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17 - 바르샤바 구시가지에서 왕궁을 구경하고는 구시가 광장으로 가다!
5월 11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민중봉기 박물관을 보고는 시스키 공원을 거쳐 구시가지 짐코바
광장 Pl. Zamkowy 에 도착하는데..... 오래된 옛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2차 대전때인 1944년
8월 국내군이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가 도시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시가지의 입구 짐코바(잠코비) 광장 Pl. Zamkowy 에서 극장 건물로 들어가 홀에는
상연중인 많은 전시물을 구경하고는 나와 왕궁 에 입장하는데.... 입장료는
20즐로티이지만 오늘이 수요일이니 무료이고 오디오 대여료 10즐로티 를 받습니다.
왕궁 Zamek Krolewski 은 13세기에 마조비아 공작의 요새 로 건립 되었으며 그후 탑과 붉은
벽돌로 고딕양식의 왕궁이 추가되었는데.... 스웨덴의 침략으로 남쪽에 있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의 왕궁이 불타자 1596년 수도 를 이곳으로 천도하였다는데 현재 박물관입니다.
바르샤바 는 남부 크라쿠프와 동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사이에 있어 교통 이 좋으니
동군 연합인 스웨덴의 지그문트 3세 는 1595년 바벨 성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1596년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고 1611년 부터 계속 바르샤바에 거주합니다.
정부 기관들도 왕궁을 따라 바르샤바 로 이전하면서 크라쿠프는 실질적인 수도로서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는데.... 하지만 공식적인 수도는 폴란드 2차 분할 (1793년) 때 까지
크라쿠프 였고 왕의 대관, 장례식 등 왕사(王事) 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중세에 폴란드군은 이반 뇌제의 러시아 군대와 싸워 승리 했으며, 1683년 20만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1만 8천명의 폴란드 기병 윙드 후사르 는
오스만 터키군에 돌격해 대승리를 거두어 유럽을 구출했으니 기독교 세계를 지킨 "수호천사" 였습니다.
폴란드 지배를 받던 카자크 Cossack (러시아 남부 자유농민)가 반란을 일으키자 1651년 베레스테츠코
에서 63,000명 폴란드군은 140,000명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에 대승 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 전투
에서 폴란드군의 피해도 엄청 심한데다가..... 국력이 소모되어 대홍수(Potop) 시기에 쇠퇴 하게 됩니다.
카자크(우크라이나) 와 러시아군 이 침공해 와서 폴란드는 국토 절반이 점령당한 위태로은 상황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 가 브란덴부르크(독일)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과 손잡고 함께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하니 폴란드는 패망 직전 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다 죽은줄 알았던 폴란드에서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 봉기 를 일으켰고, 이에 타타르 (러시아 남부 몽골족의 후예) 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니
폴란드는 종교가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치루면서 가톨릭에 기반한 폴란드 민족정체성 맹아 가 생기게 됩니다.
폴란드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파베우 얀 사피에하, 얀 소비에스키,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 등
명장의 지휘를 받아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루스 차르국 등에 맞서 여러 번의 승리 를
거두었고, 657년 벨라우 조약을 체결해 프로이센 공국 을 독립시켜 브란덴부르크와 전쟁을 끝냅니다.
1660년에 올리바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의 영유권과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 주장
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지만 그러나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 이 남아 있었으니
폴론카(Polonka), 류바르(Lyubar), 바시아(Basia) 강, 추드니우(Chudniv) 등에서 폴란드가 승리 를 거둡니다.
전쟁 막판에 흘루키우(Hlukiv) 공방전에서 타타르 가 발을 빼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동맹인 리투아니아군
이 후퇴하는 등 군대가 붕괴하면서 후퇴를 하게 되는데.... 러시아와의 전쟁 은 1667년까지 계속
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맺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에 편입 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프로이센
(독일) 의 독립 에 더해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유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지방들을 잃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으며..... 귀족회의도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허수아비 가 됩니다.
