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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침 공기는 차갑습니다. 서둘러 봄을 입었다가는 엉뚱한 손님을 맞게 됩니다. 급한 마음을 다듬고 한 걸음 물러서서 참고 기다리는 편이 낫습니다. 변덕스런 날씨가 시간을 천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낮의 햇빛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듯하지요. 그래봤자다, 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이제 곧 하순으로 접어드니 멀지 않습니다. 이미 꽃봉오리도 틈새를 열었습니다. 팍 하고 터뜨릴 기세입니다. 내주 초에는 환한 꽃을 보리라 기대합니다. 언제 이렇게 봄을 기다렸던가 싶기도 합니다. 시간을 재촉한다는 것이 그리 반갑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하기야 시간을 재촉한다기보다는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다지 춥지도 않았던 겨울인데 괜히 미적거리는 것이 더욱 밉살스러워서 말이지요. ㅋㅋ
때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저기 마음 아프게 하는 소식들이 계속 들어오니까요. 하기는 세상이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뉴스라는 것이 뭔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끌어야 하니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마음 편한 소식보다 아픈 소식에 더 민감하게 움직일까요? 아무튼 꾸준히 전쟁 이야기, 사고 소식, 범죄 사건들 등등.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렇게 아침을 열고 싶지는 않아도 이상하게 그런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섭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이지요. 그런 세상에 그렇게 물들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또 한 주가 저물고 있습니다. 다 접어두고 행복한 주말을 맞으면 좋겠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웃음을 지어보세요. ^)^
2024년 3월 16일 김종우 목사 드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찌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잠언 27 : 9 - 10)
<도그데이즈>
성공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번듯한 큰집에서 산다고 성공한 겁니까? 병들어 쓰러졌는데도 찾아와 보지도 않는 자식을 길러놓고 성공한 인생이라고요? 그게 성공입니까? 뼈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멀리 타국에 살고 있는 아들이 혹 알면 물론 당장 달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이미 아비 병수발 하느라 젊은 시절의 많은 시간을 써버린 아들을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제 아들도 자기 인생 살도록 해주고 싶은 것이 어미의 마음입니다. 다행히 동네 배달원으로 일하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사연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아들이 부모 때문에 더 이상 고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튼 성공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해줍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늙고 병들면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먹고 싸고 자는 이 모든 기본적인 일들조차 어려워지기 십상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성공 타령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령 고급 요양원에서 지낸다 할지라도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크게 즐겁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공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저 내 자리 하나 지키며 의식주 문제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대단한 업적을 남겨 사회와 후손에게 덕을 끼쳤다면 늦도록 사랑과 존경도 받을 것입니다.
평범한 시민으로 성공을 꿈꾼다면 세상 떠날 때까지 가족들 불편하지 않게 해주고 내 몸 하나 살필 수 있다면 족하다 싶습니다. 아마 늙어가며 점점 실감나게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럴진대 꼭 대단한 일을 해내야 성공이라 칭할 것인가 말입니다. 그저 가까이 사는 사람들 곧 이웃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아가는 것 또한 성공한 삶입니다. 매일 진수성찬을 차리지 않아도 맛있게 식사하고 불편하지 않은 몸으로 다닐 수 있다면 역시 성공한 것이지요. 그렇게 인생 종칠 때까지 갈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행여 아파 누워서 시간 질질 끌며 신경 쓰게 만든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젊은이의 생각이나 의식, 어른들의 생각 그리고 노인의 의식은 다릅니다. 경험하는 환경이 다르고 배운 것들이 다릅니다. 당연히 가지고 있는 꿈도 다릅니다. 그래서 ‘세대차’라는 말이 나옵니다. 더구나 살아가는 처지가 다르고 소위 입장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모두 따로따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이해와 배려입니다. 내 자리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불편해집니다. 극단적으로는 싸움판이 벌어집니다.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 마당에서 살맛이 나겠습니까?
