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비아 돌로로사☆]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비아 돌로로사]
김 석 시집 / 문학수첩시집 107 / 주) 문학수첩(2017.08.31) / 값 10,000원
================= =================
프롤로그
김 석
오월 한 날 극동
이방의 순례자 나는
은하계銀河系 별빛 목마름으로
마른버짐처럼 땅 팔레스티나로
새끼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성삼위聖三位
비아 돌로로사 예수의 14처소의 길을
뛰는 가슴, 두 손의 목마름을 여미며
사람의 아들 예수가 걸었던 길 찾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떡집이라 부르는 베들레헴부터
비아 돌로로사 채찍과 눈물로 14처소 길
왜 그래야만 했을까, 분단 지금 내 조국처럼
한 조상 아브람과 아브라함, 선민의식의 후예들
가나안 복지라는, 팔레스티나 땅 요단강과 갈릴리
무덤 없는 골고다와 찢긴 성벽 통곡의 길을 걸었습니다
척박의 땅 팔레스티나 하늘 꿈 사람들은
땅 위 선민이란 하늘 백성 됨의 순결을 빙자
칼과 불 들고 물어 형제에게 던지는 못난 일들을
찢고 찢는 마음으로 하늘, 하늘 위의 속까지 적의
칼 잠 속의 평화 위해 쇠 울타리의 공사가 한창인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다는 약속의 땅 베들레헴
예수 탄생 베들레헴은 아침 햇살 아래 철책 공사 중
앳된 유대 여자 군인들, 불안으로 나는 입성이었습니다
한 날 예수가 던진 말이었습니다
칼을 품고 형제 앞에서는 웃음을
돌아서 더욱 칼을 가는 족속들이여
땅에 평화를 주려고 내가 온 줄 아느냐
형제 미워서 웃는 너희들에게 칼을 던지려
불 이빨 볼 눈물 불춤을 던지려고 내가 왔노라
히잡과 차도르 무슬림 여인들과 등굣길 아이들
카키색 여자 군인들 총 멘 채 아이들 곁 스쳐 갔습니다
동박 박사들이 별빛 은하계 안내를 받아 왔던 길
앞서가던 별이 머문 한 밤 유대 땅 베들레헴은
파장 뒤 밤하늘처럼 별 눈들이 강보에 뉜 한 아이
까만 수염 사내와 암나귀처럼 다소곳 눈망울 여자
별 지붕 아래 말구유는 생피 냄새와 한 개 촛불 뿐
생피 냄새 말구유를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은
별 지붕 멸 아래서 별 눈으로 뉜 아기를 만나고
말구유에 윈 아이에게 황금과 유황과 몰약沒藥향
신 포도주 우슬초에 적셨던 맛처럼 몰약을 끝으로
입술 덮은 수염을 떨며 구유 아이에게 세 번의 절
오던 길 말고 다른 길 따라 베들레헴을 떠나라는 별들
수런거리는 별빛 소리를 보고 한밤 길을 재촉 떠났다는
예수의 땅 위 공생에 3년 하루 하룻날은
머리를 두고 눌 곳이 없었던 별빛 베개와
하루살이의 투명 창자처럼 진공眞空이었고
‘’과 ‘오!늘’ 묘유妙有 3년이었습니다
별 없는 낮 하늘의 별 계율을 가르치다가
낮 사람들 덫에 걸렸던 사람의 아들 예수
사람의 아들 예수의 고향이었던 베들레헴은
마른 아침 햇살 속 땅 사내들이 알루미늄 철책
사닥다리 알루미늄 타고 철책 공사 중이었습니다
슬픔과 비탄으로 길, 라틴어로 VIA DOLOROSA
예수가 맨발이기도 했던 33년 팔레스티나 지상 길
다윗 혈통이었지만 평생 먹줄 놓고 잡아 목수 요셉
목수 요셉 족보에 오른 예수의 마지막 세상길이면서
납작 세상 삶에서 하늘마음 사람들의 하늘나라 꿈 터
유월절 피 절기 맞춰 걸어야 했던 골고다까지 진탕 길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예수의 수모와 모멸의 길을
맨발 예수의 멍과 멍울 피 길바닥,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아멘과 회의 엇물린 맷돌 마음으로 나는 걸어 나갔습니다
칼에 대해 반드시 칼을 던져 답을 해야만 했던 때
칼날을 두드려 보습이라 외쳤던 사람의 아들 예수
십자가 진 예수가 걸었다던 비탄과 슬픔으로 길은
율법 유대인과 무슬림 사람들의 난마처럼 저자 길
비아 돌로로사 14처소의 잿빛 저자 골목 골목길을
분단과 실향의 사람 나는 고개 들어 마른 땅을 보고
고개 숙여 가나안 하늘을 생각하며 걸어 나갔습니다
에필로그
김 석
성지 순례 떠나던 날 70%가 산이란 분단 조국과
강남 강북의 서울은 중원中原으로부터 미중유 미세 먼지
흰옷과 흰 피 가슴으로 항거 굴복했던 미증유 병자년
호란胡亂호로 떼의 검붉은 말 갈퀴이듯 미세한 먼지가
먼지 속에서 좌우로 칼날처럼 한성판윤 선거였습니다
그러나, 피폐
땅의 90%가 황무지 그대로 팔레스티나 속 이스라엘
복지 가나안 땅은 지중해 동풍의 마른 날이었지만
햇살 오월과 푸른 종려 잎과 올리브 파란 알알 포도들
밤하늘의 별빛은 어린 시절 제사 때면 보았던 놋그릇이 듯
달밤의 헤엄 때면 빛 비늘이 온몸을 감싸듯 참 맑았습니다
나의 성지 순례는 팔레스티나
마른 우물처럼 사람들 눈동자와
가나안 복지 하늘 떡집 베들레헴에서
검은 남루와 누런 콧물 옷소매의 아이들
히잡과 차도르 주눅 눈동자 무슬림 여인들과
까까머리와 맨발 중학 시절 성경 시간에 들었던
포도 맛 대신 맨발 또래들 무성했던 발 냄새의
나중 포도주 맛에 잔칫집 사람들이 더욱 취했다는
포도 향기 사라진 마른 돌 항아리 지하 거미줄 계단과
고난 주간 때면 불렀던 영문營門밖 골고다 십자가의 길
부활절 흰옷 찬양대 틈에 끼어 불렀던 보배 갈보리 언덕
지친 몸이었지만 별빛 하늘 우러러 예루살렘 순례였습니다
붉은 살점과 피 십자가 길이면서
푸른 하늘 문 첫 부활의 터 골고다
종교 지도자들이
죽어서 산 예수 없는 부활 몸 터를 봉인
돌길 놓고 깔아 기념관처럼 분묘교회墳墓敎會
무덤 인봉印封 불을 켜 순례자들과 구경꾼을 초대
또한 나 어중간 사자 언덕 덮은 분묘墳墓의 순례
은현隱顯 예수 빈 무덤 터는 들어서지 못했지만
순례자들의 젖은 눈과 젖은 침묵 젖은 숨소리
물방울 돋듯 발걸음들 두 귀 적막 나를 열면서
납작 세상에서 내 속 나를 돌아보는 순례 사람들
죽어야 반듯이 사는 죽살이 순례자들 틈에 섞이어서
땅 사람들 목마름과 열혈 뒤져 떨림으로 순례였습니다
비무장 속 더욱 불 칼의 나라 늙은이라 그랬을까
예수가 묻혔다가 깬 부활의 터 열네 번째 예배 처소
14의 예배 처소만은 반쪽 나라 극동 이방인이라 그랬을까
선점 백인들에 밀려 뒤뜰 모습 극동 이방인 나였지만
흰 살결이지 못한 검은 피부 에티오피아 형제들
노아의 둘째 함 후예일 거라는 에티오피아의 사람들
에티오피아 형제들의 베들레헴 마구간처럼 초라 돌무덤과
神子 예수가 한 걸음 뜨거운 눈물로 걸었던 팔레스티나 저자 길 잊을 수 없습니다
플라스틱 물병 들고도 목이 말랐던 그날의
사람 성정 예수가 목마름으로 비아 돌로로사 길
무슬림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숨으로 저잣거리
믿음은 허심실복虛心實復의 밑힘이라야 다짐했지만
한 교포 예루살렘 멀건 된장국 부슬 쌀밥 앞에서
