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
-전삼용신부-
운전을 하신 분들은 가끔 기름이 떨어져 가는데 주유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경험을 한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처음 차를 샀을 때, 서울에 급한 일이 있어 기름을 넣지 못하고 빨간 연료 등이 들어와 있는 상태로 한참을 다녔습니다. 일을 마치고 서울이니 주유소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며 찾았지만 시내에선 좀처럼 찾기 어려웠고 더군다나 차가 많이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멈추어 있을 때는 아예 시동을 꺼 놓고 있었습니다. 차가 길 한가운데 멈추어 서서 발생하는 문제도 작지 않지만 기름이 다 떨어져버리면 차의 엔진에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슴 조렸던 생각이 납니다. 다행히 가까운 곳을 찾아 기름을 가득 채우니 마음이 다 든든하였습니다. 가끔은 주유소에 갈 시간도 부족할 때가 있으니 항상 차의 기름을 충분히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주유램프가 들어오기 전에 기름을 채워 넣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유학 나와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차로 주행을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 연료를 확인해보니 거의 가득이었습니다. 저는 이정도면 로마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함께 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신학적인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주고받다가 무심코 연료게이지를 보았는데 빨간 불이 들어와 있고 연료는 거의 바닥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주유소를 지나쳤고 또 남은 주유소도 그 연료로는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전화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레커차가 오더니 기름 조금 넣어주고 우리나라 돈으로 30만 원가량을 받아갔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게 미련한 처녀들이 졸다가 기름이 부족해 끝까지 못가는 경우구나!”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종말에 등잔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주었던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고 기름이 없는 처녀들은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 오더라도 반가이 맞이할 수 있도록 불 켜진 등잔을 들고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신랑이 오는 때에 보니 자신의 등잔이 꺼져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구원되기 위해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항상 기름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 말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름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름을 지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혼인하기 위해서 사제가 필요합니다.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혼인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도 한 몸이 되시기 위해 성령님이 필요하신 것처럼 모든 하나 되는 것은 하느님 ‘삼위일체’의 모델을 따릅니다. 하찮은 꽃들도 서로 수정이 되기 위해서는 꽃가루를 날라주는 벌이나 바람이 필요하듯이 둘만의 힘으로 하나가 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하고 유일한 신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천상예루살렘, 즉 교회와 혼인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랑은 준비되었지만 신부 측에서 준비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름’이신 성령님입니다. 인간의 기름통이 원죄와 본죄로 깨어져 기름을 주어봐야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피를 흘려 인간의 깨어진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의 의미이고 그 피와 물로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그 분과 한 몸이 될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때 먼저 물로 씻고 다음에 크리스마 성유를 바르는 것은, 항상 씻는 것이 먼저고 그래야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물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의 깨어진 곳이 정화되고 치료되어 기름이 새지 않는다고 하여도 기름을 꾸준히 채워 넣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 소진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한 번 기름을 넣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가 움직이는 동안은 끊임없이 주유소로 가야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들도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오늘의 미련한 처녀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침, 저녁 기도나 삼종기도와 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들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님의 9가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줄어들고 사람이 미워지려 한다면, ‘기쁨’이 줄어들고 우울해 지려 한다면, ‘평화’가 깨어지고 초조해지거나 걱정 불안 두려움이 커진다면, ‘절제’가 안 된다면, ‘화’를 참지 못하게 된다면 등으로 자신의 기름 정도를 체크 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모든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기에 에너지가 떨어진다고 느끼면 기도해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성령님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 사람은 먼저 그릇의 깨어진 곳이 없는지 살펴야합니다. 적어도 대죄가 없는 은총지위에 있어야 기름이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성령 충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기 때문에 ‘말씀과 성체’를 가까이 하면 됩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십시오, 즉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양승국신부-
언젠가 인천교구 김병상 신부님께서 "기쁨과 사목"이란 소식지에 기고하셨던 글을 읽고 크게 뉘우친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사제로 서품되신 직후 한 원로 신부님을 찾아가셨답니다. 인사를 올린 후 "새 사제로서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하고 조언을 부탁드렸습니다.
