨다고 해서 반드시 이를 근거로 서천(西遷)해서 유럽에 이른 훈족(Huns)이 흉노라고 단정할 순 없다. 이름이 서로 같다고 해서 반드시 실체가 같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Huns가 “匈奴”의 소릿값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드러났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측 사료에 보이는 흉노라고 여길 순 없는 노릇이다. 4세기 이후, 몽골고원부터 서천한 에프탈(Ephthalite), 불가(Bulgar), 그리고 아바르(Avar) 등등과 같은 유목부족 모두가 스스로 혹은 남들이 Huns라고 불렀을 것이고,20 또한 분명하지만, 이들 모두를 서천한 흉노사람으로 간주할 순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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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지만, 동족론자는 이름만으론 훈족은 흉노와 동족이라고 단정하기엔 넉넉치 못함을 알고서 힘을 다해 흉노의 서천(西遷) 궤적을 찾고자 했다. 몇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들은 중국측 사료 속에 그런 궤적이 군데군데 얼룩져 있다고 선언했다.21
1. 동족설은 흉노사람이 서천한 제1지점은 오손(烏孫)의 땅, 즉 이리강(伊犂河) 유역이라고 했다. 주된 근거는『후한서·袁安傳』이다,: “이듬해(和帝 永元3年, AD 년),북(흉노) 선우는 경기(耿夔)한테 얻어터져 오손(烏孫)으로 달아나니, 새(塞) 북쪽 땅은 텅 비었고 (북흉노의) 남겨진 부(部)는 소속을 몰랐다. [北單于爲耿夔所破, 遁走烏孫, 塞北地空, 餘部不知所屬]”. 지금 검토한다.: 영원(永元) 3년의 전쟁은 같은 책「화제기(和帝紀)」에 또한 이렇게 실려있다.
(영원 3년) 2월, 대장군 두헌(竇憲)은 좌교위 경기(耿夔)를 추천하여 거연새(居延塞)를 나가게 했다. (경기는) 북(흉노) 선우를 금미산(金微山)에서 에워싸고 이들을 크게 깨부수고 그의 어머니 연지(閼氏)를 사로잡았다.
[永元三年]二月, 大將軍竇憲遷左校尉耿夔出居延塞, 圍北單于於金微山,大破之, 獲其母閼氏.
같은 책「경기전(耿夔傳)」에:
(영원) 3년, (두)헌은 다시 하서(河西)땅을 나가면서 (경)기를 대장군좌교위로 삼았다. (경기는) 정예기병 8백을 거느리고 거연새를 나가 곧장 북(흉노)
三年, 憲復出河西, 以夔爲大將軍左校尉. 將精騎八百, 出居延塞, 直奔北單于庭, 於金微山斬閼氏•名王以下五千餘級, 單于與數騎脫亡, 盡獲其匈奴珍寶財畜, 去塞五千餘里而還.
같은 책,「두헌전(竇憲傳)」에:
이듬해, 또 우교위 경기와 사마 임상(任尙), 조박(趙博) 등을 시켜 병사를 거느리고 금미산에서 북(흉노) 됫놈을 쳐서 크게 깨부수고 수많은 무리를 꺽어 붙잡았다. 북(흉노) 선우는 달아나서 어디 있는지 몰랐다.
明年, 復遣右校尉耿夔•司馬任尙•趙博等將兵擊北虜於金微山, 大破之, 克獲甚衆. 北單于逃走, 不知所在.
또한 같은 책「남흉노전」에:
(영원) 3년, 북(흉노) 선우는 거듭 우교위 경기에게 얻어터져 달아나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三年, 北單于復爲右校尉耿夔所破, 逃亡不知所在.
뒤쪽 4개의 기록에서 한가지는 본기(本紀)에서 나왔고, 또 한가지는 흉노본전(匈奴本傳)에서 나왔으며, 두가지는 당사자인 경기(耿夔)와 두헌(竇憲)의 전기(傳記)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모두 북선우(북흉노 선우)가 “오손으로 달아났다 [遁走烏孫]”는 사건은 실려있지 않거니와 단지 북선우가 “몇몇 기병과 함께 탈출했다고[與數騎脫亡]”했을 따름이며 심지어 “달아난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逃亡不知所在]” 했다. “오손으로 달아났다 [遁走烏孫]” 운운한 곳은 한낮 이 전쟁을 배경으로서 서술한「원안전(袁安傳)」과「남흉노전(南匈奴傳)」말미의 다음과 같은 논찬(論贊) 뿐이다.:
(북흉노) 선우는 무서워 벌벌 떨며 숨죽인채 휄트를 뒤집어쓰고 오손의 땅으로 내빼 달아났고, 막북(漠北)은 텅빈 땅이 되었다.
單于震懾屛氣, 蒙氈遁走於烏孫之地, 而漠北地空.
이렇다보니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대놓고 말한다면, “오손으로 내빼 달아났다 [遁走烏孫]”는 말은 뒷날 사람들이 “금미산에서 북(흉노) 됫놈을 깨부셨다 [擊北虜於金微山]”는 말을 토대로 짐작한 생각일 가능성을 빼놓을 순 없거니와 당시의 원시기록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른다 [逃亡不知所在]”는 말 뿐일 것이다.『자치통감·漢紀』의 엮은이는 이 전쟁을 서술할 때「원안전(袁安傳)」을 취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두헌(竇憲)은 북흉노가 쇠약해지자 마침내 이들을 없애려고 했다. (두헌은) 2월에 좌교위 경기와 사마 임상을 시켜 거연새를 나갔다. (이들은) 북(흉노) 선우를 금미산에서 에워싸고 놈들을 크게 쳐부수고 그 어머니 연지와 아무개 왕 아래로 5천 여 모가지를 베었다. 북(흉노) 선우는 달아나서 어디있는지 몰랐다. (경기 등은) 새(塞)를 5천 여 리나 나갔다가 되돌아왔는데, 漢나라 군대가 일찍이 이른적이 없는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온것이다).
竇憲以北匈奴微弱, 欲遂滅之, 二月, 遣左校尉耿夔•司馬任尙出居延塞, 圍北單于於金微山, 大破之, 獲其母閼氏•名王以下五千餘級, 北單于逃走, 不知所在. 出塞五千餘里而還, 自漢出師所未嘗至也.
당연하지만, 한가지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할 수 있다. 즉「원안전(袁安傳)」에 실린 것은 뒤에 얻은 정보로서, 일시적인 전황보고에 불과한 그 나머지 4 기사에선 보류되었던 사건 일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북)흉노는 서기 91년에 이리강으로 이주했다고 볼 수 없다.
첫째,「경기전(耿夔傳)」에 분명하게 적혀있지만, 북선우는 겨우 몇몇 기병과 함께 탈출했을 뿐이지 북선우가 오손의 땅에다 왕정(王庭)을 설치했다든지 아니면 부중(部衆)을 끼고 있다든지는 자료에 나타나있지 않다. 이리강 유역은 기껏해야 북선우 개인 및 그를 수행한 소수의 임시 망명 소재지에 지나지않을 것이므로 북흉노 부중(部衆)이 이주한 땅으로 볼 수 없다.
둘째, 영원(永元) 이래 2세기 중엽까지, 북흉노는 끊임없이 동한(東漢)과 서역의 지배권을 두고 쟁탈전을 되풀이했었는데, 한차례 서역북도(西域北道)를 통제했었으되 그 근거지는 이리[伊犂]에 있지않았고 지금의 하밀[哈密] 남북에 이르는 준가르[凖噶爾]분지 일대였다.22『후한서·서역전』에 이렇게 실려있다.:
[양가(陽嘉)] 4년(AD 134) 봄, 북흉노 호연왕(呼衍王)은 병사를 이끌고 (차사)후부에 쳐들어 왔다. (순)제는 차사(車師) 여섯 나라가 북(흉노) 됫놈과 이웃하고 있다하여 서역을 지켜줄 울타리로 여겼다. 그래서 돈황태수를 시켜 여러 나라의 병사를 일으켜 옥문관후(玉門關候)와 이오사마(伊吾司馬)와 함께 모두 6천3백 기병으로써 저들 (차사후부를) 돕게했다. 그리하여 북(흉노) 됫놈을 늑산(勒山)에서 덮쳤으나 漢나라 군대는 이롭지 못했었다. 가을, 호연왕이 또 2천 사람을 보내 (차사)후부를 쳐 깨부셨다.
[陽嘉]四年春, 北匈奴呼衍王率兵侵後部, 帝以車師六國接近北虜, 爲西域蔽扞, 乃令敦煌太守發諸國兵, 及玉門關候•伊吾司馬, 合六千三百騎救之, 掩擊北虜於勒山, 漢軍不利. 秋, 呼衍王復將二千人攻後部, 破之.
여기서 말하는 “차사 여섯 나라 [車師六國]”란, 같은 전기에 따르면, “(차사)전•후부 및 동차미(東且彌), 비륙(卑陸), 포류(蒲類), 그리고 이지(移支) [前後部及東且彌, 卑陸, 蒲類, 移支]”를 가리킨다. 순제(順帝)가 “서역을 지킬 울타리[西域蔽扞]”라고 부른 것으로 봐서 북흉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같은 전기에 또한 “양가 3년 여름, 차사후부사마가 가특노(加特奴) 등 1천5백 사람을 이끌고 창오륙곡(閶吾陸谷)에서 북흉노를 덮쳐 그 유르트[廬落]를 무너뜨리고, 몇 백 모가지를 베었으며, 선우의 어머니와 아주머니를 비롯한 아줌마 몇 백 사람을 사로잡았고, 소와 양 10 여 만 마리, 수레 1천 여 대를 빼앗았으며, 병기와 일상물품[什物]도 무척 많이 빼앗았다. [陽嘉三年夏, 車師後部司馬率加特奴等千五百人, 掩擊北匈奴於閶吾陸谷, 壞其廬落, 斬數百級, 獲單于母•季母及婦女數百人, 牛羊十餘萬頭, 車千餘兩, 兵器什物甚衆]”고 한 것도 마찬가지 문제를 이야기해준다.
또 마땅히 짚어둘 것은, 영원(永元) 이후 동한과 서역을 두고 다투었던 북흉노 사람은 주로 호연왕이 이끌었을지언정 당시 북흉노 사람에겐 변함없이 자기의 선우가 반드시 있었다고 봐야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호연왕이 이끈 흉노사람은 북선우가 달아난 뒤에 남아있던 이오(伊吾) 서북쪽 부중(部衆)으로 볼 수 없다. 『후한서·남흉노전』에 이렇게 적혀있다.:
(영원) 16년(AD 104) 북(흉노) 선우는 사자를 보내 궁궐에 찾아와 공물을 바치고 화친하자면서 호한야(선우)의 옛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화제(和帝)는 이들이 옛날의 예(禮)를 갖추지 못했다하여 이를 들어주지않았고, 푸짐하게 상을 내려주었으되 그 사자에게 확답하지 않았다. 원흥(元興) 원년(AD 105)에 거듭 사자를 보내 돈황에 찾아와 공물을 바치면서 나라가 가난하여 예를 갖추지 못했었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아들을 시자(侍子, 볼모)로 들여보낼 수 있도록 (아들을 데려갈) 대사(大使)를 보내달라고 했다. 이 무렵 등태후(鄧太后)가 조정을 맡아보고 있었기에 또 그 사자에게 확답하지 못하고 단지 (상을) 내려 줄 따름이었다.
[永元]十六年, 北單于遣使詣闕貢獻, 願和親, 脩呼韓邪故約, 帝以其舊禮不備, 未許之, 而厚加賞賜, 不答其使. 元興元年, 重遣使詣敦煌貢獻, 辭以國貧未能備禮, 願請大使, 當遣子入侍. 時鄧太后臨朝, 亦不答其使, 但加賜而已.
