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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廉想涉(1897~1963) "한국 근대문학의 세 갈래 뿌리 중 하나"
염상섭 廉尙燮의 일생과 문학
염상섭은 일생 동안 오직 소설 쓰기에만 전념한 한국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으로서 한국문학을 근대문학화한 작가였으며, 한국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한 산문문학의 아버지였다. 오늘날 우리가 염상섭 문학을 논의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소설의 역사적 사회적 예술적 가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한 이가 바로 염상섭이였다. 염상섭은 당대 사회의 진실을 일상성의 삶을 통해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염상섭은 리얼리즘 문학의 화신이었다.
서울 본토박이 염상섭은 서울 어디에도 자기 집 한 칸 없었다. 염상섭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초연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롭게 살았음을 말한다. 자유인 염상섭은 도시의 야인으로서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가 작가로서 유일하게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도 돈과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결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당당하게 한 세상 살았다. 그야말로 그는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염상섭의 생애는 한마디로 고난의 삶이었다. 고난 속에 깃든 강한 삶의 의지는 곧 그의 문학이었다. 염상섭은 일평생을 도시의 가난한 야인으로 살아온 민초 아닌 거리의 악사였다. 거리악사의 불협화음은 실로 꺼질 줄 몰랐다. 야인은 언제나 야인이기에 세상에 남는 법이다. 소부가 그랬고 허유가 그랬듯이 염상섭은 벼슬을 탐내 본 일이 없다. 염상섭은 하라는 학장도 말 뿐 그 자리에 결코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염상섭은 서울이 고향이면서도 서울에 자기 집 한 칸 없었다. 군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이지만 관청 근체에는 한번도 가본 일이 없다. 오직 신문 기자생활과 작가생활로 일관 했을 뿐이다. 한때 나라가 위난지경에 있을 때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중령으로 있은 적은 있지만 그의 나이 이미 55세 때 일이다.
염상섭의 생애는 크게 3 등분 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는 구한말시대에 태어나(1897) 한일합방(1910)이 되기까지의 유년시절 13년과 청장년기를 온통 나라 없이 보낸 일제식민지시대에서 광복의 그날(1945)까지 36년간의 세월과 8.15, 6.25, 4.19, 5.16의 민주화 격동기로 이름 지어지는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18년의 시기가 그것이다. 염상섭은 67년 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대한제국의 백성이었던 그는 일본제국의 조선 식민지 백성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새로 태어나기도 했다. 공간적으로는 한국의 서울과 부산, 일본의 동경과 경도, 중국의 장춘과 안동에서 살았으나 주로 고향인 서울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돌아갔다. 서울을 떠난 그의 삶은 언제고 빛을 잃었다.
염상섭은 일본을 통해 근대문명을 받아들였다. 학창시절 8년을 일본에서 보낸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일본문화에 젖게 되었다. 일본의 영향을 그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염상섭은 한국근대작가 중 유일하게 일본 정규 명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맏형 염창섭 일본 육군 장교 덕분이었다. 염상섭은 생활에 무능했다. 그를 보살펴 준 두 분의 생활 의 은인이 없었다면 염상섭 문학도 없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들은 일본 세력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그의 형 염창섭과 그의 선배 진학문이었다. 진학문은 신문 기자로서 어려운 시절 꾸준히 염상섭의 생활을 돌봐 주었고, 그의 맏형 염창섭은 일본 육군 장교로서 염상섭을 생활의 위기로부터 언제고 건져주었다. 염상섭과 그 문학을 말할 때 우리는 결코 이 두 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염상섭 자신은 염창섭과 진학문에 대해 별로 말한 적이 없다.
염상섭은 일생 동안 항일 감정을 지니고 살았다. 1919년 오사카에서 조선 노동자들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독립 운동을 단독으로 벌인 바 있듯이 기회 있을 때마다 그 가슴 속에 맺힌 항일 감정은 폭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노동 운동을 벌였으며.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심퍼사이저(sympathizer) 노릇도 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기를 듦으로써 독립 운동의 의지를 보였다. 특히 1930년대 그의 주요 장편소설이 오늘날 값진 것으로 여겨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당대 사회의 진실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던 염상섭은 그 진실의 일부를 사회의 근대화에 둠으로써 식민지하에서의 민족적 삶을 구현코자 했다.