한참 묵묵히 생각이 잠겨 계시던 신부님은 이런 조언을 해주셨답니다. "자네가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될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도록 노력하게나. 언제나 자네 주변에서 가장 수고가 많은 식복사 자매님, 수녀님, 사무실 직원, 사목위원들을 먼저 챙기고 그들에게 정직한 모습, 성실한 사제의 삶을 보이도록 노력하게."
평범하고 소박한 한 마디 말씀이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인생의 진리가 담겨있는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또한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란 쉬운 일입니다. 또 그들에게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는 너무도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 배우자, 부모, 자녀, 직장동료, 친구, 이웃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실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고 하시며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떤 모습의 삶이 <마지막 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삶이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늘 정리된 삶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소유지향적인 삶, "이것만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식의 고착된 삶의 양식으로부터 이탈된 삶, 그런 삶이 준비된 삶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삶 역시 극도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었습니다. 매일 다가오는 수많은 문제들과 한계들을 매일 아버지께 맡기고 밤이면 모든 걱정 툭툭 털어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던 삶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그 누구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보스코 성인의 영성 그 핵심에 "일상의 영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상의 영성은 평신도들의 영성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일상의 영성은 다름 아닌 매일의 삶에 충실하려는 영성입니다. 무엇보다도 일상의 영성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 가장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실하려는 영성입니다. 또한 매일 주어지는 작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업무들에 충실한 영성입니다. 아울러 매일 와 닿는 예기치 않았던 고통스런 상황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영성입니다.
회개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우선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개선시켜나가는 노력입니다. 이런 일상에 대한 진지함이나 충실함이야말로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노력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인생의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영국, 프랑스, 한국 학생이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명 모두가 두려움에 젖어 뛰어 내리려 하지 않았지요. 이 모습을 보고 있었던 영국교사가 영국 학생에게 말합니다.
“신사답게 뛰어내려라.”
영국학생은 고개를 끄떡이더니 과감히 뛰어내렸습니다. 그 옆에 있던 프랑스교사 역시 프랑스 학생에게 말합니다.
“뛰어내려라. 그리고 예술을 보여라.”
프랑스 학생도 잠시 생각하다가 굳은 결심을 한 듯 뛰어내립니다. 마지막으로 혼자 남아 떨고 있는 한국 학생에게 한국 교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힘차게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한국 학생에게 뛰어내릴 힘을 준 마지막 한 마디는 무엇이었을까요?
“내신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꼬집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긴장하는 수험생들과 그 부모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앞선 영국, 프랑스, 한국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감하게 뛰어내릴 수 있도록 했던 말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그러한 힘이 되는 말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신앙인들이 성당에 나올 수밖에 없는 말들, 기쁨과 희망을 간직하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요.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우리들이 구원을 받던지, 구원을 받지 않고 살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부모에게 자녀에게 때로는 싫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싫은 소리를 통해서 스트레스 많이 받으라고, 그래서 잘 살지 말라고 하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바로 그러한 말을 우리 각자에게 하십니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과 행동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말은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다른 말에서만 희망을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빠다킹신부
민물장어와 어느 신부님
- 임문철 신부-
“착한 목자셨던 원 요한 신부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역만리 타향인 이곳 제주에 오셔서 당신의 한평생을 하느님 사랑 전하는데
헌신하신 신부님, 말씀으로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나누어주셨기에 아직도 그 향기가 제주 섬에 가득합니다. 투병 중에, 너무도 고통스러워
‘하느님, 어깨, 어깨’ 하며 기도하셨다는 신부님, 몸조리에 좋다고 하여
민물장어를 대접해드렸더니 그렇게 맛있게 드셨는데,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보시고는 ‘지금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시는 먹지 말자’
하시면서, 그 후로는 아무리 졸라도 가지 않으셨다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저희를 위해 내놓으셨으면서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민물장어조차 비싸다고
거절하신 신부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신학생 시절 본당신부님이셨던 원 신부님의 10주기를 맞아 추모 음악회를 열면서 쓴 글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등을 환히 밝히셨던
분이셨습니다. 수녀님들이 소임 이동을 해 처음 저희 교구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제주교구 신부님들이 참 열심히들 사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는, 신부는 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빈 등잔 속을 헤매는 내 모습
-한명수 시인-
◆“나는 우리 집사람 치맛자락만 꼭 잡고 있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거야!”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선배 교사가 있다. 은근히 본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부인 자랑을 하면서도 자신은 좀 부족하지만 아내 덕분에 하늘나라는 쉽게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참 좋겠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야기의 뒤끝을 씁쓸하게 한다.
