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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인류는 동굴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그들이 남겨놓은 동굴 벽화 때문입니다. 그들은 붉은 흙과 숯을 짓이겨서 동굴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주로 자신들이 사냥했던 짐승들이었습니다. 사냥이 잘 되어서 배불리 먹고 싶은 그런 욕망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들 옆에 손바닥 자국을 찍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림을 여기에 그려놓고는 한 옆에다가 손바닥 자국을 흙으로 이렇게 찍어놓은 거예요.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보면서 왜 손바닥 자국을 그림 옆에 남겨놓았을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 대답들이 가능하겠죠.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중 하나는 내가 여기에 존재했습니다. 자기 존재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들을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서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원초적인 모습은 사회가 발달한 지금도 똑같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곳에 여행을 갔거나 혹은 맛있는 음식점을 방문했을 때 사진을 찍어서 자기 개인의 SNS에 올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아요. 그런 반응을 기대합니다.
왜 이것을 올릴까요?
내 삶도 멋있지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알게 모르게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릅니다. 종교개혁 신앙을 정리한 책 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고백서에 소요의 문답 제1항을 보면 사람의 제1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이 질문을 제일 먼저 하는 것일까요?
우리 신앙에서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이유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답을 솔리데오 글로리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솔리데오 글로리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질문을 가지고 주어진 성경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합시다. 먼저 8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로 옮겨왔습니다. 이들은 그곳에서도 이전과 동일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한 장애인이 복음을 들으면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이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1절을 보면요.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황소 몇 마리를 끌고 와 두 사람에게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을 신으로 믿고 숭배하려고 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그것은 그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전설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 변형이라는 책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내용은 이런 겁니다. 그리스 최고의 여신 제우스와 그의 아들 헤르메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땅에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은 이 땅에서 아주 환대를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박대였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냉정하게 그들을 내쳤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노부부 빌레몬과 바우키스라는 분은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아주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선을 베푼 겁니다. 훗날 제우스는 사람들을 심판합니다. 빌레몬과 바우키스에게는 아주 큰 상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자신들을 박대했던 그 사람들에게는 벌을 주었습니다. 홍수로 그 지방의 집들을 완전히 쓸어버린 겁니다.
이 전설을 아는 사람들은 언젠가 신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최고의 환대로 그들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 눈앞에 기적이 벌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킨 바나바와 바울이 바로 전설에 나오는 그 신들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에게 황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며 환대하려고 했던 겁니다.
이것을 본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는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들 가운데로 뛰어들어가서 외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을 찢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옷을 찢는 것은 큰 분노를 표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모독하는 발언을 할 때 그때 유대인들은 자기 옷을 찢으며 분노합니다. 지금 바울과 바나바는 그 현상을 보면서 그렇게 분노한 것입니다.
한번 비교해 봅시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 왕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에게 아부아는 두로와 시도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이 헤롯을 신으로 생각한 겁니다. 헤롯은 이 말을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이 자기를 높여주고 극도로 칭송해 주면 기뻐합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면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신이라고 부릅니다. 축구를 잘하면 축구의 신, 공부를 잘하면 공부의 신, 장사를 잘하면 장사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신이라고 불리어지면 그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합니다. 자랑스러워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인정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런 호칭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호칭 앞에서 옷을 찢으며 분노했습니다.
왜 분노했습니까?
자신들이 자기가 누군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을 보면요.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똑같은 성정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똑같은 호모이오 파데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똑같다는 뜻의 호모이오스와 뭐 뭣을 겪는다라는 뜻의 하스코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처럼 고통을 겪고 여러분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감히 신의 영광을 도둑질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장 헤롯 왕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다가 벌레가 먹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 벌레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큰 병에 들어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면 그 마지막이 비참해집니다. 그래서 이들은 크게 분노하며 옷을 찢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옷을 찢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15절에서 17절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자기를 신으로 만들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앤디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요즘 최신식 핸디는 참 비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비싼 핸디를 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핸디로 많은 일들,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다니는 컴퓨터입니다. 만든 사람이 핸디를 그런 용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싼 핸디를 망치로 사용한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2천유로나 되는 핸디를 가지고 망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 비싼 물건을 자기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못된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그 사람에게 거짓말로 유혹했습니다.
창세기 3장 이 열매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라 너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 그 말이었습니다.
너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살아가면 너는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실제는 마지막에 어떠했습니까?
