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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환난날의 도피성 원문보기 글쓴이: 그리스도의 전사
나다나엘의 묵상 /일러스트: 김종한 작가님
요1:43~51
예수님의 제자로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였고, 그리고 그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전도를 해서 야고보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베드로와 안드레는 같은 동네, 벳세다에 사는 빌립에게 전도하고, 빌립은 가나사람인 나다나엘을 전도 한다.
이렇게 요한복음 1장 35~51절에선 복음이 가족에서 친구로 전파되어지는 과정이 재밌게 그려진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 나다나엘을 잠깐 소개하면, 그는 예수님의 여섯번째 제자로 나다나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 43~51절에 딱 한번 나오며, 다른 공관복음에서 '바돌로매'란 이름으로 나온다.
나다나엘이 바돌로매라고 보는 이유는 공관복음에선 나다나엘이란 이름 대신 빌립 뒤에 여섯번째 제자로 이름이 올려진 인물이 바돌로매이기 때문이다. (마10:3,막3:18,눅6:14)
그리고 '바돌로메'는 정식이름이 아니고, '바'는 '~아들'이란 뜻으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나 이새의 아들 다윗처럼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이다.
이스라엘에선 곧잘 '누구의 자식 누구' 이렇게 부르기도 해서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한 소경거지 '바디메오'도 '디에오의 자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 이렇게 부르시기도 하신 것처럼 나다나엘을 '바돌로메 나다나엘아' 또는 그냥 '바돌로메' 이렇게도 부르셨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대신 '박씨네 둘째', '최씨네 막내 딸내미' 이런식으로 많이 불렀었는데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닮은 면이 많다.
전승에 의하면 바돌로매는 살갗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다 순교를 했다고 한다. 순교야 다른 제자들도 다했지만, 살갗이 벗겨져 죽었다니, 그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 있다.
그럼에도 왠일인지, 바돌로메, 나다나엘이 조용한 성격이라 그랬는지 성경에서 요한복음 1장외엔 구체적으로 나오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예수님과의 첫 만남은 어느 제자보다도 극적이고 신비롭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수제자인 베드로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듣지 못한 칭찬을 첫 만남때에 들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열두제자 중, '그속에 간사함이 없고 참이스라엘인'이라고 이렇게 대놓고 성품에 대해 칭찬하신 사람은 열도제자중 나다나엘이 유일하다.
그만큼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제자로 준비된 사람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보았다고 한 무화과 나무 아래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묵상을 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선 회당에서 성경을 연구하거나 묵상을 하기도 했는데, 회당이 없는 시골에선 나무 아래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거나 또는 조용히 혼자 기도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런 경건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아래 있을 때, 빌립이 온것인지, 아니면 좀 시간이 지나서 다른 곳에서 나다나엘을 만난것인지는 모르지만, 빌립은 메시야를 만난 기쁨에 나다나엘을 헐레벌떡 찾아 와 예수님을 전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그이름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아마도 이 둘은 평상시에도 오실 메시야에 대해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날수있느냐" 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엔 분명히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날것이라는 예언이 되 있어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나다나엘 또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것을 몰랐던 것이다. (요한복음 7: 41,42)
거기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이름없는 촌 마을로 그들의 사투리나 교양의 부족, 그리고 이방인과의 교역으로 평판이 좋지 못한 동네였다.
빌립은 이런 나다나엘의 부정적인 반응에 "와보라"고 말한다. 논리보다 직접와서 사실을 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빌립의 적극적인 태도에 나다나엘은 자기의 선입견을 일단 접어두고 빌립을 따라가 본다
그런데 예수님이 빌립을 따라온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칭찬을 하신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속에 간사한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놀라 묻는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더 깜짝 놀란다. 그는 정말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메시야를 깊이 묵상하며 간절히 오시길 사모했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을 한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 까.
아무도 모르게 메시야를 만나길 기도했는 데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그런 자신을 만나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로 예수님께 왔지만 빌립을 보내어 나다나엘을 부르신건 예수님인 것이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한 그속에 간사한것이 없다는 것과 참이스라엘인이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창세기의 야곱을 연상시킨다.
야곱은 그이름이 '발둿꿈치를 잡다. 간사한' 이란 뜻인데 '간사'는 낚시를 할때 쓰는 미끼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미끼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된 것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 간사한 것이다. 야곱은 그 이름 처럼 간사했다.
그러나 야곱은 이러한 본성에도 하나님을 찾는 열심으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이긴자'란 뜻의 '이스라엘'이란 칭호를 받는다.(창32:28) 그리고 성화의 단계를 거쳐 참 이스라엘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열두지파의 아비가 된다.
나다나엘은 야곱이 평생에 걸쳐 이룬 성화를 이미 이루어 놓고 참 이스라엘인으로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참'이라는 것은 진짜라는 뜻으로 겉과 속이 같은 즉, 진실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그런 솔직함으로 '어떻게 나사렛에서 선한것이 나겠느냐'라고 물었지만 빌립의 와보란 권유에 더 의심없이 빌립을 따라간다. 그리고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구주로 고백을 했다.