또한 같은 책「반용전(班勇傳)」에:
원초(元初) 6년(AD 119), 돈황태수 조종(曹宗)이 장사 색반(索班)을 시켜 1천 여 사람을 데리고 이오(伊吾)에 주둔케 하니, 차사전왕 및 선선왕이 다 찾아와 (색)반에게 굴복했다. 몇 달 지나서, 북(흉노) 선우가 차사후부와 함께 마침내 (색)반을 쳐 꼬꾸라트리고, 나아가 (차사)전왕을 물리쳐 (서역)북도를 빼앗았다. …… (영건 6년) 겨울, (반)용은 여러 나라의 병사를 일으켜 흉노 호연왕을 무찌르니 호연왕은 달아났고 그 무리 2만 여 사람은 다 항복했다. …… 북(흉노) 선우는 몸소 1만 여 기병을 거느리고 (차사)후부에 들어와 금차곡(金且谷)까지 이르니, (반)용은 가사마 조준(曹俊)을 시켜 서둘러 (차사전부를) 돕게 하였다. 물러가는 선우를 뒤쫓아 그 귀족 골도후(骨都侯)를 베었다. 이로부터 호연왕은 마침내 고오하(枯梧河) 기슭로 옮겨가서 살았다. ……
元初六年, 敦煌太守曹宗遣長史索班將千餘人屯伊吾, 車師前王及鄯善王皆來降班. 後數月, 北單于與車師後部遂共攻沒班, 進擊走前王, 略有北道.…… [永建六年] 冬, 勇發諸國兵擊匈奴呼衍王, 呼衍王亡走, 其衆二萬餘人皆降. ……北單于自將萬餘騎入後部, 至金且谷, 勇使假司馬曹俊馳救之. 單于引去, 後追斬其貴人骨都侯, 於是呼衍王遂徙居枯梧河上. ……
이로부터 알 수 있지만, 북선우의 활동범위는 상술한 호연왕의 활동범위와 일치해서 동일한 정권에 속함을 너끈하게 볼 수 있다. 그렇지않다면 영원(永元) 16년과 원흥(元興) 원년에 공물을 바치러 온 북선우는 마땅히 영원 6년(94년)에 (후한을) 배반하여 새(塞)를 나간 남흉노 오건일축왕(奧鞬日逐王) 봉후(逢侯)이어야 할 것이지만,23 이 설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후한서·남흉노전』에는 봉후를 두고 시종일관 (칭호가 아니라) 그 이름을 대놓고 부르고 있거니와, 심지어 “(원초) 4년(AD 117), 봉후는 선비(鮮卑)한테 얻어터져 부중(部衆)은 뿔뿔이 흩어져 모두 북녁 됫놈에게 안겼다 [四年. 逢侯爲鮮卑所破, 部衆分散, 皆歸北虜]”고 실려있다. 여기서 “북녁 됫놈 [北虜]”이란 북흉노를 가리키므로 이 글귀는 봉후의 부중(部衆)과 북흉노를 뭉퉁그려 이야기하고 있지 않거니와 봉후를 결코 “북선우(北單于)”라고 부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24 더군다나 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북선우야말로 서기 91년에 금미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탈출한 북선우일 가능성을 완전히 내칠 순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가 다시 공물을 바치러 찾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후한(後漢) 조정은 그를 두고, 같은 책「원안전(袁安傳)」에 적혀있듯이, 다시 “오손으로 달아났다 [遁走烏孫]”는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앞에서 북선우 부중(部衆)의 91년 이후 이리(伊犂) 서천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다고 했다. 이후 북선우가 이오(伊吾) 서북부터 준가르분지까지 이르는 일대에 자리잡고 활약했다는 정확한 근거 또한 없다. 심지어 금미산에서 탈출한 북선우 본인이 동쪽으로 되돌아왔었을 가능성 또한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소위 흉노 서천 제1지점을 이리(伊犂)지역이라고 보는 것은 성립하기 힘들것이다.
2. 동족설은 흉노사람이 서천한 제2지점은 강거(康居)의 땅, 즉 키르키스[吉爾吉斯]초원이라고 제안하였다. 주요 근거는 아래와 같은『위서·서역전』의 기사다.:
열반국(悅般國)이 오손(烏孫) 서북쪽에 자리하는데 대(代, 북위의 수도)부터 1만9백30 리 떨어져있다. 그 선조는 흉노 북선우(北單于)의 부락이다. (후)한 거기장군 두헌(竇憲)에게 내쫓긴 북선우는 금미산을 지나 서쪽 강거(康康)로 달아났었지만, 그 지쳐 약해져서 떠날 수 없던 자들은 쿠차[龜兹] 북쪽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땅 너비는 방 몇 천 리이고, 무리는 20 여 만은 될 것이다. 량주(涼州) 사람은 이들을 두고 선우(單于)가 왕노릇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悅般國, 在烏孫西北, 去代一萬九百三十里. 其先, 匈奴北單于之部落也. 爲漢車騎將軍竇憲所逐, 北單于度金微山, 西走康居, 其羸弱不能去者住龜兹北. 地方數千里, 衆可二十餘萬. 涼州人猶謂之單于王.
지금 검토한다.: 북위(北魏) 사람이 열반(悅般)을 알게 된 것은 동완(董琬)과 고명(高明)이 서역사자[西使]로 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들은 북위와 몹시 살갑게 왕래하며 거듭 조정에 방물을 바쳤거니와 심지어 북위와 함께 유연(柔然)에 대한 협공을 시도하였다.25 이런 까닭에, 위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마땅히 사실로서 믿을 수 있다. 즉, 열반의 선조는 북흉노에 예속된 부락의 하나였고, 그 사람은 북흉노 부중의 어떤 이주 과정 중에 지쳐 약해져서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런 낙오로부터 북선우가 “서쪽 강거로 달아났다 [西走康居]”는 사건은 알 수가 없다. 열반 사람을 두고 서기 91년 북선우의 금미산 패배 뒤에 지쳐 낙오했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북위 사람은 열반 사람이 제공한 정보를 검토하여 이들이 쿠차 북쪽에 출현한 시기를 산출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전의 역사를 검토해보면, 서기 91년에 금미산에서 패배한 북선우는 일시적으로 “오손에 달아났을 [遁走烏孫]” 뿐이거니와 “서쪽 강거로 달아나지도[西走康居]” 않았었다. 소위 “서쪽 강거로 달아났다 [西走康居]” 운운한 까닭은 단지 북위 사람측에서, 91년 금미산에서 패배한 북선우와 서한 원제(元帝)때 강거로 망명한 질지선우(郅支單于)를 혼동하여 한가지로 이야기한것에 지나지않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26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위서·서역전』의 기사를 가지고 흉노 서천 제2지점이 강거라는 근거로 삼을 수 없는 노릇이다. 당연하지만, 객관적으로 또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 즉, 쿠차 북쪽에서 지쳐 낙오한 것은 91년에 금미산에서 패배한 북선우가 아니라 사료에 실리지않은 또 다른 북선우 일 수도 있겠다.27 그렇다해도, 사료에 빠진 이 북선우가 열반 사람과 발걸음을 함께 했는지는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이들이 “서쪽 강거로 달아났다[西走康居]”함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거니와, 심지어 “금미산을 넘어갔다 [度金微山]”함 또한 북위 사람이 이전 역사를 두고 꽤 모호하고 혼란스런 이해를 하여 생각해 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위에 인용한『위서·서역전』의 열반 관련 기사에 많이 드러나는 바는, 일찍이 아무개 북선우 한사람이 부중을 이끌고 가는 어떤 옮겨가는 과정 중에 지쳐 낙오한 일부가 있었고, 이 지쳐 쇠약해진 일부는 다름아닌 열반 사람으로서 뒷날 쿠차 북쪽에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작은 이와같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책을 과신하는 것은 차라리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 동족론자는『위서·서역전』기록 자체의 모순을 두고 깊이 연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것을 바탕으로 한걸음 나가서 북흉노가 “서쪽 강거로 달아난[西走康居]” 시기와 지점을 고증하기까지 했다. 동족설의 논거는 이러하다: 북흉노는 안제(安帝) 연광(延光) 연간에 이미 그 세력을 흑해(黑海) 북쪽까지 뻗어있었지만 파미르고원[葱嶺] 동쪽 너머 지역은 내버려 두었다. 강거(康居)로 이주를 시작한 때는 환제(桓帝) 연희(延熹) 초(AD 158 전후)인데, 처음에는 기껏해야 강거 북부 즉 키르키스초원 북부에 이르렀을 따름이지만 결국 진(晉) 초(280년)에 강거 본토, 즉 키르키스초원 남부를 점령했었다. 이는『위서·서역전』에 실린 북선우의 “서쪽 강거 패주[西走康居]” 관련기록으로 뒷받침해 볼 수 있다.
(1)『후한서·서역전』에 따르면, 연관(延光) 2년(AD 123)에 돈황태수 장당(張璫)이 글을 올려 세가지 계책을 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흉노) 됫놈 호연왕이 늘상 포류(蒲類)와 진해(秦海) 사이를 돌아다니며 서역을 제맘대로 통제하여 함께 쳐들어 오더이다. [北虜呼衍王常展轉蒲類•秦海之閒, 專制西域, 共爲寇鈔.]” 이현(李賢)이 주를 달았다. “대진국(大秦國)은 서해(西海) 서쪽에 있기 때문에 진해(秦海)라고 이름한다. [大秦國在西海西, 故曰秦海也]”. 동족론자는 그래서 이를 근거로 연광 연간에 북흉노 세력은 이미 흑해 북쪽까지 뻗어있었으며, 강거를 바로 이때부터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지금 검토한다.: 정말로 이현의 주석과 같다면, “진해(秦海)”는 바로 “서해(西海)”일 것이고, 이 때문에 대진국(大秦國)이란 이름이 붙었을 것이며, (진해란) 마땅히 지중해를 가르켜야 할 것이다.28 이른바 “포류와 진해 사이를 돌아다녔다 [展轉蒲類•秦海之閒]”함은 정작 사실일 리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호연왕은 바르콜(Barkol, 巴里坤湖, = 蒲類海)부터 지중해까지 이르는 넓디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을 리가 없다. 장당(張璫)의 이런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서역의 범위를 묘사한 것에 지나지않으며(이 범위는『후한서·서역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범위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서역에서 흉노에 의한 피해가 드셌다고 보았을 따름이다.29 이와 비슷한 언급은『한서·陳湯傳』에도 보이는데 참고할 만하다.:
서역은 본디 흉노에 딸렸었다. 이제 질지선우(郅支單于)의 쩌렁쩌렁한 이름은 아득히 멀리까지 들린다. 오손(烏孫)과 대완(大宛)을 쳐짓밟고 늘상 강거(康居)와 꿍꿍이를 꾸며 저들 (서역을) 굴복시키고 싶어한다. 이 두 나라(오손과 대완)를 얻은 것처럼, 북쪽으로 이열(伊列, = 이리)을 깨고, 서쪽으로 안식(安息, 파르티아)을 차지했으며, 남쪽으로 월지(月氏, 쿠샨)와 산리오익(山離烏弋, Alexandria Prophthasia)을 물리치니, 몇 년 사이에 성곽제국(서역제국)은 아슬아슬하게 되었다.
西域本屬匈奴, 今郅支單于威名遠聞, 侵陵烏孫•大宛, 常爲康居畵計, 欲降服之, 如得此二國, 北擊伊列, 西取安息, 南排月氏•山離烏弋, 數年之間, 城郭諸國危矣.
이로부터 알 수 있지만, 연광 연간에 흉노가 이미 그 세력을 흑해 북쪽까지 뻗었다고 여길 수 없다.
