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선배님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감동...
교지에 실릴 예정이라 하시니 오타난 부분이 눈에 띄는군요.
27째줄 끝 부분 "발리"-발이
52째줄 동네
밑에서 9째줄 그 의식도
밑에서 4째줄 현재까진
밑에서 3째줄 120억년이면
* 본 글은 약간의 내용만 수정하여 제가 근무하는 동주여상 교지에 실을 예정 입니다. 시간이 계신분은 읽어 보시고, 수정 혹은 삭제 사항이 있으시면 지적 바랍니다.
2000년 10월 26일 춘천 공설 운동장에 섰다. 10시 정각 42,195km를 향해 총성이 울렸다.
출발! 만여명의 참가자 중 풀코스에만 약 6,000여명이 참가 하였으므로 출발을 하는데만 10분 이상이 걸렸다.(신발에 칩을 달고 뛰므로 기록엔 상관이 없음)
인파속에 묻혀 그냥 뛰었다. "그래 오늘은 완주가 목표다. 5시간안에 들어 오기만 하면 된다"
내가 마라톤에 입문 한것은 건강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술, 담배를 너무나 많이 했고,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을 돌보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마라톤에 대해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해 봄. 학교에서 건강 진단을 받고 나니, 2차로 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순간 생각이, 내가 지금 이나이에 병원 신세를 져야 하나! 아니다.
다음날 곧바로 헬스장에 등록을 하였고, 얼마후 부산 아마추어 마라톤 최강팀인 "오뚜기 마라톤"에 가입을 했다. 2000년 9월 통영 하프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하여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
사실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을 하려면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고, 하프 대회 8번(어느 누가) 이상의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하프 대회 한번의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춘천 대회에 최초 10km를 신청 했었다.(대회 운영상 하프는 제외 했음)
전날 부산에서 춘천가는 전세 버스에서 풀코스를 신청하고 참가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총무에게 풀코스 배번을 요구했다.
입씨름 끝에 총무가 "그럼 배번을(남의 이름)드릴테니, 하 선생님이 혹시 제한 시간안에 못 들어오시면 우린 기다릴 수 없으므로 이곳으로 오십시오" 하면서 식당 전화 번호가 적힌 명함을 주었다.
5km 지점을 지나니 음료수가 있었다. 자원 봉사자 학생들과 시민들이 박수를 친다. 땀이 많이 나므로 이후 5km 간격으로 계속 물을 마셨다.
춘천은 호반의 도시이다. 의암댐을 지나서 계속 호수 주위를 달렸다. 늦가을 춘천의 경치는 너무 아름다웠다. 산에도 단풍, 물속에도 단풍! 10km 지점부터 숨이 가팠다. 선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니 끝이 안보인다. 내가 너무 오버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 "일단 하프(중간) 지점 까지만 가자. 그후는 나도 모르겠다."
하프 지점엔 매트가 깔려있어 신발에 달린 칩에 기록이 된다. 춘천은 순환 코스다. 하프를 지나니 발리 저려온다. 신발끈을 너무 조였던 것이다. 날씨가 쌀쌀하여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이미 손가락이 굳어져 신발끈을 푸는데 5분여를 낭비했다.
25km 지점을 지나니 약간의 언덕이 왔다. 의암댐 상류, 춘천댐을 지나고 있었다. 길가에서 그냥 소변을 보고, 계속 달리는데, 이젠 더이상 못뛸것 같았다. 20km 지점에서 초코파이 2개를 먹었는데도 허기가 져왔다. 겨우 30km 지점에 도착하니 맛있는 바나나가 있었다. 바나나 2개와 음료수를 마시니 다시 힘이 났다.
이후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 하다가 35km 지점까지 왔다. 이젠 도저히 힘이 없어 길옆 인도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머리에 풍선을 단 사람 주위로 한무리가 모여 달리고 있었다. 4시간 페이스 메이커 였다.
저 무리만 따라가면 4시간 안에 들 수 있다. 이제부터 내 정신이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군중속에 파묻혀 데모하는 사람같이 따라서 뛰었다.