기도도 깜빡 허겁지겁 숟가락과 젓가락 붙들었던
밑힘이지 못하고 눈 귀 헐렁 배꼽시계의 내 모습
입전수수入廛垂手 밑힘이지 못하고 지금껏 나뿐의 나
숟가락 먼저, 밑힘 못된 나뿐 믿음 나를 보았습니다
내가 걸어 나갔던 비아 돌로로사 14처소 사람의 길
헤롯 안토니우스, 빌라도 법정으로부터 4백여 미터쯤
사자들의 터 골고다 언덕 성분묘교회까지 순례 길
유리 바다처럼 청결 성채이길 바랐던 예루살렘 성은
하늘 아래 머리 둘 곳 없다는 예수 말씀 때문이었을까
환한 불 켜 예수가 없는 무덤 예수 묻혔다는 환한 표지
천둥과 지진 골고다 하늘을 가려 종교의 지도자들은
부활 예수의 빈 죽음의 터 만들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웅좌, 성묘교회 밖은 버짐 꽃처럼 사람들의 낮은 집
사람들 지붕에 서녘 햇살이 선혈처럼 내려와 있었습니다
나도 하나님께 근원의 물음을 던지고
근원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때면
문제는 기제旣濟보다 미제未濟로 살아감이라는
패랭이 꽃길 작은 예배당 헐렁 검은 예복 목사님의
그때 검은 예복 목사님이 침방울 튀겼던 증거처럼
해결보다 사라짐을 붙잡는 눈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불가능으로 가능의 성경 말씀과 더불어 온 60여 년
귀와 마음에 담기 시작 오늘까지 말씀 성경 붙들고
더러 공중 기도 때면 부활 예수의 전능과 무소부재의
있어 없음과 없어 있음으로 예수의 부활과 십자가를
두 바퀴 자전거를 배우고 타듯 오늘까지 나였습니다
예수 이름 빌어 세운 두 일터서 38년 노 저었습니다
예수 없는 갈릴리, 물결에 휘말리듯 삶이 아니었을까
몸 나만 붙잡고 얼 나 놓은 기도氣道 내가 아니었을까
노를 놓아버린 정박으로 기도企圖뿐 내가 아니었을까
목숨 꿈틀 없는 허황 기도祈禱 70 나이 나 아니었을까
은유와 상징, 폭력적 언어 결합이 시인의 사명이라고
고장 피뢰침과 안테나, 불통 모국어 시인 아니었을까
믿음과 밑힘 참치부제 엇물린 풋감 내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루엣이나 오로라의 일렁거림처럼
비아 돌로로사 14처소의 순례 길은
어린 시절 바다 일터에서 돌아오시던 아버지
소금 눈썹과 검붉은 옹이 손바닥으로 여덟 남매
여덟 남매 배 채우셨던 어머님과 아버님 모습처럼
갈릴리 어부 시몬의 정맥혈뿐 손바닥 옹이를 잡아
사람을 낚는 베드로로 불러 주셨던 나사렛 사람 예수
부드러운 음성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비아 돌로로사 14처소 꿈결처럼 순례 잊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한 핏줄 두 마음 예루살렘
한 핏줄 두 마음 분단 내 조국처럼 적멸의 터
샬롬, 하루 안녕 기원하는 통곡의 벽 유대인들
샬롬, 무슬림 여인들과 마른 우물 눈빛 아이들
스물 나이 유대 여자 군인들 어깨 위의 총구 하늘
사자 언덕 덮은 분묘墳廟 홀황 어지럼으로 성화들
예수가 걸었다는 팔레스티나 사람들 저자 골목길
십자가 首 뒤를 따르는 흑, 백, 황, 순례 남녀들
순례자들의 피아니시모 목숨 빛과 순한 눈빛들을
마른 햇살 아래 푸른 하늘 버짐 꽃처럼 사람들을
400m 골고다 짧아 긴 순례길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단풍잎이 선혈처럼 곱다는 숲속마을 풍등
어린 시절 어머니가 치성 새벽을 올려드리듯
새벽이면 숲속마을 숲길을 걸어 중년 아낙들
안개 속 붉은 십자가 안개 길 교회로 갑니다
없어 있는 하늘나라와 분단과 분열 내 조국과
지아비와 새끼들, 새끼들의 새끼들 평안 하루 위해
정한수 뜨는 마음 새벽 문을 열고 새벽길을 갑니다
아내가 비운 새벽 서창에 불을 켜고 앉습니다
고통苦痛을 외면, 고통高通이지 못했던
신음神音뿐 듣지 못한 몸 나 얼 나를 뜯어봅니다
알루미늄 십자가 지붕 한사리 여礖처럼 드러납니다
교회 담과 시그널 사이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그널 앞 한 여자, 누런 월급봉투 시절 아내를 봅니다
그녀 품에 기대 숟가락 잡고 놓는 법 미완인 채 아이들
고만고만한 새끼들 어른이 된 아이들의 지금을 봅니다
어린 시절 명절 때면 더욱 흥남의 숙부님들이 그리워서
굽은 허리채 돌아눕던 할머니 한숨 새벽을 생각합니다
신음神音 듣지 못하고 신음으로 야곱처럼 나였습니다
경의선 철길이듯 찢긴 모르타르 길 비틀걸음 나였습니다
광림光臨 교회 십자가와 잿빛 지붕에 햇살이 내려옵니다
高生 향한 고생이 깜빡 속 영원과 영원 속 깜빡 법임을
신음呻吟과 苦生이 단잠으로 일흔 나이 눕는 법임 알았습니다
죽음이 다가오자 단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한 스승님의 엑스레이는 하루살이 창자처럼
시험 민둥산 예수의 40주야 그날 그때처럼
환히 속이 비었었다는 아드님의 전화였습니다
엑스선 속 실복實腹과 허심, 스승님 배 속 빈 나라는
안동 삼베나 한산 모시 햇살 속 사각거림이었을까
누에고치가 몸의 팔만 배 명주 올 올 감음이었을까
풀 먹인 하얀 빨래 어머니와 누이의 다듬질이었을까
빈창자 한결 마음 두 손으로 스승님, 스승님의 나라
하얀 믿음과 붉은 밑힘이 수평과 수직 4차원 그 나라
하루살이 창자처럼 ‘깨끝, 참’으로 스승님의 그 나라
종교은 은하계 별빛 세계라 태양께서는 볼 수 없다는
빈창자의 힘 스승님은 빈탕 한데 그 나라로 가셨습니다
요단강 건너 가나안의 땅은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복지 팔레스티나는 정종政宗 뒤엉켜서 풀무질의
예수가 걸어갔던 예루살렘과 비아 돌로로사 저자 길과
돌 위 돌 하나까지 70년 뒤 예루살렘과 분단 70년 나라
분단 시간과 공간 사람과 사람 관계 속 나를 봅니다
몸 나 벗어놓고 얼나 나를 붙잡아 살아가지 못했던
몸 맘 나를 놓고 깨끗 얼숨 나를 붙잡아야 하는 함의含意
보푸라기랄까, 진물 꽃이랄까 순례 길이었던 나, 그러나
간난艱難 풀무질과 죽살이 비아 돌로로사 14처소 별빛 길
딴에는
신음으로 신음神音을 다짐 순례자의 길이었습니다
분열과 불 섶 붉은 십자가의 내 나라
비아 돌로로사 저자 길처럼 분단 조국
문자판 덮어 놓고 두 손 나를 모았습니다
몸의 허리 한 올 또 한 올 누에고치 조국을
명주明紬올올 누에고치의 부활 날개 내 조국을
남북 좌우 두 날개의 활짝 비익조처럼 그날을
苦生 속 呻吟, 팔복교회 가던 길 샤론의 합창으로 그날을
기름 준비 다섯 처녀 등불 춤 그날 그려 손을 모았습니다
깨끝
은현隱顯과 은총
사람의 아들이 선택, 걸어가야만 했던
비아 돌로로사 14처소는 저자 길이었지만
척박 속 부활 숨 터 비아 돌로로사 길 여미어
마가 다락방 성령이 불의 혀처럼, 밑힘과 믿음
청결, 거룩으로 삶은 오순절 그때 불의 혀처럼
그렇습니다, 불의 혀가 장미꽃으로 피어오르는
십자가 즉 부활의 두 눈 두 손으로 순례였습니다
회의가 곧 아멘과 얼 춤으로 순례자 길이었습니다
.♣.