(2) 영수(永壽, 155~158년) 이후, 중국측 사료에선 북흉노의 활동에 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동족론자는 이를 두고 북흉노가 파미르[葱嶺] 동쪽 너머 지역을 내팽개친 것인데, 그 시기는 마땅히 연희(延熹) 초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 까닭은 단석귀(檀石槐) 선비(鮮卑)가 서쪽으로 발전해서 영토를 오손과 서로 접하면서 흉노의 옛땅을 완전히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검토한다:『후한서·선비전』에:
단석괴(檀石槐)는 탄한산(彈汗山) 철구수(歠仇水) 기슭에 터전[庭]을 세웠는데, 고류(高柳)부터 북쪽으로 3백 여 리 떨어진 곳이다. 병마(兵馬)가 몹시 짱짱하고 동•서부 대인(大人)도 다 귀속하였다. 그래서 남쪽으론 (중국의) 가장자리를 쑤셔대고, 북쪽으론 정령(丁零)을 막았으며, 동쪽으론 부여(夫餘)를 몰아내고, 서쪽으론 오손(烏孫)을 쳐부수어, 흉노의 옛땅을 다 움켜쥐었다. 동서로 1만 4천 리요 남북으로 7 천 여리로서, 물줄기와 소금연못을 다 아우른 강토[山川]였다. …… 이윽고 그 땅을 세 부(部)로 나누었다. 우북평(右北平)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까지로서, 부여와 예맥(穢貊)과 맞붙어 있는 20 여 읍(邑)을 동부로 삼았다. 우북평부터 서쪽으로 상곡(上谷)까지로서, 10 여 읍을 중부로 삼았다. 상곡부터 서쪽으로 돈황(敦煌)까지로서, 오손(烏孫)과 (맞붙어 있는) 20 여 읍을 서부로 삼았다. 나름대로 대인(大人)을 두어 이곳들의 주인으로서 다스리게 했으되, 다 단속괴에게 딸려있었다.
檀石槐乃立庭於彈汗山歠仇水上, 去高柳北三百餘里, 兵馬甚盛, 東西部大人皆歸焉. 因南抄緣邊, 北拒丁零, 東卻夫餘, 西擊烏孫, 盡據匈奴故地, 東西萬四千餘里, 南北七千餘里, 網羅山川水澤鹽池. ……乃自分其地爲三部:從右北平以東至遼東, 接夫餘•穢貊二十餘邑爲東部,從右北平以西至上谷十餘邑爲中部,從上谷以西至敦煌, 烏孫二十餘邑爲西部, 各置大人主領之, 皆屬檀石槐.
여기서 “다 차지한 흉노 옛땅 [盡據匈奴故地]”이란 마땅히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선우(冒頓單于)가 월지(月氏)를 물리친 뒤에 점령한 첫번째 영토를 가리킨다. “상곡부터 서쪽으로 돈황까지, 오손 20 여 읍을 서부로 삼았다 [從上谷以西至敦煌, 烏孫二十餘邑爲西部]”는 글귀에서, “부여예맥과 맞붙은 [接夫餘•穢貊]” 운운한 앞글귀와는 달리, “오손(烏孫)” 앞에 “맞붙었다[接]”는 글자가 빠져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삼국지·위서·선비전』에서 배구의 주석에 인용된 왕침(王沈)의『위서(魏書)』에는 이 대목을 “상곡부터 서쪽으로 돈황까지로서 서쪽으로 오손과 맞붙어있는 곳이 서부인데 20 여 읍이다 [從上谷以西至燉煌•西接烏孫爲西部, 二十餘邑]”이라고 했던 것이다. 단석괴 선비의 서부(西部)는 돈황을 넘어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거니와 당시 동쪽을 향해 뻗은 그 세력은 돈황 서쪽 너머에 뿌리내린 오손과 서로 맞붙어 있었다.30 대놓고 말한다면, 단석괴 선비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북흉노가 파미르[葱嶺] 동쪽 너머 지역을 내팽개치고 서천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없음을 드러낸다. 영수(永壽) 이후에 북흉노의 행방이 분명치 않은 것은 당연히 서천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객관적으로 볼 때 한가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거니와 더욱이 아무런 증거가 없다. 즉, 북위 사람이 열반 사람을 두고 지쳐 남아있게 된 시기가 영수(永壽) 이후인 것을 알았다고 치더라도, 이전 역사가 실려있지 않은채로, 어떻게 또한 지쳐 남아있었다는 어떤 북선우의 행적을 알 수 있단 말인가.
(3) 동족설은 또한『위략·西戎傳』에서 차사후부(車師後部)가 “서북쪽의 오손과 강거에 넘어간 뒤로 본디 나라(차사후부)를 두고 (魏나라는 벼슬을) 보태거나 깍아내리지 않았다 [轉西北則烏孫•康居, 本國無增損也]”는 기사와 “(흉노) 북정령(北丁令)은 오손(烏孫) 서쪽에 자리한다 [(匈奴)北丁令在烏孫西]”는 기사를 인용하여 당시 (서천한) (북)흉노는 정령, 오손, 그리고 강거 세 나라와 상대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했다. 또한『위략·서융전』이 근거한 자료는 조위(曹魏) 경원(景元) 연간(260년 좌우)의 실제 지식이고, 때문에 3세기 60년대까지 북흉노는 미처 강거 본토까지 이르지 못했고 기껏해야 그 북방 즉 키르키스 초원 북부에 있었는데 바로 서한때 질지선우가 한때 머물면서 유목하던 땅(堅昆의 땅)이라고 했다. 지금 검토한다:『위략·서융전』의 관련 원문은 아래와 같다.:
호득국(呼得國)은 총령(葱嶺) 북쪽, 오손(烏孫) 서북, 강거(康居) 동북에 자리하고, …… 견곤국(堅昆國)은 강거 서북에 자리하며, …… 정령국(丁令國)은 강거 북에 자리한다. …… 이 세 나라에서 견곤은 한가운데에 있는데 (동쪽은) 흉노의
呼得國在葱嶺北, 烏孫西北, 康居東北, ……堅昆國在康居西北, ……丁令國在康居北, ……此上三國, 堅昆中央,俱[東]去匈奴單于庭安習水七千里, 南去車師六國五千里, 西南去康居界三千里, 西去康居王治八千里. 或以爲此丁令卽匈奴北丁令也, 而北丁令在烏孫西, 似其種別也. 有匈奴北有渾窳國, 有屈射國, 有丁令國, 有隔昆國, 有新梨國, 明北海之南自復有丁令, 非此烏孫之西丁令也.
여기서 말하는 흉노는 확실히 몽골고원에 자리하고 있다. 첫째,
동족설은 또한 프톨레미[托勒密]의『지리지』에 나오는 Grynaei (VI, 13)과 Chuni (III, 5)를 근거로, 북흉노가 123년 이후에 흑해 이북까지 확장했으며, 158년 이후에 키리키스 초원 북부로 이주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고 했다. 지금 검토한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Grynaei는 동족론자가 말한 것처럼 발하슈호 서쪽 너머에 위치하지 않거니와 이들을 흉노로 보기도 대단히 힘들다. 게다가, 과연 Chuni 의 소재지가 동족론자가 말한 것처럼 볼가강[伏爾加河, The Volga]과 돈강[頓河, The Don] 사이를 가리킨다면, 프톨레미가 묘사한 시대에 이미 훈족(Huns)에 대한 많은 설명이 유럽에 출현해서, 적어도 동족론자가 논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어 훈족(Huns)이 흉노임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지금껏 존재할 것이다.
(4)『진서·서융전』에 따르면, “강거국(康居國)은 대완(大宛)에서 서북으로 2 천리쯤 되는 곳에 있으며, 속익(粟弋)과 이열(伊列) 곁에 맞붙어있다. 그 왕은
강거국은 대완에서 서북으로 2 천리쯤 되는 곳에 있으며, 속익과 이열 곁에 맞붙어있다. 태시 중에 그 왕 나비가 사자를 보내 글을 바치면서 뛰어난 말도 함께 바쳤다.
康居國在大宛西北可二千里, 與粟弋•伊列鄰接. 泰始中, 其王那鼻遣使上封事, 竝獻善馬.
(속익국은 강거에 속하는데), 그 왕은
[粟弋國, 屬康居] 其王居蘇薤城. 風俗及人貌•衣服略同大宛. 地和暖, 饒桐柳蒲陶, 多牛羊, 出好馬.
두 전기가 서로 뒤섞이게 된 까닭은 분명히『진서·서융전』의 엮자가 엉뚱하게 바뀐 자료를 근거로 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진나라 무렵의 속익(粟弋)은 오래전부터 강거에 딸려있었던 탓에 속익의 사정을 강거전 뒤에 덧붙였든지 아니면 강거전 속에 끼워넣든지 해서 언급했고, 그래서 뒷날 둘 사이를 뚜렷하게 구별하기 어려워서 그리되었을 가능성 또한 있다.33 어찌 되었든 간에,『진서·서융전』의 위 인용기사 중에는, 어떻게 아무리 보더라도, 북흉노가 강거 본토로 서천했다는 알림은 나오지 않는다.
3. 동족론자가 짚어두기를, 흉노사람이 서천한 제3지점은 엄채(奄蔡) 즉 알란[阿蘭, Alan]의 땅(흑해 북안)인데, 그 근거는『위서·서역전』에 실린 속특(粟特) 관련기록이다.:
속특국(粟特國)은 총령(葱嶺) 서쪽에 자리하는데 옛날의 엄채(奄蔡)로서 온나사(溫那沙)라고도 부른다. 대택(大澤)에서 사는데 강거(康居) 서북쪽에 있으며, 대(代)로부터 1만6천리 떨어져있다. 일찍이 흉노가 그 왕을 그 나라에서 죽인뒤로 왕 홀예(忽倪)에 이르기까지 벌서 3대가 지났다. 그 나라의 장삿꾼은 앞서 량(涼)나라 땅에 많이 찾아와 사고팔기를 했었는데 (북위가) 고장(姑臧, 북량의 수도)을 꺽으면서 모조리 사로잡히고 말았다. 고종(高宗) 초, 속득국왕이 사자를 보내 (대가를 줄 터이니) 풀어달라고 하길래 들어주라고 했다. 이 뒤로는 사자를 보내 조공하지 않았다.
粟特國, 在葱嶺之西, 古之奄蔡, 一名溫那沙. 居於大澤, 在康居西北, 去代一萬六千里. 先是, 匈奴殺其王而有其國, 至王忽倪已三世矣. 其國商人先多詣涼土販貨, 及克姑臧, 悉見虜. 高宗初, 粟特王遣使請贖之, 詔聽矣. 自後無使朝獻.
지금 검토한다.: 이 기사는 99자에 지나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논쟁이 되풀이 되고 있다. 나 또한 일찍이 에프탈[嚈噠]역사를 연구하면서 이 기사를 두고 낱낱이 검토한 바 있다.34 여기서는 흉노와 훈족(Huns)의 동족여부 토론에 시각을 맞춰 대강의 줄거리를 한바탕 돌아보며 살펴보겠다.
이 기사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다르지만 아래와 같이 3가지로 묶을 수 있다.:
첫째, “粟特”이란 이름은 크리미아반도 Sughdak의 음역이다.「속특전」은 전부 Sughdak에 관련된 기록이다. 여기서 전하는 “흉노”의 사정은 훈족(Huns)의 엄채(奄蔡) 즉 알란족(Alans) 정복을 가리키는 것이다.35
둘째, “粟特”이란 이름은 중앙아시아 Soghd(Sogdiana)의 음역이다. 그렇지만「속특전」에서 말하는 “흉노”의 사정은 훈족(Huns)의 엄채(奄蔡) 즉 알란족(Alans) 정복을 가리키고, 그 나머지 부분은 소그디아나(Sogdiana)에 관련된 기록이다.36
셋째, “粟特”이란 이름은 중앙아시아 Soghd(Sogdiana)의 음역이다.「속특전」은 기본적으로 소그디아나에 관련된 기사이고, 단지 명칭과 지리적 위치에서 엄채(奄蔡) 즉 알란족과 뒤섞인 곳이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전하는 “흉노”의 사정은 에피탈[嚈噠] 혹은 열반(悅般) 혹은 Chionitae의 소그디아나 정복을 가리킨다.37
꽤 분명하지만, 앞의 두가지는 동족론자의 입장이고, 세번째는 동족론자의 입장이 아니다.
