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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트레비 분수.
신화가 떠오르는 곳.
로마(Roma)는 고대 로마의 여신이자,
로마라는 도시이며 국가를 인격화한 신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기념기둥 기단에 그려져 있다.
기원전 280년 - 276년과 기원전 265년 - 242년
로마의 동전에 그려진 헬멧을 감싼 여신.,'로마'.
'신화 속 여신'과도 같은
미녀들이 많은., 트레비 분수.
관광객을 유혹하는 경우도 많다.
'현찰을 많이 갖고 다니는
관광객은 그녀들에게.,타켓.'
로마에 가면.,
연인 사이인지
친구 사이인지
영화배우인지
일반인인지
애매모호.
영화 - '로마의 휴일'
로마의 연인들.
로마에 가면
'거지 노숙자'인지
'집시 여행자'인지
'소매치기'인지
애매모호하다.
분명한 사실은
'거지도 잘 생겼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
로마.,콜로세움.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지배 체제
혹은 원수정(principatus)을 사실 상 시작한
기원전 27년부터 몰락까지 로마를 일컫는다.
기원전 7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세운
도시 국가에서 발흥하여, 로마 시(市)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를 지배했던 서양 최대 제국.
로마 제정 시대의 종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나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고 이러한 패권주의는 로마 제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문화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뜨려,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 종교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인근,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colossus)에서 유래된
'콜로세움'의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극장이었다.
네로의 황금 궁전 정원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다.
황금궁전 & 네로 황제.
...........................네로 황제.......................
흔히, 네로(37~68년)는 정신이상자 폭군을 연상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로마의 문화는 융성하였으며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못된 황제만은 아니었다.
그는 노예를 해방했고,
감세 정책 등 선정을 펼쳤고,
매관매직 폐단을 없애려 했다.
서기 68년 자살 후 폭군으로 규정된
네로 황제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26km² 네로의 황금궁전은 파괴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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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베르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총 5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 경기장이
그 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개폐형 지붕 시설까지 갖춘., 세계 7대 불가사의.
해상전투 재현,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쓰였다.
80여개 아치문을 통해 관중 입장 30분, 퇴장 15분 소요.
1층부터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결합된 구조.
이 경기장에서 맹수의 시합이나 검투사 경기가 개최되었고,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1층 귀빈석, 2층은 일반석, 3층은 입석으로 이뤄졌다.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투사들의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경기를 중지시키면서 끝이 난다.
이후, 콜로세오는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 재료로 쓰기 위해 외벽이 뜯겨
원형 그대로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해 아쉽지만
2,000년전 건축물의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잔인하면서도 복잡한 로마의 역사가 스며있는.,콜로세움.
의회 건물로 쓰이기도 했으며 다양한 형태로 존속되었다.
10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어 총 5년 만에 지었다는.,건축물.
188m, 154m의 타원형 돔 형태로, 축구장의 원형 설도 있다.
콜로세오를 중심으로 로마 여행이 시작된다.
주변으로 고대 로마의 중심지이며 호화 별장지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볼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 & 캄피돌리오(로마) 광장
팔라티노 언덕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궁전의 폐허.
로마.
세계사의 중심 로마는 3000년 역사를 지닌 도시.
테베레 강 하류에 위치한 로마는., 이탈리아 수도.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유럽 문명 발상지이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
대부분이 구릉 지대로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
‘영원의 도시’, 로마는 이탈리아 정치, 문화의 중심지,
특히,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시국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옛 유적을 그대로 보전한 채 현대 문명과 멋진 조화.
관광객들에게는 소매치기와 좀도둑으로 악명이 높다.
그럼에도 로마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로마.
로마의 주요 산업은 연간 천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산업.
고대 로마의 신에게 바치는 판테온 신전은 서기 125년 건축.
'로마의 휴일' 영화 속.,판테온 신전.
트레비 분수는 로마의 가호이자 작별 인사 명소,
니콜라 살비(Nicola Salvi) 설계와 감독으로 완성.
분수가 만들어진 곳은 로마 중심., 트레비(Trevi) 광장.
트레비 광장 주변에는 독특한 바로크 외관
산 빈첸초 에드 아나스타지오 교회가 있고,
그뒤로 교황 정궁 '팔라초 퀴리날레'가 있다.
.........트래비 분수(Fontana di Trevi).........
로마를 찾는 관광객이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
모든 여행 일정을 마친 관광객들은 마지막으로
이 분수로 달려가 동전을 손에 쥐고 분수를 등진다.
