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일 2025-02-26 08:59:20 수정일 2025-02-26 08:59:20 발행일 2025-03-02 제 3431호 22면
또 한 번의 송별사를 쓰고 읽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참으로 지난하다. 그래서인지 누가 써도 송별사는 슬프고 아프게 들린다. 이 새삼스러운 헤어짐으로 인하여 본당 사제와 신자로 살았던 지난 시간에 대하여 서로의 마음을 되짚어 보게도 된다. 그 마음 저편에 말없이 계시는 하느님도 다시 보게 된다.
송별사를 쓰기로 맘먹는 순간부터 심사가 몹시 혼란스럽고 미사 때마다 분심이 한가득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억들에 시도 때도 없이 코끝이 시큰거린다. 그리고 마음속 밑바닥에 깔아 놓았던 노여움과 서운함에 또 한 번 남모르게 목울대를 자극한다. 미사포는 눈물과 콧물로 하얀 얼룩이 그득하다. 봉사하게 해 주신 하느님 은혜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감사하지 못한 때가 기억나 가슴이 아프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우울한 마음을 하느님께 들키는 순간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3년에서 길게는 5년에 한 번씩 공식적으로 하는 본당 사제와 이별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심해지지도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만날 때 우리는 헤어짐을 기약해야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헤어짐이 전제된 만남이다.
특별히 본당 사제와 친밀함이 있든 주일에만 한 번 만나는 신자이든 우리 성당 신부님이 바뀌는 건 참 생경하고 낯설다. 또 어떤 성품과 습관이 있는 사제일까 염려 섞인 호기심이 몸에 익을 만할 때 이 이별이 일어난다. 수 없이 겪고 경험한 본당 사제의 모습들을 기억하는 원로 신자들도 무심해 보이는 표정 뒤에 서리는 서운한 마음은 인지상정인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같은 날 오전에 정든 이별을 하고 돌아서 낮에 새 부임 사제를 맞게 된다. 새 사제를 반기고 환영 인사를 나눈다. 너무도 당연한 사제 이동에 이제는 이력이 난 어른들이다. 누가 새로 오시든 그분은 우리 성당 신부님이고 또 우리를 잘 이끌어주실 하느님의 대리자다. 조금 젊은 신자가 묻는다. “그렇게 서운하게 이별하고 돌아서서 다시 생글 웃으며 새 신부님을 맞는 거 맞아요? 제 자신이 정신이 좀 나간 사람 같아요.” ‘천주교 신자들과 사제들의 숙명 아닐까 싶어’라 말하며 나도 웃는다.
가시는 분 짐 정리를 도울 때가 있다. 조심스럽게 사제복을 접어 이삿짐을 싼다. 기다란 수단의 단추를 세어보고 싶다. 옷장은 온통 검은색이다. 로만 카라도 만져본다. 어느 신자에게서 받은 듯 보이는 보라색 셔츠는 아직 포장지에 싸인 채 그대로이다. 지난번 신자들과 도보순례 때 입으셨던 빨간색 운동복이 보인다.
이빨에 끼인 고춧가루 한 조각 같다.
오신 분 이삿짐을 풀어 빈 장롱을 채워 넣어드린다. 이 분은 운동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사제는 집이 편안해야 해요. 그래야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줄어요.” 짠한 마음이 든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삶은 보이는 것 뒤에 숨은 가늠이 어려운 무엇이 있을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인간적 걱정과 사념들 너머에 시선을 두고 마음을 기울이는 이들과 우리는 같은 주소를 쓰는 하느님을 희망하며 산다. 가시는 분, 오시는 분 모두 건강과 행복을 기도하는 건 신자의 운명인 것 같다.
글 _ 이순일 마리아(의정부교구 마석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