나는 이 기사의 연구를 통해 아래와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粟特”이란 이름은 중앙아시아의 Soghd(Sogdiana)의 음역이고,「속특전」또한 소그디아나에 관련된 기사다. 이 가운데 “흉노가 그 왕을 그 나라에서 죽였다[匈奴殺其王而有其國]”는 말은 에피탈[嚈噠]의 소그디아나 정복을 가리킨다. 여기서 엄채(奄蔡)에 관련된 기사가 섞여들어간 주요 이유는, 북위 사람이 “흉노” 즉 에피탈의 소그디아나 정복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또한 훈족(Huns)의 엄채(奄蔡) 즉 알란족(Alans) 정복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건은 시기적으로 가깝거니와 “匈奴”와 Huns의 명칭 또한 서로 같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에 잘못이 없다면, 자연스레 동족론자는 이 기록을 이용하여 흉노-훈족 동족론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덧붙여 더 뒤로 크게 한걸음 물러나게 만들 것이 있다. 위 기사에서 “粟特”을 Sogdiana로 보는 것을 인정치 않고 크리미아반도의 Sughdak로 보고, 거기에 나오는 “흉노” 또한 에프탈[嚈噠] 혹은 기타 부족이 아니라 알란족(Alans)을 정복한 훈족(Huns)으로 보더라도, 중국측 사료에서 훈족이 알란족을 정복했다는 증거를 찾아낼 순 없다. 또한 훈족이 흉노라는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匈奴와 Huns, 둘의 명칭에 대한 발음이 서로 같다는 이유만으로 북위 사람이 “匈奴”라는 이름으로써 전해 들은 Huns를 표시했다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어색하다. 즉, (이름만 듣고서) 당시 사람의 심중에 (또한 오늘날 동족론자도 마찬가지지만) 이 훈족(Huns)이 서천한 북흉노 사람임을 완전히 확인했다는 증거로 삼기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 누군들 어찌 겨우 소릿값을 빙자해서 터무니없이 아느체 하지 못하겠는가? 더군다나 정작 위진남북조 이후에 “흉노”라는 이름은 이미 북방유목민족의 범칭으로 쓰이는 경우가 셀수없이 많았다.『양서·芮芮傳』에 나오는 “위•진 때 흉노는 몇 백천 부로 나뉘었는데 나름대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魏晉世, 匈奴分爲數百千部, 各有名號]”는 말로써 뒷받침 할 수 있다.『위서·蠕蠕傳』과 『양서書·諸夷傳』은 유연(柔然)을 두고 각각 “흉노의 자손[匈奴之裔]”, “흉노의 별종[匈奴別種]”이라고 했다.『위서·高車傳』은 고차(高車)를 두고 “흉노의 사위 [匈奴之甥]”라 했고,『주서·돌궐전』은 돌궐(突厥)을 두고 “흉노의 별종[匈奴別種]”이라 한 것 역시 증거로 삼을 만하다. 대놓고 말한다면, 알란족을 정복한 훈족(Huns)이라는 “匈奴”와 동•서한 시기의 匈奴을 두고 북위 사람이 똑 같은 이름을 써서 지칭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간추리자면, 이상의 토론으로부터, 비록 객관적으로 볼 때 흉노와 훈족은 동족이 아니라고 할 순 없을지언정, 동족론자가 근거로서 인용한 중국측 사료는 흉노-훈족 동족론을 성립시키는데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함을 증명하기엔 너끈하다. 동족론자는 북흉노가 유럽으로 서천한 궤적을 중국측 사료로부터 지금껏 찾아내는데 미처 성공하지 못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3
동족론자는 중국측 사료로부터 흉노의 서천 궤적을 찾아내어 흉노-훈족 동족론의 문헌적 기초를 닦았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흉노의 서천 여정을 추정했는데, 특히 훈족의 주요 유럽 활동지점에서 발견된 한나라 왕조와 흉노의 유물은 고고학적 각도로부터 그 기초를 한층 더 강화했었다.38 그들이 마련한 관련증거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항목이다.:
1. 옥구검(玉具劍, 옥이 박힌 검). 이것은 漢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퍽 유행했었다.『한서·흉노전』에 따르면 감로(甘露) 3년에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내조하자 선제(宣帝)는 “옥구검 [玉具劍]”을 하사하였다.『후한서·남흉노전』에도 화제(和帝) 영원(永元) 4년에 북선우 어제건(於除鞬)에게 “옥검 4자루 [玉劍四具]”을 내려주었고, 순제(順帝) 한안(漢安) 2년에도
2. 한나라 조정이 흉노에게 보내준 예물에는 옥구검 말고도 또한 활•화살류[弓箭類]가 있었다.『한서·흉노전』에 따르면, 선제(宣帝)는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활 1점과 화살 4발 [弓一張, 箭四發]”을 주었다. 이로부터 서한 말까지 쭉, 선우가 내조할 때마다 활과 화살을 몇 점씩 주었었다.『후한서·남흉노전』에 따르면, 동한 건무(建武) 26년에 광무제(光武帝)는
3. 한나라 중기 이후의 일광경(日光鏡) 및 기타 한경(漢鏡) 그리고 모방품이 볼가강 하류를 비롯한 코카서스 여러 곳에서 골고루 발견되었다.
4. 크리미아의 케르치(Kerch) 옛무덤떼의 연대는 서기 3~4세기인데, 여기서 출토한 실크[絹布]는 누란(樓蘭)과 노인-울라[諾顔烏拉]에서 발견된 한나라 실크[絹]와 닮아있어 한나라 시대에 생산된 물품임을 알 수 있다.
5. 스키타이(Scythae)식 동복(銅鍑)과 한나라식 영향을 받아 생산한 흉노식 동복이 오르도스[鄂爾多斯] 등지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동일한 양식의 동복이 또한 알타이산[阿爾泰山] 지역, 볼가강 및 카마강[Kama] 하류지역, 남러시아의 돈강[頓河] 하류지역, 그리고 헝가리 등지에서 출토했다.
지금 검토한다.: 동족론자는 상술한 볼가강 하류지역, 북코카서스, 크리미아반도, 그리고 헝가리 등지에서 출토한 옥구검, 한나라식 활•화살, 한경(漢鏡), 한나라 실크, 그리고 흉노식 동복 따위는 다 서천한 흉노사람이 가지고 갔던 것이고, 이것들은 흉노와 훈족이 동족이라는 한가지 중요한 증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으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어 타당성이 빠져있다.
첫째, 훈족은 흉노가 아니다. 오직 그들이 몽골고원으로부터 이동했어야만 옥구검 따위를 지니고 유럽으로 가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둘째, 훈족이 흉노라고 치더라도, 상술한 유물이 반드시 전적으로 흉노사람이 서천할 때 지니고 갔다고는 할 수 없다. 몽골고원의 유목부족은 일찍부터 끊임없이 이동했기 때문인데, 더군다나 대체로 같은 노선을 따라 순환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훈족을 비롯한 뒷날의 아바르족(Avars) 따위는 그중에서 아주 돗보이는 큰 무리다. 바꿔말하면, 훈족외의 부락이 서쪽으로 이동할 때 옥구검 따위를 지니고 유럽에 갔을 가능성도 있다.
셋째, 유라시아초원은 자고이래 동서 경제 및 문화교류의 대동맥이어서, 민족이동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무역 따위의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동부의 물산이 서부에서 나타났다한들 티끌만큼도 이상할 것 없다.39
간추리자면, 훈족(Huns)의 무덤 속에서 나타난 옥구검 따위는 훈족이 서천할 때 가지고 갔던 것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흉노와 훈족이 동족이라는 증거로 쓰일 수는 없다. 그리고, 추정한 훈족의 서천여정에서 발견된 옥구검 따위의 물품이 반드시 훈족이 지니고 간 것이라곤 할 수 없거니와 더욱이, 흉노와 훈족이 동족이라는 증거로 볼 수도 없다.
4
흉노-훈족 동족설을 증명하자면 두 인종이 서로 같게 잇닿아 있는지 증명하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동족론자는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못하고 있다. 제1의견은 둘 모두를 몽골로이드로 보는 것이고,40 제2의견은 둘 모두를 유로포이드(Europoid)로 보되 몽골로이드(Mongoloid)의 피가 섞여들어 갔다고 한다.41 제3의견은 흉노의 지배계층은 유로포이드고 피지배계층은 몽골로이드로 보지만, 유럽으로 서천한 사람들(훈족)은 피지배계층뿐이라고 한다.42
지금 검토한다: 흉노와 훈족은 다 거대한 부족 혹은 부락연합체인데, 이와 같은 연합체의 인종구성은 의심할 바 없이 꽤 복잡하거니와 그 짜임새 또한 서로 다른 인종의 부족 혹은 부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흉노 혹은 훈족을 두고 어떤 한가지 인종으로 지칭한다는 의미는 기껏해야 그 핵심부를 지칭하는 것인데, 즉, 연합체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거나 부족 혹은 부락의 지배행위를 일으키는 어떤 한가지 인종을 뜻한다. 이와같인 본다면, 상술한 세가지 의견은 채택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따라서 동족론자의 개념을 가지고 훈족과 흉노의 동족여부를 논증한다면, 훈족이 흉노의 부족 혹은 부락과 동족에 속하는지 여부를 논증하는 것으로 바뀌고 말것이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부족 혹은 부락에 속한 인종은 틀림없이 일치하지 않을 것이므로 동족론자는 유럽으로 서천한 어떤 부족 혹은 부락을 정확하게 짚어낼 순 없을 것이다. 흉노의 핵심부가 유로포이드이든, 훈족이 몽골로이드이든 간에, 우리는 단지 인종문제를 두고 동족론자가 서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다고 여길 따름이다.
또한 우리가 여기서 흉노와 훈족의 인종을 토론하는 까닭은, 동족론을 곧추 세울것인지 아니면 뒤집을 것인지 따지기 위함이지, 동족론 혹은 비동족론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흉노와 훈족의 인종이 서로 같은지 아니면 서로 다른지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상술한 제2의견은 한동안 되돌아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동족론자에 따르면, 흉노는 본디 유로포이드인데 몽골로이드와 섞여살면서 통혼하여 점차 후자의 피가 섞여들어갔기 때문에, 훈족이 유럽에 나타난 무렵에는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띤채로 나타났다고 한다. 정작 이 말은 동족론자가 흉노와 훈족 둘 사이의 인종차이를 발견했지만 동족론를 전제로 출발했기에 이 현상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둘이 동족이라는 한가지 전제를 내던진다면 분명히 그와 같은 결론이 나올 리가 없다. 더군다나, 앞에서 적었듯이, 흉노와 훈족 둘이 동족인지 아닌지 토론하는 바는 단지 그 핵심부를 두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핵심부 또한 몸통과 가지, 으뜸과 버금이 되는 부분이 있다. 흉노가 만약 동족론자의 말대로 본디 유로포이드였지만 뒷날 몽골로이드의 피가 섞여들어 간 것이라고 치더라도, 또한 우리는, 훈족은 본디 몽골로이드였지만 뒷날 유로포이드의 피가 섞여들어간 것인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단말인가?
제1의견의 경우도 내가 보기엔 오류다. 왜냐하면, 흉노는 유로포이드일 가능성이 매우 크고, 훈족은 의심할 바없이 몽골로이드다. 아래에 나타낸 자료를 손에 쥐고 살피면서 흉노와 훈족의 인종을 따로따로 고찰하여 동족론의 의미를 두고 그 결과를 논술하겠다.
1. 흉노의 인종:
먼저, 문헌에 나타난 흉노사람의 생김새에 관한 주요기록은 아래 몇가지다.
(1) 『한서·금일제전』:“금일제(金日磾)의 자(字)는 옹숙(翁叔)이다. 본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 (금)일제는 키가 8척2촌이고 얼굴생김새가 몹시 다부졌다. [本匈奴休屠王太子也. ……日磾長八尺二寸, 容貌甚嚴.]