1772년에 폴란드에 살던 여러 민족들이 폭동 을 일으키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가 개입함으로써 1773년 8월 영토가 쪼개졌으니 나라가 넷으로 분할 되었는데....
친러파가 가득한 의회는 3국의 위세 굴복하니 폴란드의 4분지 3이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지성과 근대적 능력을 갖추었으니 기사학교 (Szkola Rycerska) 의 설립안을 가결시켜
수많은 개혁 청년과 엘리트들을 양산해내었고, 세계 최초의 교육부인 '국민교육위원회' 도 만듭니다.
폴란드에 관세 제도를 도입해 외국 상품에 관세를 매겨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했고 1791년 5월 3일 가결된
'5월 헌법' 은 세계사에서 미국 다음으로 2번째이며 유럽에서는 최초로 가결된 성문헌법 이었으니 입헌
군주제와 세습,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10% 의 소득세)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귀족들의 자의적인 재판 을 당하지 아니하며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고, 도시민들에게 토지 구입
을 허용하며, 농노제가 소작제 즉 계약제로 전환 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는데, 소작제는 전적으로
귀족과 농민 모두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행해야 했고 농민들은 원한다면 도시로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자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른 위력에 의한 헌법을 빌미로 1793년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 하자 맞서 싸웠지만 러시아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고, 1793년
다시 한번 영토가 분할되니 100만 제곱킬로미터 가 넘는 면적이던 폴란드 영토는
21만 제곱킬로미터 로 축소되었으며.... 왕국은 370만명 을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다가 1795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대(對) 러시아
봉기 를 철저히 탄압했고, 1795년에는 세 번째 분할 이 이루어져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으니...... 이때부터 눈물없이 보기 힘든 폴란드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그 자리에 바르샤바 공국 을
세운 기간 동안 잠시 괴뢰국으로나마 독립하지만 나폴레옹 몰락후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에게 분할 되어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3국에 합병된 폴란드인 들은 11월 봉기,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 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저 삼국의 폴란드 지배를 거부하였으나... 저들 삼국은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였습니다.
1809년 프로이센(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폴란드 왕들의 리갈리아를 모두 녹여 금화
로 만들어 폴란드의 보물을 훼손했으니 현재 남아있는 폴란드의 리갈리아는
모두 복원품 이며, 폴란드인의 봉기에 놀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3국은
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귀속됩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때, 구 연방영토의 폴란드인 다수 거주지역에 바르샤바 공국 이 세워졌고, 공국이
오스트리아에 속한 폴란드 영토를 일부 회복함에 따라 1809년 크라쿠프도 공국에 속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워털루 전쟁으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에, 빈 회의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 대부분이 러시아와
강제로 동군연합으로 묶인 폴란드 입헌왕국 으로 넘어갔지만, 크라쿠프는
부분적인 독립국으로서 1815년 근교 지역과 함께 크라쿠프 자유시 라는 이름으로 독립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령인 가운데 크라쿠프 자유시 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지만, 이후
수차례 폴란드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니, 폴란드 전역을 휩쓴
1830년 11월 봉기 때 크라쿠프는 러시아의 영향에 있지 않아 봉기 현장이 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무기를 밀반입하는 창구 로서 입헌왕국을 도왔으며 이 때문에
크라쿠프의 행위에 분노한 러시아의 요구로 도시 또한 자치가 제한되었으며 경찰은
오스트리아의 통제 를 받게 되었고 시민들이 뽑은 시장은 주변 3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크라쿠프 시민들의 분노는 커져갔고, 1846년 2월 20일 자유시의 주권을 넘어 공화국의
형태로 나라를 되찾고자 공화주의자 귀족, 지주, 중산층을 중심으로 크라쿠프
봉기 가 일어났는데, 도시의 봉기가 성공하면 또다시 폴란드 전역에 봉기가 퍼질
것으로 생각한 봉기군은 도시의 정치가였던 얀 티소프스키의 지휘하에 오스트리아와 맞섭니다.
