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일탈하는 군상 (40)
제 8장 야승과 산도둑
한편 방 안으로 들어간 노지심은 모든 세간들을 한곳으로 밀어낸 다음, 계도(戒刀)는 침상 머리맡에 놓아두고 선장(禪杖)은 의자에 기대놓았다.
그리고 휘장 뒤로 가서 옷을 벗어부친 뒤 벌거숭이로 침상 위에 올라앉았다.
주인은 날이 아주 어두워진 걸 보고 머슴들을 불러 집 안팎에 등불을 내다 걸게 했다.
그런 다음 보리타작 마당에 탁자 하나를 꺼내 놓고 그 위에 향불과 꽃등을 얹어 혼례상을 꾸몄다.
거기다가 한편으로는 머슴들에게 고기를 한 상 가득 벌여 놓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 독째 술을 데우게 하니 겉보기에는 멀쩡한 혼인 잔칫집이었다.
한 초경쯤이 되었을까, 문득 도화산 쪽에서 북소리, 징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주인과 머슴들이 벌벌 떨며 문간으로 나가보니 멀리서 사오십 개의 횃불이 대낮같이 비추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듯 달려 다가온 것은 한 떼의 말 탄 사람들이었다.
주인은 머슴들을 시켜 장원의 문을 활짝 열게 하고 그들을 맞아들였다.
장원 문으로 몰려드는 도둑들의 모습은 볼만했다.
저희 대왕을 앞뒤로 호위한 도둑들은 창칼과 깃발을 벌려 세운 중에도 새신랑을 따른다는 복색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모두 붉고 푸른 비단옷에 머리에는 들꽃을 꽂고 있었으며 그중 앞선 네댓 놈은 홍사초롱까지 받쳐 들고 있었다.
대왕이라 불리는 말 탄 새신랑은 더욱 볼만했다.
머리에는 끝이 뾰족한 붉은 비단 두건을 썼으며 그 둘레에는 울긋불긋한 조화를 꽂고 있었다.
윗도리는 수놓은 녹색 비단 도포에 허리는 금빛 번쩍번쩍하는 띠요, 발에는 한 켤레 흰 쇠가죽 신을 꿰고 있었다.
거기다가 한 마리 큼직한 백마에 높게 앉았으니 정말로 대왕 같은 모습이었다.
그 대왕이 장원 문 앞에 이르러 말 등에서 내릴 때 졸개들이 목청껏 혼례 때의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사모관대 번쩍번쩍
오늘 밤 새신랑이로구나
비단옷 착착 맞아
오늘 밤의 새색시네.......
그를 본 주인이 황망히 달려나가 잔에 술을 친 뒤 한 잔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머슴들도 주인을 따라 모두 무릎을 꿇었다.
대왕이라 불리는 자가 그런 주인을 부축해 일으키며 자못 점잖게 말했다.
"영감님은 이제 제 장인이 되시는데 어찌하여 제게 무릎을 꿇으십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늙은이는 다만 대왕의 다스림을 받는 한낱 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대답하자 이미 술에 얼큰해 있던 대왕이 껄껄 웃었다.
"나는 이미 영감님의 사위가 되었으니 어떻게 영감님을 낮춰 볼 수 있겠소? 따님만 아내로 주신다면 모든 게 전과 다를 것이오."
그리고 주인이 주는 하마배(下馬杯)를 마신 뒤 객청으로 들어갔다.
향불이 피워지고 홍사초롱이 밝혀진 걸 본 대왕이 다시 주인에게 공치사를 했다.
"나를 이렇게 맞아 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소.“
말뿐만이 아니었다.
대왕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거기서 다시 술 석 잔을 더 들고 마루로 올라갔다.
졸개들이 북이야 피리야 요란하게 불고 두들기며 한층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다.
마루에 앉은 대왕이 주인에게 물었다.
"장인, 내 아내 될 사람은 어디 있소?“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둘러댔다.
대왕이 그대로 믿고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술이나 더 내오시오. 장인과 함께 들며 정을 두텁게 하고 싶소."
그리고 술이 나오자 한 잔을 더 마신 뒤에 불쑥 말했다.
"아내 될 사람을 보고 싶소. 술도 아직 모자라니 따님을 이리로 데려올 수 없겠소?“
"그럼 차라리 이 늙은이가 신방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주인은 노지심(魯智深)이 그 대왕을 잘 달래 주기만을 빌며 그 말과 함께 앞장을 섰다.
병풍 뒤를 돌아 똑바로 대왕을 신방으로 데려간 주인이 문 앞에서 말했다.
"바로 여기가 신방입니다. 이제는 대왕 혼자서 들어가 보십시오."
그리고 길을 밝히던 촛불을 든 채 얼른 그곳을 떠났다.
만약 일이 잘못 꼬이면 달아날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왕은 호기 좋게 신방 문을 열어젖혔다.
방안엔 불이 없어 깜깜한 동굴 같았다.
대왕은 그게 기름을 아끼기 위해 등불을 켜지 않은 까닭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 장인 살림 솜씨 좀 보게. 방 안에 불도 켜지 않고 캄캄한데 마누라 될 사람을 앉혀 놓다니. 내일 졸개들을 시켜 산채에서 좋은 기름을 한 통 갖다줘야겠다."
그렇게 씨부렁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막 뒤에 숨어 있던 노지심(魯智深)은 그 소리를 듣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킥 웃으니 그게 새색시의 웃음소리인 줄 안 대왕이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어째서 나를 맞으러 나오지 않소?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 나오시오."
"내일부터 산채를 마음대로 다스리는 부인이 되도록 해주겠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가씨를 부르고, 한편으로는 두 손을 휘저으며 새색시를 찾았다,
그런 그의 손에 노지심(魯智深)이 숨은 장막이 걸렸다.
얼른 그리로 다가간 그가 장막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자 노지심의 뱃가죽이 만져졌다.
대왕은 그게 신부의 살결인 줄 알고 손끝이 짜릿했으나 단꿈은 바로 거기서 끝장이 났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억센 집게 같은 게 그의 머리를 움켜잡더니 질질 끌고 침상으로 갔다.
그리고 놀라 버둥거리는 그를 침상에 메다꽂더니 이어 쇠뭉치 같은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새색시 아닌 노지심(魯智深)이 드디어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계집 도둑놈아!“
노지심(魯智深)이 그렇게 욕설까지 퍼부었으나 아직도 상대가 새색시인 줄로만 알고 있는 대왕은 턱도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쿠, 왜 이러시오? 남편을 때리는 법이 어디 있소?“
"그래? 이게 아직도 계집 타령이구나. 그럼 여편네 맛 좀 봐라!"
노지심(魯智深)이 그렇게 소리치며 꼴사납게 된 대왕을 침상 구석에다 처박고 올라타 마구잡이 주먹질을 해 댔다.
그래도 거친 도둑 떼의 우두머리라 맥없이 늘어지지는 않았지만, 노지심의 주먹을 견뎌 낼 수 없기는 대왕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버둥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 죽는다아!"
바깥에서 그 소리를 들은 주인 늙은이는 놀라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스님이 좋은 말로 인과(因果)나 설법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개 잡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람 죽는다는 비명이 먼저 들려온 까닭이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수호지 - 이문열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