마치 핸디를 망치로 사용한 것과 같았습니다. 어리석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독사입니다. 이 독사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을 완성했는데 그때 그 성막에 구름이 자욱하게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며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매개물입니다. 구름 자체는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구름을 통해 자신이 여기에 임재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구름이 하나님처럼 거기에 임해서 사람들이 볼 때 거룩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구름이 그 속성 자체가 하나님처럼 된 겁니까? 거룩하게 된 겁니까?
아닙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값 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이번 주일은 종교개혁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그래서 어제 청소년부와 함께 루트슈다트 아이스레벤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종교 개혁이 발생한 1차적인 원인은 면제부 판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두 개의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왕들과 영주들을 중심으로 한 세속 권력입니다. 중세 초기 교회는 세속 권력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왕들과 영주들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 지역에서 왕으로 혹은 영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황의 인정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당시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세상의 왕들과 영주들의 힘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합니까?
바티칸에 거대한 성당을 지어서 나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 판매를 허락한 겁니다. 그 면죄부를 통해 돈을 벌어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당시 교황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 자기 힘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너희는 나에게 복종해야 한다. 나에게 복종하면 내가 너희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한 것 그것이 당시 교회의 교회 타락에 핵심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라틴어만 사용했습니다. 당시 라틴어는 교황청의 언어였고 일부 지식인만 사용하는 그런 언어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과거 한문과 같은 것입니다. 한글이 없을 때 한국에서는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지식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문을 아는 일부 사람들만 국가의 고급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나라에서 세상에서 성공했습니다. 이처럼 중세 당시 교회도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사제가 라틴으로 설교를 하니까 설교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믿기는 믿어야 하는데 그래야 천국에 가는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몰랐던 겁니다.
이것을 묵종적 신앙 휘데스 인플리스타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제가 신앙 문답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게 질문하면 신도들이 대답합니다. 예 믿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사제가 물어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때 신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잖아요.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설교를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했던 말은 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지만 신부님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당신이 믿는 신앙을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신부님과 똑같은 걸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제들만 믿음의 내용을 독점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제들에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사제들이 믿는 그 믿음 그 믿음대로 따라간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제들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이러다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은 사제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렇게 운영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세상을 이렇게 운영했습니까?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솔리데우 글로리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 구호를 외쳤던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 사제의 영광이 아니라 솔리데오 글로리아 오직 하나님의 영광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런 문제를 알기 때문에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도 독일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우리 시대 사람들도 자기 영광을 좋아합니다.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을까 남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을까 남들로부터 칭송받을 수 있을까 그것을 연구합니다.
그렇게 연구하면서 이 땅에 성공한 인물들을 거론하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징기스칸입니다. 왜 진기 습관처럼 되고 싶습니까?
그는 그 시대에 이 땅의 이 땅의 대부분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학자들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징기스칸이 죽인 사람의 수가 당시 세계 인구의 11%였습니다. 11%,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인구가 82억이라고 한다면 11%면 10억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0억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본받겠다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그 사람을 연구하고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 이게 정상인입니까? 이런 성공을 숭배해야 합니까?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온 세상의 영광을 독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 그게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뭡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 사도는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렇게 사랑이 실천되면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유익이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유익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솔리데오 글로리아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될 게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는 유혹, 자기 영광만 생각하라는 세상의 신화,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마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자기 옷을 찢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것을 찢어야 합니다.
근데 쉬운 일이 아니에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선사 시대의 인간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까지 모두가 바라는 원초적 욕망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이 문제와 싸웠다 나는 찢었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똑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됩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서 교회에서 이것을 도려냈다. 그렇게 말했지만 또다시 교회 안에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일이 어렵더라도 자기 영광의 옷을 찢어내야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이스레벤에 가면 루터가 죽었던 슈데오베 하우스가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루터는 위대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두고 PC에서 이런 메모를 남겨놓았습니다. 우리는 거짓입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마치 거짓처럼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던 거지, 자기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나는 거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을 밝힙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 글 뒤에 붙어 있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자기 영광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십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십니다. 이 사실은 바울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루터의 삶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종교 개혁주일을 청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를 청년부 주관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청년들이 종교개혁자 루터의 모습을 또 그 신앙을 배웠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하면서 카톨릭과 싸웠지만 그러나 남을 바꾸는 일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개혁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발견한 복음, 그 복음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존재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런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솔리데오 글로리아 그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솔리데오 글로리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진짜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