그리고나서, 다시 한 번 이 '영원의 도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동전을 분수에 던진다.
세계 곳곳에 복제되어 로마를 연상케하는 트레비 분수
'세 개의 길(라틴어로 tre viae)이 만나는 광장.'
트레비 광장에 가장 아름다운 분수가 들어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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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
육지, 수상 교통 중심지로, 로마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교통이 연계되어 발달되어 있다.
로마는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발칸 반도 찬바람 영향으로
가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한국과 비슷한 기후 이지만
한국보다 겨울이 더 따뜻하며,
한국 시간과 - 8시간 차이가 난다.
3월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
이탈리아에서는 섬머 타임으로,
1시간을 앞당겨 사용하기 때문에
이때 이탈리아는 한국보다 - 7시간.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면적 30만 1,223㎢, 인구 5,740만 명(1988년)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며, 종교는 99%가 로마 가톨릭을 신봉.
이탈리아 역사는 기원전 7세기경 이 지역에 살았던.,그리스인.
로마 역사는 이탈리아 반도 통일 시기인 기원전 270년경.
고대 로마제국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395년 동서로 분열, 동로마 멸망 후, 476년 서로마도 멸망.
그뒤 중세 교황시대에는 동방무역으로 여러 도시가 번영.
‘신대륙 발견’ 후 16세기부터 주위 여러 세력에 의해.,분열.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 1871년 수도를 로마로 이전.
이탈리아 왕국은 체제상으로는 입헌군주제.
제1차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세력이 나타나면서
1929년 무솔리니(Mussolini) 파시스트 독재 정권.
제2차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패함으로써
1946년 6월 총선이 실시되었으며, 새 헌법에 의한
공화제가 1948년 1월 출범 1955년 12월 유엔에 가입.
현재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대의기구는 양원제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양원과 각 주의 대표자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선출.
1970년대부터 정계가 개편되어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
대표적인 올리브연합·공산재건·북부동맹·자유동맹 등이다.
1950년대까지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알려졌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오늘날
서방 5대 선진국이라고 불릴 만큼 공업국가로 변모되었다.
1997년 국민총생산은 1조 880억 8,5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9,000달러. 1996년의 무역은
수출 2,507억 3,200만 달러(직물류·화학제품),
수입 2,070억 200만 달러(원유·기계·식품·광물)
고대 이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서는 선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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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
이탈리아는 일찍부터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여 고려(Kauli)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가 이탈리아에 소개된 이후 이탈리아는
16세기 후 중국과 일본 신부들에 의해 알게되었다.
이탈리아와 조선이 직접교류는 19세기 후반.
아르미뇬은 귀국보고서에서 조선의 배가 청결,
조선의 인삼이 지닌 마력이 대단하다고 적었다.
이탈리아와 조선이 정부 차원에서 직접교섭 시도는
1880년 6월에 사보이아(Savoia)라는 제노바 출신 공작.
피사니호 선장으로서, 통상을 위한 조선정부와 접촉이었다.
그는 부산과 원산을 통해 조선 정부와 교류 의사.
당시 조선의 강한 쇄국정책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그뒤 1878년 제주도 근해에서 상선 비앙카 페르리카호 조난.
산토로(Santoro)라는 선원 한 사람이 조선인에 의해 구조되자,
사보이아는 조선 정부의 친절에 보답한다며 대화시도했으나 실패.
조선은 1882년(고종 19) 미국과,
1883년 독일과 상호 통상조약 체결.
마침내 닫고 있던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
이탈리아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84년 5월
순양함 크리스토포로 콜롬보호를 파견해 관계 수립.
1884년 6월 26일 우호·통상 및 항해에 관한 협정을 체결.
그러나 이탈리아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의회로부터 협정 비준 동의를 늦게 받아
비준서의 교환은 1887년 7월에야 이루어졌다.
조선측에서는 서상우(徐相雨),
이탈리아측에서는 크라비오사
서울에서 비준서 교환식을 거행.
1901년 말경에야 상주 대표가 파견.
.
이탈리아는 1902년에 상주 영사 말그라(Malgra)로 하여금
신임장을 봉정(奉呈)하도록 하였고, 조선은 그때까지 영국·
독일·이탈리아 전권공사 성기운 뒤를 이어 민영돈이 신임장.
조선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쇠퇴해 가는 국권을 재정립시키려
노력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는
조선으로부터 광산채굴권을 얻으려고 하였다.
