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다 도모히코가 일본화용 붓과 안료로 그려낸 가상의 인물이 실체를 지니고 현실(혹은 현실 비슷한 것)에 나타나서 제 의지에 따라 입체적으로 돌아다닌다는 건 분명 놀랄 일이었다."(396)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의 그림 속 주인공인 기사단장이 키 60센티미터의 모습으로 글 속 주인공 '나'에게만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오직 '나'에게만.
'나'는 미대를 나와 추상화를 그리고 싶어 하지만 생계 때문에 초상화를 의뢰 받아 작업을 해 왔다. 아내와의 결별로 친구네 아버지(아마다 도모히코)집에 은거한다.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집이므로 은거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그곳에서 멘시키라는 미지의 재벌가로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거액의 금액과 함께. 고민 끝에 수락한다.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기법이 아니라 잠재 의식을 끌어내 인물의 특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초상화는 의뢰인 멘시키의 마음을 산다. 그리고 그와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해 간다. 멘시키의 딸로 추정되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도 그리게 된다.
미니커처 기사단장은 왜 아마다 도모히코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현현했을까?
<기사단장 죽이기>는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공격에 반발하여 암살미수사건을 일본화로 나타낸 그림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첫 머리에도 '기사단장 죽이기'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 모차르트 오페라와 아스카 시대를 다룬 일본화의 조합일게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그림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그림 실력의 획기적 변혁을 경험한다. 침체되었던 그림 활동을 이것을 계기로 왕성하게 펼쳐나간다.
1편에는 아직까지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지 가닥을 잡을 수 있는 것들이 나와 있지 않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의 연속이다. 멘시키의 존재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멘시키는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그림처럼 방울 소리가 들려온 석관 동굴 속에 1시간 가량 어둠과 함께 죽음을 맛보기를 원했던 묘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치 대원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아마다 도모히코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작품일거라는 멘시키의 설명이 아직 밝혀진 <기사단장 죽이기>그림의 전부다. 미스테리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그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2편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아뭏든 나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이번이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읽은 것이 처음이다. 왜 일본인들이 그의 책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다. 560여 쪽에 걸친 1편에서 알듯 말듯한 사건 전개는 후속편을 읽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루키의 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