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 [원본 메세지] ---------------------
탄원서
주민등록번호 : 810xxx-111xxxx
성 명 : 이준호
주 소 : 부산광역시 해운대 구 우 동 460-42 17/5 3층 건물의 2층 일부..
학교명 : 세종대학교
학 번 : 992284
작성일 : 2001년 1월 23일
저는 현재 21살의 휴학생이고, 올해 2월 6일에 입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네 명의 구성원(아버지, 어머니, 누나, 본인)을 가진 가정의 둘째입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런 아버지 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부산에 살았습니다.
제가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실은,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맞고 살았으며, 하고 싶은 것들, 먹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잠조차 제 의지대로 자질 못했습니다.
제 아버지 인 이창화 세무 회계 사무소 의 소장, 이창화 는 저를 어릴 적부터
개를 다루듯 취급했습니다.
목욕탕을 같이 가본 적이 없고, 손잡고 다정하게 어딜 가본 적도 없습니다.
다섯 살 때, 동네에서 놀다가 자전거 밑에 깔려 오른쪽 이마 윗 부분이 크게 찢어진 적이 있습니다.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 했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 엄마.. 하면서 어머니를 찾았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순간, 저를 본 아버지는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끼! 왜 자전거 밑에 깔려가지고 지랄이야?
제가 맞으면서 아버지에게 들은 단 한마디 말이었습니다.
뒤늦게 나온 어머니는 피투성이로 아버지에게 맞는 제 모습을 보시고 기겁을 하셨으며,
아버지를 밀쳐내고 저를 병원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 결과 일곱 바늘을 꿰매었으며, 그 흉터는 아직도 제 이마에 있습니다.
저는 이마가 찢어진 그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보호받지 못했고,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를 못했습니다.
누가 잘못을 했건, 자기 자식이 다쳐서 아주 위험한 상황인데도 자식의 상태는 뒷전이고 자식이 그렇게 된 데에 대한 행위에의 잘잘못만을 따지는, 그런 아버지 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누나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구박, 학대, 구타 등의 가정 폭력을 당했습니다.
여자를 때리는 남자는 야만인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여자 쪽이 확실히 잘못을 했다면 현실에서 때릴 남자가 없진 않겠지요.
하지만, 저희 누나는 그런 어떠한 잘못도 없이, 맞기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한 겨울에 찬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거울을 깨뜨렸다거나 군것질을 했다하면 자주 있는 일이었지요.
덕분에 누나는 그 당시 감기가 잘 떨어지지 않아, 항시 휴지를 가지고 다녔었습니다.
누나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저와 한 방을 썼습니다.
그 어느 날, 아버지는 시험기간이라 방에서 공부하는 누나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누나는 시험을 앞둔지라,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얼떨결에 싫어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아버지는 괘씸하다면서 방문을 부수려 했고 그 소동에 잠을 깬 저는 누나를 보았습니다.
누나는 책상에 엎드려 서럽게 울며 떨고 있었고, 시계는 11시를 넘어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요구사항은 술 심부름이었습니다.
이것은 시험을 앞둔 누나를 격려하기 위한 행위도 아니었
고,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였습니다.
자식이 어떤 심정인지는 헤아리지도 못하고, 상관도 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식을 부리는, 그런 아버지 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나가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된 데에 대해 단지 하나 잘못한게 있다면, 위대한 가장(?) 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런 위대한 가장(?)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자식만을 개 취급한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하루가 멀다하고 때렸습니다.
어렸을 적 기억에, 어머니의 얼굴이 성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세무사 라는 직업에 대해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대단한 자격증이라고 했으며, 돈을 많이 번다고 했었지요.
아버지 자기자신은 자기가 돈 잘 번다고 큰 소리 쳤지만, 우리 가족이 결코 풍족하게 산 것이 아닙니다.
아니, 경제형편이 일반 그런 자격증을 가지지 않은 아버지들의 이하였습니다.