(2)『진서·劉元海載記』:유연(劉淵, 재위 304~310년)은 “신흥(新興) (출신) 흉노 사람인데, 묵돌(冒頓)의 후손이다 [新興匈奴人, 冒頓之後也]”,43 “몸가짐이 크고 훤칠했는데, 키는 8척4촌이고, 수염길이는 3척을 넘었으며, 가슴 한복판에 있는 빨간 잔털 세 가닥은 길이가 3척6촌이나 되었다. [姿儀魁偉, 身長八尺四寸, 鬚長三尺餘, 當心有赤毫毛三根, 長三尺六寸]”. 같은 책「劉曜載記」: (유)연의 조카인 유요(劉曜, 재위 318~328년)는 “키가 9척3촌이고, 손을 내리면 무릅을 넘어갔으며, 날때부터 하얀 눈썹이었고, 눈에 붉은 빛이 있었으며, 수염은 1백 여 가닥을 넘지 못했으되 모두 길이가 5척이나 되었다. [身長九尺三寸, 垂手過膝, 生而眉白, 目有赤光, 鬚髯不過百餘根, 皆長五尺]”. (유)요의 아들 (유)윤[胤]은, “키가 8척3촌이고, 머리카락과 몸뚱이 (길이가) 같았다 [身長八尺三寸, 髮與身齊]”. 같은 책「佛圖澄傳」에선 (유)요를 두고 “키가 크고, 얼굴빛이 희다 [長大, 白皙]”고 했다.
(3)『진서·赫連勃勃載記』는 (혁련)발발[勃勃]을 두고 “흉노 우현왕 거비(去卑)의 후손인데 유원해(劉元海, =유연)의 일족이다. …… (혁련)발발의 키는8척5촌이고, 허리둘레는 10 위(圍)이다. 말을 잘하고 슬기로운 성격이며, 몸가짐도 멋들어졌다. [匈奴右賢王去卑之後, 劉元海之族也. ……勃勃身長八尺五寸, 腰帶十圍, 性辯慧, 美風儀]”고 했다. 또『위서·陸琇傳』은 “육수(陸琇)의 어머니는 혁련씨(赫連氏)였고, 키는 7척9촌이었다 [陸琇母赫連氏, 身長七尺九寸]”고 했다.
이들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흉노사람 (귀족은) 키가 크고 얼굴빛이 희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이는 뚜렷하게 몽골로이드 생김새의 특징이 아니다.『자치통감·晉紀』에 따르면, 영화(永和) 9년(AD 353) “서역호(西域胡) 유강(劉康)이 (자신은) 유요(劉曜)의 아들이라고 둘러대며 평양(平陽)에서 무리를 모아 스스로 진왕(晉王)을 일컬었다 [西域胡劉康詐稱劉曜子, 聚衆於平陽, 自稱晉王]”. 유강이란 사람은 어쩌면 강성(康姓)의 호인(胡人)일 수도 있겠다. 이런 호(胡)가 유요의 아들을 사칭한 것은 그 생김새가 유요의 아들과 닮은 얼굴임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겠지만, 이로부터 우리는 유씨 일족의 모습이 서역호(西域胡)와 꽤 닮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신당서·回鶻傳』에 따르면, “힐알사(黠戛斯, 키르키스)는 옛날 견곤국(堅昆國)이다. 땅은 이오(伊吾)의 서, 언기(焉耆)의 북, 그리고 백산(白山)의 곁을 커버하고 있다. …… 그 종(種)은 온갖 정령(丁零)인데 흉노의 서부나라[西鄙]였다. 흉노는 한(漢)나라에서 항복한 장수인 이릉(李陵)은 우현왕으로, 위율(衛律)은 정령왕으로 봉했었다. 뒷날 질지선우(郅支單于)가 견곤을 쳐부수었고, 이때부터 동쪽으론
다음으로, 약간의 유물에 나타난 흉노사람의 예술형상을 보겠다.:
(1) 섬서성[陝西] 흥평시[興平]의 서한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무덤 가장자리에 있는 이른바 “말에 밟힌 흉노[馬踏匈奴]” 돌조각. 여기에는 흉노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얼굴부분은 평평한 편이고 광대뼈는 조금 튀어나와 있어 깊은 눈과 높은 코를 가진 것 같진 않지만 수염은 특히 무성하다.
(2) 1924~1925년, 코즐로프(P. K. Kozlov)가 이끄는 구소련의 몽골-티벳탐험대는 지금의 몽골인민공화국 셀렝가강[色楞格爾河] 언저리에 있는 노인-울라[諾顔烏拉] 옛무덤떼를 발굴•조사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무덤떼는 왕망(王莽)과 동한(東漢)시대 흉노 왕후(王侯)의 무덤에 잇닿아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 가운데 제25호 무덤에서 사람모습을 뜬 자수화가 몇 폭 출토했는데, 한 폭의 그림에 나타난 사람은 머리를 묶었으며, 얼굴생김새는 다부지고, 이마는 넓적하며, 빰은 호리호리하고, 광대뼈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턱뼈는 뒤로 들어가있고, 코는 꽤 넓적하며, 콧대는 곧게 솟았고, 콧수염은 빽빽하며, 머리를 몹시 짧게 깍았고, 안구는 까만색 실로 수를 놓았으되 동공은 남색 실으로 수를 놓았다.45
(3) 1940년에 구소련의 학자가 예니세이강[葉尼塞河] 상류지대의 하카시아[哈卡斯, Khakasiya] 자치공화국 아바칸[阿巴幹, Abakan] 남쪽 8 km 지점에서 흉노시대의 한(漢)나라식 궁전을 1채 발견했다. 거기서 발견된 청동문고리에는 문지기神인 도깨비마스크[怪面具]가 주조되어있는데 길고 고불고불한 수염을 두루고있고, 아래쪽은 아랫입술과 아래턱이 없으며, 윗잇몸 좌우에 있는 특히 길고 큰 두 이빨은 밖으로 뻗어 나와있고, 높은 매부리 코이며, 눈은 움푹 들어가있으되 전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46
(4) 1955~1957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풍서(灃西)발굴대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풍서향(灃西鄕) 객성장(客省莊)에서 옛무덤을 하나 발굴했는데 그 무덤 주인공은 흉노의 사신 혹은 그 수행원으로 짐작되고 있다. 무덤 안에서 두 점의 네모꼴 투조(透雕)청동악세서리가 발견되었다. 양 갓쪽에 나뭇가지가 빽빽한 나무가 한 그루씩 있고, 나무 밑에 나귀가 한마리씩 묶여있는데 고삐와 안장을 갖추고 있다.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은 마주엉켜 서로의 허리와 허벅지를 잡고 씨름하는 모양을 하고있다.47
이상 4개의 본보기는 “말에 밟힌 흉노[馬踏匈奴]” 한가지를 제외하곤 흉노사람의 형상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확실치 않아서 학계에 지금껏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예컨대, 두번째 본보기를 두고, 어떤이는 흉노 귀족의 형상이라고 보았고,48 또 어떤이는 그리스사람이 묘사해 그린 스키타이(Scythae) 전사(戰士)의 형상이라고 보았다.49 예를 더 든다면, 세번째 본보기를 두고, 어떤이는 흉노가 유로포이드임을 뒷받침한다고 했고,50 또 어떤이는 1세기 초까지 이르도록 남시베리아에는 유로포이드가 우세하게 점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51 반드시 흉노와 관련있다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검토한다.: 뒤쪽의 세 본보기가 반드시 흉노사람의 형상을 잘 묘사한 것이라곤 할 수 없지만, 이들 예술품의 출토 정황을 미루어보아도 정작 이 세 본보기가 흉노사람를 나타낸 형상인지도 아직 알 수 없다. 굳이 이것을 근거로 흉노는 유로포이드라고 단정짓기라도 한다면, 이상의 문헌고찰을 통해 얻은 흉노인종에 관한 견해와 모순은 없고 심지어 상호보완될 수 있다.
“말에 밟힌 흉노[馬踏匈奴]” 조각상의 경우, 거기 나타난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좇았기 때문에 흉노를 두고 몽골로이드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52 거기 나타난 유로포이드의 특징을 좇았기 때문에 흉노를 두고 유로포이드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53 지금 검토한다: 이 조각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확실히 체르토믈리크 (Chertomilyk), 니코폴(Nicopol) 등지에서 출토한 은호리병[銀壺, silver vase] 겉에 묘사된 스키타이(Scythae)사람의 형상을 방불케 하거니와,54 적어도 이를 두고 몽골로이드의 전형적인 형상이라곤 볼 수 없다. 약간 띠고있는 몽골로이드의 특징은 이어지는 글귀와 같은 한가지 사실을 나타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늦어도 서한(西漢) 초까지 흉노사람과 몽골로이드의 혼혈현상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그 전형적인 흉노사람 형상을 묘사하여 조각할 때 반드시 약간의 몽골로이드 특징을 들여놓겠다고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조각상을 만든 장인이 전체적인 효과에만 악센트를 주려고 했지 세부적인 리얼리티는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은 흉노사람의 사람뼈다.:
(1) 코즐로프(P. K. Kozlov)의 보고에 따르면 노인-울라 옛무덤의 머리뼈와 뼈대는 몽골로이드가 아니라 유로포이드라고 했지만, 인류학적 조사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발표하지 않았다.55
(2) 1926년, 구소련의 흉노역사 전문가인 베른슈탐[A.N. Bernshtam, 伯恩斯坦]은 탈라스강[Talas, 塔拉斯河] 상류지대의 켄콜(Ken-kol) 강가에서 무덤 하나를 발굴했는데, 그에 따르면 무덤의 주인공은 흉노 사람이라고 한다. 구소련의 인류학자 데베츠(G. F. Debets)는 무덤 속 4점의 머리뼈를 계측한 자료가 전적으로 유로포이드 계통을 나타낸다고 했다.56
지금 검토한다: 흉노의 인종을 판정한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의심할 바없이 그 사람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그렇다고 여긴 흉노사람 무덤에서 출토한 사람뼈는 대다수가 파손상태가 심각해서 인류학적 계측을 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들이다. 그리고, 흉노는 한 거대한 유목부족연합체이므로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되지 않았을 뿐더러, 얼마없는 몇 예의 머리뼈를 믿고 흉노사람 인종을 단정하기란 곤란하다. 더군다나 남아있는 머리뼈 또한 반드시 흉노사람에게 속한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케-콜 강변은 질지선우(郅支單于)가 한동안 머물면서 이 일대에서 유목하기도 했었지만 흉노의 옛땅은 아니다. 베른슈탐 그 스스로가, 발굴한 무덤을 두고, 흉노의 무덤인지는 보다 적극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흉노무덤이라는 노인-울라 옛무덤의 사람뼈로부터 널리 인정 받으려해도, 관련된 인류학자료가 공포되지 않은채로는, 어떠한 결론도 이끌어낼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흉노와 같이 구성이 복잡한 대부족의 인종을 사람뼈 가지고 판단하려면, 아직까진, 흉노고고학의 발전을 기다려야함은 물론이고 인류학자료가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다려야 하겠다. 바꿔말하면, 흉노인종의 귀속에 대한 지금의 연구는 기껏해야 문헌과 예술품만을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있을 따름이다.
또, 1972~1973년에 내몽고자치구 이케 아이막[伊克盟] 항깅키[杭錦旗] 도홍파랍(桃紅巴拉)에서 발굴된 전국시대 무덤은,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흉노무덤이다. 여기서 출토한 사람뼈대의 머리뼈는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인류학팀의 감정을 거쳤는데 그 결과는 이러하다: 죽은이는 남성으로서 (나이는) 35살 가량이다. 남아있는 머리뼈를 관찰해볼 때, 둥근머리꼴[圓頭型]이고, 머리뼈봉합[顱縫, cranial suture]은 간단한 편이며, 이마뼈의 결절(結節, 뼈에 두툼하게 솟은 부분)은 두드러진 편이고, 광대뼈는 크고 앞으로 튀어나왔고, 코뿌리 패임[鼻根凹, nasion(sellion depth)]은 (깊이가) 대단히 얕고, 송곳니는 약하게 박혀있고, 전비극[鼻前棘, nasospinale(anterior nasal spine)] (높이는) 낮은데, 전체적으로 얼굴부분은 평평한 편이다. 이 머리뼈는 뚜렷하게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을 이야기해준다.57 그러나, 이 무덤의 소재지가 전국시대에 이미 흉노사람의 세력범위에 있었다고 보기엔 몹시 어렵거니와, 심지어 당시에 벌써 흉노사람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 무덤의 주인공을 흉노사람이라고 긍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58 따라서, 이 머리뼈에 나타난 몽골로이드의 특징이 문헌 및 예술품 측면에서의 흉노인종 관련 견해(즉, 흉노는 유로포이드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를 너끈하게 뒤집을 만한 증거가 되리라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다.