우리 모두 각자의 추구하는 바가 있고 얻고자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서로 충돌할 수도 있고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서로에게 유익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도 될 수 있습니다. 서로의 특기가 서로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수도 있습니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티격태격하다가도 서로의 이익이 맞으면 합해서 조화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네 이웃들 속에서 그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느 공동체나 그렇게 운용할 수 있다면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유기체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도와주면서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려견 1,500만 시대라고 하나요? 꼭 개가 아니라도 모든 반려동물을 합해서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인구 중 3명 당 한 사람은 반려동물을 데리고 산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개일 것입니다.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인 가족이 늘어가는 마당에 아마도 반려견이 더 늘어갈 공산이 큽니다. 개든 동물이든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합니다. 비록 이성은 없을지라도 감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사람의 생명까지 천하게 다루기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입니다.
유명 건축가, 건설 분양업자, 동물병원 수의사, MZ 배달 라이더, 밴드 리더 그리고 입양아를 데리고 사는 케이팝 작곡가 부부 등등 각자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반려견들로 인하여 이야기 속에 엮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개들이 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과 정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 정 때문에 스르르 눈물을 흐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일 텐데 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옵니다. 동물병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다가 이웃의 정과 중년의 사랑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음악으로 마무리됩니다. 영화 ‘도그데이즈’(Dog Days)를 보았습니다. 이거 동물병원 이름입니다. ㅎㅎ
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사는 가운데 하나님은 저 바벨론 땅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직 자식도 없던 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창 12 : 1 - 3) 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하나님 가라 하시는 곳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그 땅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창 15 : 13 - 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지나 이방 땅 즉 애굽에 내려가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크게 번성합니다. 그런데 역시 말씀하신 대로 거기서 크게 곤욕을 당합니다. 자식도 마음대로 낳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지요. 그러니 백성의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래 전 조상에게 약속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부르짖었겠지요.
하나님이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 때를 기억하시고 당신의 종을 택하여 부르십니다. 그 종이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를 통하여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일을 행하십니다. 즉 당신의 백성을 그 이방 땅에서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보겠습니다. 출 6 : 2 - 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많이 들어왔겠지만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호칭할 때 크게 두 이름을 사용합니다. 흔히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또 따로 사용하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입니다. 물론 그 발음에 있어서 정확성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지금 세상에서 그 누구도 정확한 발음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는 전혀 틀린 발음이고 아마도 ‘야훼’가 그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당신을 소개할 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그 이름은 바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출 3 : 14) 아마도 모세에게 처음으로 그 이름을 소개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막연하게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전으로 쭉 전해져 왔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여호와라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의 출발이며 원인자이시라는 뜻입니다. 렘 33 : 2절에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출 3 : 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이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모세와 함께 하셔서 애굽에서 당신 백성을 위해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택하고 부르신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십니다.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아픔과 슬픔을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그 고통의 자리에서 구원해 내시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엡 1 : 4 - 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1.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였습니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이 신이 있다는 둥 없다는 둥 떠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그냥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과 만물의 창시자이십니다. 골 1 :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아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조,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전능하시기에 창조하십니다. 창 1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보이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능한 하나님이신가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분명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나이가 90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다 치고 그 아내 사라도 이미 나이 80이 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자로서의 기능도 끝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부부는 이제 자기네 몸에서 자식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도 또 10년,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창 17 : 15 - 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17 - 18절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즉 첩의 자식이나 후사로 삼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할진대 그 아내인들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 말합니다. 창 18 :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그리고 그 반응은 11- 12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한 마디로 못 믿겠다 그거지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말씀하신 그 날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네 몸에서 낳은 아들을 갖게 됩니다. 창 21 : 1 - 2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사람이 한 일입니까? 사람은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롬 4 : 17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그 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 6 :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십만이 되는 백성이 어떻게 한꺼번에 이동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자기 지배하에 있는 그 값싸고 막대한 노동력을 어찌 그냥 내보냅니까? 당시 애굽에서는 여기 저기 방대한 건축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감당합니까? 바로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에서 들어온 노예들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출 1 :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런데 이 노동자들을 그냥 보내줍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애굽 왕이 내보내게 만들겠다. 누가요?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할!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든지 뜻하지 않은 질병에 걸린다든지 천재지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누가 주관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언약대로 행하십니다.