광산채굴권은 몇 차례 고비를 넘긴 뒤 허가되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조선과 이탈리아 관계도 제2차세계대전 종료까지 두절.
현재 이탈리아에 대한무역진흥공사 등 많은 업체들이 진출.
우리 나라를 이탈리아에 처음으로 소개한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에는 우리 나라가 카울리(Cauli)라고 소개.
그뒤 카를레타(Carletta)가 1594∼1602년에 세계 여행 중
우리나라 소년을 데리고 갔는데, 이름이 안토니오 코레아.
오늘날, 안토니오 코레아 후손으로 추정되는
코레아 씨들의 집성촌이 로마 남쪽 600㎞에 있는
알비시(市)에 주민 300명이 코레아 성을 가지고 있다.
바티칸 시국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
성벽으로 둘러쌓인 내륙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국'의 수도는 '바타칸 시티'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 바티칸 평원
면적 0.44㎢, 인구 842명, 세계 199위 매우 작은 독립국가.
이전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
10년 후인 1870년 로마와 더불어 타 지역도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
바티칸 시국은 이 교황령의 회복을 목표로 한 1929년
라테라노 조약 체결로 독립을 성취하여 오늘에 이르며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국가로, 전세계 가톨릭 총본부이다.
바티칸 시국에 속한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
국제 관계에서는 성좌(聖座, Sancta Sedes)로 호칭된다.
바티칸시국은 바티칸 언덕과
그 앞 인근에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 궁전과 시스티나 경당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 등 건물들이 세워진 평원.
교황은 직무상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자
정부 수뇌자로, 초대 교회 시대부터 있었던
그의 직분인 로마 주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좌라는 표현은 바티칸 시국이 아닌
교황의 영적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로, 로마 교황청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교황의 공식 직함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
교황직은 선거에 의한 추기경단에서 선발.
또한 법적으로 교황은 절대 군주에 해당하며,
바티칸 시국의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지배.
현재 교황은 유럽에 남은 유일한 절대 군주이며
콘클라베에서 여든 살 이하 추기경들이 선출한다.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 바로 옆 사도 궁전에 거주.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 순교장소.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단다.
19세기 중반 신흥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간 로마와 주변 지역들은 교황령 이름 아래 다스렸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창궐후 영향력을 잃은 교황청
1870년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점령당하면서
교황 소유지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로마 문제.
이로 인해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티칸으로 대거 피신.
이탈리아는 바티칸 퀴리날레 궁전을 포함한 교회 재산을 몰수.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잃은 후 스스로 ‘바티칸 포로’라 표현.
1929년 2월 12일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란 조약' 체결로
로마 문제 종식 후, 바티칸시국 독립.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총 177개국.
현재 성좌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국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이며 프랑스 혁명후
프랑스 국내의 교회재산이 몰수되고 아비뇽 지방을
프랑스가 합병함으로써 프랑스와 관계가 악화된 바 있다
바티칸 시민 824명(2008년 기준) 가운데
거의 대다수는 바티칸 성벽 안에 거주하며
그 외는 외국 주재 교황대사관에서 성좌 활동.
바티칸 시국의 공용어가 이탈리아어이다.
스위스 근위대에서 명령 언어로 독일어 사용.
현재 바티칸 시국의 공식 웹사이트 언어들은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중국어, 아랍어이다.
교황: 1명
로마에 상주하는 추기경: 58명
성좌의 외교 활동을 맡은 성직자: 293명
바티칸에서 기타 다른 업무를 맡은 성직자: 62명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 101명
기타: 43명
이처럼 시민권 보유자의 80%가 가톨릭 성직자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교회의 구성원이 된 스위스 근위병.
기타 43명 세속인들은 반드시 신앙을 표하고 있지 않다.
바티칸은 나라 자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의 보고.
성 베드로 대성전, 시스티나 경당 등에 산드로 보티첼리,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르네상스 예술 사상의 거장들의 작품들로 가득 넘치고 있다.
바티칸은 1984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바티칸 성당의 역사.
성 베드로가 64년 또는 67년에 순교한 뒤
네로(54~68) 황제 경기장(37년 건축)의 북쪽,
바티카누스 평원의 공동묘지에 안장이 되었다.
바티칸 어원.,바티카누스.
지금 바티칸이 있는 자리는
그 옛날 공동묘지인 셈이다.
2세기 중엽 그의 무덤 위에 작은 성당이 세워진다.
