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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구별된 사람들
출 10: 21-23
병든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말씀을 듣고 그 아버지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믿사오니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이 말 속에 그의 모순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믿는다는 말입니까,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믿으면 믿는 것이고 못 믿으면 못 믿는 것이지 내가 믿사오니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안 믿는다면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다고 우리에게는 동시에 의구심 ․ 주저함 ․ 두려움 ․ 의심 같은 것이 동시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제 말을 곧이들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상담을 할 때는 매우 합리적으로 또 냉정하고 판단하고 또 상식적으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담을 마치고 기도할 때 그 때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이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하는 말이고 믿음의 고백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말씀도 신뢰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까. 저에게도 모순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상반된 면모가 있지 않습니까. 길을 가다가 누군가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나 저사람 몰라요, 나 교회 안다녀요, 이런 민망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아,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담대하게 전도를 하지 못할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어느 것이 진짜 우리의 반응입니까? 또 누가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볼 때 한편으로는 저 사람 참 믿음이 좋다, 뜨겁게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꼭 저렇게 티를 내야 될까, 꼭 저렇게 기도해야만 잘하는 것일까 하는 흉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진짜 우리의 마음입니까? 신도시 같은 데 가서 한 상가건물에 교회가 여러 개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민망하고 대한민국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정답은 둘 다라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늘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삽니다. 사랑하려는 마음과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령과 육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힘든 것입니다. 몸을 입고 살면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이 깊어지고 오래되면 우리를 영적으로 무기력화 시킵니다.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을 품는다고 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그의 믿음의 능력이 없어지고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얘기입니다.
소위 세계화된 시대에 살면서 세상은 점점 좁아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는 것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눈치 봐야 될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손해를 보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남편들입니다. 남자들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가정의 돈 지출에 대한 권한이 점점 남편으로부터 아내에게로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마는 통계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만큼 남편의 권한이 줄어들어 간다는 얘기입니다. 남편들이 불쌍하지요. 남편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요즘 남학생들이 남녀 공학을 피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도 여학생들에게 치여서. 남자의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누가 손해를 보는지 아십니까?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에는 지도자들의 권한을 존경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우러러 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 없습니다. 이제는 초등학생도 대통령을 욕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초등학생이 무엇을 안다고. 그러나 이제는 높은 사람, 우러러 보는 사람, 어려운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요구하는데 정말로 물러가면 대책이 있느냐? 대책 없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무책임한 것입니다. 이건 국가의 절차와 제도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불만, 자신의 감정, 이것이 어떠한 원칙보다, 제도보다도 어떠한 질서보다도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내 불만을 표시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가정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고 직장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고 교회에서 통하지 않는 것이고 나라에서도 당연히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이 시절은 합리적인 시절이 아니고 감정이 다스리는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합리적인 것이 통하지 않고 목소리 큰 사람과 강한 정서가 다스리는 시대가 되다보니까 이제는 이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불쌍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불쌍합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시대에 누가 손해를 보는지 아십니까.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종교가 손해를 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적당히 포용이든 타협을 말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우리가 믿는 교리에 대해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천년 전에도 그랬고 구약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왜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던져졌는지 아십니까.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까.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까. 예수님 믿고 섬기는 것을 거부하기를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했습니까. 일본 신사에 절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만 기독교가 타협을 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믿음의 성격상 불가피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타협하게 된다면 믿음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고 진리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고 예수님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타협하게 된다면 예수님을 그저 인간으로 보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담당하러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는 믿음의 성격상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든 중세든 지금이든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여전합니다. ‘천하에 사람이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느니라‘ 그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같이 일하고 같이 어울리고 같이 잘 수는 있지만 우리의 믿는 것을 타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이러할수록 우리는 더 담대해 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해야 되지만 동시에 강하고 담대해야지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서 온유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물러 터져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는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귀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무력화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귀를 내쫓는 것이 영적인 능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화 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영화 엑소시스트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 영화는 제일 무서운 영화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입니다. 그 영화가 처음 개봉됐을 때 전기 소모량이 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불을 켜놓고 잠들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 두 명의 신부님이 나오는데 젊은 신부는 귀신에 대해 무지하고 나이든 신부는 전문가입니다. 그 소녀 속에 들어온 귀신을 만나보고 쫓아본 적이 있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젊은 신부가 자기의 이론을 이렇게 폅니다. ‘제 생각에는 적어도 이 소녀의 속에 세 인격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이든 신부가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아니다, 단 한 인격체만 있을 뿐이다.’