사람은 약속을 해놓고도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을 나눈 연인이 잠시 헤어져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굳게 약속을 합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말입니다. 그 날을 행복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약속 당일 시간 맞춰 약속 장소로 달려갑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시간에 늦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운전기사를 독촉하며 달려갑니다. 저기 그곳이 보입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너무 기뻐서 좌우도 살피지 않고 길을 가로지릅니다. 그런데 깨어나고 보니 온통 붕대로 감겨 병원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어느 영화 이야기를 간추린 것이지만 이런 일이 우리들의 인생길에서는 종종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지키는 경우도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언약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창 21 : 1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말씀대로 권고하셨고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까? 그 말씀에 신뢰성이 없다면 어찌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작년 한 해 동안에도 많이 당했지만 그래서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을 그다지 경청하지 않습니다. 왜요? 신빙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엽기 유머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국회의원 나리를 태운 고급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논두렁으로 추락했습니다. 때마침 폭우를 걱정하던 농부가 논을 살피러 나왔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했지요. 농부는 땅을 파고 국회의원을 정성껏 묻어줬습니다. 며칠 뒤… 파출소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 부서진 승용차를 봤습니다. 차적 조회 후 그 지역 국회의원의 승용차임을 알고는 깜짝 놀라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그 농부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파출소장에게 사고가 난 경위와 자신이 그 차에 있던 국회의원을 고이 묻어주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경악한 파출소장 왈 "아니 그렇담 그 국회의원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겁니까?" 농부의 대답인즉 "뭐 살아있다고 외쳤지만 그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의 현실을 빗대어 만든 것이지만 이게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민 23 : 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아멘!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자 죄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약속하십니다. 사람을 죄에 빠뜨린 원수에게 말씀하십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갈 4 : 4 -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말씀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나아오시는 것을 보며 말합니다. 요 1 : 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 인생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 : 23) 그래서 히 10 :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고 우리는 구원의 길을 얻었습니다. 할!
앞에 본 성경을 봅니다. 출 6 : 4 - 5절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아파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신 약속,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믿을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만은 언제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늘 조마조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일호의 의심도 불편함도 초조함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십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출 6 : 6 - 7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이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내어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고 또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자식을 키운 부모라면 그 자식이 자라서 처음으로 부모를 바라보며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의 감격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그 자식의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연한 그 호칭을 그 입에서 들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듭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요 또한 그의 택하심을 받은 그의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기뻐하십니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강한 손에 의해 구원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엡 1 : 4 - 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여 하나님을 기리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여 그 하나님을 마음으로 자랑하고 칭송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아멘! 하나님이 강한 손을 더하므로 오늘도 우리를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건져내시고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내실 줄 믿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내가 과연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제사도 번제도 드리지 않습니다. 누가 드립니까? 하나님 백성이 드립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안다면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안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사나 번제를 드리기 전에 우선 하나님부터 알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전에 하나님부터 알고 드리라는 말씀이지요.
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실까요?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시나요? 얼마나 아십니까? 성경 1189장, 31173절 가운데 몇 %나 아십니까? 암송하고 있는 성구는 얼마나 되지요? 암송한들 그 뜻을 알겠습니까? 성경은 구약과 신약 곧 약속입니다. 지키자고 한 약속 아닙니까? 그런데 알아야 지키지요. 여태 듣고 배우고 알고 있다는 성경은 거의 과거 역사 이야기 아니면 현재 우리가 지켜야 할 교훈의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약속은 앞으로 있을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면서 어떻게 약속을 지키렵니까? 그래서 알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혼자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는 못 지킨다면 초림 때 하나님 백성 유대인이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일과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뭐 그리 복잡하게 신앙생활 하냐고 핀잔주시렵니까? 성경 몰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우기시렵니까?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에게 예배드린다고요? 하나님 말씀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 가서 영생복락을 얻겠다고요? 마귀가 박수치며 환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자기 나라, 마귀 나라로 올 곳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길입니다. 제대로 하나님 나라 가는 길입니다. 요 1 : 1 - 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다시 강조하지만 이 말씀이 우리 신앙의 뿌리입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어렵고 힘들어도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며 신앙하지 말고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똑바로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알지 못하니 약속하신 메시야가 눈앞에 보여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었던 유대인들은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초림 때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림의 때를 기다리면서 과연 알고 있습니까? 어디로 어떻게 오시는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알려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합니다. 그냥 믿으면 구원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찾으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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