=================
■ 목차
프롤로그
14처소의 단장斷章
제1처소
제2처소
제3처소
제4처소
제5처소
제6처소
제7처소
제8처소
제3처소
제9처소
제10처소
제11처소
제12처소
제13처소
제14처소
에필로그
후주
평석 허중虛中 이명섭(성균관대 명예교수)《비아 돌로로사》평석評釋
.♣.
=================
■ 시인의 말
슬픔과 수난의 길이란 뜻의 비아 돌로로사 14처소 연작시는 70 나이테 성지 순례 후 3년간의 구상과 2년의 집필과정을 거쳤습니다. 나는 순례와 집필에 앞서 예루살렘과 골고다에 관한 성경과 성경 주석 등 자료들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읽었습니다. 또 20여 년간 현재玄齋 김흥호 선생님의 성경을 근간으로 생각 없는 생각의 동서 사상공부와 허중虛中 이명섭 교수님의 엘리엇 강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금수강산이라 하듯 성경은 요단강 건너 땅을 가나안 복지라 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약소민족 가나안의 영토를 분할, 지금은 팔레스티나로 개칭해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몇 신학자들은 8․ 15광복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우리가 꼭 분단을 위해 광복된 것처럼 지금의 우리나라 모습을 바빌론 포로 시절 분단된 유대 민족의 나라 꼴에 비유했습니다. 나 또한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걸었던 분쟁의 땅 팔레스티나의 비아 돌로로사 14처소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현장에 분단되고 분쟁 중인 조국의 어제와 오늘을 대입해 수평과 수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이 말한 복된 땅 가나안,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척박 14처소 길을 걸으면서 상식과 이성으로 나를 내려놓았습니다. 마른 남새밭 한 줄금 물이랄까, 호롱불 영성이랄까, 거죽 나를 내려놓아야 근원 내가 보인다는 로마서 1장 3~4절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1처소에서 10처소까지는 내 눈으로 본 것과 기록한 책들의 도움을 받았고, 11처소에서 14처소까지는 성묘교회 안에 있어 딱히 구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즉부활十字架卽復活이란 역설로 압축됩니다. 이 역설을 밑힘과 믿음으로 나는 분쟁의 땅 팔레스티나와 분단 조국의 70년과 지금을 시 속에 병치시켰습니다. 그러나 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임을 생각해야 했고, 주의시의 특성상 제재의 광활함과 주제의 확집確執 또한 붙잡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진술을 통해 이미지를 전개시켜야 했지만 진술의 탈출을 위해 병풍을 펼치듯 영상 기법과 동시동존의 돌올突兀한 이미지, 패러디, 모순 형용, 연과 행에 독립감을 주면서 시의 연계를 위해 단장斷章으로 썼습니다. 제재의 감수와 평석評釋을 써 주신 이명섭 교수님, 교정을 맡아준 주원규 시인, 아내와 함께 성지 순례의 길을 도와 준 아이들, 시인수첩 편집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 석
.♣.
=============== == = == ===============
김 석 詩集 [※비아 돌로로사※]
[ 해설 ] -
《비아 돌로로사》평석評釋
허중虛中 이명섭 성균관대 명예교수
들어가는 말
이 연작시는 김석 시인이 2012년 5월에 경험한 성지 순례를 증거한 작품이다. 시인이 필자에게 시평을 부탁한 것은 김 시인이 다석 유영모 선생의 수제자인 현재 김흥호 선생의 연경반 강의를 1983년 6월부터 청강했고, 현재 선생이 은퇴한 후 5년 반동안 현재 선생의 뒤를 이어 연경반을 맡아온 필자의 강의 중 엘리엇 강의부터 청강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0년에 태어난 다석 선생보다 2년 연상인 T.S.엘리엇도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힌두교와 불교 등 동양철학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했다. 영원의 상징인 다석의 “가온찌기”와 “꼭대기”가 바로 엘리엇의 “정점still point”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김석 시인은《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가 필자의 엘리엇 강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시에 나오는 “신음呻吟과 신음新音”, “납작 땅”,“사차원”등과 같은 것들은 필자가 연경반 강의에서 즐겨 사용하던 표현들이어서 독자들에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또한 필자도 2010년 4월과 2014년 2월 두 번 성지 순례를 하면서 시인과 같은 경험을 했다. 시인의 문제가 필자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 시를 정독하면서 다시 깊이 생각할 기회를 준 시인에게 감사드린다. 연작시 프롤로그의 첫 부분이다.
오월 한 날 극동
이방의 순례자 나는
은하계銀河系 별빛 목마름으로
마른버짐처럼 땅 팔레스티나로
새끼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성삼위聖三位
비아 돌로로사 예수의 14처소의 길을
뛰는 가슴, 두 손의 목마름을 여미며
사람의 아들 예수가 걸었던 길 찾았습니다
-<프롤로그> 부분
시인의 증언에 따르면, 석汐이란 필명은 1973년 오후 문학동인 시절 해운대 달맞이 집에서 마침 밀물 위에 달이 걸쳐있고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을 생각하다가 모인 대학 선후배들의 동의를 얻어 사용해 온 이름이라 한다. 시인의 ≪비아 돌로로사≫는 현재 김흥호 선생이 좋아하시던 소강절邵康節의 <청야음淸夜吟>의 산들바람처럼 시원한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둥근달이 떠올라 하늘 중심에 이른 곳으로부터/산들바람이 호수 면에 이를 때/이렇게 시원한 맛을/아는 이 극히 적은 듯하노라(月到天心處風來水面時 一般 淸意味 科得少人知).” 동양에서 달은 절대자의 상징이고 호수는 마음의 상징이다. 대낮의 태양열을 받은 호수물은 내 뜻(욕망)으로 뜨뜻해진 내 마음이다. 해가 지고 하늘 한가운데에 떠오른 둥근달을 내 마음 눈으로 집중하여 쳐다보면 시원한 성령의 바람이 불어 내려와 이마가 시원해지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 깃든다.