다른 일반적인 가정에선 가장이 스스로, 받은 월급을 아내에게 모두 맡긴다 합니다.
그리고 나선 차비, 용돈 등을 아내에게 조금씩 받아서 쓰고,생활비를 뺀 다음, 나머지는 저축을 한다더군요.
돈 씀씀이가 좋지 않은 가장일 경우라고 해도 아내가 가족들의 생활비를 관리하겠다고 하면 가장은 그것에 대해 썩 내키진 않지만 월급을 맡긴다고 합니다.
물론 여건이 그렇게 안 되는 가정이라고 해도, 가족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 가장이라면 가족들의 생활에 대한 금전적인 문제에는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월급을 어머니에게 맡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생활비 명목으로 일정하게 받았던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에게 사정을 해야 만 욕설, 구타와 함께 아버지의 지갑에서 10만원씩 돈이 나오곤 했습니다.
아껴써....
한 가정 네 가족이 10만원으로 한 달 동안을 생활할 수 있을까요?
전기세, 수도세, 도시가스, 전화세와 같은 정기적인 세금만 해도 한 달에 10만원을 넘지 싶습니다.
한 달의 첫 주는 그렇게 받은 돈이 몇 몇 세금 납부로 날아갔습니다.
그 외에도 해결해야 할 세금은 또 많이 남아있었지요.
결국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사정을 하십니다.
그 돈 모두 어디다가 썼어?!
한 달의 두 번째 주 역시 아버지의 구타와 함께 10만원이 떨어 졌습니다.
기본적인 세금은 해결이 되었고, 쌀, 찬거리나 어머니와 저희들의 생활비가 남았지요.
어머니는 이번에도 아버지에게 사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지갑에서 더 이상의 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쌀은 직접 사오셨지만, 그 외의 금전적 지원은 전혀 없었습니다.
차비가 없어서 어머니는 마음대로 외출 한 번 못하셨고, 몇 천원도 없어서 반상회 한 번 제대로 못 하셨습니다.
누나와 저는 어릴 적부터 군것질 한 번 제대로 못했으며, 생일 파티에 가도 선물이 없었기에 푸 대접 받기 일쑤였죠. 빈부격차를 그 당시부터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세금과 같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는 것에만 금전적인 지원을 했고, 인간적인 면에서
나오는 생활비에는 일체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로 인해 아버지와 거의 매일이다시피 싸우셨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일방적으로 맞은 것이지요.
당신이 한 번 그 돈으로 가정 유지해봐!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주먹이었습니다.
내가 돈을 버는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나? 이 집도 내 돈으로 산 집이니 싫으면 당장 나가!
어머니와 누나, 저는 그런 식으로 집에서 쫓겨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쫓겨나면 저희 가족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친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갈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아버지는 억지로 우리를 굴복 시키기 위해 그런 식으로 쫓아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 누나와 저는 그렇게 굴복했습니다. 그런 날 밤은 서러움에 울다 지쳐서 잠들곤 했죠.
어머니는 그런 영향으로 나가! 라는 말에 노이로제가 걸리셨습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단지 쉬고싶다는 이유로
그 어떤 말도 없이, 한 두달간, 쌀도 사놓지 않고, 어떠한 돈도 주지 않은 채로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땐 어머니가 다른 집으로 쌀을 빌리러 다니시곤 하셨고 대략 열흘 가량을 굶으신 적도 있습니다.
저희는 굶기지 않으시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셨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울다 지쳐 쓰러지신 적도 있습니다.
가족들의 눈은 개 눈 보듯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 하는, 그렇기에 가족을 개같이 여기는 이런 아버지 가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위 사춘기라고 불리는 반항기 시절, 저는 사춘기가 지났다고 애써 생각하려 했습니다.
넌 사춘기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지났다.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면서 제 행위에 대한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나와는 달라서 모범생도 아니었고, 공부를 그리 잘한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절, 학생의 신분에서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요.
