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수정액도 페인트 아니겠어?
김개미
습도는 높고
구름은 가까이에서 검은색이었다
벽지 속에는
크랙이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벽을 칠하는 동안
나는 아주 더러웠다
그러나 샤워를 다섯 번이나 하는 날도 있어서
나는 아주 깨끗했다
어떤 때는 라디오를 켜야 했고
어떤 때는 라디오를 꺼야 했다
어떤 때는 전화를 받아야 했고
어떤 때는 전화를 안 받아야 했다
페인트칠을 하면 좋은 점은
아무 생각도 안 해서였다
붓을 내려놓으면 가끔 생각이 안 나서 괴로울 때도 있었는데 그건
생각이 나서 괴로운 것보다 덜 괴로웠다
내가 붓을 들면
페인트에 날개가 돋아
내 어깨에도 정수리에도 날아가 앉았다
동공 속으로 뛰어든 페인트 방울은
아직도 앉을 곳을 찾고 있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고양이
고양이는 페인트에서 쥐를 찾아 뛰어다녔다
눈알처럼 반짝이는 페인트 방울을 핥아먹었다
고양이가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화를 냈을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건 칠할 벽이 아니라
칠한 벽이었다
칠한 벽이 자꾸만
칠할 벽으로 바뀌었다
완성이란 타협의 다른 표현일 뿐
페인트의 세계에도 완성이란 없었다
에이스와 요거트를 먹으며 쉬었다
어디서 비행기가 천둥 같은 소리를 냈다
손톱을 두 번 깎고서 붓을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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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미 / 1971년 강원도 인제 출생. 2005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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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정액도 페인트 아니겠어? / 김개미
장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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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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