마귀는 우리를 혼동 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해져서 마귀를 내쫓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정확하게 구별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구별하십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세상에 섞여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 당신이 백성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십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구별이 가능합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이 정확하게 구별됩니다. 우리 눈에는 구별이 안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애굽 전역에 어두움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자수하여 광명 찾자. 빛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십니다. 내 백성, 내 자녀라고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십니다. 차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로 우리에게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어디에 속했느냐 나는 누구편이냐 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확한 정체성이 있어야 됩니다. 아이덴티티가 분명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거기에 따라오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고 우리에게 분명한 정체성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오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영적인 특권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었더니 애굽 전역에 어두움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던 것처럼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에요. 온 세상이 어두워 깜깜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은 어두움이 다스리지 못합니다. 온 나라에 불황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는 형통함이 가능한 것이고 온 세상이 병들고 우편에서 만인이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경제적으로든 건강이든 모든 면에 있어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것을 아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권세와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게 바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니다. 무기력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모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 이상하다. 오, 신비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당연한 것입니다. 응답 안하시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했는데 믿음은 일하는 것이요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요 믿음은 능력이요 믿음은 적극적인 것이요 믿음은 유일하게 우리를 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완전한 구속
출 10: 21-26
역사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를 나타내는 웅변적인 대 사건입니다. 저들이 애굽에 머문지 430년이 되는 그 날에 이스라엘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기적의 해방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 축복의 역사에 참여한 자를 가리켜 장정만 60만명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토(吐)한 그 네 번째의 거절과 주장입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하는 말은 '발굽 하나라도 남길 수 없다', '조금도 남길 수 없다'는 당시의 격언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Ⅰ. 애굽 바로왕의 회유책에 대한 강한 거부를 뜻합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회유책은 벌써 네 번째였습니다. 바로 앞에 나타난 모세는 「내 백성을 내어보내라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출애굽의 명제를 제시했습니다(출5:1). 물론 애굽의 바로는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바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① 피(출7:14-25), ②개구리(출8:1-15), ③이(출8:16-19), ④파리(출8:20-32), ⑤악질(출9:1-7), ⑥독종(출9:8-12), ⑦우박(출9:13-35), ⑧메뚜기(출10:1-20), ⑨흑암(출10:21-29), ⑩장자의 죽음(출12) 등의 재앙으로 바로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재앙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모세를 통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출애굽의 명제를 제시하였습니다''
. 이때 바로는 모세에게 타협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출8:25). 그때 모세는 그것은 불가하다고 거절하였습니다(출8:26). 이것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붙들어보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사탄의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8장 28절에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절하기를 왕을 떠나 기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출8:29). 그 세 번째는 남정만 가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0장 11절에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고 하면서 바로가 그들을 쫓아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여덟번째 재앙인 메뚜기 심판을 예고했을 때, 겁을 집어먹은 바로가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기를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자가 누구 누구뇨」라는 질문을 했을 때, 모세가 답하기를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출10:8,9).
그때 바로는 남자 장정만 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과 부인들(가족들)과 재산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붙잡아 놓기 위한 바로의 술책입니다. 이것이 오늘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쓰는 유혹 중에 하나입니다. 전부가 아닌 부분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물론 모세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 네 번째는 우양만은 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가 아홉 번째 흑암 재앙으로 두들겨 맞았을 때 제의한 술책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4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끈덕진 사탄의 도전입니다. 이때 모세는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출10:25, 26). 우리는 여기서 바로 왕의 결사적인 유혹과 계책에 대하여 결정적인 거부의 답변을 하는 모세를 보게 됩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거절입니다.