단지, 어느 정도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생기게 된, 남자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그런 이유 없는 반항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제게 했던 행위에 대해 느낀 감정과 겹쳐서 조금 강하게 표출되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저를, 정말 개 다루듯이 다뤘습니다. 특히 먹는 음식으로서, 자기의 마음에 들면 음식을 주고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으면 쌀마저도 집에서 없애는 그러한 개 훈련 시키는 듯 우리 가족을 습관화 시켰습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문제집을 사야하니, 책값을 달라는 요구에도 "아버지는 돈 없다, 거짓말 마라"와 같이 반응하셨고, 자식도 의심한다고 중얼거리기라도 하면 또 구타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미숙했던 자아 속에서도 아버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맞으면 맞을수록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횡포에 참 다 못해 가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틀 정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갈 곳이 없었기에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왜 벌써 왔어? 다시 나가라!
아버지에게 들은 말입니다.
그 후로 한 시간 정도 계속 맞기만 했지요.
후에도 얼마나 걱정했는데.. 라는 말 한마디 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던 겁니다.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에 대한 불신, 배신감에 반항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 반항기의 절정, 저는 아버지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허리를 맞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쓰러져 몇 분 동안을 나뒹굴었습니다.
어머니는 울면서 그 자리를 수습하셨고, 저는 그 날 너무나 아파서 잠을 못 잤습니다.
저는 그때 쇠파이프에 맞았던 허리가 훗날 영향을 미치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덩치가 좀 커지고, 어느 정도 완력도 생기던 무렵부터
아버지는 저와 저희 가족에게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더 소유권 을 가지고 가정을 정신적인 폭력으로 다스렸죠.
이 집은 내 집이야. 당장 나가!
이 물건은 내가 산 것이다. 네게 선물한 거라고 해도 내돈으로 산 내 물건이니 마음대로 해도돼!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쓰는데 왜 그러냐?
제겐 컴퓨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컴퓨터는 고 1 초, 반항을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손에 부셔졌습니다.
내 돈으로 산 컴퓨터야. 내가 내 물건 부수는데 왜 그러냐!
한창 비디오게임에 빠져있을 무렵, 용돈을 모아서 산 게임기 역시, 써보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손에 부셔졌습니다.
사라고 한 적 없다. 공부도 안 하는 놈이 무슨 게임이냐! 그리고 용돈은 내가 준거야!
아버지가 쓰는 것도 아니고, 내게 선물해 준건데 왜 부숩니까?!
그게 싫으면 이 집에서 나가! 네가 나가서 돈 벌어서 사면 될거 아니냐!
난 지금 고등학생입니다. 나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일한단 말입니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촌구석 공장을 가던 앵벌이를 하던 나가라! 식비도 아깝다!
그런 식으로 제가 아끼던 물건들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하나씩 없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남아있는 물건이 없군요.
어머니 역시, 학생 시절의 사진과 일기장, 소중했던 물건 등을 아버지에게 빼앗겼습니다.
과거는 필요 없고, 현재는 어머니가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빼앗은 물건은 아버지가 불에 태워버리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소유권 에 관한 아버지의 횡포는 저희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일상이었다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시면서 20 여 년, 누나와 저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20 여 년을
그런 횡포와 가정 폭력에 시달려 왔습니다.
남도 아닌, 가족에게조차 소유권 , 법이나 다름없는 것을 따지고, 가족을 귀찮은 혹 덩어리로만 여기는 이런 아버지 가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 누나가 고 3, 제가 고 1인 96년의 일입니다.
누나는 모범생이었지만, 수능 성적이 평소보다 못 나온지라, 대학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누나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횡포가 너무나도 무서웠는지라,꼭 서울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많이 들어서 반대하셨을 뿐 아니라, 대학에 보내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질 않았습니다.
누나는 재수를 원했지만 그 역시 반대하셨지요.
9급 공무원 시험 쳐서 동사무소 가라. 돈 벌어서 적당히 시집가.