이 당시의 갈릴리엔 자칭 메시야들이 많이 출몰 했다고 한다. 그들 중엔 그저 단순한 미치광이도 많았지만 소소하게 초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나름 그럴듯한 강론도 펼쳐 가면서 제자들을 이끌고 포교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거짓메시야들이 판치던 시대에 나다나엘은 한눈에 예수님이 자신이 고대하던 진짜 메시야임을 알아본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수 없는 영적인 직관이며 그러한 감각은 나다나엘의 진실함과 순수함, 그리고 기도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나다나엘에겐 고집과 교만이 없었다. 충분히 성경말씀대로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며 고집을 부리며 따라오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항상 메시야를 갈망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따랐겠지만 친구에 대한 존중과 관대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의 이런 성품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빌립을 통해 불러 제자를 삼아 주신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실제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직후에 자신의 고향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을 목격한다.
이 결혼식이 나다나엘 또는 요한의 결혼식이라는 설이 있지만 어찌됐든 신랑이든 하객이든 나다나엘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일 이후에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무한 복제해 수만명을 먹이신걸 보았고, 또한 그날 밤에 바다 위를 걸어 오신 것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숱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할수 없는 큰 이적들과 권능을 목격하게된다.
이어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다음의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 말씀은 설명할 필요없이 창28:10~15의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을 인용 하신 것이다.
사실 야곱은 꿈을 꾼후, 실제로 땅과 후손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로 인한 더 큰 영적인 축복은 받지 못했다.
여기서 하늘이 열린다는 뜻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자들이 하나님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말씀은 성도들의 기도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상달되고 또 그응답이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시대 성도들에게 그대로 실현이 되고 있다.
예수님의 삼중직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다.
구약시대때의 선지자,제사장, 왕의 직분은 장차오실 메시야의 예표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내려오는 계시를 전해주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인간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역할이며, 왕은 그 두직분 사이에서 인간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역할이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께 나아갈수있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영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자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처럼 우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이어질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아셨듯,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의 결점, 죄들, 사람들에겐 숨길수 있으나 예수님 앞에선 숨길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부족한 와중에도 예수님을 사모하며 의지하는 마음도 아신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묵상할때 예수님이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전심으로 구하고 기도할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심리학에서 '단순 접촉의 원리'란게 있다. 아무런 의미없이 단순히 접촉을 해도 그 접촉의 빈도수가 증가할수록 그 대상에 호감을 생기고 융화되어 가는 원리이다.
이렇듯, 아무런 의미없이 접촉만 해도 그러한데, 의미있게 전심으로 자주 접촉하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가 된다.
나다나엘은 그렇게 오실 메시야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수없이 접촉했고 그로인해 그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 순전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늘 예수님을 생각하며 졉촉한다면 예수님의 거룩함이 옮겨지고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반면 부정한 것을 생각하고 보는 자는 이와 같이 사단의 부정함이 옮겨지는 법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게 되어 거룩하게 된 자라 하더라도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시간보다 세상 것을 더 접하는 사람은 거룩함을 유지 하기가 어렵다. 자주접하는 것에 물들 수밖에 없다.
우린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믈 때의 그 첫사랑,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얻은 성결함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성도는 '구별된 사람들'이란 뜻이다. 어둡고 더러운 세상으로 부터 잘라져 나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이의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백성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죄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마5:8절에서도 마음이 깨끗한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깨끗함은 그리스도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다.
불신자이나 나름 솔직하고 착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솔직하고 착할 뿐이지 거룩하진 못하고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신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거룩함을 얻기 위해 틈나는 데로 예수님과 접촉해야 한다.
세상것을 접촉하면서는 절대로 거룩해질 수 없다. 여기서 접촉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직업상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접촉하는 것과 마음으로 접촉하는 것은 다르다.
사단은 미디어를 통해 또는 사람을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오염시키려 접촉해 온다. 그들을 받아 들여선 안된다.
필히 세상것에 물들어 더러워진 마음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 늘 마음으로 예수님을 접촉함으로 거룩하여져서 예수님을 사다리 삼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참이스라엘인, 참신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의 산ㅡ 나현미
첫댓글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이의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백성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죄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마5:8절에서도 마음이 깨끗한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다. 그 깨끗함은 그리스도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다. 불신자이나 나름 솔직하고 착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솔직하고 착할 뿐이지 거룩하진 못하고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신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함을 얻기 위해 틈나는 데로 예수님과 접촉해야 한다. 접촉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직업상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접촉하는 것과 마음으로 접촉하는 것은 다르다. 필히 세상것에 물들어 더러워진 마음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늘 마음으로 예수님을 접촉함으로 거룩하여져서 예수님을 사다리 삼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참이스라엘인, 참신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 수14: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