그러면 청야음과 만물제동의 도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도추道樞는 문에 박은 돌쩌귀(추=지도리)를 돌쩌귀의 구멍(도)에 고정시키고 문을 열고 닫으면 원을 그리면서 문이 잘 열리고 닫힌다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도추는 컴퍼스의 고정각을 원 중심에 고정시키고 운동각을 돌려 원주를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각형 한 변과 길이가 0과 같게 무한히 미분(lim=0)하면 원 중심처럼 길이가 0인 점이 된다. 모든 점들이 합쳐도 0이다. 그러므로 모든 점이 합친 원주가 원 중심과 같다. 모든 점들이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 집중된 원 중심에서는 모든 점들이 동일하므로 우주를 원주에 비한다면 만물제동이다. 다각형의 모든 직선의 시작과 끝이 한 점에 모여 둘의 간격이 사라지고 동시에 차별상이 사라져 모두 동일하게 된다. 미분의 효시가 된 다각형과 원의 차이가 소실되고 소진되어 다각형을 원으로 작도作圖하는 “실진법”에 관해서는 “§6 만물제동의 사차원”에서 상론하겠다. 하늘 중심에 있는 하나님 “도”의 달[月]에 마음 눈 “추”(지도리)를 집중하고 돌 때 내리는 “하나님”의 평화는 반대되는 충동으로 여기저기에 흐트러진 마음이 하나임 안에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된 상태다. 이것이 도추다. 도추는 저것과 이것의 차별 또는 분별을 초월하여 대립을 하나로 일치시킨다(彼是莫得其偶). 이것이 다름 아닌 중세의 신비 박사,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정의한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다. 사와 생, 십자가와 부활과 같은 차별상이 하나로 귀일되는 가온찌기다. 도추는 십자가를 지기까지 내 뜻을 비우고 천부께 순종하여 부활하신 대 효자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또는 유추로 볼 수 있다. 도추는 원 중심(環中)에 해당하는 지도리(돌쩌귀) 중심에 지도리를 고정시키면(樞始得其環中) 지도리가 원주를 그리며 무궁한 상황에 대응할 것이다(以應無窮). 원이기 때문에 원주의 어떤 지점에서나 걸림이 없어(無礙) 잘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나 잘 대응한다. 원주는 무차별 또는 무분별의 “하나”님이 세상 안으로 육화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환원)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집중하셨다(樞得). 내 뜻을 비우고 겸허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이 집중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도리처럼 지고 도신 것도 집중이다. 차별상이 있는 직선처럼 “목이 곧은” 교만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하셨다. 지도리 십자가는 그 집중의 상징이다. 지도리 십자가를 지고 돌면서 예수께서는 풍부에도 “예스”, 비천에도 “예스”, 나중에는 십자가에도 “예스”, 부활에도 “예스”하셨다.(고후1:19. 빌4:12). 대 효자 예수께서는 언제나(無窮) “예스(應)하셨다. 그래서 일도출생사 일체무애인(一道出生死 一切無礙人)이 되셨다. 고난의 불길이 곧 부활의 장미 길인 비아 돌로로사, 비아 돌로로사가 바로 차별상이 모두 하나로 귀일歸一한 만물제동으로 도추의 길이다.
시인의 필명 저녁 조수, 밀물 석汐자는 해가 지고 달이 반쯤 나타난(日旦冥而月且生)황혼 모습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이 세상에 속한 나의 뜻과 욕심을 비운다. 낮은 욕망의 불이 위로 솟아오르고 그 불을 꺼야 할 물은 밑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화승수강火昇水降의 촛불처럼 염상누수炎上漏水의 욕망을 상징하고, 밤은 그 욕망을 비우는 신비의 길을 가르친 십자가 성 요한의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많은 반달이 두 개로 축소된 多와 夕이 합친 유영모 선생의 호인 다석多夕은 세 끼 저녁밥을 축소하여 한 끼 저녁밥으로 귀일歸一시킨다는 뜻이라 한다. 일식은 그의 네 가지 일 중의 하나다. 일식은 주야통, 일좌는 천지통이고 일언은 생사통이며 일인仁은 유무통이다. 통은 시공간의 간격이 축소하여 0으로 사라져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무시공의 영원이다. 현재 선생이 애송하던 “일도출생사 일체무애인”의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이며, 승찬僧瓚의 “일공동양 제함만상一空同兩 齊含萬象”의 경지다. 시공간 간격의 특성인 차별과 분별과 대립과 반대가 사라져 모두 하나가 된 만물제동이며,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정의한 “반대의 일치”다. 다석은 이 만물제동이 틈이 있는 시공간에서 흡수 통일된 로마의 통일 “팍스 로마나”나 미국의 통일 “팍스 아메리카나”, 중국의 통일 “팍스 시니카”와 같은 국가 중심의 통일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께만 집중하면 좌도 중이요, 우도 중이며, 동도 중이요, 서도 중이 되는 “귀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만사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며”(롬 8:28),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이 더해지는”(마 6:33)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이 시의 여러 곳에 나오는 다석 선생의 “하루살이”도 이렇게 영원한 오늘 하루를 사는 귀일이다. 귀일은 하나(一)님께로 돌아가는 것(歸)이다.
필자는 연경반 강의에서 시간과 공간을 절대화하고 광속을 상대화한 뉴턴의 기계론적 시공간의 3차원 물리학과 반대로 시공간을 상대화하고 광속을 절대화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의 시공 4차원과 기하학의 사차원, 그리고 양자역학의 수직적 중첩 등의 현대 물리학 이론을 자연 계시적 “존재의 유추anlogia entis”로 사용해 왔다. 광속을 성서적으로 해석하면 광속은 빛인 하나님의 유추다. 시공간은 그 공간을 0으로 축소 수렴하는 불변하는 절대적인 광속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변수로 패러다임 교체가 일어났다. “존재의 유추”는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즐겨 사용해 온 전통적 비유법이다. 예수님께서 초월적인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사용한 겨자씨 비유, 빚 탕감 비유, 전 재산을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산 비유, 씨 뿌리는 비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 등의 비유들이 존재의 유추에 해당한다. 이 존재의 유추 방법은 보이는 자연 사물을 보고 그 속에 숨은 보이지 않는 이치를 미루어서 깊이 생각(推究)하여 밝히는 성리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방법에 해당한 것 같다. 이것은 또한 가까운 자연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먼 하늘에 있는 이치를 미루어 생각하는 “근사近思” 또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접근법이다.
