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2년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다
- 인류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갈등은 크게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사이에 일어났다. 그래도 싸운 기간보다는 평화로운 기간이 훨씬 길지 않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동안에도 실은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싹텄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기든 그 사회를 손에 쥐었던 지배자는 피지배층의 움직임이 자신들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가로막으려고 온갖 장치를 만들었다. 때문에 이들에게 대항하는 싸움은 힘겨울 수밖에 없고 적절한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성공은커녕 맞서기도 어려웠다. 그 여건이란 무엇일까? 객관적인 형세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고, 대중의 의식도 어느정도 깨우쳐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형세를 읽고 대중을 끌어나가는 인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중세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농민과 이들을 다스리려는 지배층간의 싸움이 중심적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파업이 자연스럽듯이 중세사회에서는 농민의 저항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러한 갈등이야말로 중세사회를 움직여온 동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배층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정치변란 이외에는 지방사회에서 벌어진 세세한 싸움에 대해서는 한 조각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잇지 않아서 우리가 잘 알수없을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양반이라는 지배신분을 중심으로 짜인 사회였으므로 하층신분인 농민이 이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조직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뿐더러 어지간해서는 뒤로 움추려들기 쉬웠다. 그런 속에서는 운동을 끌어가는 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저항에 앞장서려면 농민들을 통솔하는 능력도 잇어야 하지만 그전에 대단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지배층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곧 처벌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기와 신념에 앞서 농민운동의 지도자들은 농민의 입장에서 당시 사회의 모순을 절감하였고 농민의 힘을 모아 해결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 봉건사회의 가장 마지막 시기인 19세기 중엽인 1862년 전국에 걸쳐 70개가 넘는 군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근대로 나아가는 우리 역사의 과정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항쟁을 이끌었다. 그 가운데 몇몇 인물을 찾아서 농민들의 활동이 역사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하였는가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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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적인 농민 운동으로 한걸음 나아가다 - 진주의 유계춘
- 농민 운동은 농민 대중이 주체가 된 운동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농민들이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있어서 공공연히 힘을 모으고 운동에 나서기 어려웠다. 봉건 말기에 부세 문제가 터졌을 때 처음에는 오히려 그 지역의 양반과 같이 어느 정도 힘있는 자들이 나설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전부터 지방 사회를 장악하기 위한 조직이라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층의 권력 독점과 부패에서 비롯된 부세 문제가 지방 사회의 지배 계층인 자신들에게까지 피해를 주자 이들은 참지 못하고 모여서 관과 수령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 방식은 기껏 감사나 비변사에 등장을 올리고 호소하는 정도였다. 봉건 질서를 깨뜨릴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고 이들로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농민들은 실상 부세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입장이나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대체로 양반들의 지시를 받거나 이들에 이끌려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차츰 농민들의 의식이 깨고 힘도 모이면서 직접 농민이나 농민들의 이해를 뼈저리게 느끼는 인물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진주의 유계춘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선대는 양반이었으나 그 자신은 고향에서 뛰쳐나온 탓에 땅 한 뙈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히려 사회 모순에 대해 농민의 편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또 어느 정도 학식이 있을 뿐더러 나이도 거의 오십에 가까워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이나 고을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을에서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등소장을 쓰거나 앞장섰다. 진주는 당시 몇 년 전부터 읍의 재정을 서리와 수령들이 뒤로 빼먹어 모자라는 세금을 메우려고 별도의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그리고 그 액수도 해가 갈수록 커져 갔다. 유계춘은 그 뒤 농민들을 이끌고 천리 길을 걸어 당시 최고의 권부였던 비변사에 호소하여 결국 그 세금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런 불법은 없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에서는 축난 재정을 줄여 주기 보다는 오히려 빨리 채우라고 성화를 부렸다. 지방관이 하는 방식이란 농민들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면장, 이장을 모아 놓고 회유하고 협박하여 토지에다 가외로 세금을 매겨서 채우고자 하였다. 농민들이 다시 반발한 것은 당연하였다. 유계춘은 처음에는 진주 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인 이명윤이라는 인물과 함께 논의하였다. 그러나 서로 대처하는 입장과 방식이 달랐다. 이명윤이 이전과 같이 양반이 중심이 되는 집회를 열고자 했다면, 유계춘은 가급적 농민들이 참여하는 집회를 열고자 하였다. 이명윤이 관에 호소하는 방법을 바랐다면 유계춘은 농민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에 압력을 가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한글로도 따로 통문을 짓고 노래도 만들어 농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명윤은 유계춘의 활동이 자신의 생각을 넘어선다고 보고는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2월 6일, 수곡 장시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계층간의 차이점이 잘 드러났다. 이때 참석한 양반들이 한껏 주장하고 나선 것은 감영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유계춘은 대중에게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 "지금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만 할 것입니다. 당장 개를 잡아서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합시다."