그 실체가 바로 1930년대 그의 대표작 3부 장편소설이다. 이들 작품에서 염상섭은 한 가족이나 한 집단의 삶을 통해 근대정신을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가치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염상섭은 <삼대>를 통해 전근대 즉 봉건적 삶을 철저히 부정하고 사이비 근대성도 냉혹히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근대 지향성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근대 사상으로 표방되는 사회주의 사상과 사상운동을 전개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게 함으로써 진보적 보수주의가 현실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염상섭의 항일 감정은 그의 초기작에 많이 노정되어 있다. 항일 감정의 승화는 행동적인 저항보다는 식민지적 현상을 인식시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 식민지인 당시 조선 사회를 묘지로 규정짓고, 그곳에 사는 사람을 구더기이로 상징한 점이다. 식민지 사회의 비인간화에 그는 심히 분로하고 있었다. 염상섭의 초기 대표작 <만세전>(1923)은 한국 근대 문학에서 최초로 식민지적 인식을 시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대 사회를 강력하게 부정하고,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를 부르짖은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중편소설 <만세전>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의 겨울로 상징되는 전환기적 사회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염상섭은 당대 식민지 사회를 공동묘지로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백성을 구더기라 불렀다. 이는 염상섭의 항일 감정의 드러냄이었다. 이는 염상섭의 허무주의였다. 식민지 사회를 최초로 묘지와 구더기로 명명한 그의 문학적 상징은 놀라운 바였다. 이는 염상섭의 독창력이었다. 이로부터 염상섭 문학에 일관성 있게 흐르는 식민지 사회에 대한 부정의식은 곧 당대 윤리의 실천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염상섭이 윤리적 작가로 불리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염상섭은 「폐허」 동인인 경기 서울 출신과 잘 어울리었다. 최남선‧ 남궁벽‧ 오상순‧ 홍란파‧ 변영로‧ 나도향을 비롯하여 김억‧ 황석우‧ 최서해‧ 현진건‧ 양건식‧ 나혜석‧ 이무영‧ 윤백남 등과 사귀었다.
남달리 시대 상황에 민감하였다. 근대는 도시로 상징된다. 염상섭의 집안은 관료 계층이었다. 그의 부친 염규항(廉圭恒)은 구한말 군수였으며, 조부 염인식(廉仁湜)은 중추원 참의로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증조부 염재진(廉在鎭)은 행중추부사(行中樞府事)였으며, 그의 맏형 염창섭(廉昌燮)은 일본 육군 대위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부친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염상섭은 전부터 의논해 오던 윤태우(尹泰宇)와 함께 부모 몰래 현해탄을 건너갈 결심을 했다. 염상섭은 우선 일본 옷을 헌 옷 가게에서 사 입었다. 염상섭이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하여 배를 탄 것은 1912년 9월이었다.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널 때까지 염상섭은 한마디의 일본 말도 하지 못했다. 염상섭은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것을 이때 비로소 후회하였다. 염상섭의 첫 번째 도일은 이렇게 모험적으로 실행되었다.
염상섭의 항일 감정은 일종의 원한 관계였다. 일본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망했다는 원한에서 비롯된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망국의 현장에서 겪은 원망과 슬픔이 그대로 그에게는 원한이 되고 그 원한은 저들을 향한 원수의 마음을 일으켰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염상섭은 일본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사랑 미스브라운과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면 염상섭이 경도에서 알게 된 일본 여자 시나꼬와의 사랑은 연정 어린 그의 유일한 첫 사랑이었다. 이 여인은 염상섭에게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연정의 황홀함도 느끼게 했으며, 사랑의 숭고함도 알게 해주었다. 염상섭은 시나꼬를 통하여 비로소 여자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시나꼬는 염상섭의 심상의 일부가 되었다. <만세전>에 나오는 시즈꼬(靜子)는 바로 경도의 첫 연인 시나꼬(品子)였다.
경응대학이 있는 미다에는 염상섭 보다 1살 위인 출중한 여류화가 나혜석이 있었다. 나혜석은 요절한 천재 시인 최승구의 연인이었다. 염상섭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생긴 첫 사건은 나혜석과의 만남이었다. 염상섭이 나혜석과 가까이 지낸 것은 최승구가 죽은 뒤 김우영과 나혜석이 사귀고 있는 때였다. 염상섭의 나혜석을 향한 연애 감정은 여태껏 있었던 사춘기적 호기심을 넘어선 것이었다. 나혜석은 말하자면 염상섭의 세번째 연인이었다. 최승구와 나혜석의 연애는 당시 동경 유학생들의 화제 거리였다. 경응대학의 천재 시인 최승구와 미모의 동경미술학교 천재 화가의 열애였기 때문이다. 더욱 최승구와 나혜석은 동경 조선 유학생의 연모의 적이었다.