이 비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이해되도록 잘 보이게 피조물에 드러났다”(롬1:20)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뉴턴의 시공간 물리학에 기초한 18세기 계몽주의 이래의 철학에서는 칸트처럼 감각적 경험만을 진리로 보고, 초자연적인 경험을 “초월적 환상”으로 전도망상顚倒妄想한 시각이 우세해 왔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투사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이 등장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돈(경제)으로 대치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이러한 자연관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에 등장한 자유주의 신학도 이러한 조류에 편승한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역설적 변증법 신학은 이러한 자연관에 기초한 “존재의 유추”를 파기하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성경 말씀대로 믿는 “신앙의 유추analogia fidel”를 옹호했던 것이다. 동양 종교의 개념도 특수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극한치가 0이 되는 미분, 연금술사의 돌 등처럼 이해할 수 있도록 피조물에 분명히 보여진 창조주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의 “유추”에 불과하다. 존재의 유추는 자연 자체가 곧 신인 동양 종교의 우주신론 또는 범신론과는 다르다. 유추에서는 같은 면보다는 다른 면이 한없이 많다. 다석 선생이 임제臨濟선사의 “내가 주인이 되는 곳은 그 어디나 진리(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말에서 “내가 주인이 된다”는 “작주作主”를 “내가 주님을 위(敬愛)한다”는 뜻의 “위주爲主”로 고친 것은 자연에 속한 내가 곧 주인(신)이라는 우주신론을 우주 창조의 유신론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의 간격을 축소하여 사라지게 한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시작품들poiemata속에도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인간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분명히 보여진 자연(롬:1:20)을 유추로 사용할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시인의 ≪비아 돌로로사≫에도 이런 존재의 유추가 등장한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간격이 축소되어 0으로 수렴되는 특수상대성이론이나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처럼 반대되는 상태가 중첩되어 포개지는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은 모순을 인정하지 않은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는 망상으로 업신여김을 받아 왔던 역설의 묘리妙理와 기적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sa는 내려가는 길인 십자가의 고통이 다름 아닌 올라가는 길인 부활이라는 역설이다. 고통스러운 고생의 십자가의 길이 부활하여 높이 태어나는 고생의 길이다. 라틴어 “Dolorosa”는 “슬프다”는 뜻의 형용사다. 이 글자를 상형문으로 보아 파자하면 반대되는 dolor(고통)와 rosa(장미)의 일치“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고통의 연옥불이 곧 천국에 핀 사랑의 장미다. 단테를 스승으로 벤치마크한 엘리엇은 ”불과 장미는 하나(And the fire and rose are one)“라는 말로 그의 대작, ≪네 개의 사중주≫를 끝맺는다. 시인의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가 부활이라는 초월적인 역설을 증거하는 진리다.
본문
§1.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의 38년 방황과 베데스다의 38년 된 중풍병자
시인은 프롤로그의 “마른버짐처럼 땅 팔레스티나”를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의 팔레스티나 아이들 모습이 합쳐진 이미지이며 유년 시절의 춘궁기의 모습도 떠올라 버짐 꽃의 이미지라고 했다. 이 이미지는 “흙 갈라진 집 문에서 내다보면서/벌건 침울한 얼굴들이 비웃고 으르렁거릴 뿐”인 ≪황무지≫5부의 “하얀 길”을 상기시킨다.
비아 돌로로사 제1처소의 관문 역할을 하는 요한복음 5장의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은 십자가의 길의 알파요 오메가 역할을 한다. 히브리어에서 집을 뜻하는 “바이트bayith”의 합성어인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질타하신, 헤세드가 없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정신적 상황과 예수님의 헤세드를 증거한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혈기 마른” 중풍병자는 출애굽 시 애굽을 떠나 2년 만에 도착한 가데스 바네아Kadesh-barnea에서 가나안 땅 사해 건너편에 있는 세렛 시내에 도착하기까지 주위의 신 광야에서 38년간 방황한, 즉 개미 체바퀴 돌듯 맴돌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가데스”는 “거룩한 곳”, “바르”는 들판. “네아”는 “방황”이란 뜻이다. “마른버짐처럼 땅”은 중풍으로 혈기가 “마른” 유대인들의 땅 팔레스티나를 가리킨다. 이슬람교도들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한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한 유대인들처럼 혈기가 마른 환자들이다. 유대인들은 이집트를 떠나 2년 만에 거룩한 성지가 바로 눈앞에 바라다 보이는 가데스에 당도한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듣지 않고 믿음 없는 거짓된 열 사람의 말만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집트로 되돌아가자고 아우성친다. 이 배역한 무리를 다 죽이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간구하여 살아나긴 했지만, 그들의 지조 없는 죄의 벌로 신 광야를 38년간 방황하는 고생길에 나서도록 하신다.
“방황”은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을 전심 전령 전력으로 믿고 사랑하지 않아 정신의 중에 풍을 맞아 중심을 잃고 좌우로 흔들리는 중풍병자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묘사한 말이다. 아브라함이 99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 얼굴을 보고 걸어가며 자세를 바로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자전거를 탈 때 앞 중심을 쳐다보아야 좌우가 미세 조율되어 좌우로 비틀거리다가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것에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지 않고 주로 희생 제사를 비롯한 율법의 행위들과 같은 자력에 의지하여 걸어갔다. 믿음에 의한 은혜의 타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건물의 다섯 기둥은 율법의 행위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만유의 중심인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들에만 집중한 것은 앞 중심을 쳐다보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에 맞는 고행을 거친 뒤 38년간 황무지를 방황한 후 가나안 복지에 들어왔으나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헤세드가 부족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38년간 하나님의 헤세드의 집에 머물면서도 믿음이 없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 병석에 누워 물을 움직이는 천사의 “표적만 바라는”중풍병자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었다. 다시 영적으로 38년간 황무지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오셔서 베푸신 헤세드를 믿어 자리를 들고 일어선다. 십자가의 수난의 길, 비아 돌로로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이 중풍병자와 같이 믿음amen이 없어 똑바로 서지amen 못하는(사 7:9) 유대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 얼굴만 쳐다보고” 걸으신 믿음과 순명의 길이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양의 문” 가까이에 있다. 느헤미아가 성전을 복구할 때 유월절 어린양이 그 연못에서 목욕재계하고 제물로 바쳐지려고 통과하던 문이었다. 그 문은 여러 문들 중 첫 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헤세드의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의 연못은 비아 돌로로사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2. 잔인한 자비로서의 거룩한 전쟁의 진멸(헤렘)과 의로운 전쟁
한 날 예수가 던진 말이었습니다
칼을 품고 형제 앞에서는 웃음을
돌아서 더욱 칼을 가는 족속들이여
땅에 화평을 주려고 내가 온 줄 아느냐
형제 미워서 웃는 너희들에게 칼을 던지려
불 이빨 불 눈물 불춤을 던지려고 내가 왔노라
-<프롤로그> 부분
엘리엇은 흠정역 성서 영역을 명령한 제임스 1세 시대의 극작가 시릴 터너Cyril Tourneur의 ≪복수자의 비극≫(1611)의 주제가 되는 죽음을 “신비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과 합일하기 위한 신비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뜻을 버리고 절대자의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뜻을 버리는 것은 내 욕심으로 오염된 옛사람이 죽어 욕심이 낳은 죄를 정화하는 것이다. 엘리엇은 ≪네 개의 사중주≫의 <이스트 코커>4악장에서 이것을 “잔인한 자비sharp compassion”라고 했다. 엘리엇은 같은 시 <리틀 기딩>4악장에서는 2차 대전 중 런던을 공습한 “비둘기”란 이름을 가진 나치 폭격기들이 투하하는 “갈라진 혀 모양의” 폭탄 불을 보고 죄를 정화하는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비둘기 성령 불의 “갈라진 혀”로 받아들였다. 잔인한 죽음의 불이 정화하는 자비의 불과 같은 것이었다. 만물제동이다. ≪네 개의 사중주≫는 “불과 장미는 하나다”로 끝맺는다. 고통의 지옥불이 정화하는 연옥불이 되어 천국의 사랑의 장미 모습으로 피어난다. 고통이 사랑이다. “잔인한 자비”다. 기쁨이 아니고 고통인 사랑의 이름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고통의 불 “셔츠를 짠 손 뒤에는” 사랑이 숨어 있다. 그리스도는 백만장자 아담이 물려준 이 세상이라는 병원에서 아담의 죄의 병을 수술하여 치료해 주는 외과의사다. 루터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칼”은 옛사람에게는 잔인한 고통을 안겨 주지만 그의 잔인함은 병을 고쳐 새 사람으로 살리려는 자비심에서 나왔다. <작은 옛사람Gerontion>에서는 그리스도가 봄에 “우리를 삼켜 먹으려고” 온 잔인한 호랑이로 등장한다. <동방박사의 여행>에서는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와서 아기 예수를 본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의 죽음”임을 깨닫는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려는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려 잔인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의 예수님은 “나는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평화인 사랑이 아니라 잔인한 칼을 주려고 왔다는 충격 선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예컨대 겨울에 영산홍을 아파트 베란다의 혹독한 추위에 내어놓는 주부의 마음속에는 봄에 꽃을 피게 하려는 사랑이 숨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의 자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비를 우리에게 던져 주려고 오셨다. 사랑의 알맹이를 감춘 잔인의 껍질은 태양신 바얄 우상을 섬기던 가나안을 “진멸(헤렘)” 시키라는 여호와의 잔인한 명령을 상기시킨다.
