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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예수님께로 이끌고 성령역사하사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심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서 전진하는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36:31)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 곧, 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62,63).
그 때에 우리의 입술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만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는 사도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삼을 것이다.(COL 160.3)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2:12 ,13)신다. 자아가 그대의 영혼과 크신 일꾼이 되시는 주님 사이를 가로막아, 장애가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그대의 고집이 하나님께서 그대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고상한 목적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의 힘을 의지할까 두려워하고 그대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을 놓고, 그분 없이 인생길을 걸어가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라.(COL 161.1)
우리는 교만과 자부심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첨과 칭찬을, 주고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아첨은 사단이 하는 일이다. 그는 참소하고 비난하고 아첨한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는 영혼들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사람들을 칭찬하는 자들은,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그의 조수(助手)들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교역자들은, 모든 칭찬의 말을 물리치도록 하라. 그들로 자신을 숨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게 하라, 만민의 눈을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신 그에게”(계1:5)로 향하게 하며, 만민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송이 그분께 올라가도록 하라. (COL 161.2)
주를 경외하는 자의 생애는 슬픔에 젖어 있거나, 우울한 생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거나 나그네처럼 탄식하는 생애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자존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자들은,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와 산 연합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반석 위에 떨어지지 아니한 자의 마음은, 자기가 완전하다고 자랑한다. 사람들은 웅장한 종교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갈 만한 넓은 길로 걸어가기를 원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신망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구주를 저희 마음속에서 내쫓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기쁨의 샘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의 근원이 된다.(COL 162.1)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 (COL 162.2) 예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 진리의, 광범위한 영역을 펼쳐 보이셨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이나 금언과는 다른, 예수님의 교훈을 지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랍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아 왔으며 이것은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들의 정서를 형성시켰다.
세속적 생각과 현세의 사물이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자주 설명하셨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적성질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혼란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성경말씀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분의 교훈의 대부분이 그들에게, 거의 잃어버려진 것처럼 보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분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자비롭게 약속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해할 수없는 많은 것들을, 말씀하지 않으신 채 남겨 두셨다.
이것들 역시 성령께서, 그들에게 알려 주실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하늘의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해를 촉진시킬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16:13)라고 말씀하셨다.(DA 670.3)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요16:13)이라고 불린다. 보혜사의 일은 진리를 밝히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분은 먼저 진리의 성령으로 마음 가운데 거하시며, 그리하여 보혜사가 되신다. 진리 가운데는 위안과 평화가 있으나 거짓 속에서는, 참된 평화와 위안을 찾을 수가 없다.
거짓교리와 유전을 통하여, 사단은 마음을 지배하는 세력을 얻는다. 그는 사람들을 거짓표준으로 인도함으로, 품성을 일그러지게 한다. 성령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말씀하시며, 진리를 심령에 깊이 새기신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잘못을 드러내고, 심령에서 그것을 내쫓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택하신 백성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다.(DA 671.1)
성령의 직무를 제자들에게 묘사하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흥겹게 한 기쁨과 희망을 그들에게 고취시키려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신, 많은 도움을 인하여 기뻐하셨다. 성령은 예수께서 그분의 백성을 높이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고상한 선물이었다. 성령은 갱생시키는 주선자로서 주어져야 하였으므로 이분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었다. 악의 세력은 여러 세기동안 강해졌으며, 이 사단의 속박에 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죄는 신성의 제 삼위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으며 그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실 것이었다.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의 성향들을, 이기며 자신의 품성을 그분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성령을 주셨다.(DA 671.2)
성령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 내리”(요16:14)라고 말씀하셨다. 구주께서 그분의 사랑을 표명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신 것처럼 성령께서도 그분의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셔야 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 곧 그리스도의 명예는, 그분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DA 671.3) “그(진리의 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이는, 말씀의 전파가 전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분이야 말로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유일한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함께할 때에만, 양심을 일깨우거나 생애를 변화시킬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명령들과 약속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를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영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교육이나 유리한 지위가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함이 없이는 아무도 빛의 통로가 될 수 없다. 씨가 하늘의 이슬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약동하기 전에는, 복음의 씨 뿌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께서 기도하던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은, 신약성경 어느 한 책도 기록되기 전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어느 한 복음 설교도 설교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원수의 증언은,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행5:28)였다는 것이었다.