결코 이럴까? 저럴까? 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고 단호한 거부였습니다.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시종이 여일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일에 추호의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신앙적 주장이었습니다. Ⅱ. 하나님 여호와 예배를 위한 목적적 수단임을 답하는 말입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는 명백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6절에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대답입니다. 지금 모세는 그와 그의 백성이 왜 애굽에서 나가야하는가를 분명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예배) 것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결정적인 목적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결코 정치적이요, 사회적이요, 경제적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결코 정치적 해방신학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길 구원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 섬기는(예배) 필수적인 수단이 양과 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리의 소나, 양이라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섬김(예배)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양과 소들은 하나님 섬기는 제물로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내용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양과 소떼들 중에서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예배) 것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모세는 그 전에 바로 왕 앞에서 이 사실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출10:9). 사람뿐 아니고, 재물(牛, 羊)도 가지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목적에는 재물(牛, 羊)이 수단으로 따라야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우양들 가운데 하나님께 구별되게 드려지는 제물은 지극히 적은 수입니다. 그 외는 모두 이스라엘 생존의 경제적 수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우양을 이스라엘이 하나님 섬기는 목적을 위한 경제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진리는 바로 전 성경에 충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일반계시, 곧 자연계시(자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김에 필요한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만물은 다 인생 것이요,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우주 존재의 대 질서요, 축복의 원리입니다(고전3;21-23).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10:31)
Ⅲ. 완전 구속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토한 말씀, 곧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소'하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하여 계획한 모든 사람, 모든 재산은 완전히 다 애굽에서 나가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
인이든 그리고 은이든, 금이든, 아니면 다른 보석이든 그리고 우양과 다른 생축이든,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가지고 나가야된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바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役事)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출12:32). 심지어 이스라엘은 고센 땅에서 발교되지 못한 반
죽 담은 그릇까지 옷에 싸고, 어깨에 메었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은금 패물과 의복과 물품까지 구하여, 다 가지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출12;34-36). 저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모조리 다 가지고 나왔습니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경 표현은 이 세상에서 인류를 향한 당신의 구원을 완전히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완전 구속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완전 구속의 내용이 무엇일까? 1. 전인(全人) 구원입니다-개인
적 완전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전인(全人)으로 창조했습니다. 흙으로 육신을 만들었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므로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영육(靈肉)의 존재로 지었
습니다. 육신(肉身)이 없는 영(靈)만의 인간이거나 영(靈)이 없는 육(肉)만의 인간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창2:7) 아담은 먼저 그 영이 하나님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 육도 함께 죽었습니다. 영육이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먼저 죽은 영을 살렸습니다. 복음을 듣는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부활입니다(요5:24-25). 그 다음에 죽은 몸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요5:28-29). 그래서 바울
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살고, 죽은 몸도 다시 산다고 하였습니다(롬8:10-11)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양분하지 않으십니다. 전인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일부분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전인을 요구합니다. 전부를 요구합니다. 전체를 소유하시기 원하십니다. 일생 중 어느 한때(부분)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전 시기, 전 생애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한 곳도, 그어느 부분도 남김없이 전인, 전부
를 요구하십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신 분입니다. 2. 전 교회(全敎會)의 구원입니
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양 100마리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수입니다.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들에 99마리를 남겨두고, 그
잃은 한 마리를 찾도록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눅 15:7) 예수의 본수(本數)가 상징적인 100이었다면, 한 마리 없는 99는 완전한 본래의 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만 4천인이 예정의 본수로 상징되었습니다(계7:4, 14:1). 그 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표현되었습니다(계7:9). 그러므로 주님은 전 시대, 전 교회를 다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 중에 한 마리도 애굽(세상)에 남겨둘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구원하여 하늘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3. 그것은 궁극적 완전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로 39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
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남길 수가 없습니다. 애굽의 세상에 남겨두거나, 바로 같은 악마에게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완전 구속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우리가 잠시 머물고 있는 세상은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합니다(계11:8). 큰 성들이요, 또 성 길들이라고도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는 사단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선민 구원의 역사적 현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후손을 가나안의 흉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요셉을 먼저 보내어 그 일을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창45:1-8). 때가 이를때 애굽의 총리 요셉으로 하여금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서 부양하게 하고, 430년 어간에 큰 민족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때가 이를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바로로 하여금 선민을 학살하게 섭리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 중에 모세를 세워 출애굽의 거사를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애굽 바로의 학대는 선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한 마리의 우양까지도 애굽에 남겨두지 않고, 당신이 받으실 영광의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현장이요, 무대입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한 생명도 잃거나, 놓치거나, 빼앗기거나, 버리지 않고, 완전히 구원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지구와 지구 가운데 인간의 역사가 혼전을 거듭함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중 세상 끝에는 온 세상이 다 일어나 교회(성도)를 박해할 것입니다. 그것은 택자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택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