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숙님
5. 14.
불법사드철거 김천평화촛불 906회
벌써 운영팀이 나와서 준비를 하고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집회 시작전 모여들고 있다.
묵념과 구호
이동욱 공동위원장이 "오늘 집회를 30분만 하고 김천촛불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할 시간을 갖겠다고 김천 사람들은 꼭 회의에 참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현정 부위원장이 시간이 지났지만 지난 5월 4일 있었던 기자회견에 대한 설명을 했다.
여기서 낭독했던 시를 소개했다.
<한미, 동맹은 없다>
권말선
미국이 말하는 ‘든든한 한미동맹’이란
점령군으로 들이닥쳐
70년 넘는 세월 동안
분단과 전쟁을 낳고
끝없이 착취하다 결국 다시
전쟁의 불구덩이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
바로 이것인가?
너희 미국이 허락한 한미동맹이
그렇게나 든든하고 좋은 것이라면 어디
우리도 너희처럼 똑같이 해 줄까?
캘리포니아, 뉴욕, 워싱턴
혹은 적당한 도시 아무 곳이나
널찍한 땅을 강제로 빼앗아
주민들을 이리저리로 내쫓고
너희 돈으로 으리으리한 군사시설 짓게 하고
너희 돈으로 우리 무기 잔뜩 사게 하고
우리 군인들 넉넉히 주둔시킨 뒤
너희 군대를 하수로 부리면서
너희 땅에서 전쟁을 일으킨 다음
미국을 두 토막 내고 철조망으로 벽을 세워
너희 국민들끼리 서로 적이 되어 싸우게 하고
무시로 전쟁의 공포에 떨게 해 볼까?
또 너희 피땀으로 일군 경제를 요리조리 착취하고
너희 미국 땅에서 온갖 세균무기실험도 하고
너희 미국 땅 곳곳을 발암물질로 오염시키고
1년 365일 하늘과 바다 육지에서
너희를 지켜주겠다는 핑계로 전쟁연습 해대고
백악관이나 펜타곤이나 월가나
막무가내 불법도청으로 엿보고 엿듣고
간사한 놈 하나 골라 꼭두각시 대통령 세워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주권 다 능멸하며
자주나 통일은 꿈도 꾸지 못하도록
간섭하고 방해하고 옥죄는 일
70년 아니 100년 혹은 천 년, 만 년
동맹을 넘어 혈맹이라 우겨가며
어디 우리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 주랴?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동맹 따위, 우리는
필요 없다
아무리 막대한 힘을 가졌다 해도
아무리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다 해도
금수만도 못한 약탈의 제국
동맹을 가장한 식민지 놀음
거부한다
단 한 번도 진정한 평화
단 한 번도 고상한 인류애
단 한 번도 깨끗한 양심
단 한 번도 진정한 배려
단 한 번도 상대에 대한 존중
가져 본 적 없는 더러운 미제국주의와
동맹, 우린 필요 없다
태고적부터 홍익인간을 배워 온 우리
척양척왜를 골수에 새긴 우리
자주통일을 오매불망 소원하는 우리
그런 우리의 선택은, 양심은
온누리에 평화의 날개 펼치는 것
머잖은 날 우리 날갯짓에
너희 점령이 무너지도록
너희 제국이 사그라지도록
우리는 쉼 없이 날으리라
자주, 평화, 통일의 날개
8천만 민족 하나되어
힘차게 펄럭이리니
온누리 감싸리니
너희 미국이
강요하는 동맹
이제 더는
필요 없다!
박석민 자문위원의 평화이야기 아홉 번째, 시간이 촉박해서 짧게 줄여서 했으나 준비한 자료가 있어 그대로 옮겨본다.
주제와 제목은 “북-일 관계정상화, 미국은 왜 두 차례나 가로막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상을 보기 전에 현재 한반도, 남북 상황은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분단과 냉전체제로 인해 70년 세월을 고통과 힘든 시대를 모든 민중이 감내하고 있는데, 이 상태가 유지되는 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힘 관계 때문인데, 내부적으로는 1948년 남북이 각각 분단 정권을 수립하고 외세가 개입한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고 정전체제는 하나의 민족임에도 세계에서 가장 적대적인 관계로 살아온 분단 시대를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외적으로는 미소가 대립하며 냉전체제가 유지된 40여년간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등으로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구도가 유지되면서 분단과 냉전체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구도가 해체되면 분단도 냉전체제도 흔들릴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면에서 1990년대 초반, 탈냉전 시기에 한소 한중 수교, 유엔 동시가입, 남북합의서 채택, 한반도비핵화 선언 등이 추진된 것은 한반도의 운명이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준비가 안되어 있었지만...
남은 적대국인 소련과 중국과 수교를 하고, 북은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면서까지 북미대화에 나섰지만 지난번 평화이야기 주제처렴 미국은 이를 걷어찼고, 북일수교가 진행되는 것을 미국은 결사적으로 막아 나섰습니다. 그 구도가 이뤄졌다면 미국을 한편으로하는 5:1 구도가 형성돼서 한반도 정세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형국이 되었을 테지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지금 현재 다시 북중러 대 한미일 대결이 더욱 가속화되는 신냉전을 맞고 있어 분단과 냉전체제가 해소될 전망이 매우 어두운게 현실이지만... 역사는 민중의 투쟁으로 전진한다는 진실로 오늘도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촛불을 들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큰 투쟁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영상에 본 것처럼 2002년 9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사상 첫 양자 정상회담에서‘조일 평양선언’에 서명한 뒤 악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북일 수교 협상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습니다.