2. 훈족(Huns)의 인종:
마르셀리누스(Ammianus Marcellinus)59 (4세기 무렵) (XXXI, 2~2)에 따르면,:
(훈족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철칼을 가지고 아이의 빰을 깊이 내려긋는데, 이는 아이가 자라나서 수염이 날 때쯤 되었을 때 칼자국이 수염을 못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수염이 없는 것이고, 때문에 볼썽사나운 것이 마치 거세한 사람(eunuch)과 같다. 이들은 튼튼하고 굳센 팔다리, 굵고 단단한 목덜미을 가지지만, 덩치는 크고 다리가 활처럼 휘어서 (누군가 이들을) 보면 두 다리를 가진 거친 짐승, 아니면, 다리(교량) 양끝을 받치는 기둥에다 도끼로 아무렇게나 찍어 모양을 만들어 놓은 볼록한 조각상을 떠올릴 것이다.
[역자 전제] At the very moment of their birth the cheeks of their infant children are deeply marked by an iron, in order that the usual vigor of their hair, instead of growing at the proper season, may be withered by the wrinkled scars; and accordingly they grow up without beards, and consequently without any beauty, like eunuchs, though they all have closely knit and strong limbs and plump necks; they are of great size, and bow-legged, so that you might fancy them two-legged beasts, or the stout figures which are hewn out in a rude manner with an axe on the posts at the end of bridges. [영문번역(1862): C. D. Yonge)
또한 요르다네스(Jordanes, 6세기)의『고트의 역사[Getica]』60 (127~128)에 따르면:
저들 (훈족의) 생김새가 워낙 무시무시한 탓에, 아마도 진짜 전쟁다운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을 상대방에게 어마어마한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저들은 적을 벌벌떨면서 달아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저들의 가무잡잡한 생김새가 무섭기 때문이다. 즉, 저들은 대가리가 아니라 무슨 모양없는 덩어리를 달고 있는 듯하거니와, 눈깔이라기 보다는 바늘구멍을 달고있다. 저들의 터프하고 사나움은 이런 거친 꼬락서니에서 훤히 드러나지만, 저들은 스스로의 갓난아기를 두고도 끔찍하게 군다. 저들은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칼로 두 빰을 찢어놓아 젖을 물기도 전에 아픔 참는 법을 꼭 배워두게 한다. 이렇다보니 저들은 늙어가도 수염이 없으니 ㅤㅈㅓㄼ은이는 멋이 없다. 얼굴에 그여진 칼자국이 수염의 아름다움을 못쓰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키가 작되 움직임이 재빠르고, 활도 잘쏘지만 목덜미가 뻣뻣해서 (숙이지도 못하고) 언제나 자랑스레 곧추 세우고 있다.
[역자 전제] For by the terror of their features they inspired great fear in those whom perhaps they did not really surpass in war. They made their foes flee in horror because their swarthy aspect was fearful, and they had, if I may call it so, a sort of shapeless lump, not a head, with pin-holes rather than eyes. Their hardihood is evident in their wild appearance, and they are beings who are cruel to their children on the very day they are born. For they cut the cheeks of the males with a sword, so that before they receive the nourishment of milk they must learn to endure wounds. Hence they grow old beardless and their young men are without comeliness, because a face furrowed by the sword spoils by its scars the natural beauty of a beard. They are short in stature, quick in bodily movement, alert horsemen, broad shouldered, ready in the use of bow and arrow, and have firm-set necks which are ever erect in pride. [영문번역(1915) : C. C. Mierow]
같은 책 (182) 에 또한 훈족의 우두머리 아틸라(Attila)의 생김새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가슴이 넓고 머리도 컸다. 그의 두 눈은 작았지만 턱수염은 드문드문하고 회색빛을 뿌렸다. 그의 코는 납작했지만 살결은 거무잡잡했다.
[역자전제] He was short of stature, with a broad chest and a large head: his eyes were small, his beard thin and sprinkled with gray: and he had a flat nose and a swarthy complexion;.
이밖에도 이와 비슷한 묘사가 조금 더 있다.61 우리가 여기서 미움이나 무서움 따위로부터 나온 감정요소탓에 생긴 과장과 허풍을 걷어내고 본다면, 훈족 생김새의 주요특징은 왜소한 신체, 거무잡잡한 피부색, 납작한 코, 그리고 작고 가느다란 눈동자임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더군다나 우두머리와 부중(部衆)의 차이 또한 많지않다. 이것들은 마땅히 몽골로이드의 특징이라 하겠다.
혹시 훈족이 수염이 나지 못하도록 어떤 “신체훼손[殘破軀體]”(sacrification) 풍습을 실행했기 때문에 모발계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요르다네스는 이 사람들을 두고 다리에 털이 덮수룩하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훈족은 본디 유로포이드였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62 지금 검토하건대, 이 설은 어설프다. 첫째, 훈족의 덮수룩한 다리털 및 이상과 같은 기타 특징묘사가 의심할바 없다하더라도, 몽골로이드 또한 다리털이 반드시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둘째, 마르셀리누스 등이 적어놓은 훈족의 “신체훼손” 풍습 묘사는 퍽 특이하지만, 이와 같은 묘사는 흉노에서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타 몽골고원의 유목부족에 대한 중국측 사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묘사는 말할것도 없이 “얼굴흠집내기[剺面]” 풍습이 엉뚱하게 바뀌어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수염을 나고 자라지 못하게 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늙어가도 수염이 없어” 어쩌구저쩌구 한 것은 단지 당시 유럽사람 눈으로 볼때 훈족의 수염이 굉장히 적게 보였음을 나타낼 뿐이며, 수염이 적은 것은 또한 몽골로이드의 특징이다. 이 설의 주장자도 물론 훈족이 이와 같은 수염을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지만, 한걸음 나가 훈족은 몽골로이드가 아니라고 단정한다면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힘들 것이다.
이쯤에서 마땅히 짚어둘 것이 있다.: 즉, 서천한 이들 몽골로이드 훈족은 이미 혼혈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훈족의 우두머리였던 발라미르(Balamber)는 고트[哥特, Goths]의 공주 한사람을 아내로 들였었다 (Jordanes, XLVIII, 249). 아틸라(Attila)의 마지막 후비는 게르만[爾曼, German] 이름인 힐디카(Ildica)로 불렸다 (Jordanes, XLIX, 254). 이밖에, 훈족에 의해 정복된 뒤에 함께 연맹을 이루었던 알란(Alans) 사이에도 통혼이 흔히 일어났었다. 지금껏 발견된 것으로서, 훈족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무덤에서 출토한 재료는 훈족이 순수한 몽골로이드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같은 이유에서 많은 곳이 몽골로이드와 유로포이드의 혼혈종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은 무덤은 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Simmering,슬로바키아의 Strazhe과 Bešeñov, 헝가리의 Adony와 Györ, 그리고 루마니아의 Dulceance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무덤 주인공의 장례풍습과 껴묻거리로 미루어보아 훈족의 기원은 의심할 바없이 동방이다. 훈족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상의 여러 곳에서 몽골로이드가 대량으로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유럽에 첫출현했을 때의 훈족형상에 관한 당시 사가의 기록을 한데묶어서 보면, 훈족이 서천하기 이전에만 보다 순수한 몽골로이드에 속했었다고 볼 수 있을 따름이고, 상술한 혼혈현상은 서천 과정 중 또는 유럽에 진입한 이후에 유로포이드(알란 등)와 점차 융합된 결과일 것이다.63
간추리자면, 현재 우리가 가진 자료는 흉노와 훈족의 인종은 서로 다름을 나타내는 것 같다. 자료가 지나치게 단편적이어서 이상의 이야기는 결론이 아니거니와 결론내리기도 멀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현시점에서 인종은 동족론 성립의 근거로서 유리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설사 흉노와 훈족이 같은 인종임을 증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기껏해야 동족론 성립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흉노와 훈족의 동족여부 문제는 사학의 범주가 되는 것이지 인류학 범주가 되어 제기할 문제가 아닌것이다.
5
마지막으로, 동족론자의 또 한가지 중요한 논거는 흉노와 훈족이 언어가 동일한 어계(어파) 혹은 어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서방학자는 흉노를 두고 핀어(Finnic) 혹은 핀-우그르어(Finno-Ugurian)에 속한다고 보았지만, 그 전제는 흉노가 훈족이란 점이었다. 이들은 훈족의 언어를 핀어 혹은 핀-우그르어에 속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이를 근거로 흉노어의 계통를 짐작했던 것이다.64 20세기 이후 이 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흉노어의 계통를 두고 주로 3가지 의견이 있다. 이 세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흉노어를 두고 몽골어족,65 투르크어족[突厥語族]66, 그리고 몽골-퉁구스어족[蒙古-通古斯語族]67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 연구방법은 대체로 서로 똑 같은데, 중국측 사료에 남아있는 흉노어 어휘의 한자(漢字) 음역을 찾아 한 곳에 모아서(얼추 20 여 개), 먼저 한자의 옛 독음 또는 그 본디 발음을 검토•조사하고, 다시 관련기록을 바탕으로 그 낱말뜻을 추정한 뒤에, 후세부터 오늘날까지의 알타이어계 여러 어족 언어 중에서 소릿값과 뜻이 서로 가까운 어휘를 찾는다. 이렇게 찾아낸 어휘 중에서 몽골어 어휘, 투르크어 어휘, 그리고 퉁구스어 어휘가 각각 차지하는 비율이 많고 적음을 대조해서 흉노어가 어느 계통에 속하는지 짐작한다. 비록 세가지 설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지언정, 크게 보았을때 흉노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 훈족의 언어를 두고 오래도록 동•서방의 학자는 모두들 핀-우그르어로 보았었는데, 이 설은 훈족과 Oungri(Ougri) 사람들이 동족이라는데 바탕을 둔 것이었다.68 그러나 이 설은 결국 투루크어설에 의해 자리바뀜 되었다. 후자의 설은 훈족의 후예라고 생각되는 Tschuvaschen(Čuvashes) 언어연구를 통한 훈족어 어휘에 기초를 두고 있다.69 이런 까닭으로, 동족론자는 흉노와 훈족 둘의 언어는 다 알타이어계에 속한다고 보거니와,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둘이 동족임이 뒷받침된다고 여긴다.70
지금 검토한다.: 이 설은 아직 허술하다. 한가지 측면으로서, 흉노어가 알타이어에 귀속한다함은 증거가 부족해서 아직은 미덥지 못하다. 현존하는 흉노어라고 확인할 수 있는 어휘의 수가 너무나도 드물어서 흉노어의 계통을 판정하는 근거로 삼기엔 대단히 어렵거니와, 동족론자가 채용한 연구방법 또한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흉노는 최전성기에 몽골고원을 통일했었던 바, 뒷날의 몽골, 투르크(돌궐), 그리고 퉁구스 여러 어족의 선조 또한 그들에게 딸려있었고, 따라서 흉노어 어휘 안에는 틀림없이 상술한 각 어족의 언어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설령 동족론자가 연구한 흉노어 어휘의 소릿값 형태소와 말뜻의 뜻새김 등이 완전히 정확할지라도 흉노어가 몽골, 투르크, 혹은 퉁구스어족 중의 어느 한가지에 속한다고 섣불리 단정지을 순 없는 노릇이다. 비단 그 어족을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두리뭉실하게 알타이어계에 속할 것이라고도 단정지을 순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한가지 가능성을 결코 내던질 순 없다. 즉, 흉노사람을 두고 어떤 인도-유럽어를 쓰지만 그 어휘에는 알타이어 계통의 여러 어족도 담겨있었다는 설이다. 어떤 사람은 일찍이 중국측 사료에 보이는 흉노어휘 하나를 두고 이란어의 풀이[詮釋]일것이라고 했었다.71 이런 풀이가 반드시 정확하다곤 볼 수 없거니와 흉노어가 반드시 어떤 이란어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런 시도는 적어도 흉노어가 어떤 알타이어에 속한다고 단정했던 학설의 연구방법이 썩 믿을 만한 것이 못됨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다른 측면으로서, 훈족의 언어을 두고 어떤 투르크어에 보다 가까울 것으로 보는 설을 검토해 본다. 남아있는 훈족 어휘는 모두 전해오는 고유명칭에 잇닿아있는데, 부락이름은 적은 편이고 사람이름은 많은 편이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름 중에서 어원이 분명치 않은 약간을 제외한 일부는 투르크어이고 그 나머지는 게르만어 특성 및 페르시아어 특성이 뒤섞여있는 성질의 언어이다. 그리고 부락이름은 다 투르크어 특성을 띠고 있다.72 비록 이들 훈족 언어의 어휘에 대한 분석방법 또한 상술한 흉노어 어휘의 분석방법과 큰 차이는 없다하되 그 신뢰도는 훨씬 높다. 훈족의 주위에는 인도-유럽어 계통의 여러 어족의 큰바다로 뒤덮여 있었던 탓으로 훈족이 인도-유럽어를 썼다고 (누군가) 가정한다면, 투르크어의 사람이름과 부락이름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단 말인가? 어떤 게르만어 및 페르시아어가 혼합된 언어의 사람이름은 마땅히 훈족이 인도-유럽어 계통의 각 종족과 연맹을 맺었으며 통혼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훈족 사람이 인도-유럽어식 이름자를 채용한 것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밖에, 어떤 사람은 볼가강을 따라 살고있는 추바쉬[楚瓦什, Chuvash] 사람들을 두고 훈족의 후예라고 여기면서, 이들의 언어를 두고 프로토-투르크어[原突厥語]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라고 했다.73 이 말을 믿는다면, 훈족은 알타이어 계통에 속한다는 한가지 증거로서 모자라진 않을 것이다.
