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금) 오랜만에 대구에 갔다.
대구는 고향이기도 하지만 반겨줄 친구들이 있어 꼭 가야할 곳인데도 올해 들어 첫걸음이다.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김정의, 최완식, 박창규 세 동문이 나와 있어 인사를 나누고
예정대로 먼저 동구 둔산동의 옻골(漆溪) 마을부터 가보기로 했다.
옻골 터줏대감 최완식동문이 안내를 하고 묘골 출신의 박창규동문이 차를 몰아 마음 든든하다.
실은 옻골은 우리 집안과도 연분이 있어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얘기를 자주 들었던 곳이라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하며 벼르던 곳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예비지식을 좀 얻으려 검색하니 옻골 마을은 이미 관광 명소로 지정돼 있다.
대구 동구 옻골마을은 임진왜란 때 대구지역 의병장으로서 선무2등 공신으로 녹훈된
태동공(台洞公) 최계(崔誡)의 아들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이 광해군 8년(1616)에
이 곳에 터를 잡은 이래로 약 400여 년간 경주최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이다.
마을 뒤에는 주산인 해발 390m의 옥고개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왼편에는 황사골,
오른편에는 새가산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터는 세장하며 농토 또한 비교적 좁은 편이다.
(....이하 생략...)
그리고 작년 6월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옻골 마을에 관한 블로그, 카페는 인터넷에 많이 올라 있다.
'대구시 둔산동 옻골마을'로 검색하면 잘 찍은 사진과 소개 글을 볼 수 있다.
百弗庵 崔興遠선생이 효행으로 정조 때 정문 표창을 받아 세워진 정려각(旌閭閣)이다
정겨운 돌담길을 따라서 걸으니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마을 이름이 옻골인 것은 옛날에는 이 곳에 옻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택인 백불고택이다. 百弗古宅은 百弗庵 崔興遠(1705~1786)선생이 거처하시던 곳.
종택 건물의 중심이다. 수구당(數咎堂)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최흥원선생은 정조조에 승정원 좌승지 겸 경영참찬관에 중직되었던 실학자다.
효행으로 정조 때 정문 표창을 받아 마을 입구에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져 있다.
백불암이 66세 때에는 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교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 사람이 서 있는 뒷건물에서 반계수록의 교정작업을 했다고 한다.
다음은 종손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최완식동문이 마루로 올라가라고 해서 올랐더니 종부가 친히 차와 과일로 대접했다.
김정의 회장은 담장 뒤 저 넓은 땅이 모두 종택의 정원이라고 한다.
崇慕閣에는 옻골 경주최씨 문중의 중요자료가 전시돼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전시된 자료들은 거의 박물관 수준이다.
400년에 걸쳐 문중의 각종 문서, 유품들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보존했는지 놀라웠다.
먼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할약한 台洞公 崔誡 선생이 쓰시던 칼(劍)이 눈길을 끈다.
문중의 여러 귀중한 기록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전시돼 있다.
그 중에는 판서를 지낸 대학자 星山人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선생의 필적도 있다.
안내해준 최동문은 건물과 주위 유적 하나 하나 자세한 설명을 하였으나
기억력이 감퇴한 탓인지 다 떠오르지가 않아 더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여간 옻골 마을은 400년간 내려온 양반촌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
대구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하는 느낌과 함께 가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
이상으로 옻골 견학을 마치고 일행은 아양교 부근 현풍할매집 곰탕을 맛있게 먹고
월남 파병용사가 모는 차를 타고 달려 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로 향했다.
박창규동문은 다들 아시겠지만 묘골 박씨다. 원래는 순천 박씨인데 박평년의 후손들이
이 곳 묘골에서 살아 地名을 따서 묘골 박씨로 일반에겐 더 알려져 있다.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의 자손이 유일한 생존 후손이어서 사육신 여섯 분의
신주를 이 곳에 모시고 이름하여 육신사(六臣祠)라고 붙였다고 한다.
입구의 六臣祠 현판 글씨는 박정희대통령의 필적이다.
홍살문을 지나 사육신 여섯 분의 이름이 새겨진 육각기념비를 지나 成仁門으로 향한다.
대구시와 달성군은 국비, 시비, 군비를 합해 약 180억원의 비용을 들여 이곳에
약 20 가구의 한옥을 개축하고, 기념관 건립, 문화체험관, 전통놀이마당 등을 만들고 있는데,
이 사업은 2011년 마무리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 방문객에는 공개하지 않는 숭정사(崇正祠) 내부를 박창규 동문의 도움으로 들어갔다.
숭정사 안에는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나왔다.
다음은 보물 554호 태고정(太古亭)이다. 일명 一是樓라고도 하는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 묘골의 입향조)이 성종 10년(1479)에 세운 별당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太古亭의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필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묘골 마을은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도 있었다.
묘골 입구로 나와서 오른편 지름길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주요 민속자료 제104호로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묘동 박황(妙洞 朴煌)가옥이 나온다.
이 집이 바로 삼가헌(三可軒)이다. 박팽년의 11대손 성수(聖洙)가 이곳에 집을 짖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했다고 한다.
묘골 박씨 자손들은 이 마을에서 더 많이 살아왔다고 하며
종택 건물도 비교적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처음 김지미 주연으로 나온 박경리의 '토지' 영화는 이 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박창규 동문의 본가도 이웃에 있는데, 현재는 伯氏가 낙향하여 살고 계신다고 한다.
파산서당 앞 연못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상으로 옻골에 이어 묘골 견학도 마쳤다.
최완식, 박창규 두 친구의 친절하고도 자상한 안내에 감사드리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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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기에 나오는 작자 이연님과 박창규님은 대구초등교 동문입니다. 보내주신 여행기를 이 곳에 옮깁니다.
작년 한국 갔을때 내 막내동생하고 둔산동 옻골 마을에 갔다 왔어요.
경주최씨라고.....
팔공 보성아파트에 살았지만 둔산동에 문화재가 있는줄도 몰랐지요. 아이챙피야~~~~
아래사진 옻골 갔을때 종가집 가는길의 돌담 같은데 사진이 너무 작아서????
다방면으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이쁜 미야가 자꾸 보고 싶구나.
옻골과 묘골 기행 잘 보았습니다. 묘골은 여러번 가봤는데 여기 살면서 옻골은 가보지 못했습니다. 자세하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구 곳곳을 누비며 남은 여생을 즐겁고 보람되게 살고 있는 청수님의 건안을 빌고 또 빕니다.
잘 보존된 경주최씨문중의 유품들을 유심히 보면서
후손들의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옻골,묘골 두루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