하지만 초급 장교들이 이끌던 11월 봉기와 달리, 크라쿠프 봉기군의 지원자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무기도
형편없었으니 결국 크라쿠프 근교에서 벌어진 그도프 전투 (Battle of Gdów) 에서 참패했고, 봉기의
지도층이던 귀족, 지주들에 불만이 많던 근교의 농노들도 오스트리아를 도우면서 봉기는 실패 로 끝납니다.
봉기 진압후 1846년 11월 16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협약을 맺어 자유시를 없애버리기로 했고 결국 자유시
는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Kingdom of Galicia and Lodomeria) 의 일부
로서 크라쿠프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1850년 대규모 화재로 10%의 시가지가 불탑니다.
크라쿠프는 외세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제 2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번영하기 시작했으니 1866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내에서 점점 끓어오르던 민족주의의 위협
에 시달렸고, 해결책으로 1867년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결성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으로 재탄생합니다.
제국은 헝가리를 독립시킨 것 뿐 아니라 보헤미아, 갈리치아 등 시스라이타니아로 설정된
영토에 향상된 자치권을 부여했으니 갈리치아의 크라쿠프 도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받게 되었고 시 정부와 의회, 학교에선 다시 폴란드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러시아령 폴란드나 독일령 폴란드 에선 상상하기 힘든 특혜 였습니다.
크라쿠프는 나라 잃은 폴란드 민족의 문화적, 예술적 상징 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니 많은 폴란드인이 모여
들어 크라쿠프 황금기 시절 유산들을 도시에 모았고 예술가와 학자들이 활동했으며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도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으니 후에 폴란드 군단을 이끌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오스트리아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두고 세력을 불립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크라쿠프는 1914년 겨울에 러시아의 공격 을 받았는데 시 정부는 시민들을 모라비아
변경백국으로 대피시켰지만, 전투는 대부분 새로 지은 크라쿠프 요새 주변에서 치러졌고 도시에 포탄
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는데.... 1918년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항복하면서 도시에
주둔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떠났고 크라쿠프는 다시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 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광장에서 문득 국제신문에 실린 “폴란드 거리의 총탄자국, 깊이 박힌 전쟁의 기억을
탁본하다” 라는 기사가 떠오르니 ‘2023 아츠버스(ARTsBUS) 월드 투어 프로젝트
(ARTsBUS World Tour Project)’는 한 달 일정으로 ‘세계평화 예술대장정’ 을 떠난게 떠오릅니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 행위예술가 성백 씨를 비롯한 예술가 6인으로 이뤄진
일행은 유럽곳곳에서 공연·퍼포먼스·전시 등 예술 활동을 통해 평화·반전·생태·연대
메시지를 전하는데..... 부산에 본부를 둔 한국행위예술가 협회의 회원들이라고 합니다.
성백 작가는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교회 벽에 박힌 2차 세계대전 당시
총탄 자국을 탁본한 작품 을 현지 젊은이들과 펼쳐 보였다고 합니다.
7월 5일 ‘아츠버스( ARTsBUS) 월드 투어 프로젝트’ 일행은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첫
퍼포먼스 공연 을 했는데 관광객들은 내용을 물어보고 아츠버스가 한국에서 어떻게 왔는지
북한은 지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으며, 그날 저녁 늦게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에 도착했습니다.
광장 한켠에 있는 오래된 교회 건물 외벽에 선명하게 남은 총탄 자국 이 보이니 이걸 탁본을
하는데 20대로 보이는 폴란드 청년 한 무리가 끝까지 지켜봤고,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으니 자신들은 이곳에 살지만 건물 외벽에 전쟁 흔적 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의 모습으로 재현한 구시가지 광장 Rynek Strego Mista 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걸어서 크라쿠프 처럼 도시의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둥근 원형의
요새인 바르비칸 Barbacan 을 잠시 구경하고는 퀴리부인 박물관 Muzeum Mari Curie 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