96년도, 돈이 없어서 대학에 못 보낸다는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돈 잘 번다고 하는 세무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는 운 좋게 동국대에 추가합격을 하였습니다.
누나가 어렵게 대학에 가게된 후, 어머니는 누나와 저를 공부시키기 위해 직접 돈을 버시기 시작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하시게 된 후로, 저희 가족은 예전과 비교도 못 할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저도 서울 쪽에 있는 4년 제 대학에 붙어, 서울에서 누나와 같이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생활비, 학비 등을 아버지 눈치 없이 받을 수 있었고, 어머니 역시 그 동안 돈이 없어 드시지 못했던 음식도 드시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만나실수 있어서 기뻐하셨
습니다.
그렇게 일년 여 동안은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학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어머니는 회사 직원에게 사기를 당해, 큰 금전적 손실을 입으시고, 어머니는 큰 빚을 지게되셨습니다.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회사의 돈은 어머니 명의로 빌리고, 아버지가 보증을 선 대출금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금융기관의 대출만이 아버지의 명의 였습니다.
이에 관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크게 싸우셨고, 어머니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사고 당시 차는 폐차하였고, 어머니는 허리, 목, 다리 등 온 몸에 디스크 판정을 받고,
눈을 잃으셨습니다. 현재 어머니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어머니는 몇 달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시며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의료 보험, 자동차 보험에서 얼마 정도의 보험금이 나왔지요.
아버지는 그 보험금으로 자신의 빚을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보험금이 해당 대상자가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고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온 몸이 성하지 않으셨기에, 더 이상 사업을 하실수도 없었고, 치료비 역시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빚이 없었다고 해도 어머니의 회복에 드는 치료비를 아까워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요구사항을 거절했지요.
넌 그 사고로 죽었어야 했어..
아버지가 어머니께 한 말입니다.
결국,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이후로, 아버지는 보험금만을 노렸지, 어머니의 상태는 중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자전거에 깔려 이마가 찢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사고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워할 수 있는 인격은 애초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자신이 진 빚이 어머니의 계획적인 행위였고, 이제는 이혼을 하려하는
아주 나쁜 여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닌 결과, 아버지 주변의 사람들은 어머니를 좋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상황이 좋지 않아, 2학년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여기고는 휴학 후, 군대를 가기 위해 부산에 내려왔습니다.
생일이 빨라 2000년 내로는 육군을 갈 수 없었기에 몇 달간 쉰 후 해군을 가기로 했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이후로, 아버지는 일체의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차비조차도 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일하고 있던 신발 공장에 자리가 있어서 그 곳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2000년 1월, 저와 친구는 버스로 두 번 갈아타서 두 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공장을 매일 같이 다녔습니다.
친구에게 빌린 6만원으로 월급 전까지 차비는 겨우 낼 수 있었지요.
그렇게 한 달간을 공장에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힘들지? 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쓸돈은 네가 벌어써라! 했습니다.
전 더러워서 내 돈은 내가 직접 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친 듯이 일을 했습니다.
대략 5개월 정도를 공장, 오락실 등을 전전하며 겨우겨우 돈을 벌었고, 집에선 밥을 제대로 못 먹기에 친한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리고는 6월에 입대, 하지만 입대 일주일만에 다시 귀가 조치를 받고 나왔습니다.
허리불량 판정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에게 쇠파이프에 맞은 허리 때문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저는 누나에게 전화를 했고, 경악할 정도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 회사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 어머니를 욕 보였다는 것입니다.
마침 누나는 서울에서 잠시 내려왔었습니다.
어머니가 집에서 통곡을 하시는걸 이상하게 여긴 누나는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듣고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거울을 집어던져 깨뜨린 직원을 왜 탓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누나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내겐 돈 벌어주는 직원이 소중하지, 너희 엄마는 필요없어!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온 사람이고, 우리 가족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를 어떻게 그리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냐고..누나는 그 직원을 만나서 따지겠다고 했습니다.