- 옛날부터 여러 사람이 모여 맹세를 할 때는 동물을 잡아 그 피를 입술에 바르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유계춘은 마음을 굳게 다져 먹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양반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감사에게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대표까지 뽑았다. 농민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모여서 유계춘이 주장한 대로 읍으로 쳐들어 가기로 하였다. 병영에서는 유계춘이 앞장서서 농민들을 부추긴다며 그를 진주성 안에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한번 치솟은 농민들의 분노를 막기는 어려웠다. 마침 유계춘은 집안 제사를 구실로 말미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 날인 2월 14일부터 농민 항쟁이 시작되었다. 2월 14일 새벽, 마을마다 장정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모두 머리에는 흰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손에는 지게 작대기를 움켜쥐고 어두운 새벽길을 나섰다. 이때부터 열흘간에 걸친 농민 항쟁이 시작되었다. 그가 봉기 과정에서는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 행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농민들을 지도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대중적인 열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이며 여기서 불붙은 반봉건 투쟁은 경상도의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 전라도·충청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이처럼 농민 운동을 대중적인 운동으로 한 단계 높인 유계춘은 그 대가로 진주성 앞 모래 사장에서 많은 농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머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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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센 지도력과 조직으로 맞서다 - 선산의 전범조
-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 항쟁은 이웃 읍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계속 확대되었다. 같은 경상 우도에 속한 선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전범조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었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본래 그의 신분이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감영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인망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4월 2일 각 동리에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모아 관가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부사를 둘러싸고 토지에 매기는 세액을 낮춰 줄 것을 요구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부사는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고는 감영에 보고하여 그를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그는 감영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그 때문인지 곧 풀려 나왔다. 그러면서 동래부에 전세를 납부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마침 중앙에서 선무사 이삼현이 선산에 도착하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사가 지키지 않은 결가 문제를 다시 따지기로 하였다. 그는 읍내에 들어오면서 농민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의 말 한마디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오후가 되자 농민들은 읍내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부사는 관정에서 다시 봉기가 일어날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였다. 결국 전범조는 이삼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전범조를 보고 이삼현은 비웃었다. 키가 작고 용모도 보잘 것 없으며 말도 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삼현은 한없이 깔보면서 '무식한 놈이구나. 저런 자가 일을 꾸미다니, 저런 자는 위엄으로 눌러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소란을 일으킨 죄를 꾸짖었다. 그러나 전법조는 그 앞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지도자가 된 것이 얼굴이 잘나서도 아니었고 번지레한 말을 잘 늘어 놓아서도 아니었다. 농민과 생활을 함께 하고 농민의 마음을 읽고 농민의 손발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결가를 8냥으로 낮출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대었다.
- "결전 8냥은 처음부터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소이다. 만일 수세 장부를 가져다가 조사를 한다면 8냥으로 하더라도 부족할 이유가 없습니다."
- 이삼현은 조리있게 따지는 그의 말을 듣고는 어쩔 수 없이 장부 조사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되자 부사도 어쩔 수 없이 이서층에도 천여 결 은결이 있고 관가에도 백여 결의 은결이 있어서 여기서 부세를 충당하면 8냥이라도 부족하지 않다고 실토하였다. 마침내 관으로부터 '농민의 바람에 따라 8냥으로 결정한다'고 쓴 문서를 얻어 내었다.
이삼현은 감영에서 전범조를 놓아주었기 때문에 다시금 사태가 나빠졌다고 억울해 마지않았다. 그것은 비록 농민이 관청에 뛰어들거나 이서들의 집을 부수지는 않았어도 4000 - 5000명이 넘는 농민이 그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삼현의 눈에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만 비쳤다. 농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기 때문이라는 점은 간과하고...전범조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중앙 관리로부터 확실한 증거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다음날 아침 전범조는 농민 40 - 50명을 이끌고 관가 마당으로 가서 선무사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삼현은 자신은 지나가는 파견 관리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결가가 많은지 적은지 알 것인가 하고 거짓 능청을 떨었다. 이에 전범조는 굽히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 "관문 밖에 농민들이 많이 모여 있소이다. 만일 선무 사또의 문적을 얻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삼현은 소리 높여 위협하였다.
