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내 오른팔 손목에 환자등록번호가 적힌 푸른색 띠와 팔보호(혈압측정, 혈관주사, 혈액채취 금지)라고 쓴 노란색 띠가 둘러져 있었다. 간호 인력에게 주의를 촉구하는 표지인 모양이지만, 내 눈에는 이제 더는 유방암 환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라는 경고문처럼 보였다. 수술 전 병원 측에서는 가슴 한 쪽을 전부 절제하고 나면 상실감이 클 테니까 복원수술을 동시에 하라고 권하였다. 늙어도 여자는 여자라지만 이 나이에 가슴 성형까지 고려한다는 게 부질없는 욕심이란 생각도 들고, 애꿎은 내 뱃살까지 생고생을 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어 망설여졌다. 게다가 현미경으로 혈관을 잇는 이식수술이 7시간 이상 걸린다니 더럭 겁이나 더 고민할 것도 없이 포기하였다. 겉옷만으로 감춰지지 않는 움푹 꺼진 오른쪽 가슴이 보기 민망하긴 해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술 후에 오른팔을 쓰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은 것만도 어디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사람들이 모이면 세 명에 한 명은 암환자라는 말이 떠돌듯이 암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흔한 질병이 되었다. 유전적 요인도 있겠지만, 서구화된 식사나 운동 부족 등 좋지 않은 생활 습관 그리고 최근에는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의 사용으로 너무 많은 전자파에 노출되어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암 발병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어 의사들도 암에 걸리는 건 그저 불운이라고 말한다. 두 달 전 갑작스런 유방암 판정을 받고 너무 황당해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올봄에 건강검진을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통보에 안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무심코 거울에 비친 모습이 뭔가 좀 달라 보여 가슴을 조심스레 만져보니 긴가민가할 정도로 작은 멍울이 잡히는 거다. 그때는 별 의심 없이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나 한번 해보자고 가볍게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진료의뢰서와 조직검사 슬라이드를 챙겨 예약한 대학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유방암에 대해 기계적으로 설명을 하고는 대뜸 수술 날짜를 잡아주며 지금부터 병원에서 요구하는 검사를 받으라고 지시하는 거다. 어째 순서가 뒤바뀐 것 같아 몇 마디 질문을 던졌더니 나를 말귀 어두운 늙은이라 여겼는지 귀찮다는 듯 짜증스럽게 바라보는 바람에 무안해서 그만 자리를 털고 나왔다. 대기실을 가득 메운 환자들을 보니 의사에게 친절을 바랄 상황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일반 병원에서 먼저 받은 검사가 어쩌면 오진이었을지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를 안고 갔던 나로서는 정밀검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부터 말을 꺼내니까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으며 거부감이 들었다. 일본인 암 전문의 곤도 마코토는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사암을 괜히 건드렸다가는 암의 역습을 당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병원에서는 수익을 위해 무조건 수술을 시키려든다며 환자는 의사의 돈줄이라고까지 말한다. 의료도 사업인데 환자를 돈줄로 본다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환자의 사정은 묻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의 스케줄에 따라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게 당연한 듯 수술로 몰아붙이는 의사에게 어쩔 수 없이 내 몸을 맡긴다는 게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지난여름, 80년 만의 갑작스런 폭우로 순식간에 서울 강남 일대가 물바다가 되자 어떤 젊은이가 차 지붕에 올라앉아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막막하고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그 '서초동 현자' 의 모습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졸지에 암환자가 되어 망연자실하고 있던 내게 그 젊은이가 모든 건 지나가는 것이니 괜찮다고 용기를 내라고 일러주는 듯 했다. 아직 수술 날짜까지는 한 달 여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사이에 내 궁금증에 답해줄 수 있는 실력 있고 가슴 따뜻한 의사를 만날 기회가 생기길 마음 속으로 빌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우연찮게 유튜브를 통해 명의(名醫) 한 분을 알게 되었고,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우여곡절 끝에 정말 그분의 진료를 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방암 수술을 제일 많이 한 권위자답게 그분은 촉진만으로도 단번에 다른 의사들이 알아내지 못한 정확한 병명을 짚어냈다. 하지만 수술을 피하고 싶었던 바람과는 정반대로 내 경우는 전 절제가 불가피하다고 하는 거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라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분이 사재를 털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자들의 불편을 덜어주는 등 그동안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고 듣고 있던 터라 내게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는 의심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며칠 후 내게 직접 전화를 해서 MRI를 판독해 봤더니 촉진한 것과 똑같이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난 병원을 바꿔 그분에게 수술을 받았고, 지금 온코프리라는 유전자 분석검사를 하기 위해 수술시 뗀 조직을 외국으로 보내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검사 결과에 따라 항암 여부가 결정되지만, 림프샘에 전이가 없는 걸로 봐서 나는 항암을 하지 않게 될 것 같다고 너무 걱정 말고 기대해 보란다. 보통 의사들은 책임질 말은 피하는데, 오랜 경험상 확신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환자를 위로하고 싶은 그분의 연민의 정이 그만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나쁜 결과가 나오면 그땐 어쩌려고 속단을 하는지 그분이 난처해질까 봐 오히려 그게 나는 더 신경 쓰인다. 한편으론 그분의 아이 같은 솔직함과 천진스러움이 놀랍고 재미있어 속으로 웃게 된다. 어쨌든 내가 원했던 의사를 기적적으로 만나 수술도 잘 했고 회복도 빨라 한 달만에 이런 글도 쓸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여기저기에서 내 소식을 듣고 나를 응원해준 분들의 지속적인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는 걸 알겠다. 건강을 되찾으면 우선 그분들에게 내가 진 사랑의 빚을 갚으러 길을 떠나려 한다. 내가 그동안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하였다가 이번에 그들의 진정성을 깨닫고 큰 감동을 받았다. 왜 교회에서 고통이 은총이라고 말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내게 힘이 되어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길 오늘도 기도한다.
첫댓글 큰 마음 고생하셨습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남습니다. 생명 끝날 때까지 안고 가야 할 큰 고통이기에 평정심만이 최선의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