(DA 671.4)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교회에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은 처음 제자들에게 해당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모든 다른 약속들처럼 이 약속도, 조건 하에 주어진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장한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령에 관하여, 말하지만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거룩한 능력의 지도와 제재를 받도록, 영혼을 복종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을 사용할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야 한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 안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2:13) 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저희가 하늘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은혜와 지도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만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요청과 수용을 기다린다. 믿음으로 요청하는 이 약속된 축복은, 그에 따르는 다른 모든 축복들을 가져온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주시는 것이며, 또한 그분은 받을 수 있는 역량대로 각 영혼에게 공급하려고 준비하고 계신다.(DA 672 .1)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 : 12)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제자들의 사업이, 그분께서 하신 사업보다 더 고귀한 것이 아니라, 범위가 더욱 커지리라는 것을 의미하셨다. 그분은 단순히 이적을 행하는 일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아래 일어날 모든 일을 말씀하셨다.(DA 664.5)
주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그분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의 못 박힘과 부활과 승천의 광경들이, 제자들에게는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들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였고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그 교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 거룩하신 교사가 바로, 그분께서 그로라 하신 분임을 알았다. 제자들이 그들의 경험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높일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풀리고 부드럽게 되어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믿었다.(DA 667.1)
구주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은 시대의 종말에 처한, 그분의 교회에게 하신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그분의 놀라운 계획이 다만, 보잘것없는 결과만을 성취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일을 하기 위하여 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약속의 성취를 확실히 깨달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고 선언하신다.(DA 667.2)
아직도 제자들이 구주의 무한한 재원(財源)과 능력을 알지 못할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요16:24)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성공의 비결은 그분의 이름으로, 힘과 은혜를 구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간청하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영혼을 대신하여 마치 자기 자신의 소망인 것처럼, 겸손한 탄원자의 기도를 드리신다. 모든 성실한 기도는, 하늘에서 듣는다.
비록 기도가 유창하게 표현되지 않을지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봉사하시는 지성소에 올라갈 것이며, 예수께서는 서투르거나 더듬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완전한 그분 자신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향과 함께, 이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실 것이다.(DA 667.3) 신실과 성실의 길은 장애물이 없는 길이 아니요, 기도가 필요함을 알게 되는 매우 어려운 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그 능력의 근원은 가장 연약한 인간에게도 열려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고 말씀하셨다. (DA 667.4)
그리스도께서는, “내 이름으로”(요14:13)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들을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가치를 통해서만, 그들은 주님이 보시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끼쳐 주신 의로 말미암아, 그들은 귀중하게 헤아림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주께서는,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을 용서하신다. 그분은 그들에게서 죄인의, 비루함을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믿는 그분의 아들을 닮은 모습이, 그들 안에 있음을 인정하신다.(DA 667.5)
주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낮게 평가할 때에 실망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이 그분이 그들에게 매기신 값에 의하여, 자신들을 평가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하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그들을 구속하시려고, 그처럼 값비싼 심부름으로 그분의 아들을, 보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쓰실 데가 있으시며,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고 그분에게, 가장 큰 요구를 할 때에 매우 기뻐하신다. 만일 그들이 그분의 약속들을 믿는다면, 그들은 큰 것을 기대할 수 있다.(DA 668.1)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품성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분의 사업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주의 약속은 조건 하에 주어졌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고, 죄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순종함으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DA 668.2)
모든 참된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마음이다. 만일 우리가 동의하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그분의 뜻과 일치하도록 융합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받은 자극을 실행하는 데 불과하게 될 것이다. 세련되고 성화된 의지는 그분의 일을 봉사하는 데서, 최고의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그분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생애는 계속적인 순종의 생애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존중하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우리들은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DA 668.3)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시고 율법대로 생애하신 것처럼, 우리도 능력을 얻기 위하여 강하신 자(그리스도)를 붙든다면, 그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이며, 무엇을 해야 될는지 우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권고에, 의지할 수 없다. 주께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간다면 그분의 비밀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것이다. 주께서 ‘에녹’[살아서 하늘로 올라감]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와 교통하려고 가까이 오시는 때에, 우리 마음은 우리 속에서 때때로 불타게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은,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 바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지혜뿐만 아니라, 능력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순종과 봉사에 필요한, 능력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모든 것”은, 인간의 머리요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DA 668.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전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완전한 선물, 즉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은혜의 무한한 근원이 될, 선물을 주려고 노력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고 말씀하셨다.(DA 668.5)