- "너 이 보잘 것 없는 촌놈이 나에게 공갈을 하느냐, 8냥으로 정하는 것은 한 읍의 중요한 일인데 마침 선무차 들어와서 아무 말이 없을 수 없는 까닭에 이미 문서를 써서 내주려고 하였는데 네가 이렇게 공갈을 하니 내가 공갈에 넘어가서 문서를 내어줄 수는 없다."
- 그리고는 보라는 듯이 미리 준비된 문서를 품에서 꺼내가가 붓으로 지워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교활한 연극이었다. 이삼현은 이미 농민들이 자신의 도장을 요구하리라고 예상하고는 대책을 준비하였다. 즉, 그는 '옛말에 미친 개가 물고자 하면 밥 덩어리를 던져주어서 모면하라는 말이 있지. 비록 비속한 말이지만 족히 시험해 볼 만하네' 하면서 두루마리 종이에 '결가 8냥을 이미 감영과 읍에서 정했으니 이것을 준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쓴 다음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어서 품안에 넣어 두었다. 그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농민들을 '미친개'처럼 대하였다. 그리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속임수라도 자기로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삼현의 연극에 전범조는 당황하였다. 그가 미리 마련한 문서가 '미친 개에게 던져 주는 밥덩이'로써 만들어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삼현이 결가 8냥을 인정한다고 믿고는 그가 떠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결국 이삼현은 농민들을 완전하게 속였다. 그가 농민들을 어떻게 보는가는 '농민들을 크게 처벌하지 않으면 두려워할 줄 모른다. 은덕을 베풀면 그만큼 교만해진다. 지금 잠시 급한 일을 모면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다'는 중얼거린 말에서 알 수 있다. 전범조는 지배층 그 누구에게도 당당히 맞섰지만 그들이 가진 교묘한 속임수는 알아채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삼현은 농민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 이들이 내세우는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범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계속 읍에 주둔하면서 읍권을 장악하고 군비도 갖추었다.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선산읍으로 들어오는 큰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였다. 몰래 들어오려는 진영의 포졸을 잡아 처형까지 하였다. 5월 중순에는 선산의 해평이라는 지역에서, 상주에서 감영으로 가던 감사의 비장을 잡고는 그를 인질로 삼아 아직 감영 옥에 갇혀 있던 농민 이예대와 교환하자고 요구하였다. 결국 감사는 그의 요구에 굴복하여 이예대를 풀어 주었다. 실로 대담한 행동이며 1862년 농민 항쟁에서도 처음 있었던 성과였다. 이때 풀려나온 비장의 말로는 전범조를 중심으로 6- 7천명의 농민들이 모여 있었다고 하였다. 그만큼 선산 농민의 조직력이 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앙에서 군대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자 농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무너져 가는 체제이지만 경군의 위력은 대단한 데다가 왕의 군대라는 의식이 농민들 속에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장흥 출신 백기호란 자가 병력을 이끌고 공격하여 전범조는 체포되고 말았다.(그는 그 공으로 제주 판관이 되었으나 얼마 뒤 탐학 때문에 처벌받았다) 지도자를 잃은 농민들은 쉽게 무너졌으며 전범조는 6월 21일, 항쟁을 시작한 지 석달 만에 많은 농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렸다. 전범조는 그야말로 선산의 농민 항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으며 자칫 넘어가기 쉬운 지배층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농민들의 요구를 앞장서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튼튼한 지도자를 가진 선산은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고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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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와 농민을 위한 길임을 소리높여 외치다 - 함평의 정한순
- 오늘날에도 농민 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인 함평은 익산과 더불어 전라도 농민 항쟁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지도자는 정한순으로 이전부터 자주 서울을 오가며 고을의 폐단을 고치려고 애썼다. 함평에서는 이전부터 결세라든가 환곡의 폐단이 심하여 등소 운동이 일어났다. 정한순 등 지도부는 함평의 폐단 10조와 수령, 관속들의 여러 가지 부정 사실을 한데 모아 관찰사에게 소장을 올렸다. 그런데 감영에서는 시정하라는 지시만 형식적으로 내렸을 뿐이었다. 이에 함평 읍민들은 참지 못하고 서울까지 올라가서 사헌부에 정소하고 심지어 궁궐 가까이서 꽹과리를 치며 왕에게 호소하였다. 남산에 올라가 횃불 시위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함평읍에서는 중심 인물인 정한순을 감영의 도장을 위조하여 무고했다는 혐의로 감영에 보고하여 형배를 가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4월 16일, 정한순은 통문을 돌렸고 농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촌리 장시에 모여 들었다. 정한순은 이때의 상황을 나중에 관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토호를 축출하고 간리배를 응징하기 위해 한 장의 통문을 돌렸을 뿐인데 읍민들이 모여서 모의하지 않았어도 똑같은 심정이었던 듯합니다."