염상섭은 나혜석을 연모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전력 즉 최승구와의 연애와 현재 김우영과는 약혼 관계임을 알고는 단념했다. 나혜석(1986) 역시 경기(수원) 태생이었으며, 군수의 셋째 딸이었다. 나혜석은 최승구가 요절하자 이광수, 김우영을 알게 되었다. 이광수가 우시고메 여자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허영숙과 가까워지자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경도제대 법학부생 김우영과 약혼하였다. 김우영은 부산 동래 사람으로 전처와 사별하고 자녀도 있는 처지이나 부유한 편이었다. 김우영은 그후 변호사,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 만주 안동현 부영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당대의 소위 명사였다. 이들은 1920년 4월 서울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염상섭은 나혜석을 모델로 하여 중편소설 <해바라기>(1923)를 쓰기도 했다.
염상섭의 경응대학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워낙 귀족적이고 부유층 자제들이 모인 대학이어서 학비와 생활비의 부담이 컸고, 학교 분위기도 염상섭의 기질과는 맞지 않았다. 염상섭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했지만 1학기를 마치고 1918년 여름 휴학했다. 휴학 사유는 병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복합적이었다.
염상섭은 1920년 9월 오산학교 작문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염상섭의 맏형 염창섭은 육군 대위로 예편되어 오산학교 교감이 되었다. 염창섭은 서울서 하는 일 없이 빈둥대고 있는 동생 염상섭을 정주로 내려오도록 했다. 염상섭은 가뜩이나 모든 것이 시퉁스럽던 판에 잘 되었다 싶었다. 형의 권유로 서울을 떠난 염상섭은 기분도 풀 겸, 황석우와 동행하여 평양을 거쳐 진남포에 잠시 들려 정주 오산학교로 갔다. 염상섭은 1920년 9월부터 1921년 7월까지 1 년 남짓 오산학교에 근무했다.
염상섭이 오산학교로 부임해 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표본실의 청개구리>다. 염상섭의 오산학교 생활은 <E 선생>(1922)과 <악몽>(1926)에 잘 나타나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1921년 5월 집필 완료되어 같은 해 8월부터 10월까지 「개벽」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염상섭 자신의 그간의 심정적 체험을 「시라카바」파의 심정 고백체를 빌어 도스토예프스키의 병적 소설 창작법에 따라 자동 기술된 염상섭의 우울증의 체험적 고백이다. 염상섭의 우울증은 청년기의 일반적인 현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우울증은 식민지적 현실과 개인적 환경이 복합된 심정적 현상이었다. 그의 우울증과 신경과민증은 일종의 자각 현상이기도 했다. 그 원인과 현상이 모두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담겨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모두 10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주인공 ‘나’가 서울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무거운 기분의 침체와 한없이 늘어진 생의 권태는 나아가지 않는 나의 발길을 남포까지 끌어 왔다.”로 시작된다. 여기에 나오는 ‘나’는 염상섭 자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품 속의 ‘나’다. 이 작품에 나오는 X와 H는 염상섭과 시인 황석우의 약호였다. 이들은 서울 역에서 만나 밤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난다. 이야기는 주로 ‘나’의 그간의 심정적 고백이다. 이는 염상섭 자신의 서울 탈출의 변이기도 하다.
제3장은 남포에서의 일이다. 오후 2시 남포에 도착한 H와 X는 Y와 A를 만난다. Y는 평양 출신 유방 김찬영이고, A는 곽산 출신 안서 김억이다. 이들과 광인 김창억이 이 소설의 작중인물이다. 이들은 그날 저녁에 광인 김창억을 찾아간다. X는 저들이 말하는 3원 50전으로 원두막같은 3층 집을 짓고 사는 김창억에 호기심이 갔다.
제4장은 김창억과 ‘나’의 만남이다. 주로 X의 질문에 김창억이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그 이야기는 상당히 해학적이다. X는 김창억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끼었다.
○염상섭(1897~1963)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평소 고집과 술이 세기로 유명해서 호가 횡보였고 오랫동안의 문단 생활에도 내성적이고 아집이 세 특별한 친구가 없었다. 스스로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으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20년《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이때 《개벽》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했다. 이후 <만세전>(1923), <제야>(1923), <삼대>(1932) 등을 발표하였다.