네가 봤나? 안 봤으면 그딴 소리하지 마라! 그 여직원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라.
손대면 네 학비는 그날부터 없다!
아버지는 여기서도 '소유권 을 가지고 협박했으며, 물증을가지고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사실이 분명함에도 물증이 없으니 직접 보지 않은 누나와 저는 대놓고 따질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그 날의 잘못이 자기에겐 없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어머니를 직원과 주변사람들에게 욕하고 다닌 결과 그런 일이 생겼거늘, 자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우기는, 자신의 확실한 잘못이면서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에도 정 안될 경우에는 너 죽이고 난 도망갈거다.
난 절대로 안 잡혀! 라는 말을 수 없이 아버지에게 들어왔으며, 정말로 칼을 들고 위협했던 적도 있었기에 정신적인 불안, 공포감으로 결국 집을 나와 지금도 예전에 일 하셨던 오피스텔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오피스텔에 계시고, 누나는 서울에 있기에, 결국 집에 남은 건 저와 아버지 뿐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2000년 입영을 포기하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7월,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경험을 쌓고 싶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남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같은 집에 산다고는 하지만 금전적, 인간적으로 오고 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었고,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쌀과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새로 사오는 부식이나 먹거리는 하나도 없었고, 가끔씩 술집에서 먹고 남겨온 안주 같은 것들은 눈에 띄었습니다.
개도 아니고, 자기가 먹다 남긴 걸 먹으라고 자식에게 주는 그런 행동은 역시 가족을 개 취급한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줬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와 같은 어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커서 저런 사람이 되지만 않으면 돼..
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묵묵히 제 자신을 위해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4개월 가량을 일하고 번 돈으로 저는 컴퓨터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직접 번 돈으로 산, 확실한 제 물건이라 너무 기뻤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보증을 선 자신의 빚을 일부러 내지 않고, 어머니에게 넘겼습니다.
내 빚은 모두 너희 엄마 때문에 생긴 빚이다! 내가 왜 그걸 갚아야 하나!
하지만, 어머니는 교통 사고 이후로 사업상 가지고 있던 부동산으로 거의 모든 빚을 갚고 있던 상태였고, 남아있던 아버지의 빚은 어머니가 사업을 하시기 이전부터 아버지가가지고 있었던 빚이고, 그 빚이 시세에 따라 상승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과 회사의 빚을 대부분 처리한 상태였지만, 아버지의 빚까지 떠맡게 되어, 한때는 오피스텔과 자동차까지 압류 당할 뻔했습니다.
결국 살고 있던 집마저도 경제적 여건 때문에 팔아야만 했고 2000년 11월 말경에 집이 팔렸습니다.
어머니는 얼마 후, 이삿짐 센터 사람들과 함께 물건을 빼고 집을 비워줘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는 자신이 갈 곳이 없다는 핑계로 저를 끌어들였습니다.
이런 저런 법을 토대로 집에서 버티자는 말을 하더군요.
저는 내키지 않았지만, 역시 갈 곳이 없었기에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집을 넘기기 전날 밤, 저는 편의점에서 일을 오랫동안 했고, 집에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는 저를 믿지 못하고, 제 컴퓨터를 부수었습니다.
집이 넘어가는 당일, 저는 제 컴퓨터가 부셔진 것을 보고, 너무나 화가 나서 따졌습니다.
이거는 내가 번 돈으로 산 것이고, 명백한 내 물건인데 왜 부셨습니까?!
내가 안 부셨다. 증거 있냐?
결국, 이번에도 사실이 확실하지만 아버지는 물증 을 운운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부정했습니다.
그 날은 물건을 빼러 온 이삿짐 센터의 사람들과 아버지가 크게 다투었고, 어머니와도 큰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결국 물건은 옮기지 못하고, 이삿짐센터 사람들은 보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후에도 계속 싸우셨고, 제가 일을 갔다온 후에는 경호원이 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동생인 변호사 이기열 이 부른 경호원들인데,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들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컴퓨터를 부순데 대한 보복이 두려워서 불렀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합니다.
