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핵심인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고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는 구약성경 구절이 공통으로 말하듯,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은 인류의 이상이다. 현대에도 그 열망을 어떻게 이론으로 정립하고 현실에 구현하느냐는 문제는 사회철학의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다. 정의라는 단일 주제만 파고든 철학자, 고(故) 존 롤즈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론’(초판 1971)은 사회 정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획기적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인문ㆍ사회과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세기의 대작이다.
그는 실증과학과 분석철학이 풍미하면서 ‘규범’ 불모지가 된 학계를 향해 정의란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신념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합의를 위해 전통적인 사회계약론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하고 사회과학의 의사결정 이론을 원용했다. 이 때문에 롤즈의 이론은 사회과학이나 사회철학 전분야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롤즈의 패러다임에서 정의의 원칙이란 공정한 배경 속에서 합리적 계약자들이 합의를 통해 도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관’이다.
그렇게 도출된 정의의 원칙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될 때만 허용할 수 있다고 천명한다.
분배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정의론’의 요체는 자유주의 이론 체계 속에 사회주의의 요구를 통합했다는 데 있다. 서구 자유주의 철학의 전통을 잇는 롤즈는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로크보다 평등주의적이고, 마르크스보다는 자유주의적인 ‘자유주의적 평등’의 이념을 옹호하고 있다.
롤즈의 지적대로 ‘정의론’을 통해 마르크스의 유명한 슬로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는 기준을 자유주의 내에서 최대한 실현할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 ‘정의론’ 최종 개정판(1999) 번역(이학사 발행)은 초판을 77년 ‘사회정의론’(서광사 발행)이란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긴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 교수가 다시 맡았다. 황 교수는 롤즈에 관한 저서가 많고 수많은 논문을 통해 그의 사상을 국내에 본격 소개했다. 하버드대 객원연구원 시절 롤즈를 사사하기까지 했으니 아마도 가장 적임자가 아닐까 싶다.
세계 26개 언어로 옮겨진 ‘정의론’ 최종판은 초판 출간 이후 지적된 많은 난점과 심각한 약점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최종판에는 세 가지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사회 경제적 가치에 대한 기본적 자유의 우선성, 분배의 대상인 사회적 기본 가치(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한, 소득과 부, 자존감의 기반)의 설정 방식, 그리고 복지국가에서 평등을 제고하는 문제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유주의적인 도덕적 인간관을 명확하게 근거로 제시해 해결을 시도한다. 복지국가에서 단순한 사회적 안전망이 아닌 실질 평등을 어떻게 제고할 수 있는가 하는 세 번째 문제는 생산적 자산과 인간 자본의 광범위한 소유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풀고자 했다.
‘정의론’ 최종판 번역본은 지난해 11월 타계한 20세기 세계 철학계의 거목 롤즈의 영전에 바치는 한국 철학계의 조사(弔辭)이다. 롤즈는 생전에 성실한 학문 태도와 원숙한 인격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하버드의 성인’으로 불렸다.
역자의 권말 부록 ‘세기의 정의론자 존 롤즈’에는 그의 생전의 철학 행로와 그 의의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돼 자칫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할 780여 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책에 다가갈 좋은 미끼이다.
이 책은 분량만이 아니라 정치하고 심원한 철학 이론이 전개돼 있어 읽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롤즈는 결코 지적 오만을 부리지 않는 학자이다. ‘정의론’은 평범한 독자라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책이다. 번역본도 문장이 평이하면서 유려해 읽기 좋다.
‘정의론’은 통일 한국의 정치철학 이념과 관련해 철학 뿐만 아니라 모든 규범적 인문사회과학의 학제적 연구 대상이 돼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취약한 우리 사회에서 계층간 소득 격차와 지역 격차, 그리고 5대 차별(성, 장애, 학벌, 비정규직, 외국인)을 해소해 국민통합을 이루려는 참여정부가 특히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