삼대의 속편으로 <무화과>를 내놓은 이후 <모란꽃 필 때>, <그 여자의 운명>과 같은 통속소설을 발표하다가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다. 8 15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경향신문》편집국장이 되었으며, <두 파산>, <일대의 유업>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3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염상섭의 작품 경향은 이광수류의 선각자 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적, 실존적 고뇌를 사회적, 보편적 고뇌로 치환시키고 반대로 사회적, 보편적 고뇌를 개인의 실존과 결부시켜 이해하려는 근대적 예술인 특유의 자각을 담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화>, <임종>, <굴레>, <표본실의 청개구리>, <두 파산>, <만세전>, <삼대>, <무화과> 등이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작품의 줄거리
'나'는 불규칙한 생활과 삶의 권태로 고통과 갈등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신경 과민에 불면중까지 겹쳐 죽음의 유혹까지 느꼈다. H가 평양 방문에 동행할 것을 권유하여 '나'는 밀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 허락은 하였으나 여러 번거로운 일로 망설이다가 기차를 탔다. 대동강 가에서 기괴한 차림의 장발객을 보고 '나'와의 동질성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풍광 속에서 마음의 전환을 느끼면서 H와 남포로 Y를 방문하여 김창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행들과 함께 그를 방문했다.
그는 삼 원 오십 전으로 삼층집을 짓고 산다는 정신 이상자였다. 그는 철학자연하였고 유유 자적하는 자유인과도 같았다. 우리 모두의 욕구를 채워 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일종의 영감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세계 평화를 위한 모임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남포를 다녀온 지 두 달쯤 되는 어느 날 Y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김창억이 집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우울한 심정이 되어 늘 거닐던 절벽 길을 걸었다. 그날 밤 김창억에 대한 생각과 대동강 가에서 본 장발객의 신경질적인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 후 김창억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싫어하는 평양에 살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후처의 친정이 있는 평양의 보통문 밖 깊더미 속에 살면서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김창억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발단 : 남포로 떠나기 전까지의 '나'의 정신적 고뇌와 심리적 갈등
▷ 전개 : 평양 도착까지의 과정과 대동강 가에서 여러 가지 일로 갈등과 분노를 겪음.
▷ 위기 : 남포에 도착하여 Y와 함께 김창억을 만나고, 그의 인생 내력을 알게 됨.
▷ 절정 : 김창억이 자신의 삼층집에 불을 지르고 종적을 감춤.
▷ 결말 : '나'의 침울한 심정과 김창억의 뒷소식
○등장 인물의 성격
* 나 - 심한 절망감으로 고뇌하는 젊은 지식인.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눌려 침체된 기분과 삶의 권태를 느끼며 사는 사람.
* 김창억 -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오는 동안 후처가 윤락에 빠지자 정신 이상자가 되어 몽환의 세계에서 이상을 펼치려는 인물
○정리
*갈래: 단편 소설
*성격: 사실주의(자연주의)
*문체: 상징적 대화가 많이 쓰임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배경: 시간적 - 1920년대 전반기 공간적 - 서울, 평양, 남포 등
사상적 - 세기말 사상(pessimism)
*주제: 3․1 운동 직후, 패배주의적 경향과 우울 속에서 침체되어 있는 지식인의 고뇌
거대한 힘을 지닌 현실에서 빚어지는 삶의 아픔으로 인한 비극적인 숙명의 삶
*갈등: 지식인들의 실의와 고뇌가 주요 갈등 요인임.
○감상의 길잡이
제목이 암시하듯 1920년대 사회는 물론 인물의 내면까지 해부하듯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으나 여러 가지의 상징적 대화와 사건, 그리고 복합 구성 때문에 매우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 시절, 박물 선생이 청개구리를 실험대 위에 놓고 심장과 폐를 해부해 내는 것은 육체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적인 근거마저 상실한 현재 '나'의 처참한 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그 박물 선생의 청개구리 해부는 작가가 앞으로 이런 태도와 방법으로 인생이나 현실을 해부해 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당시의 현실에서 '나'의 표본이 될 만한 김창억이란 인물을 해부대에 올려 놓고 그의 생활과 심리를 실험적인 방법으로 해부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암시이다.
말초 신경만 예민하게 발달한 '나'와 정신 이상자인 김창억이란 인물은 지식인의 고뇌를 대표하고 있는데, 특히 김창억의 정신 이상은 당시 지식인의 회의적이고 절망적인 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나'와 김창억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른바 닮은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김창억이라는 인물이 당시의 지식인의 한 전형이라고 볼 때, 그는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깊은 좌절에 빠져 있는 지식인의 한 모습일 수 있다. 그런 관계의 연장선에서 생각한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당대의 무기력한 지식인들의 전형이며, 그의 소설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쓸여 있는 소지식인의 자기비판적 성찰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