예수께서 등잔 속의 기름, 혼인 예복, 바위 위에 지은 집 등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 그 의도하는 바는 똑같다. 곧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만이 심판관의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타인의 공적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함께 사는 부부일지라도 배우자의 공덕을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선배는 그저 한번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그의 생활과 언행을 가만히 보면 그것이 완전히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하지만 하루 일을 반성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저녁기도 시간이 되면, 나 역시 그 부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나 역시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공동체의 공로에 묻어가려는 얌체짓을 행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동료들은 잘도 참아주니, 참으로 나는 ‘어리석은 처녀’인 것이다. 남의 공로에 묻어가려는 선배를 질책하는 시선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가슴에 꽂힐 때 나는 심한 고통을 느낀다.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라고 애걸하는 내 모습이 텅 빈 등잔 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
- 김인한 신부 -
이런 대화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가 어딘지 아십니까?”
“어딥니까?”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멀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 다짐하는 것이 얼마나 먼지 모릅니다. 아는 것과 마음 먹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랍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것보다 더 먼 거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먼거리요?”
“예,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거리도 제법 됩니다만은, 마음에서 손발까지의 거리는 사실 더 먼 것 같습니다.”
“예... 그렇군요. 백날 마음을 먹으면 무엇합니까? 단 한 번의 실천에 견줄 일이 아닌 것을...”
예전에 저는 어느 글에서 저에게는 조금은 쓰라린 비판하는 글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예수쟁이들은 흘러넘치지만, 예수를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말입니다. 신부는 있는데 영적인 아버지는 없다는 어느 신자의 고백의 글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입바른 소리 잘하고, 하느님이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는 없습니다. 예수쟁이들만 난무하고, 예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진정 한 사람에게 사랑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며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면서도, 자신 스스로가 살아가는 삶은 천국과 거리가 먼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 부산교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시는 빈민사목을 담당하시는 서유승 신부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엇습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천주교 신자 비율이 아주 낮으며, 서울에서 아주 잘사는 동네일수록 천주교 신자 비율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우리 교회가 외형적인 구원만을 찾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노력이 많이 부족햇음을 이야기 해주는 것은 아닌지, 우리끼리만의 구원을 찾고만 있는지 반성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물어봅니다.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에 대해서 잘 ‘아는가?’, ‘모르는가?’ 혹은 신앙심이 있어서 기도를 많이 ‘하는가?’, ‘하지 않는가?’ 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살아가는가 살아가지 못하는가? 의 문제입니다. 결국 삶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죽어서만이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우리의 기다림은 먼훗날의 기다림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기다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운 처녀와 그리고 미련한 처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이라고 하지만, 어찌보면 미련스럽게 그 무거운 시간을 지켜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잔머리로 그리고 얊팍하게 살아가는데, 미련스럽게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내어서 보여주는데, 속으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만 목을 메고 있지만, 진정 주님과 함께하고, 그리고 나눌 시간들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다가올 것에만 눈을 들지만, 속에서는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와 그리고 우리의 예수님은 세상의 눈으로 미련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직하게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고, 이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삶안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자리잡기 시작할 때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우리는 진정 주님을 맞이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기다리는 그리고 준비하는 이에게 그것은 다가올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7, 21)
우리는 그날, 그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유재훈 신부-
우리는 그날, 그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압니다. 그날, 그 시간은 지구의 종말, 최후의 심판, 구원의 날,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나의 죽음으로 그날, 그 시간을 더 빨리 체험하게도 됩니다.
