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5장7절에 참 기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먼저 발견이 되어야죠.
그 다음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대언이란 말이 됩니다. 첫째 조건은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 안에 거하는 만큼
주의 생명의 진액이 우리에게 스며들고 주의 성분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므로
말씀이 들리고 가까이 오는 대로 그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바로 기도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기도입니다.
성경에 참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곳이 많은데 이 기도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먼저 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내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가 또 내가 아버지 앞에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알아야 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15장9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 안에 거하라 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자식들이 부모가 해 주는 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이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그 안에 거하면서 그대로 받고 그대로 나타내는 것,
주님의 공급을 받아서 그대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지의 운명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가지의 꼴값을 하라고 무엇이든지 행하라 닦달을 하는 가르침은 불법입니다.
나무의 가지를 잘라보면 나무와 가지가 그 조직이 같습니다. 아주 작은 가지도
큰 나무와 조직이 똑같습니다. 조직이 같아야 진액이 흐릅니다. 그래서 접붙임을
해 놓으면 처음에는 나무에 가지가 끼어 몸살을 앓다가 드디어 잎이 피고 자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으려면 그건 큰 영적인 싸움이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아니면 뜻을 세우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이나 방법이나
그 조직과 성분이 주님과 같아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자신을
넘겨주므로 그 생명이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사모하게 되는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절로 되고 있는 걸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십자가가 되어 처음에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지만 나중엔 그 십자가의 도가 자신을 지고 가게 됩니다.
그 때부터 주님과 나 사이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담대함과 확신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조직과
성분이 같아지면 주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조직과 성분이 같아지길 힘써야 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처리되는 과정이 40년이 걸렸고 야곱은 20년이 걸렸습니다.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길길이 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겁니다.
조직이 주님과 닮아가고 모든 성격구조가 주님을 닮아갑니다.
나도 모르게 그분께 설복이 되고 고분고분 항복되어 갑니다.
흡수 합병이 되어 갑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역할은 나무 밑동이 합니까? 그 가지가 하는 겁니까?
가지가 합니다. 연결시키고 공급하시는 내면적인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하시지만 거기에 붙어 조직과 성분을 일치시키는 그 역할은 가지가 다 해야 합니다.
그 역할이 바로 열매 맺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인데,
이것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겁니다.
진리의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요15:8)
주님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 또한 참 제대로 된 거야 하는 인정과
더불어 영광을 같이 받게 됩니다. 그 증거가 주님의 기쁨이 흘러들어와 같은
그 기쁨을 누립니다(요15:11)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을 들으므로 나무로부터 가지가 공급을 받는 것이며 삶은
그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 듣고 행함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나무로부터 공급을 받을 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란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므로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태에서 살아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역기를 드는 것이 아니죠.
바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향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라는 이 말은 맞는 말 같으나 잘못된 말입니다.
바로 바리새인의 말은 듣고 행함은 본 받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의 의밉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란 히브리서를 통해서 이런 원리가 이루어 진 사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와 관계가 설명이 완료된 사람이 아버지로부터 공급을
받을 줄 알아야만 그 사람에게 행함이 따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행함을 보고 행함이 없는 것은 그 믿음이 죽은 것이 아니냐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되어있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플러그 뽑힌 전기기구와 같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의 공급이 끊겨있는 죽은 믿음이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야고보서는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개혁주의 자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만 주장하므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으로 몰므로 지금의 세계교회가 믿음과 행함의 함수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