진멸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렘cherem”은 하나님께 바치는 “지극히 거룩한(qodesh qadashim)”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므로 이 진멸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한다. 거룩한(카도슈 qadosh)것은 깨끗한(토하르tohar) 것이다. 우상으로 더러워진 가나안 족속들의 죄를 깨끗하게 정화하는 “신비적 경험”이 잔인한 자비의 진멸이다. 그러나 이 잔인성의 이면에는 불변한 자비 헤세드라는 알맹이가 들어 있으므로 진멸하라고 한 명령 뒤에는 가나안 여인들과 혼인하지 말라는 말이 뒤따른다.(신7:2-3) 진멸했으면 가나안 족속이 모두 멸망했을 터인데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는 죄 없는 민간인은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 죽은 가지를 전지하는 것과 같다. “전지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정화한다katharo”는 뜻이다. 가지를 치는 것은 나무 전체를 더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다. 현재 선생의 “고른 말”을 빌리면, “고생苦生이 자리로운 고생高生”이다.
진멸하라는 명령에는 가지를 쳐서 깨끗하게 하라는 자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가지만 치지 않고 포도나무 전체를 찍어 버리는 것은 자비가 없는 잔인성의 발로다. 일족 전체가 진멸당하면 그 족속이 회개할 주체가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사랑의 정화가 아니고 증오의 숙청으로 변할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회초리로 치신 것도 겉으로는 잔인하게 보이지만 성전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자비심이 숨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런 뜻을 모르거나 어긴 이스라엘 왕 예후는 태양신 바알을 섬기던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을 “진멸”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 속에 자비가 들어 있는 것을 망각하고 그 왕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죄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예언하고(호 1:4) 실제로 얼마 후에 시리아에게 멸망당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정치적 메시아로 숭배하는 다윗과 같은 임금도 잔인하게 피를 흘린 죄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피를 흘리지 않은 솔로몬에게 넘기셨다. 디아스포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 간의 자비가 없는 “거룩한 전쟁”은 호세아가 저주한 예후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재정착은 예후와 같은 세속적인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프롤로그 그 첫머리의 “떡집이라 부르는 베들레헴”은 집(바이트)와 빵(레헴)의 합성어다. 그러나 “레헴lechem”과 동근어인 “라함lacham”은 “전쟁”이란 뜻이다. 내가 남의 빵을 빼앗으려고 하는 전쟁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상처 난 몸과 잔인한 고난의 화덕에서 구운 몸의 빵은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평화의 빵이다.
다음에는 하나님이 명하신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거룩한 전쟁”과 다른 “의로운 전쟁”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고,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마저 내주라”(마5:39)고 말씀하셨다. 의로운 전쟁의 옹호론에 따르면, 이 말씀은 이 죄 많은 지상 왕국이 아니라 재림하신 후의 새 하늘과 새 땅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는 종말론으로 궁극적 도덕률이라고 해석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사2:4)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은 제1처소에서 시인이 말한 “칼에 대해 반드시 칼을 던져 답을 해야만 했던 때/칼날은 두드려 보습이라 외쳤던 사람의 아들 예수”가 이룩할 영원한 생명의 하늘나라에서나 실현될 소망으로 본다. 그때까지는 “의로운 전쟁 또는 정당한 전쟁just war”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가톨릭의 성 아우구스타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개신교의 루터와 칼뱅의 성서 해석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도 “개인이나 집단의 정당방위는, 고의적인 살인죄가 성립되는 무죄한 사람의 살인을 금지하는 데 대한 예의가 아니다”(2263)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당한 전쟁은 적이 자국민을 살인하지 못하도록 방위하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준수하는 정당한 방법이다. 생명을 보존하려는 “의도”로 불가피하게 공격자의 생명을 빼앗는 “비의도적” 전쟁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인 “거룩한 전쟁holy war”은 사람이 치르는 의로운 전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로운 전쟁이 반드시 거룩한 전쟁은 아니다.
유엔은 의로운 전쟁을 실현시키는 도구다. 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 따르면, 예수님과 바울은 반전 평화주의자pacifistrk 아니다. 그 근거로 다음 성경 구절들을 든다. 왼쪽 뺨까지 돌려 대라고 하셨지만 대제사장과 대화 시, 자신을 때리는 경비병에게 예수님은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요18:23)라고 맞서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회초리를 들어 “깨끗하게 하셨다”. 그리고 신약에서 전쟁을 묵인했다는 간접 증거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요18:36)라고 하신 말씀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온 군인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녹3:14)고만 타이르고 군 복무 자체를 부정하지 않은 구절을 의로운 전쟁의 예로 들고 있다. 이보다 더욱 확실한 것은 사도 바울의 말이다. 그는 정의 “칼을 찬”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권력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을 포상하고 악을 징벌한다고 했다. 국가에 조세를 바치거나 군 복무를 하는 것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 로마의 철학에서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 돌려주는 것(suum cuique tribuere)”을 정의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 즉 두 왕국에 대해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정의의 뜻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마22:21) 즉 유대인들이 외적인 정치 면에서 로마인들에게 복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위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것”(칼뱅)이다. 이상과 같이 거룩한 전쟁은 우상 숭배하는 자는 진멸하리라는 계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진멸할지니라”(출22“20)
불춤을 추고 추어야 한다는 사람들에 끼어
십계명 1조 목울대 침 튀겨 가르쳤던 늙은 목자들
빈궁한 자 눌린 자들 편이라는 검은 제복 사제들과
시신 김 부자 앞에서 굵은 목덜미 남한 종교지도자들
한 줄 뒤져 일렬 종횡으로 그들 모습들은 어떠했을까
-<제7처소> 부분
태양신인 김일성 부자에게 절하는 가톨릭 검은 제복 사제들과 “목이 곧은” 굵은 목덜미 개신교 지도자들은 바알 우상에게 절한 850명의 이스라엘 사제들(사34)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아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 우상숭배자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우상 숭배는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좌나 우로 한눈을 파는 것이다. 좌나 우로 달리는 내 뜻과 욕망은 시始와 종終에 간격이 있어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차별상이다. 앞만 올려다보아야 직선이 미분되어 원융무애한 원이 된다. 원은 과거에서 미래로 달리는 욕망의 지옥철로 직선(크로노스Chronos)이 원 중심인 하나님의 은혜로 원주(카이로스Kairos)로 차원 상승한 영원이다. 진멸은 좌우로 한눈을 파는 우상 숭배자를 미분하여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고 경외하게 하고 “주일무적主一無適”하게 하는, “우리를 삼켜 먹는 호랑이 그리스도”의 “잔인한 자비sharp compasslon”다.