예수님은 그날, 그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그 시간을 아무도 알 수 없는데 가끔 어떤 사람이 그날이 언제 시작하니 자신의 교회에 들어와 그날을 준비하라고 호도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말에 넘어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바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날이 와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제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원망합니다. 가족과 직장 그리고 재산을 잃어버린 것을 후회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천국을 내기하는 도박꾼’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도박은 적은 돈과 적은 노력으로 한순간에 상상할 수 없는 재화를 갖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날 도둑이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서 천국 갈 준비는 하지 않고 몇 달의 기도로 천국을 얻으려 하니 말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히 하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김기태 신부-
옛말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이라 하여 '날마다 좋은 날'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보람된 삶의 연속이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저서 '명상록'에서 '오늘이 네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서도 '오늘이 네 인생의 최초의 날이요 최후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라' 고 했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린 날이요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오늘뿐이기에 오늘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하루하루가 편치 않고 순탄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인생을 한 조각 조그마한 배를 타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는 일엽편주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항상 순풍만 부는 것이 아니라 뜻하지 않은 광풍과 암초에 부딪쳐 난파할 수도 표류할 수도 있는 위험한 항해의 연속입니다. 매일의 삶이 힘들고 비상한 순간의 연속이든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며 권태를 느끼는 반복이든지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날마다 주어지는 삶을 이끌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가 어리석은 처녀들은 물론 슬기로운 처녀들이 졸다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모범적인 처녀들로 인정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이 늦게 도착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고 대비했다는 데 있습니다. 곧, 깨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신들의 준비성 덕분에 결정적인 순간에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으나 이와는 달리 지각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유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변화가 필요한 것같습니다. 곧,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면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머물러 있지 않고 깨어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끝없는 변화의 삶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변화란 이렇게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계절을 통하여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에 사는 사람은 철 따라 변하는 계절로부터 배울 바도 많고 계절에 대치하는 준비도 많으며 이를 통하여 계속 깨달아야 할 귀중한 진리가 있다고 봅니다.
봄은 희망과 설계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은 성장과 열정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과 아름다움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은 동결과 심판과 휴식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봄 같은 꿈의 계절 여름 같은 성장과 활동의 계절 가을같이 그간에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 계절 겨울같이 휴식의 계절이 뒤따릅니다.
이처럼 계절은 각기 나름대로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봄은 봄의 아름다움을 여름은 여름의 아름다움을 가을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겨울은 겨울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열 처녀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그대로의 머묾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자리만을 지킨다는 것은 머묾의 시작입니다. 변화라는 것은 봄은 여름이 필요하고 여름은 가을이 필요하고 가을은 겨울이 필요합니다. 결코 변화를 원하는 삶이라는 것은 준비되지 않은 삶이어서는 안됩니다. 변화를 원하는 것은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곧,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항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입니다.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지혜롭습니다. 자신의 몫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처녀의 모습은 농부와 같습니다. 농부는 계절을 고치는 자가 아닙니다. 다만 계절의 변화를 알고 받아 들여서 그를 따라 농사의 수고를 알고 열매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인생의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겨울에 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겠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을 준비가 있어야겠다는 말입니다. ●
-김윤태 신부-
오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이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 되어라”고 거듭 당부하시면서 그 일을 등잔의 기름을 잘 준비하는 일로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실천을 통한 기름을 채움은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숙제입니다. 해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들이나 사제 수도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며 즐겨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염두에 두고, 먼저 이야기 하나를 들어 봅시다.
모든 동물들이 화목하고 풍요롭고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동네에 토끼집에서 자기 집 앞에
예쁜 돌을 하나 가져다가
집 앞 정원을 예쁘게 꾸몄습니다.
며칠동안은 계속
다른 동물들이 구경을 하며
좋다고 칭찬하고 격려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옆집에 너구리 길 건너 사슴 등
모든 동물들이 자신들의
집 앞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동물동네는 아름답게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동물들이 도를 넘어
자신들의 집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뒷동산 그 넘어 큰 산까지 찾아가
각종 돌이며 아름답게 보이는 나무며
온 산을 뒤엎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모든 곳이 황폐되어 갔고
나아가 자신의 집 앞도 흉물스럽게 변해갔습니다.
급기야 동물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다른 곳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동물들이 자신의 집을 꾸미는 것은 정도를 넘어 너무 과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과 조금 여유로운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면서 구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세상이 꼭 생존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에 대해서 관여하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보살피십니다. 바로 끊임없는 '창조'가 그것입니다.