(간추리면,) 흉노어가 인도-유럽어 계통에 속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직은 내던질 수 없으되, 훈족의 언어가 알타이어 계통에 속한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것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의 비교언어학 측면에서도 동족록 성립에 유리한 증거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6
이상 종합하면, 匈奴와 Huns가 비록 똑 같은 이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동족이라곤 할 수 없거니와, 훈족의 족원은 마땅히 다른 길도 거슬러 올라가며 캐물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나름대로 짐작해보아도 좋다면, 나는 이른바 훈족이란 주로 서천한 선비(鮮卑)사람이되 (선비 외의 부락으로서) 본래 흉노에 예속되었던 부락도 다소 아우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는 까닭은 아래와 같은 생각에서다.:
1. 훈족이 정식으로 유럽에 나타난 시기는 4세기 70년대이다. 위•진 이후, 선비사람은 한무더기씩 무더기로 몽골고원을 떠나 우리나라 서북지역로 이주했었는데 동쪽 섬서성 동관(潼關)부터 서쪽
2. 선비사람이 몽골로이드임은 의심할 바가 없는 듯하거니와 전술했듯이 훈족 또한 몽골로이드다.
3. 일반적으로 선비의 언어는 투루크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거니와, 전술했듯이 훈족 또한 투루크어족에 속할 수도 있다.
4. 서방측 사료에 보이는 훈족의 부락이름은 다해서 14개인데 모두 중국측 사료에서 대응되는 부락이름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이 선비부락이되 일부는 원래 흉노에 예속되있던 부락이다.
(1) Akatir: 어쩌면 “呼揭”[xa-kiat]일 것.
(2) Hunugur(Onogur): 어쩌면 “渾庾(窳)”[huәn-jio(oa)]일 것.
(3) Kadisenoi: 어쩌면 “屈射”[khiuәt-djak]일 것.
(4) Zalio: 어쩌면 “薪犂”[sien-lyei]일 것.
이상 네가지는 흉속에 예속되있었던 부락일 가능성이 있다.『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묵돌선우는 “북으로 渾庾, 屈射, 丁零, 鬲昆, 그리고 薪犂라는 나라를 정복했었다 [北服渾庾, 屈射, 丁零, 鬲昆, 薪犂之國].” 또한 우현왕(右賢王)인 아우를 보내 월지(月氏)를 쳐없애고 “樓蘭, 烏孫, 呼揭을 비롯한 그 이웃한 26나라를 평정했었다 [定樓蘭, 烏孫, 呼揭及其旁二十六國]”. 呼揭는 알타이산 남쪽 기슭에 자리했었고,76 渾庾, 屈射, 그리고 薪犂은 흉노의 북쪽에 자리했었다. 흉노가 무너진 뒤에 각 부락은 서천하여 유럽까지 갔다함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5) Ultinčur: 어쩌면 “壹斗眷”[iet-to-kiuan].
(6) Koutrigouroi(Kutrigur) : 어쩌면 “屈突”[khiuәt-tok].
(7) Outigouroi: 어쩌면 “紇單”[huәt-tan].
(8) Toungoures: 어쩌면 “吐谷渾”[tha-kok(jiok)-hunә].
(9) Sorosgoi(Saragur) : 어쩌면 “樹洛干”[zjio-lak-kan].
(10) Angisciri: 어쩌면 “屋引”[ok-jien].
(11) Bardores: 어쩌면 “匹婁”[phiet-lo]; “莫輿”[mak-jia]도 가능하다.
(12) Sabiroi: 어쩌면 “須卜”[sio-pok],또한 “鮮卑”[sian-pie]로 풀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상 여덟가지는 모두 선비부락 계통인데, 뒷줄의 한역(漢譯) 이름은 다 『魏書·官氏志』에 실린 “內入諸姓”이다.
(13) Bittugur: 어쩌면 “步度根”[ba-dak-kәn]. 또한 “蒲頭”[pha-do]로 풀이될 수도 있겠다. 步度根과 蒲頭는 다 『三國志·魏書·鮮卑傳』에 보이는데, 전자는 동부선비(東部鮮卑) 대인(大人)계통이고, 후자는 서부선비(西部鮮卑) 계통이다. 이것들은 다 아마도 부(部)의 추장 이름이 부(部)의 이름으로 된 것 같다.
(14) Barselt: 어쩌면 “萬俟”[mәk-ziә]. “萬俟”는 『魏書·官氏志』에 보이지않으므로, 어떤 사람은 본디 흉노에 예속되었던 선비부락이라고 고증했다.77
또한 Saragur는 “若洛廆”[njiak-lәk-huәi]로 풀이될 수도 있는데,『晉書·吐谷渾傳』에 따르면, “토곡혼은 모용외의 큰형이되 서얼이다. 그 아비인 섭귀(涉歸)는 부락을 떼어 1천6백 가를 그에게 딸리게 했었다 [吐谷渾, 慕容廆之庶長兄也, 其父涉歸分部落一千七百家以隸之]”。모용외(慕容廆)를 두고『魏書·吐谷渾傳』엔 “若洛廆”라고 적혀있다. 일설에 의하면 “吐谷渾”이란 몽골어 계통인 Toghosun의 음역인데, 그 뜻은 토하(土河)로서 지금의 라오하강[老哈河]이다. 그리고, “若洛廆”는 몽골어 계통인 Sarakha의 음역인데, 그 뜻은 황수(黃水)로서 지금의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이다. 섭귀(涉歸)는 이 두줄기 강물의 이름을 따서 그 두 아들의 이름을 지은 셈이된다.78 훈족의 부락에 “吐谷渾”이 있는데, 또 “若洛廆”이 있더라도 그리 이상할 것 없다. 후자 또한 부(部)의 추장이름이 부(部)의 이름이 된 것이다. 또, 吐谷渾등은 본디 모용선비였는데,79 요르다네스(XXXV, 180)에 따르면 아틸라(Attila)의 아버지이름은 Mundzucus이고, Mundzu-는 어쩌면 “慕容”[ma-jiong]으로 풀이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틸라 또한 모용선비가 된다. 이런 흐름을 따르다보니, 뜻밖이지만, 나는 Bulgars 또한 연원이 선비(鮮卑)까지 거슬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Bulgar는 어쩌면 “步鹿孤”[ba-lok-kua]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Huns가 만약 匈奴가 아니라면, 왜 匈奴와 이름이 똑 같은 것일까?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가능성은, 흉노가 막북(漠北)의 패자를 일컬은지 3백 여 년이나 드리우면서 그 쩌렁쩌렁한 이름이 초원길을 거쳐 멀리 서방까지 전파되었고, 유럽인은 오랫동안 몽골고원에 있다는 기마유목민족으로서 “匈奴”라는 이름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철기(鐵騎)가 동쪽에서 오자 무턱대고 이들을 두고 Huns라고 불렀을 것이다. 둘째 가능성은, 여러 부족이 몽골고원에 있을 적엔 정치면에선 물론이고 혈연상으로도 흉노와 크든 작든 연맹을 이루고 있었고, 때문에 이들은 그 옛땅에 있을 때 匈奴라고 지칭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宋書·索虜傳』에 따르면, 흉노에는 “몇 백천 종이 있고, 저마다 일컬음을 내세우는데, 색두(索頭) 또한 그 하나다 [有數百千種, 各立名號, 索頭亦其一也].”『南齊書·魏虜傳』에도 “(북)위 됫놈은 흉노종 [魏虜, 匈奴種也]”이라고 했다. 이들 선비부락이 막 서쪽을 향하여 옮겨가면서 흉노라는 이름이 들러붙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들 또한 스스로를 “匈奴”라고 일컬었을 것이다. 에프탈[嚈噠], 열반(悅般)이 서천할 적의 정황도 이와 비슷해서 가히 참고할 만 한다.80
1. 참고: К. Иностранцев, Хуннуи Гунны, СНБ, тин, ки. В. П. Мещерского, 1900. 이 책은 善鄰協會蒙古硏究所에 의해 일어로 번역되었다: イノストランツエフ著『匈奴硏究史』,善隣協會蒙古硏究所, 東京:生活社, 1942年. 또한 內田吟風“フン匈奴同族論硏究小史”,『北アジア史硏究·匈奴篇』同朋舍, 1975年, pp. 167-200. 內田씨의 글은 가히 동족론을 집대성했다고 할 만하다. 본문에서 관련 동족론자의 관점을 정리할 때 內田씨의 글에 많이 의지했지만, 동시에 동족론에 대한 비판도 역시 內田씨를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2. 많은 우리나라 학자가 동족론을 견지한다. 오래된 학자를 예로 들면 이러하다: 章炳麟“匈奴始遷歐洲考”,『太炎文錄初編·別錄』卷二, 『章太炎文集』(四), 上海人民出版社, 1985年, p. 381;金元憲“北匈奴西遷考”, “國學論衡”第 5 期(上), 1935 年, pp. 37-42;何震亞“匈奴與匈牙利”, “中外文化”第1 卷第1 期, 1937年, pp. 39-48;근래의 학자를 예로 들면이러하다: 齊思和“匈奴西遷及其在歐洲的活動”, “歷史硏究”1977年第3 期, pp. 126-141;蕭之興“關於匈奴西遷過程的探討”, “歷史硏究”1978 年第7 期, pp. 83-87;林幹“北匈奴西遷考略”, “內蒙古社會科學”, 1984 年第1 期, pp. 58-65;郭平梁“匈奴西遷及一些有關問題”, “民族史論叢”第1輯, 中華書局, 1987 年, pp. 103-113. 非동족론자은 필자가 아는한, 僅邱克、王建中“關於匈奴西遷歐洲的質疑”란 글이 “西北民族文叢”1984 年第2 期, pp. 58-67.에 실렸다.
3. The Geography of Strabo, with an English Translation by H. L. Jones,
4. Kalman Namati, "The Historic-geographical Proofs of the Hiung-nu = Hun Identity", Asiatic Quarterly , 3rd. Ser.29, 1910, pp. 325-369.
5. 참조. 余太山『塞種史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2年, pp. 53-56.
6. W. W. Tarn, The Greeks in
7. Pliny, Natural History , with an English Translation by H. Rackham, Lodon, 1949.
8. Dionysius' Periegesis, Scythica et Caucasica, in C. Muller (ed.), Geographi Graeci Minores II, Paris, 1882.
9. J. Charpantier, "Die ethnographische Stellung der Tocharen",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andischenGesellschaft LXXI, 1917, pp. 347-388.