이전에도 성령께서는 세상에 계셨으며 구속 사업이 시작된, 바로 그 때부터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오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동안, 제자들은 다른 조력자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지 않게 되자 비로소 제자들은, 성령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그때에 성령께서는 오실 것이었다.(DA 669.1)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며 이 사랑에 마음이 감동되면,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MB 113.2)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를 마치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 14,15)고 부언하셨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끊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들이 잘못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물론 회개와 고백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이긴 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이, 그 실수를 고백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 대하여 긍휼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줄지라도, 불만을 품거나 상처를 받은 자신을 동정하지 말며,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을 용서받으려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MB 113.3)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널리 용서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시면서, 마치 그 약속의 뜻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처럼 이렇게 부언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7~9).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 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하고 기도했을 때 용서의 참 뜻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 :12)라고 말한다.(MB 114.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자신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우리를, 그분께로 이끌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악의 짐을 담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거하시며, 그대를 통하여 소망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죄로 병든 마음에, 하늘의 평화를 가져다줄 천국의 사랑을 나타내시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처음부터 가져야 할 조건은, 그분에게서 자비를 받고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MB 114.2)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어주기 위하여, 우리가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 하나는 그분께서, 우리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을 깨닫고 믿는 것이다(요일4:16).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자,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기만을 부리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실수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를 축복하고 구원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것 외에는 볼 것과, 하나님께 내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사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품성의 결함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사단은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대가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대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양심을 더럽힌 일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사단에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말할 수 있다. 죄를 범하여 기도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부끄럽고 매우 비참한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믿어야 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용서 곧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 많은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를 둔, 선물로서 주어진다.(MB 115 .1)
변명으로 우리의 죄를 감소시키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실로 무겁다. 오직 ‘갈바리’만이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면, 죄가 우리를 눌러 뭉개 버릴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분께서 우리와 입장을 바꾸셨다. 그렇게 할 책임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그분의 율법에 공의로우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인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7:18).(MB 116.1)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감해 주시며 그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실 때에 그분의 거룩한 은총 가운데로, 그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죄인은 오직 범죄 한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없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망과 부활의 공로를 통해서만 죄와, 율법의 정죄와 범죄의 형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이야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신앙이란 믿는 것뿐만 아니라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1SM 389.1)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명목상의 신앙을 가지고는 있으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공로를 차지하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명목상의 신앙에 관하여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19,20) 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인정은 하면서도, 동시에 저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멀리하고 저희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저들의 개인적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들의 신앙은 단순히 정신적인 동의에 그치며, 진리를 판단하는 것으로 전부를 삼는다.
그러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 영혼을 성결케 하지 못하고 그 품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롬8:29,30)던 것이다.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르심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것이며,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사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1SM 389.2)
많은 사람들은 구속 사업의 첫 단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혼돈하고 있다. 회개란 죄인 자신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는, 한 가지 일로 여겨왔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죄인이 반드시, 합당한 자격을 얻어야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물론 회개가 용서의 선행조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며,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도 없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위하여 준비할 수도 없다. 죄인은 회개하지 않는 한,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죄인 자신이 하는 일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선물이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어야 한다.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이전에, 그의 마음속에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으로 가득 차야만 하는가?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제일 첫 단계는,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이 이끄심에 응할 때에 그가, 회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1SM 390.1)
죄인은 잃어버린 양으로 상징되었으며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친히 나아가 찾아가지고 돌아오지 않는 한 결코, 제 우리로 찾아 돌아올 수 없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회개할 수 없으며,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다. 주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죄인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분 자신을, 바라보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영혼을 이끄시고 힘을 주시며,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는 회개의 체험을 얻도록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단 한 발자국도 신령한 생애로 나아갈 수 없다.(1SM 3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