그에 반해 세상은 자신이 어디서 왔고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쩜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자신이 그 중심에 서 있고 싶어 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힘(세상의 힘)을 보여주고 가지고자 합니다.
이런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뱀과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보다 세상의 것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는 '죄'라고 부르며 그 결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 생존의 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결국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것은 우리의 생존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에 관심이 있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악'이라 부릅니다. 이 악의 가장 큰 특징은 항상 따뜻한 이웃이요 친구로 다가 옵니다. 심지어 악으로 드러난 이후에 조금 지나고 나면 또 그를 가장 친한 이웃으로 좋은 벗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이 힘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세상, 악)에게 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느님은 주실 것이 없는 것 같고 세상은 우리에게 줄 것이 아주 많은 부자로 보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함께 화목하고 조화롭게 여유롭게 사는 것이지 자신만 풍요롭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하느님의 축복인 것처럼 항상 우리를 부추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결과는 위의 이야기로 결말이 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금 여유롭고 평안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우리에게 “나는 너희들이 누구인지 모른다.”하시면 어떡하겠습니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세상의 것은 생명을 기초로 하지 않고 부유한 것에 기초를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행복이나 여유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세상의 등잔에 기름을 채웁니까? 하느님의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자 노력합니까?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길 꿈꾸고 있나요? 부유한 세상사람, 부유한 하느님사람, 가난한 세상사람, 가난한 하느님 사람.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아님 적어도 가난한 세상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하느님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청자 여러분 하느님이 기억하는 우리가 되는 하루이길 기도합니다. ●
-최종수 신부-
신학생 시절 아침기도가 끝나고 묵상하는 시간이면 마치 조는 시간인 것처럼
졸음이 몰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축제의 개막식 날로 기억됩니다.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주제로 신학교의 일상을 영상물로 제작한 일이 있었는데
아뿔사! 아침기도를 바치고 묵상시간에 디딜방아 찧으며 졸고 있는 제 모습이
영상물에 편집되고 만 것입니다. 그날 개막식의 사회자가, "졸고 있는 풍경이
나가면 개막식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축제를 마치고 맥주를 샀던
웃지 못할 추억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분심과 졸음. 분심은 정신을 집중하면 쫓을 수 있지만 졸음은 정말 몰아내기 힘든
도둑과 같습니다. 특히 점심 식사 후 조수석에 앉은 뒤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갈 때 찾아오는 졸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듯 졸음은 생리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졸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무를 다 하지 않고
졸고 있는 태만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자비를 베풀고, 이웃과 자연과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풍경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 앞에 미련한 처녀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불의와 전쟁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 불감증 환자가
되어버린 듯한 우리들의 모습은 현명한 처녀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없게 만듭니다.
깨어 있는 삶
-최혜영 수녀-
열 처녀의 비유를 들을 때면 저는 늘 마음이 찔리곤 합니다. 과연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늘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제 책상 위엔 늘 이것저것 잔뜩 쌓여 있고 막판까지 가야 발동이 걸리는지라 늘 머리 뒤꼭지에는 뭔가가 걸려 있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면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보다는 뭔가 이것저것 지난 일을 생각하거나 미래의 계획 속에 사는 때가 많습니다.