다리엔 쥐가 났지만 잠시 지체하고 또 따라 갔다. 저멀리 춘천 공설 운동장이 보였다. 마지막 10여분은 지나간 나의 삶이 환영처럼 떠오르고 눈물이 났다. 땀인지 눈물인지 남들은 몰랐다. 3시간 58분 16초(공식기록).
나를 걱정하던 당시 오뚜기 클럽 총무와 많은 사람들이 한참 뒤에야 들어 왔다. 풀코스 전체 완주자의 25% 안에 드는 기록 이었다.
이렇게 나의 첫 풀코스 마라톤은 대성공리에 끝났다. 많은 환영도 받았고 기분도 뿌듯했다.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니 또다시 나태해 졌다. 술, 담배, 연속된 나 본인과 집안의 우환. 여전히 마라톤은 했다. 이후 2001 동아 마라톤을 비록하여 풀코스 5번, 하프 수차례 등을 참가 했지만 기록은 별 진척이 없었다. 개인 사정으로 오뚜기 마라톤 클럽도 탈퇴했다.
그러다가 2002년 봄 어느날 부산대학교 효원 마라톤 클럽 이라면서 메일이 왔다. 정말 기뻤다. 재학시절 동아리라곤 한번도 가입을 못했는데, 졸업 후에라도 기회가 오는구나. 당연히 가입하여 열심히 참가하고 있다.
2002년 7월 20일 여름 방학이다. 교장선생님께서 올해는 학교에 공사가 있으니 방학 중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난 이미 몇주 전부터 차곡 차곡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바로 집에와서 짐을 실었다. 동내 아는 후배가 차를 가지고 왔다. 지리산으로 향했다. 한달간 머물면서 마라톤 연습도 하고, 정신도 가다듬을 것이다. 한달전 사전 답사도 했다.
대원사 입구 야영장에 도착하니, 공원 관리 사무소에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야영을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이 민박을 하였다.
다음날 부터 뛰기 시작했다. 대원사 입구 매표소에서 새재까지 왕복 15km인데 고도차가 약 500m나 나기 때문에 상당히 가파르다. 주위에 경치는 좋지만, 자동차가 수시로 지나가는 것이 부담스럽다. 시간은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정도 걸린다. 낮에 햇볕이 따가워 주로 이른 새벽이나 오후 늦께 달린다.
한번은 달리고 있는데, 자동차 한대가 옆에 와서 아는체를 했다. 돌아보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상이 조폭(?) 같아서 그냥 갈려고 하니 "수고 하요" 했다. 감격 스러웠다. 힘이 들지만 달리고 있을땐 이세상 누구 보다도 뿌듯한 자심감이 든다.
솔직히 낮엔 무료하다. 캠프를 차린 이후 동주여상 교감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께(지리산 등반) 인사도 했고, 그외 아시는 몇분이 다녀 갔지만,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아무 책이나 잡지를 구해서 읽기도 했는데, 그 중 "봉순이 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언덕을 오르면서 힘이 들때 봉순이 언니의 힘든 삶을 되새겨 보기도 했다.
첫주가 지나고 둘째주 부터는 야영을 했다. 돈도 절약되고 솔직히 야영을 하면 재미 있는 일도 있다. 야영장엔 사람들이 많아 지겹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온 목적은 피서가 아니라 마라톤 이었다. 하루에 한번은 거의 뛰었다. 올라갈땐 아주 힘이 들고 내려올땐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지리산 중에서도 대원사 코스를 선택 했느냐 하면 그건 "수구 초심"이다. - 여우가 죽을땐 머리를 고향으로 돌린다 -
물론 난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그러나 공자님이 말하는 불혹의 나이 인데도 아직 난 아무런 업적(직척)없다. 인생에 있어서 큰 획을 긋고 싶었다.
나는 음력 1961년 12월 3일(양력 62년 1월 8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명상에 태어났다. 이곳에서 초등(국민)학교 3학년 까지 다녔다. 싸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고, 나무도 잘했다.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2학년 인가 3학년 땐가 나무를 하다가 손가락을 약간 다쳤다. 시골이라 치료를 잘못하여 지금까지 불구인 셈이다.(이후 교사란 직업, 군대문제 등 수많은 제약이 따랐다.) 사실은 그때 죽을뻔 했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다.