그게 맞다면 결국은 자기가 컴퓨터를 부수었다는게 맞겠지
요..
이런 치사하고 더러운 아버지 가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아버지, 이창화 의 동생(삼촌)인 변호사 이기열 은 자신의 장인을 상대로 돈을 뜯기위해 법정에서까지 싸운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같은 변호사 사이에서도 이기열 변호사의 이러한 행태는 잘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제 아버지는 삼촌의 권유로 인해, 울산에 있는 어떤 절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절에 다니게 되면서 삼촌이 있는 하숙집에 자주 머물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절을 다니면서부터 아버지의 악행은 더욱 더 심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집이 팔고 이사하는 동안 아버지는 12월초, 어머니와 화해를하셨습니다.
그 과정이 어찌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쪽에서 어머니에게 모든 걸 사과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앞에서, 올해 2월 초중순 경,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혼을 하신다고 하였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자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일단 살던 집이 팔렸으므로, 새 전셋집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행복한 가정 이라는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제가 살, 방 두 칸 짜리 집을 물색하셨고, 부동산에서 계약도 했습니다.
2천 5백 만원 짜리 전셋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군 제대 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그 집의 명의를 제 이름으로 하고, 상황이 안 좋을땐 제가 전세금을 찾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명의에 등록된 사람의 신변에 이상이 있으면 안되고, 미성년자라서 안되니,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하자고 하였습니다.
부동산 주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제 명의로 등록한 후, 군대를 갔다와도 상관이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를 믿었기에..
절대로 그 전세금 빼먹으면 안됩니다. 명의는 당신 앞으로 해도, 전세금은 아들에게 줍시다...와 같이 아버지께 당부하셨고, 아버지 역시 절대로 그 돈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세금 2천 5백 만원을 빼먹기 위한 아버지의 연극이었다는 걸,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의 새 출발하는 기분으로 라는 말은 온데 간
데 없이, 새 집에 정착하자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집의 명의를 울산에 있는 한 여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삼촌이 묵고있는 하숙집 주인입니다.
동생 이기열은 변호사이고 형 이창화는 세무사이니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행해졌으리라 봅니다.
재혼 문제는 당연히 흐지부지 되었지만, 아버지는 이번에도 자신의 잘못이 없고,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재혼을 거부했다고 주장합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됩니다.
어머니는 전셋집을 살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믿으셨거늘.. 아버지는 재혼, 새 출발이라는 미끼로 어머니를 유혹해서, 마지막까지 돈을 떼어먹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마음을 돌리고, 순전히 돈 때문에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줄 수 있는, 저런 사람이 정말 가장이라는 아버지입니까?
아니, 그걸 떠나서 한 사람의 가장이기전에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명의가 양도되었다는 걸 알게된 그날, 저는 아버지에게 따졌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돈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내 명의로 등록되었으니 내 돈 아니냐?
일부로 그 여자한테 넘겨놨다!
세 사람이 부동산에서 계약하면서 했던 약속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런 말을 아주 당연한 듯이 하는, 세무사 이창화 .
이 땅에 가족을 가진 한 남자로써 살 수 있을 자격이 과연 있을까요?
전 2월 6일에 입대를 합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제가 입대하면 아버지는 지금 있는 집을 팔아 넘기고 울산에 있는
하숙집 여자에게 갈 것입니다. 이젠 자신이 자진해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하는군요.
사고이후 생활 능력이 없는 어머니를 돌보지 않은 채, 빚을떠 넘긴 채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제대 후, 갈 곳은 고사하고 당장에 움직일 수 있는 차비조차도 없게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걱정하시는 마음에 가진 돈을 모두 털어 2천 5백만원을 제게 주기로 하셨었지만 세무사 이창화는 그런,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도둑질, 사기나 마찬 가지인 행위를 가족에게 저질렀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로써, 평범한 인간으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
아직은 저는 미성년자로서 보호자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보호자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제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은) 는 쌀도 사놓지 않습니다.
