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내가 입고 다니던 옷은 청바지와 아버지의 가죽 잠바와 검은 티셔츠, 이렇게 세 개였다.
속옷도 내복도 양말도 없었다.
이유는 빨래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워낙 게을러서 빨래 같은 사소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기 싫었다.
식사도 굵은 김밥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해 주신 반찬은 거의 냉장고 없이 보관 할 수 있는 장아찌 종류였다.
어머니는 발효식품의 달인이셨다.
나의 자취방 구석에는 신문지 위에 반찬통 몇 개와 김 뭉치와 전기 밥솥과 쌀통이 있었다.
식사 방법은, 신문지를 펴고, 김을 깔고 그 위에 밥을 얹고 짱아찌를 넣고 둘둘 말아 먹으면 끝이 었다.
설거지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대학 시절은 자취를 하면서도, 설거지와 요리와 빨래에서 벗어나 있었다.
어느 날인가, 저녁을 먹고 청바지와 가죽 잠바를 입고 학교 광장으로 산책을 갔다.
아이들이 데모를 하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멍 하니 밤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누군가 소리를 쳤다.
“저 새끼 잡아”
처음에는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잡아서 학생회관으로 끌려 가면서야, 그 소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가죽 잠바를 입은 나를 정보기관 사람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들에게 크게 변명도 못했다.
짧게 아니라고 말해도 내 말을 들으려고도 않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고향 후배가 증명을 해줘서 풀려 날 수 있었다.
군대 가지 전에 나도 데모를 했다.
멋 모르고 사북사태에 뛰어 들었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군대에 끌려갔었다.
제대를 하고나서는 데모를 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데모대 옆을 모른척 지나가기만 했다.
자취방 부근은 최루탄 냄새로 눈이 따갑고 잔 기침이 날 정도였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 갔다.
일본에는 10 년전에 이미 데모대는 사라져 있었다.
사실 화염병도 일본 대학생들이 만들었던 그대로 한국에서 따라 한 것이었다.
요요기 경기장과 메이지 신궁 앞의 넑은 광장이 있는 하라주꾸는, 데모대와 최루탄 가스 대신에 버스킹과 코스프레족들의 천지였다.
일본에 와서 2년 후, 강릉의 착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휴일이면, 하라주꾸에 자주 놀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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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