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
비가 오락가락갈 하는 사이 갈곡리 성당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서 차가 많아 혹시라도 교통체증이나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전방이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장마철이어서인지 오히려 도로가 한산하여 운전하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갈곡리 성당은 약 110여 년 전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 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다.
성당 앞 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며,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다.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라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
었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쟁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를 넘으려면 20여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한다.
이렇게 험한 첩첩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 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 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 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34년 신자 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 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47년에는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되었으며, 1955년 1월 군종 신부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으로
현재와 같은 공소 건물이 건립되어 노기남(盧基南, 1902~1984, 바오로) 대주교의 주례로 축성 봉헌되었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