북-일은 1991~92년, 2002~2004년 적대관계 청산과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모두 미국의 견제 탓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88년 7월7일 일본 정부는“일본과 조선간에 존재하는 현안의 모든 측면에 대해 북조선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날은 한국 노태우 대통령이“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직후로 노태우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특별선언)으로 나라 안팎에서 북한과 공존·협력하겠다는 의지를 공식 발표하자마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북을 향해‘관계정상화 협상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미국 정부가‘7·7선언’석 달 여 뒤인 1988년 10월30일에야 북-미 외교관 사이의‘중립적 장소에서 실질적 대화’를 허용하는 “신중한 방안”(modest initiative)이라는 새 대북정책을 내놓은 사실에 비춰보면, 일본 정부의 반응은 전광석화와 같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성명 발표만으론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이듬해인 1989년 3월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식민지배와 관련해 북한에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밝혀 1980년대 말까지 적대적 긴장에 가까운 냉랭한 관계였던 북일 관계 개선에 물꼬를 텄습니다. 이는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베를린 장벽 붕괴, 특히 한-소의 급격한 접근이 소련의 남하를 막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요구를 보다 본격화한 것입니다.
1990년 9월24일 자민당(가네마루)과 일본사회당(다나베) 대표단이 조선노동당 초청으로 일본 총리의 서신을 들고 평양에 갔습니다. 곧 바로 9월26일 김일성 주석과 자민당 사회당 대표간 3자 회담이 열렸고, 일본 대표단은 일본 총리의 친서를 전하며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속죄와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고, 김 주석은 북-일 국교 교섭 개시 제안으로 화답했다고 와다 하루키가 쓴 <북한현대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노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공동선언’(3당 공동선언)이 발표됐는데, 1항은 “전후 45년간 조선인민에게 입힌 손실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고 인정”한다로 8개항의 선언은 빠른 시일내 국교 수립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계정상화를 넘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까지 선언한 것은 획기적으로 그만큼 일본은 북일 관계 정상화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북-일은 ‘3당 공동선언’의 합의 내용은 1990년 11~12월 중국 베이징에서의 세 차례(11월3~4일, 17일, 12월15~17일) 예비회담을 거쳐 1991년 1월30~31일 평양에서 ‘조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정부 간 제1차 본회담’을 여는 등 속도를 낸 것은 일본으로서는 한소 수교의 파장을 흡수하려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탈냉전기 유일무이한 패권국의 입지를 다지려 한 미국은 이를 가로막았습니다. ‘3당 공동선언’직후 북일 수교 회담 견제를 위해 일본에게 “북이 핵사찰을 받아들이게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미국 요구에 순응해온 일본은 미국 견제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이를 북일간 평양 1차 회담에서 전제로 제시했고, 북은 회담 성사를 위해 일본인 납북 사건에 해결에 나서는 등 애를 썼지만 미국의 압박 수단인 핵 문제에 부딪쳐 회담은 어려워졌습니다. 3차 본회담(1991년 5월20~22일, 베이징)에서 일본은 핵안전조치협정 체결(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 수용) 등을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고, 북은 “핵 문제는 조미 간에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 입장으로 1992년 8차 회담까지 진행했지만 미국이 핵 문제를 가지고 북일 수교를 견제해 결국 북일 수교 협상은 파탄나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을 하고 ‘조일 평양선언’을 채택했지만 2003년 북의 NPT 탈퇴 등 ‘2차 북핵위기’가 터져 결국 북일 수교는 미국의 의도대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북-일 접근 → 북핵위기 발발’의 패턴이 1992년 2002년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반복된 것인데, 1990년 자민당과 사회당이 방북했을 때 미 국방장관인 베이커가 “핵”문제를 꺼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동북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을 적으로 만들고, 핵 문제로 한반도 운명을 옥죄는 미국의 패권 야욕이 한반도 운명을 “핵” 문제로 질곡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이처럼 1990~91년,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관계정상화 노력이 무산된 뒤 북-일 관계는 출로를 찾지 못한 채 수렁에서 헤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과 일본은 냉전시기보다 더 심각한 대결 상태가 되었고, 그 한복판에는 미국에 굴종적인 한국의 윤석열과 미국의 패권 전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1990년대 초반 한반도 정세 변화, 남은 사회주의권과 수교에 나서고, 북은 일본과의 수교가 이뤄졌다면 한반도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핵”으로 남과 북을 통제하는 미국은 현재 상황이 너무 좋은 상태로 여기고 있겠지만 한국에는 목숨같이 평화를 원하는 소성리, 김천 사드 반대 투쟁이 있어 결국은 평화가 승리할 것입니다.
이번주는 광주민중항쟁 43주년을 맞습니다. 오늘 광주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미루겠습니다.
2015년 5월 14일, 오늘 대법원에서 국가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조작했던 강기훈의 유서 대필 조작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날입니다. 역사는 승리한다는 진리는 이런 사실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드 반대 투쟁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투쟁을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 집회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에 불러서 광주민주화운동때 널리 불려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시 한 수로 기록을 마무리할까 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떨어져 가지 말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앞에 가며
너 뒤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너 먼저 가란 말이랑 하지 말자
열이면 열 사람 천이면 천 사람
어깨동무하고 가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가시밭길 험한 길
누군가는 가야 할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