대원사 코스를 매일 달리면서 어릴적 시절을 매일 떠올린다. 실제로 코스 중에 내 생명을 빼앗을뻔 했던 그 장소가 있다.
아버지가 경제적 무능력 자라(미련 없이 사시다 간 분이라고 생각됨) 우린 이사를 했다. 산청군 단성면으로, 이곳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도 갔다. 원하는 학과, 대학이 아니라 중도 하차하고 군대나 갈려고 했다.
6개월 가량의 공백이 있었는데, 마땅히 갈때가 없어 서면에 있는 부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지식을 많이 축적 했던 곳이다.
군대는 현역으로 가고 싶었는데, 국가에서 보내 주질 않았다. 악몽같은 14개월을 보내고 다시 대학 입시를 봤다. 운칠기삼, 재수로 내가 그렇게 원하던 부산대학교 지리교육과에 입학을 했다.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그해 치러진 2.12총선(12대)에 적극 참여 했다.(군사 독재가 무너지는 시발점)
얼마후 내가 집안에서 막내가 되었다.(원래는 아닌데) 너무 슬퍼 울지도 않았다. 부산대학교 다니는 4년동안(졸업후 상당 기간까지) 내가 매일 변함 없이 찾아간 곳은, 지금은 없어진 장전 시장 옆 밀양집이다.(최근에 그 주인집 아지매를 수소문 했지만 알길이 없다.)
어쨋든 졸업후 교사란 직업도 얻었다. 32살인가 33살때인가 결혼도 할려고 했지만 결과는 못했다. 집을 한번 샀다가 엄청 손해만 봤다. IMF 이후 터진 빚 보증 관계는 나에겐 결정타 였다.술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그래서 마라톤에 입문 한 것이다.
지리산 캠프 셋째주엔 비가 많이 내렸다.
다시 민박집으로 짐을 옮기고, 빗속에서도 뛰었다. 정말 행복하다. 지난 음력 설 몇일 후 서면에 있는 철학관을 찾은 적이 있다. 이제 부턴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라 했다. 처음에는 20,000원을 줄려고 하다가 기분이 좋아 30,000원을 주었는데, 잘 했던것 같다.
캠프 22일째인 2002년 8월 10일날 효원 마라톤 클럽에서 김병호 임시 회장님과 이상금 교수님을 비롯하여 20여명의 대규모 가족을 이끌고 방문을 했다. 우린 비가 오는 밤에도 렌튼을 들고 다같이 뛰었다. 술도 마음껏 마셨다. 다음날 아침에도 뛰었다. 8월 11일 일요일 오후엔 지리산 주위 역사 유적지를 관람시키고, 난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스스로 약속한 날이 아직 일주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4주째다. 월요일이 지나고 벌써 화요일 새벽이다. 비가 왜이리 많이 올까?(지난 주 월요일 부터)
다가오는 일요일 캠프를 정리하고 지리산 등반을 할 것이다. 천왕봉에 가기 이전 중봉에서 술도 한잔 할 것이다.
이 세상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아주 많다. 모두들 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난 내 주위 사람들을 많이 의식을 했는데, 이젠 그 의시도 떨쳐 버리고 싶다.
맑은날 지리산의 밤 하늘엔
별이 무수히 많다.
모두가 우주의 일부이다.
결혼, 2세, 행복,....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 하는 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다 똑 같아진다. 인류의 역사가 언제까지 연속 될진 모르겠지만, 현재 까진 지구 역사의 1,000분의 1도 안된다. 그리고 이 지구도 우주의 일부인데, 우주도 앞으로 120억년 이면 소멸 된단다. 우주가 없어지면 과연 신(God)은 존재 하겠는가? 모르겠다.
2002년 8월 31일 부산대학교 교내에서 열리는 "효원 마라톤 클럽" 창단식에 빨리 참가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