- 이제 농민들은 토호들을 공격하고 이서의 집을 부수고 불질렀다. 수탈의 실무를 맡았던 이서들은 위협을 느끼고는 관가에서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꺼내 들었다. 농민들은 이에 맞서 각 마을마다 깃발을 앞세우고 죽창을 들고 읍내 장터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관청을 공격하여 현감을 끌어내여 길 바닥에 앉히고는 부세를 빼돌린 것을 추궁하였다. 저녁 무렵에 수령의 상징인 인신과 병부를 빼앗고 담가에 태워 경계를 넘어서 무안의 논치라는 고갯마루에 내팽개치고 돌아왔다. 또 포교들을 가두고 감옥을 열어 억울하게 갇혔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이때 농민들은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 매우 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읍정이 마비된 상태에서 농민군은 정한순을 중심으로 교원에 진을 치고 읍의 행정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관에서는 주동자인 정한순을 체포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지만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그를 체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고 안핵사를 견책하고 체포의 임무를 맡은 진영의 영장 가운데 꽁무니를 빼는 자는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였다. 드디어 안핵사가 함평으로 들어오고 선무사까지 이곳으로 향하였다. 중앙 관리와 맞딱뜨리게 된 정한순은 자기 한 몸을 던져 이들과 담판하고자 하였다. 그는 깃발과 창을 든 수천 명의 농민들을 거느리고 관청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안핵사를 만나 차근차근하게 설득하였다.
"이전 감사와 현감이 불법을 많이 저질러서 그 곤경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오늘 안핵 사또의 행차를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바람은 사실이 드러남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 이처럼 스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 그르고 정한순은 그의 활동이 나라와 인민을 위한 것(輔國爲民)임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가 말한 나라는 결코 지배층만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세상일 수 없었다. 그는 농민들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죽더라도 민폐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하며 10가지 읍폐를 일일이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정한순은 함께 항쟁을 이끌어 간 다섯 동지와 같이 군사를 수련하는 교장에서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보국안민은 그 뒤에도 농민 운동의 가장 드높은 슬로건이 되었다.
- 이렇듯 봉건말기에 농민들의 지도자들은 목숨을 내걸고 농미운동을 벌였다. 위의 사례는 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1894년의 전봉준처럼 전국을 호령하는 인물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터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지도자였다. 이들이 앞장섬으로써 앞에서 보았듯이 농민조직에서, 투쟁양상에서, 농민운동에 대한 인식에서 모두 이전보다 한 단계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한 조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에비해 지배층의 힘에 의한 억압과 온갖 기만을 감당하기 어려워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은 지배층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반역'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도 모두 한결같이 머리를 잘리는 참형을 당하였다. 체제 안정을 제일로 삼는 지배층으로서는 피지배층의 최소한의 의사 표시도 위험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위에서 본 인물들은 곧바로 처형당하였고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봉건지배층에게 큰 타격을 주어 삼정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게 하엿고 세도정권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 민중운동 속에 꿋꿋이 자리잡아 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이 이루어 놓은 역사적 전통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전국 어느 구석에도 이때의 농민항쟁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제 고을마다, 마을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과 자신을 희생했던 분들의 사적을 발굴하고 기념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그리하여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지배층을 기리는 거짓 선정비가 아닌 농민들의 꿋꿋한 삶을 담은 기념비를 자랑스럽게 내세워야 할 것이다.
- 구로역사연구소 회보4. 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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