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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에서 잘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출판업자들이 많다. 사진은 헌책방 ‘고구마’의 이범순사장이 책을 분류하는 모습. [사진 신인섭 기자] |
‘헌책 폐인’ (헌책 매니어)이 늘고 있다. 인문적 교양을 갖춘 30∼40대 젊은 사장들이 온·오프라인에 헌책방을 차리는 등 업계에 부는 새로운 바람과 맞물린 현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헌책 매니어라면 웹 서핑보다는 ‘도보 순례’를 더 즐기는 편이다. 토요일 오후 제법 이름이 알려진 헌책방에 한번 가 보시라. 홀쭉한 배낭을 메고 느긋한 여유를 뽐내며 서가를 탐색하는 손님이 있다면 십중팔구 헌책 폐인이라고 보면 맞다. 그러나 그 손님의 눈빛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새로운 광맥을 캐는 듯한 광부의 표정처럼 사뭇 진지하고 호기심에 가득 차 있다.
그랬다. 헌책 폐인들이야말로 ‘양서의 리사이클링’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문화 파수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책에 미친 바보’라는 뜻에서 스스로 책바보(看書痴)라고 불렀다면, 헌책 매니어들은 헌책 폐인 이라는 호칭을 무슨 훈장인 양 여기는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에 탁발 순례하듯 헌책방 기행기를 수년째 연재하는 최종규씨가 대표적인 헌책 폐인이다.
운좋게 희귀본을 찾을 수 있는 것도 헌책방만의 즐거움이다.
최씨는 지난 1∼3월 인천 아벨서점에서 세번째 헌책방 사진 전시회(hbooks.cyworld.com)를 열 정도로 헌책의 향기에 푹 빠져 있다. 헌책 전도사라고 해야 할까. 결코 이들 못잖은 헌책 매니어들도 적잖다. 시집 초판본 전문 수집가인 L시인과 S출판사 P국장, 그리고 서울을 떠나 수집처를 청주로 옮긴 S씨 등. 특히 서울 홍대앞 온고당(02-335-4414)에서 ‘작업 중’ 여러 차례 조우했던 전직 장관을 지낸 N선생은 반세기가 넘도록 헌책을 수집하고 있다.
왜 헌책에 매력을 갖는가. 서울 성동구 금호2가동에 위치한 헌책방 고구마(goguma.co.kr)의 이범순 사장은 언젠가 “헌책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속시원한 대답은 못 되겠지만, 이 말로밖에는 설명하기 힘든 매력이 진짜 헌책에는 있다. 좀더 덧붙인다면 서울 용산의 헌책방 뿌리서점(02-797-4459)의 처마에 붙어 있는 문구가 어떤 힌트를 줄지도 모르겠다.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시인 기형도는 ‘오래 된 서적’에서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 나는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곡절 없는 헌책이 어디 있으랴마는 주인으로부터 탄핵된 헌책들 가운데는 ‘저주받은 걸작’이 적지 않다. 공공도서관이라는 인프라의 부족, 그리고 심지어는 작가들에게 도서 기증을 요청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도서관 행정 및 도서 구입비 부족은 지식기반 사회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새로운 주인의 간택을 기다리는 헌책들은 지식정보의 산실로서 제 구실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웃한 일본의 경우 이미 메이지 시대 때부터 헌책방이 활성화되었다. 가령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문인인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기러기』(1911)에는 헌책방을 출입하는 의대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헌책은 비교적 경기를 타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팔리는 책의 종류는 유행에 민감하다. 이른바 군부독재 시절에는 주로 대학생들이 이른바 ‘금서’를 찾곤 했다. 공안기관의 금서목록은 오히려 운동권 학생들의 커리큘럼이었고, 그런 책들은 헌책방에서 은밀히 거래됐다. 70년 필화 사건을 부른 김지하의 『오적』은 단연 인기 품목이었다. 고구마의 이 사장은 79년 봄 청계천 헌책방에서 순전히 『오적』을 베끼는 데만 5000원을 지불해야 했다고 한다.
헌책방이 판매하는 책의 종류가 싹 달라진 것은 90년대였다. 참고서와 사회과학 서적은 예년만 못했고, 95년을 전후로 대중소설·만화·잡지·명상 서적류가 인기를 끌게 된다. 만화책의 수요가 특히 급증했다. 소설 『천년의 사랑』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신화』『슬램덩크』 같은 책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뿌리깊은나무’ 등 잡지 창간호나 최남선의 『심춘순례』와 같은 희귀본을 찾는 독자들도 꾸준히 늘었다.
최근 들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광수전집』『한용운전집』 등 오래 전에 출간되어 절판된 작가 전집류를 비롯해 외국 이론서들이 각광을 받는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의 인기는 모아북(02-324-8789), 책창고(02-557-1616) ,숨어 있는 책(hiddenbooks.co.kr) 등 인문서적 전문 헌책방이 탄생한 덕분이다. 헌책방도 일종의 문화사업일진대 주력 서적류를 정해 마케팅의 차별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바람직한 현상이다. 최근에 와서는 디지털 카메라 붐 덕분인지 사진집을 비롯해 디자인과인터넷 사업 관련 서적들이 인기다. 강운구·최민식 같은 사진가의 사진집은 디카 매니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헌책방 주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 여름 장마철이다. 책이 비에라도 젖으면 몽땅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헌책방 주인들은 대체로 마음씨가 고와서 단골들이 ‘떼’라도 쓰면 모질게 굴지 못한다. 37년에 나온 박영희의 『회월시초』를 어느 헌책방에서 떼를 써 ‘헐값’에 산 경험이 있는데,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헌책방 출입이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자와 교수들이 버젓이 저자 사인이 담긴 책까지 중개상에 넘겨 시중에 유통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난다. 돈이 없어 『맹자』를 팔아 밥을 해 먹었다며 웃음을 터뜨린 이덕무 같은 사연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유독 정년퇴임 교수들의 경우가 더 심한 편이다. 모교 도서관에서조차 도서 기증을 꺼리기 때문이다. 후학들 혹은 지역사회가 관심을 갖고 이들 소장도서를 한데 모아 일종의 ‘작은 도서관’을 세우면 어떨까 싶다. 장기적으로는 영국의 헤이온와이 같은 전문적인 ‘헌책방 거리’를 조성하여 가내 수공업 수준을 넘어서는 규모의 경제학을 모색해야 마땅하리라. 비록 손때 묻은 헌책들을 취급하지만, 헌책방이 갖는 문화적 의미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헌책방은 도시에 꽃핀 문화 오아시스 공간으로서 훌륭히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고영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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