많은 영성가들은 “현재에 충실하라”는 충고를 합니다. 하느님 현존을 깨닫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요, 구원이 실현되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라도 달려가시겠다며 브르낭의 ‘부활 아침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 그림을 벽에 걸어 놓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감탄스러울 정도로 무슨 일을 미루는 법이 없으십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고 싶으면 생각한 즉시 실천에 옮기십니다. 또 움직일 수 있을 때 기쁘게 다니시고 입맛이 있어 맛있게 음식을 드실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오늘을 감사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종말론적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죽음을 대면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복일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처럼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만옥 신부-
◆학교 다닐 때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로 공부해 본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만 그런가? 분치기·초치기를 하면서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그런 경험. 그럴 때마다 ‘다음부터는 미리미리 공부해 둬야지’ 하지만 그 결심은 시험 때마다 반복되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매일미사 때 강론을 하고 있지만 평일미사보다 주일미사 강론이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생 때 벼락치기로 공부하고 시험을 보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주일 강론 원고도 늘 이르면 토요일 오전에, 그렇지 않으면 오후가 되어서야 완성된다. 어떤 신부님은 주초에 원고를 작성하고 주일 전까지 계속 수정해 가면서 완성한다는데…. 그런 신부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들 같다. 물론 나는 늘 바둥거리고 허둥대는 어리석은 처녀들 같고.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좀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그날과 그 시간을 알고 있는 시험이나 강론도 그 모양으로 준비하는데 예측할 수 없는 그날과 그 시간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세속 삶의 버릇과 영원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는 다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전체적 삶의 지향이나 영적 삶을 보실 것이다. 하지만 세속의 삶에서도 모든 것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버릇을 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등과 기름
-이회진신부-
지난 월요일 복음 묵상을 하며 “구원”에 대해 잠시 언급하였을 때
에비 신자를 포함한 신자 몇 분이 구원에 대해 잘 모르겠다며
좀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주었으면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수도원에서는 이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실제로 신자들에게 “구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난감한 점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움을 주는 것은
신자분들이 “구원”에 대한 문제를 “구원된 삶”에 대한 문제와 구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나라에 초대를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열 처녀처럼 등을 받았고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무엇인가 더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나 모두 하느님나라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런 구별이나 전제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구원받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하느님나라에 자유로이
아무런 제약 없이 구원받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틀림없이 종말론적인(최종적으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하느님과 구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저 구원되리라는 기대는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 자신의 주제를 넘는 것입니다.
한편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 더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구원의 문제는 우리의 몫(주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다 채우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에 관하여도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기”(마태 19,26) 때문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받아먹을 생각만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구원의 문제는 분명 복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종적인 구원은 하느님의 몫이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실제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고민은 우리의 현재 삶 안에서의 구원의 문제,
즉 구원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의 생활 안에 들어온 이들은 구원의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모두 구원의 삶에 초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구원된 삶의 기쁨을 현실 생활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이제는 이 세상에서 살며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기다리고 열망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 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세례를 주라고 보내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졌다”(1고린 1,17)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이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셨으며,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은 요한 17,19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사는 것 자체가 구원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 있음을 체험하며,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살아있는 복음, 살아있는 기쁨의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나라에 초대 받았지만 여전히 그분께 무엇을 청할 지,
아니면 그냥 되겠지 하며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구원된 삶을 살 수도,
최종적인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님을 오늘 복음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길을 배우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길이 슬기로운 처녀가 등과 기름을 함께 지내고 기다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거창한 미래의 목표를 준비하는 것이라기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주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당신을 인해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으로 인해 인내하게 하시며, 당신으로 인해 움직이게 하소서. 아멘.”
갈망(渴望)의 기름
-이수철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두 대목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문은 닫혔다.”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끝 부분의 대목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 늦게 서야 기름을 마련하여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고,
문은 닫혔습니다.
아무리 후회한들 닫힌 문은 다시 열수 없습니다.
하루가 열리고 하루가 끝나 닫히면 더 이상 열 수 없습니다.
지나가 버려 닫힌 세월들,
아무리 후회하고 아쉬워한들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오늘 열린 하루가 끝나 닫히기 전에 100% 깨어 사는 게 제일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정적 죽음으로 문 닫히면 모든 것은 끝입니다.
언제 죽음이 와서 삶의 문이 닫힐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신체 기능의 문이 닫힐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매일 순간 평생을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깨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미운 정 고운 정 깊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삶의 거품이나 환상은 걷히고 본질만 남습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이 말씀 역시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또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지요?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평생 과제가
참으로 서로를 깊이 아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 진정 주님을 알았다면
이렇게 태만하게 준비 없이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 등잔에 갈망의 기름을 늘 확인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감히 ‘갈망의 기름’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갈망이
늘 깨어 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이 있어 깨어있음이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런 갈망이 사라지면 영성생활도, 수도생활도 끝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찾는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man of desire)’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갈망의 사람들인 우리들,
사람들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느님 눈엔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아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모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과의 깊어지는 사랑과 앎의 관계 중에
갈망의 기름 가득 채워지는 우리들의 마음 등잔입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