10. W. W. Tarn의 책, pp. 110-111.
11. 余太山의 책, pp. 24-29.
12. Geography of Claudius Ptolemy , Translated into English and Edited by E. L. Stevensen,
13. G. Haloun, "Zur Üe-tṣï-Frage",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andischen Gesellschaft XCI, 1937, pp.243-318.
14. 참조. 白鳥庫吉“塞民族考”, 『 白鳥庫吉全集·西域史硏究(上)』(卷六), 東京:岩波, 1970 年, pp. 361-480.
15. 同注4.
16. 참조. H. W. Bailey, "A Khotanese Text concerning the Turks in Kantson", Asia Major 1, 1949, pp. 28-52; W. B. Henning, "The Date of the Sogdian Ancient Letters",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Studies XII, 1947/1948, pp.601-615;林梅村“敦煌出土粟特文古書信的斷代問題”, “中國史硏究”1986 年第1 期, pp. 87-99.
17. 注1 所引內田吟風文本F. Altheim, Attila und die Hunnen ,
18. 注13 所引G. Haloun 文.
19. O. Maenchen-Helfen, "Pseudo-Huns", Central Asiatic Journal , vol. I, 1955, pp. 101-106.
20. Gy. Moravcsik, Byzantinoturica II,
21. 최초로 중국측 사료로부터 흉노의 서천경로를 추적해 본 사람은 J. DeGuignes, Histoire generale des Huns, des Turcs, des Mongols, et des autres Tartares occidentaux , I,
22. 참조. 馬雍“新疆巴里坤、哈密漢唐石刻叢考”, 『 西域史地文物叢考』, 文物出版社, 1990 年, pp. 16-23;
23. 林幹『匈奴歷史年表』, 中華書局, 1984, p. 103.
24. 注22 所引
25. 悅般에 관해선, 余太山『嚈噠史硏究』, 齊魯書社, 1986 年, pp. 183-187, 196-199.을 참조할 것.
26. 松田壽男『古代天山の歷史地理學的硏究』, 早稻田大學出版部, 1970 年, pp.188-189은 그래서『魏書·西域傳』에서 前史에는 보이지 않던 “西走康居”이 실린 이유는 아마도 당시 사람이 전해들으면서 원래부터 康居之地에서 활동하던 Huns를 연상하여 소급적용한 것일 수 있다고 했다. 필자가 볼 때 이것도 한가지 해석이 될 순 있겠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康居之地의 Huns가 반드시 서천한 북흉노라곤 할 수 없다.
27. 注22 所引
28. “秦海”, 일설에는 博斯騰湖(Boston), 참조: 馮承鈞“樓蘭鄯善問題”, 『西域南海史地考證論著彙編』, 中華書局香港分局, 1979 年, pp. 25-35;또 일설에는 준가르분지 북쪽의 布倫托海(Buluntuo), 참조: 注22 所引 馬雍의 글.
29. 참조 注25 所引 余太山의 책, pp. 227-228.
30. 참조 注5 所引 余太山의 책, pp. 298-302.
31. 이상의 토론에 대한 상세한 것은, 護雅夫“丁令に關する魏略西戎傳の記事について”, “東洋學報”40~1(1957 年), pp.82-109;그리고 “いわゆる‘北丁令’、‘西丁令’について”, 『瀧川博士還曆記念論文集·東洋史篇』, 中澤印刷, 1957 年, pp. 57-71.
32. 자세한 것은 注25 所引 余太山의 책, pp. 53-57.
33. 참조 注5 所引 余太山의 책, pp. 102-104.
34. 同注32.
35. 注21 所引 F. Hirth의 글과 內田吟風文의 글은 다 이설을 견지한다.
36. 注21 所引 江上波夫의 글은 이 설을 견지한다.
37. 白鳥庫吉“粟特國考”, 『白鳥庫吉全集·西域史硏究(下)』( 卷七), 東京:岩波, 1971 年, pp. 43-123;榎一雄“魏書粟特國傳と匈奴·フン同族問題”, 榎一雄著作編集委員會編『榎一雄著作集』第三卷, 汲古書院, 1993 年, pp. 3-50;“ソグデイアナと匈奴”1-3, 同上書, pp. 51-132. ;이 모두 이설을 견지함. 또한 “匈奴”를 두고 榎氏는 Chionitae로 보았고, 白鳥氏는 嚈噠으로 보았다가 후에 悅般로 고침;후자의 설은 “蒙古及び突厥の起源”, 『白鳥庫吉全集·塞外民族史硏究(上)』(卷四), 東京:岩波, 1970 年, pp. 541-547.
38. 이런 관점에서 흉노-훈족 동족설을 논한 것은 注21 所引 F. Hirth의 글; Z. von Takacs, "Chinesische Kunst bei den Hunnen", Ostasiatische Zeitschrift IV, 1915/1916, pp. 174-188; Z. de Takacs, "Some Irano-Hellenistic and Sino-Hunnish Art Forms", Ostasiatische Zeitschrift XV, 1929, pp. 142-148; "Congruencies between the Arts of Eurasiatic Migrations Periods", Artibues Asiae V, 1935, pp. 177-202;그리고 注21 所引 江上波夫의 글 등. 이하 다섯 항목은 江上氏의 글에 자세하다.
39. 참조: 榎一雄“匈奴フン同族論の批判”, 注37 所引書, pp. 437-449.
40. 예컨대,
41. W. M. McGovern, The Early Empires of Central Asia , 章巽漢譯本(『中亞古國史』), 中華書局, 1958 年, pp. 102-103, 168-169.
42. 注1 所引 內田吟風의 글 및 內田氏“匈奴の人種體型について”, 注1 所引 책 pp. 143-165.
43. 劉氏일족은 일설에 따르면 응당 屠各이다. 참조: 姚薇元『北朝胡姓考』, 科學出版社, 1958 年, pp. 38-52;唐長孺“魏晉雜胡考”, 『魏晉南北朝史論叢』, 三聯書店, 1995 年, pp. 382-450;注40 所引馬長壽書, pp. 96-97;등. 또 일설에 따르면 응당 南單于의 후예다. 참조: 內田吟風“南匈奴に關する硏究”, 載注1 所引書pp. 201-365;周偉洲『漢趙國史』, 山西人民出版社, 1986 年, pp. 19-25. 필자가 보건대, 후자의 설이 더 설득력이 있지만, 어느쪽이든 劉氏가 흉노계통인 것은 틀림없다.
44. 이상 匈奴人 생김새에 관한 문헌기록은 다 內田吟風가 찾아냈다. 注43 所引의 글을 볼 것. 그러나 內田氏는 본래 王國維“西胡續考”( 載『觀堂集林』卷十三)에서 지적했듯이 羯胡를 匈奴로 보았는데, 타당성이 없다. 羯胡는 대부분 西域胡이다. 참조: 注43 所引 唐長孺의 글, 注40 所引
45. 耶茲“俄國科斯洛夫探險隊外蒙考古發現紀略”, 向達(漢譯), “東方雜誌”第2 卷15 號(1927 年), pp. 29-40;護雅夫『漢とロ-マ』, 東京:平凡社, 1970 年, pp. 259-260.
46. 周連寬“蘇聯南西伯利亞所發現的中國式宮殿遺址”, “考古學報”1956 年第4 期, pp. 55-66.
47.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編著『灃西發掘報告』, 文物出版社, 1963 年, pp. 138-140. 匈奴墓葬에 대해선, 林幹“試論匈奴的族源族屬及其與蒙古族的關係”, 載林幹編『匈奴史論文選集』, 中華書局, 1983 年, pp. 75-87.
48. 注45 所引 護雅夫의 책, pp. 259-262.
49. 注2 所引 邱克、王建中의 글.
50. 注45 所引 護雅夫의 책, pp. 209-210.
51. 同注50.
52. 注 40 所引
53. 注42 所引 內田吟風의 글;注2 所引 邱克、王建中의 글.
54. C. Bishop, "Notes on the Tombs of Ho-Chu-ping", Aribus Asiae I, 1925, pp. 31-40.
55. 注45 所引 耶茲의 글.
56. O. J. Maenchen-Helfen, The World of the Huns ,
57. 田廣金“桃紅巴拉的匈奴墓”, “考古學報”1976 年第1 期, pp. 131-143.
58. 注2 所引 邱克、王建中의 글;熊存瑞“先秦匈奴及其有關的幾個問題”, “社會科學戰線”1983 年第1 期, pp. 110-113.
59. Ammianus Marcellinus , with an English Translation by J. C. Rolfe,
60. The Gothic History of Jordanes , English Translation by C. C. Mierow,
61. 注56 所引 O. J. Maenchen-Helfen의 책, pp. 360-364.
62. 注41 所引 W. M. McGovern의 책, 章巽漢譯本, p. 169.
63. 참조 注56 所引 O. J. Maenchen-Helfen의 책, pp. 365-367.
64. 참조 注1 所引 イノストランツエフ의 책, pp. 98-118.
65. 19세기의 주요 몽골설 주장자로는, I. J. Schmidt, Forschungen im Gebieto der alteren religiosen, politischen und literarischen Bildungsgeschichte der Völker Mittel-Asiens vorzuglich der Mongolon und Tibeter , St. Petersburg, 1924, pp. 39-67 등. 20세기의 이 설을 주장한 자로는 주로 方壯猷“匈奴語言考”, “國學季刊”第2 卷第2 號(1930 年), pp. 693-740;黃文弼“古代匈奴民族之硏究”, “邊政公論”第2 卷第3, 4, 5 期(1943年), pp. 35-39 등.
66. 19세기의 주요 돌궐어족 주장자로는 A. Remusat, Recherches sur les languages Tartares , Paris, 1820, pp.242-330; J.Klaproth, "Memoire sur l’identite des Toukiue et des Hiougou avec les Turcs", Journal Asiatique VII, 1825, pp.257-268 등. 20세기에 이 설을 주장한 사람은 주로:O. Frank, Beitrage aus chinesischen Qunellen zur Kentniss der Turkvolker und Skythen Zentralasiens , Berlin, 1904, pp.4-13; L. Bazin, "Un Texte Proto-Turc du IV E Siecle:Le Distique Hiong-nou du , Tsin-chou", Oriens I (1948), pp. 208-219; 岑仲勉“伊蘭之胡與匈奴之胡”, “眞理雜誌”第 1 卷第 3 期(1944 年), pp. 309-314. 馮家昇“匈奴民族及其文化”, 載注47 引林幹所編書, pp. 155-170;何星亮“匈奴語試釋”, “中央民族學院學報”1982 年第1 期, pp. 3-11 등.
67. 白鳥庫吉“蒙古民族の起源”、“東胡民族考”, 『白鳥庫吉全集』(卷四), pp. 23-61, 63-320;및 “西域史上の新硏究·大月氏考”, 『白鳥庫吉全集』(卷六), pp. 97-227.
68. 注66 所引 J. Klaproth의 글.
69. 69 A. Vambery, Ursprung der Magyaren , Leipzig, 1882, pp. 40-50.
70. 注1 所引 內田吟風의 글.
71. H. W. Bailey, Indo-Scythian Studies, being Khotanese Texts , vol. VII,
72. 注56 所引 O. J. Maenchen-Helfen 의 책, pp. 376-443.
73. W. Barthold, "Die heutige Stand and nachsten aufgaben der geschichtlichen Erforschung der Turkvölker",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ändischen Gesellschaft , Neue Folge, VIII-83, 1929, pp. 121-142.
74. 周偉洲“魏晉十六國時期鮮卑族向西北地區的遷徙及其分佈”, “民族硏究”, 1983 年第5 期, pp. 31-38.
75. 참조 注25 所引 余太山의 책, pp. 33-39.
76. 注31 所引 護雅夫의 글.
77. 注43 所引 姚薇元의 책, pp. 246-248.
78. 白鳥庫吉“東胡民族考”(出處見注67).
79. 周偉洲『吐谷渾史』, 寧夏人民出版社, 1985年, pp. 1-2.
80. 참조. 注25 所引 余太山의 책, pp. 163-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