쌀통은 비어있고, 냉장고엔 반찬 하나 없습니다.
얼마 전, 46년만의 기록적인 폭설, 추위가 부산에 온 적 있습니다.
그 여파로 인해, 제가 사는 집의 수도는 동파 되고, 보일러는 고장났으며 난방조차 되질 않았습니다.
물은 4일 여간 나오지 않았으며, 그 동안에는 손을 씻기는커녕 양치질조차 하질 못했습니다.
보일러가 고장나서, 4일 동안 추위에 떨면서 보냈고, 그 때문에 감기몸살에 호흡기 질환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4일 동안 집에 들어오질 않았고, 대책하나 마련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지냈냐는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은 그 4일 동안 울산 동생하숙집에서 따뜻하게 자고, 밥도 잘 먹고, 목욕도 잘 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지금도 집에는 쌀이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쌀도 자식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샀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이제, 가정을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는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든 행동을 합리화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수많은 구박과 폭력에도 저와 누나를 먹여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피눈물 나도록 노력하셨던 어머니가 정말이지 불쌍합니다.
지금도 저희 어머니는 눈이 거의 보이질 않고, 뜨거운 물 한방울 나오지 않고 난방 하나 되지 않는 오피스텔의 차가운 공간에서 정신적, 육체적 충격에 떨면서 계십니다.
저는 한 가족의 일생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어놓은, 세무사 이창화 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고발하려 합니다.
그 사람은 약한 사람에게만 강한 성향이라, 잘못을 지적하면 지적한 사람만을 원망하지 자기 자신의 잘못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살아갈 사람입니다.
제가 입대를 하게되면 저희 어머니는 세무사 이창화 에게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됩니다.
자신의 동생인, 변호사 이기열 과 계획을 짜서는 그때처럼 경호원을 불러, 어머니께 해를 가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이 사실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세무사 이창화 와 그의 동생 변호사 이기열을 이 땅에 편안히 얼굴 내놓고 다닐 수 없게 만들어주십시오..
제가 쓴 이 글이 다소 두서가 없고, 정리된 느낌이 없겠지만, 확실한 사실만을 썼습니다.
저희 어머니, 이렇게까지 된 데에 대해 조금이라도 잘못을 따진다면, 자식들 먹여 살리고, 시대에 뒤쳐지지 않게 대학을 보내기 위해 돈을 버셨다는 것 뿐입니다.
저희 어머니, 보호해주십시오..
제 바램은 이 글이 우리 나라 전체에 퍼져, 세상 모든 사람들 이 세무사 이창화 와 변호사 이기열 의 잘못을 지적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창화 세무 회계 사무소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6가 3번지
10/1 신천지 백화점 3층
이창화 세무사 사무실 Tel. 051) 248-9510 ,255-1584
세무사 이창화의 휴대폰 : 017-556-9510
이준호 (글 작성자) : 016-576-3820
여기까지 귀한 시간 내주시며 읽어주신 모든 분들의 가정에 행복이 깃 들길 기원합니다.
편의점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이 옵니다.
아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들어오는 남자..
편의점에 들어와서 가족에게 전화를 거는 남자..
어, 나야. 뭐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없어?
아들은 어때? 별 일 없지?
여보, 나 월급 탔어. 갖고 싶었던 향수 사 갈게.
다정하게 들어오는 가족..
편의점에서 몇 개월 동안 일을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바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누나와 저 둘다 지금껏 학비 적게 준다고 불평한 적이 없고, 모자라면 우리가 아르바이트해서 보태었으며 지금껏 우리가 바래온 것은 가정의 화목함이었을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이란게 정말로 무엇인지 아버지 이창화 에게 깨닫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
카페 게시글
유쾌방
어머 너 누구니?? 난 중곡3동사는데..반갑다!!^^
sksksk
추천 0
조회 39
01.07.19 14:3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