§3. 죽어 산 예수:수평적 통일이 아니라 수직적 귀일과 믿음
돌아보니, 죽어 산 예수와 나의 만남은
중학 시절 언덕 위 종탑과 작은 예배당
비가 그친 하늘에 더러 무지개를 둘렀고
실루엣처럼 땅에는 아지랑이가 일렁거렸습니다
풍금소리가 파도를 재웠던 작은 예배당 그 시절
물 먹은 밤하늘 은하 길은 하나님의 편지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안쓰러움과 에둘러 불확실로 증거
검은 예복 위 하얀 방울 침들 안간힘 증거함이었습니다
-<제1 처소> 부분
“죽어 산 예수”는 다석 선생이 52세에 세례를 받을 때 지은시, <뉘게로 가오리까>에 나오는 말로서, 불교, 유교, 도교와 기독교를 구별하는 말이다. 현재 김흥호 선생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시원타, 죽어 산 길에, 그 사랑을 펴셨네”의 “죽어 산 길”이 통일 사상과 다른 다석의 “귀일歸一”사상이라고 했다. “살아서 사는 게 아니라 죽어서 사는 거다. 석가니 노자니 공자니 다 살아서 산 사람들이다. 공자가 부활했다, 노자가 부활했다는 것도 없다.”(2008년 6월 30일 대화에서) 통일은 헤겔의 변증법처럼 시공간에서의 수평적 반대의 일치이고, 귀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므로 시공간을 초월한 수직적 반대의 일치이다. 키르케고르와 바르트의 역설적 변증법에 해당한다. 시인의 12처소의 “목숨 끊어 빛, 힘, 숨 언덕의 골고다가/연기가 오르듯 푸른 숨길 하늘가는 길”은 이러한 귀일 사상을 알맞게 표현하고 있다. “빛, 힘, 숨”은 현재 선생이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 중에서 진리를 빛, 길을 힘, 생명을 숨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수난dolor의 죽음으로 사랑의 장미rosa길을 걸어 죽어 사랑-생명의 영체로 살아나시고, 우리도 죽어 살게 하신 천부의 명령에 “예스”만 하시고 “노”를 하지 않으시고(고후1:19),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대 효자”(다석의 말) “예수와의 만남”은 성경에 증언된 특별계시이고, 이 만남을 통해 자연에 계시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이해되게 분명히 보인 피조물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는 육체로 육화된 “poiema”(롬1:20)로 보였다. 그러나 육화된 하나님 아들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인 시들poiemata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자연으로 육화하여 보이게 하신 자연의 시를 통한 자연계시인 “존재의 유추”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육화하셔서 눈에 보이게 진리를 증거하신 특별계시인 “믿음의 유추”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인 하나님의 증거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믿으면 정신이 집중되어 균형을 이루어 굳게 설 수 있고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자기를 비우고ekenosen 낮추어 하나님께 순명한 겸허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길이다. “너희가 믿게 되지 않으면 굳게 서지지 못한다”는 이사야 7장 9절의 말씀을 ≪70인역 성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로 번역했는데 이것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받아들였다. 믿음의 몰두는 하늘로 붕 떠올라 시간의 간격을 0으로 축소시켜 영원으로 귀일하게 한다. 서문에서 장자의 만물제동의 도추는 이러한 믿음의 유추다. 그러나 성경은 범신론적인 노장철학과는 다르다.
§4. 원죄는 3대 욕망(뜻), 구원은 이 욕망을 비우는 십자가
팔레스티나 동풍 오월 사람들 저잣거리
조국은 가정의 날 오월, 밥 먹는 문제 두고 재신임
서울시장의 선거, 선거는 아이들ㄹ에게 무조건 밥이다
차츰 밥 먹는 법으로 확대입니다
-<제4처소> 부분
예수가 내 집은 기도하고 기도해야만 하는 집
신자임을 빙자, 종교 밑천 거간들과
한통속 장사치들 내몰았던 솔로몬 성정
-<제7처소> 부분
비아 돌로로사 제7처소싸지는 무슬림 지역이다. 무슬림들도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돈으로 바꾸는 유대인들과 같다. 무슬림들은 육신의 빵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신 비아 돌로로사를 장사하는 길로 만들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야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신 말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란 헬라어는 주 기도문의 “[당신의] 뜻이 [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즉 “게네세도 토 쎌레마 쑤Genetheto to thelema sou”란 말과 똑같다. 이것은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다. 순종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청종hupakoe이다. “첫 아담”이 천명에 순종하지 않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제 뜻을 따른 것이 원죄다. 죄를 뜻하는 헬리어 “하마르티아hamartia”와 히브리어 “하아타chata”는 또같이 궁수가 과녁의 중심인 정곡에 집중하지 않고 좌나 우로 한눈팔아 화살이 정곡을 맞히지 못하고 “헛친다(虛打)”는 뜻이다. 죄는 ≪중용≫의 실정곡失正鵠이다. ≪중용≫에서는 정곡을 맞힌 중용의 인을 군자, 실정곡한 비중용의 인을 소인이라 부른다. 엘리엇은 실정곡한 인간을 “작은 옛사람Gerontion a littie old man”이라 불렀다. 직역하면 “소노인”이지만 옛사람은 ≪황무지≫의 시빌처럼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의 뜻(sybil의 어원)”을 따르지 않아 영적 생명력이 늙어 쪼그라져 소노인이 된 사람이다. 우리말에서는 “뜻”이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서양에서 뜻은 “욕망”과 동의어다. 영어의 “will”과 헬라어의 “thelema”에는 의지와 욕망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따른 불순종으로 욕망으로 타락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유가 고등 지능을 지닌 사기꾼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3:6) 선악과를 따먹은 데 있다. 이 3 대 욕망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해당한다. 또한 이 3대 욕망은 40일간 광야 금식 기도 중 예수께서 사탄에게 받으신 3대 시험이다. 육체의 정욕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이고, 안목의 정욕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며, 이생의 자랑은 사탄에게 절하면 온 천하의 왕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는 최종 최대의 시험이다. 이 시험은 하와이 마지막 시험에 해당한다. 지혜롭게 해 줌직한 과일은 권세를 줌직한 과일이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이 되고 싶은 것이 사탄의 시험 중 가장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야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사탄으로부터 다시 세 번 시험을 받으신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26:39)라는 기도에서 “하실 수만 있으시면”이란 말은 사탄의 시험이라는 해석이 있다. 42절에서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이라는 말씀도 39절과 비슷한 시험이다. 44절에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공생에 시작과 마지막에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 구하여 주옵소서”란 주기도문을 보면 아마도 이 3대 시험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사람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하나님”(칼케돈 정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다면 완전히 사람인 우리 인간은 말해서 무엇하랴. “두 번째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아담”의 죄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신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제 뜻(욕심)대로 하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매일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데 있었다.
