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태장재사(安東金氏 台庄齋舍)는 안동 서후면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로 (신)안동김씨 시조인 태사 김선평(金宣平)의
단소(壇所)를 지키고 봉향(奉享)을 위해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태장재사(台庄齋舍) 원경
1711년(숙종 37) 작은 집을 지었다가 1749년(영조 25)에
확장하였는데,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사헌부 지평 김양근(金養根)이
경향 각처의 뜻을 모아 현 위치에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터를 닦아
1793년(정조 17)에 28칸을 중건하고 익실(翼室 : 분채의 좌우편에
딸려 있는 방)과 문루(門樓)를 옮겨 지었다.
태장재사 측면
1913년 주사(廚舍)를 현위치에 확장하여 10칸을 중건했고
1960년 풍수해를 당해 재사를 보수했는데, 재사는 일(一)자형의
이상루(履霜樓)와 口자형의 재사, ㄷ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튼 일(日)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장재사 이상루(履霜樓)
재사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상루는 묘제(墓祭) 뒤에 음복과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재사는 민도리집의 간결하고 검소한 건물이나, 누(樓)는 이익공(二翼工)의
팔작지붕건물로 누상부(樓上部)에는 3면에 판벽을 치고 판문을 설치하였다.
이상루 정문
태장재사 관리사 출입문
관리사 안쪽
이상루(오른쪽)와 참제원실, 유사실 등
이상루 안쪽
관리사 방향
향나무
이상루를 돌아 단소 쪽으로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단소 입구
(신)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단소
안동김씨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은 36세 때
고창군주(古昌群主, 현 안동)로 군병(郡兵)을 일으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병산(甁山)에서 대파,
그 훈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아부(太師亞父)에 올랐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원년인 918년 8월에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공신을 포상하고 당시 고창(古昌) 성주였던
김선평을 안동김씨 시조로 공신에 처하고 고창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김선평은 신(新,후)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좌우 무인석과 제단비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 김선평 제단
(三韓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金宣平 祭壇)
(신)안동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60명, 왕비 3명, 부원군 3명,
정승 15명, 판서 35명, 대제학 6명, 종묘배향공신 6명을 배출했다.
대대로 벼슬을 하였기에 금관자(金貫子)로 일컫는다.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인조 때 상신에 올랐으며,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순조 비 순원왕후, 헌종 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에
이르기까지 세도가문이 되었다.
단소 뒤에서
(신)안동김씨의 주요인물로는 김상근, 김계권, 김계행(1431~1517),
김번, 김원효, 김극효, 김상준, 김상용, 김상헌, 김광현, 김수증, 김창집,
김조순, 김옥균, 김좌진, 김병연(김삿갓) 등 많은 인물이 있으며
인구수는 47.000여명으로 인물 배출에 비해 다소 적은편이다.
김선평의 묘사는 매년 음력 10월 10일이다.
참고로 신(新) 또는 후(後) 안동김씨는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며,
구(舊) 또는 선(先),상락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고려후기 수상격인 문하시중.첨의중찬을 지낸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로 인구는 520,000여 명이다.
단소와 태장재사 사이
송림
태장재사 입구의 김선평 신도비각
신도비각인 조녕각(肇寧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