사탄의 3대 시험의 핵심은 부귀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다. 떡은 ‘부’, 왕국과 그 영화는 ‘귀’다. 이 둘의 공통점은 남보다 잘나고 싶은 욕망이다. 남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별이 되고 싶은 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영어 “desire”는 별sire sidus이 되고 싶은(de=want) 욕망이다. 내가 태양과 같은 항성이 되고 싶은 외람된 욕망이다. 촛불이 타면서 화염은 위로 치솟고 촛물은 아래로 흐르는 다석의 “염상누수” 즉 화승수강이다. 첫 아담의 선악과에 대한 욕망도 빛인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게 빛나고 싶은 욕망이었다. 마르크스는 무산계급 독재 과도기가 끝나고 공산주의 이상 사회가 오면 “필요한” 만큼만 돈을 번다고 했지만 그것은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욕망의 본지을 모르고 한 말이다. 그것은 내 뜻(욕망)을 오순절 성령의 불로 정화한 초대 기독교 원시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경제(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공산주의자들은 화승수강하게 하는 욕망으로 중심을 잃어 중풍병자처럼 휘청거리다가 저절로 넘어지고 말았다.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산다”. 이러한 인생관은 이 삶의 맛이 삶의 맛을 가게 한다는 아이러니에 취약하다. 살맛나게 살려고 돈도 처먹고, 높은 자리도 처먹는다. 동서양의 수양법에서 단식 또는 금식을 권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몸을 굶는 신재身齋와 마음을 굶는 심재心齋룰 병행한다. 에스더에서처럼 국가 위기를 당했을 때 금식하는 것은 모든 죄의 원천인 하와와 아담의 뜻(욕심)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를 정화 또는 성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석 스승이 지어 준 김흥호 교수아 호, 솥귀(제기)현과 재계 재로 이루어진 현재玄齋도 전심 전령 전력으로 하나님께 제사(예배)드려 마음을 굶어 비우라는 뜻이다. 내 뜻을 비우고 마음을 굶을 때 과거에서 미래오 달리는 “목이 곧은” 내 욕망의 직선 지옥철로가 미분되어 만물제동의 원형이 된다.
== <중략> ==
나가는 말
궁수가 과녁의 정곡을 맞히는 것이 다석의 “가온찌기” 즉 “꼭대기”이며, “과거와 미래가 모여” 시와 종의 간격이 있는 시간의 간격이 0으로 축소되어 사라진 무시간의 영원한 현재인 엘리엇의 “정점定點still point”이다. 그리고 자비와 잔인한 정의가 하나로 모여 간격이 사라져 “잔인한 자비”의 역설로 계시된 하나님의 “의”다.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크tsedeg”다. 히브리어 사전에 의하면 체데크의 뜻은 (1)자비, (2)의, (3)진리다. 체데크는 자비와 잔인한 정의의 심판이라는 상호 모순된 “낯선” 역설의 묘리가 빌라도가 믿었던 상대적 진리(truth)와 차원이 다른 “절대 진리the Truth”다. “체데크”의 어원은 하나님을 직시(“딕”(덱))하면, 좌측의 잔인과 우측의 자비의 양측(체)이 모두 중심점처럼 간격이 사라진 무차(분)별한 ‘하나’님의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주를 앙모하는 독수리처럼 전심 전령 전력의 믿음과 사랑의 집중으로 이 영원의 삼층천에 붕 떠오르면, 직선의 차별된 간격이 사라져 시와 종이 동일한 만물제동의 원융무애한 자유의 하늘나라다. 현재 선생의 “일도출생사 일체무애인”은 도추를 달리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한 도에 주일무적하면 원융무애한 원이 되어 생사의 분별이 사라져 생사에서 탈출하고 공간의 간격이란 장애물이 사라지니 아무 데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이 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빛(진리), 힘(길), 숨(생명)”으로 고쳐 쓴 현재 선생의 말도 빛인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정신 통일하면, 하나님의 은덕을 받아 힘(덕)이 생겨 독립하여 굳게 설 수 있다(믿게 되면 굳게 서진다)는 말이다. 생명이 충만한 원융무애 상태에 이르면 장애물이 없어 자유로워진다. 그러므로 현재 선생은 빛은 통일, 힘은 독립, 숨은 자유와 같다고 했다. 필자는 빛 힘 숨을 경敬 권權 영寧으로 다시 써 본다. 경敬은 주일무적의 집중이다. 집중하면 아름다운 균형[權]의 대칭성을 이루는 원이 된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평화[寧]이 온다. “청야음”이 형상화한 만물제동의 진리다. “죽어 산 예수”가 걸으신 “귀일”의 비아 돌로로사이다. 자전거를 타고 인생길을 달릴 때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듯 앞의 중심만 쳐다보고 폐달을 밟으면 좌측 핸들과 우측 핸들이 하나님의 은덕의 힘으로 저절로 좌우로 미세 조율되면서 굳게 설 수 있게 되어 우로 굽은 길이나 좌로 굽은 길이나 모두 하나의 중으로 통일되어 어디로든지 자유롭게 달려갈 수 있다. 주님만 경외하면 그 어디나 천국이다. “수처위주 입처개진隨處爲主 立處皆眞”이다.
김석 시인이 만물제동의 유추인 석汐이라는 필명을 짓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인으로 그는 연경반 엘리엇 강해 시간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시선을 강의자의 얼굴에 가온찌기하고 경청하며 가끔 “아멘!”으로 화답했었다. 만물제동의 석은 전심 전령 전력으로 아름다운 균형의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 영원한 생명의 정점인 가온찌기에서 그 어디나 천국이 되도록 살아왔고 또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얻으라는 천명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
=================
◆ 표4의 글 ◆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내려가는 길인 십자가의 고통이 다름 아닌 올라가는 길인 부활이라는 역설이다. 고통스러운 고생의 십자가의 길이 부활하여 높이 태어나는 고생의 길이다. 라틴어 ‘Dolorosa’는 ‘슬프다’는 뜻의 형용사다. 이 글자를 상형문으로 보아 파자하면 반대되는 dolor(고통)와 rosa(장미)의 ‘일치’다. …… 시인의《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가 부활이라는 초월적인 역설을 증거하는 진리다. ― 허중 이명섭. 성균관대 명예교수
.♣.
=================
▶ 김 석金 汐 시인∥
∙ 1942년 부산 출생.
∙ 동아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부산 브니엘고, 서울 숭실고 교사, 오산대학교 객원 교수 역임.
∙ 197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 시집『환상예배』『우슬초로 씻으소서』『도산서원 가는 길』『광화문』외 5권.
∙ 수상집『다섯 수녀와의 山行』
∙ 기독교문학상, 크리스쳔문학상, 홍조훈장 받음.
∙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PEN회원, 퇴계학 회원, 문인선교회회장 역임,
∙ 성경을 주제로 한 12시인 모임의 간사. 서울 창천감리교회 장로.
.♣.
================= =================
[출판사서평]
슬픔과 수난의 길을 걸으며 분단 조국의 현재와 과거를 짚고
예수와 이스라엘을 증언하는 ‘비아 돌로로사’ 연작시
올해로 시작 인생 40년을 맞는 김석 시인은 2012년 5월 경험한 성지 순례를 바탕으로 3년간의 구상과 2년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시집 《비아 돌로로사》를 내놓는다. 이 시집은 ‘비아 돌로로사’ 14처소에 관한 연작시로, “20여 년간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님의 성경을 근간으로 생각 없는 생각의 동서 사상 공부와 허중虛中 이명섭 교수님의 엘리엇 강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시인이 밝힌 것처럼, 책 말미에 이명섭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귀한 ‘평석評釋’이 함께 실려 있다.
김석 시인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걸었던 분쟁의 땅 팔레스티나의 비아 돌로로사 14처소를 걸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우리의 8?15 광복으로, 바빌론 포로 시절 분단된 유대 민족의 나라를 “분단을 위해 광복된” 우리나라와 병치시킨다. 기독교가 ‘십자가즉부활十字架卽復活’로 역설되듯이, 시인은 이 역설을 밑힘과 믿음으로 삼아 분쟁의 땅 팔레스티나와 분단 조국의 70년 그리고 현재를 시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병풍을 펼치는 듯한 영상 기법과 동시동존의 돌올한 이미지, 패러디, 모순 형용, 연과 행에 독립감을 주면서도 시의 연계를 이루기 위해 단장斷章으로 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