‘너를 "베드로"라 부르니 너 위에 내 성당을 세우리라,
너에게 천상의 왕국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노라’ -성경-
그 의미 그대로 그의 묘지 위에 성당 건축을 시작.
이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9년 모양을 갖춘 성당을 세운다.
성당의 규모는 지금 바티칸 대성당의 본당 규모 정도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분열, 게르만 족의 침입,
심지어는 826년경에 아랍인들까지 이곳을 점령.
846년 바티칸에 쌓은 성벽이 오늘날 바티캉의 외벽.
당시 교황은 이곳 아닌 라테란 궁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아비뇽 유수 시대(1305~1377)
로마는 철저히 버려지게 되고 새로이
교황권을 복구할 이유도 생기게 되었다.
율리우스 2세가 1505년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에게 성전 건축을 위임.
했다고 하지만, 실제는 1400년대 중반
이미 니콜로 5세 교황에 의해 성전 재건축 계획.
니콜로 5세는 건축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일임.
이때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이후 시스티나 예배당이 1470년대 말
식스투스 4세에 의해 1483년 8월 15일 완공, 제막식을 거행한다.
그는 기존의 성당을 부수고
거대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브라만테에게 맡긴다.
그는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기 위해서
로마와 인근 지역에 있던 수많은 성당과
유적지에서 재료를 뽑아 쓰는 뿐만 아니라
기존의 초대 성당의 모습을 완전히 없애버려
브라만테는 ‘파괴의 건축가’ 오명을 듣게 된다.
그러나, 1514년 브라만테의 사망으로
그 일은 훗날 미켈란젤로에게 넘어간다.
1547년 바티칸 대성당 건축, 예술 주임으로
임명을 받게된 미켈란젤로는 사이가 나빴던
브라만테 설계가 사라지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브라만테 설계대로 성당의 재건축을 추진했으며
외벽의 무늬 모양, 조각 등의 벽감 만을 수정했다.
또한 교황의 제단 위에 웅장한 쿠폴라(돔)를 설계한다.
하지만 그 완성은 제자 자코모 델라 포르타에 의해 마무리.
미켈란젤로는 당시 예술가로서
최고의 직위에 있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오직 예술과 신의 사랑, 그리고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이 작업에 매달렸다.
이후 1607년~1612년까지 카를로 마데르노가
성당의 전면을 손보고 이후 큰 변화없이 지금까지
성 베드로 성당은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으며 이때
마데르노는 대성당의 파사드, 즉 성당의 앞면을 만들면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실수.
차후 베르니니가
성당의 광장을 만들면서
지면을 경사지게 만듦으로써
뒤쪽의 돔이 보이게끔 수정했다.
성 베드로(바티칸) 성당.
성 베드로 성당은 총 500개의 기둥, 50개의 제단,
450개 조각으로 이뤄졌으며 총 5개의 문이 있다.
성당의 내부는 1506년 브라만테에 의하여 건축 시작.
미켈란젤로, 1600년대 마데르노에 의해 내부 공사 계속.
공식적으로는 1626년 완성되었으며 여기 있는 작품들은
아주 화려하며 바로크 풍의 모자이크와 거대한 조각들은
‘이 성당이 과연 가톨릭 본산답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성당 길이는 총 187m, 폭은 58m.
벽 사이 사이에는 총 39인의 성인들과
수도회의 창설자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1780년에 도금된 천장도 볼 수가 있다.
바티칸성당에 들어가려면
복장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모자 안 되고, 슬리퍼도 안 된다.
끈 묶는 슬리퍼는 되고, 해변용 슬리퍼는 안 된다.
여자든 남자든 너무 노출이 심한 옷 역시 안 된다.
여행자는 반바지에 면티에 운동화가 가장 무난하다.
이 규정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8년 사도회법을 통해 강화된 것.
원칙적으로 남성의 경우
반바지도 입장 불가이지만
여행자의 경우 양해가 된다.
바티칸 광장
바티칸의 가장 자랑거리.,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
알렉산드로 7세 재위 시(1665~1667) 베르니니가
1667년까지 12년의 공사 기간 동안 완성한 것이다.
이 광장은 우선 완만하게 경사가 지도록 했는데
성당 앞에서 거행되는 종교의식을 잘 보이게 함과
미켈란젤로의 돔을 드러나게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전체적으로 팔을 벌려
모든 신도를 감싸 안는
모양을 지니고 있는 광장.
가장 넓은 곳의 크기는 240×340m이고
양 좌우에 15m 높이의 기둥이 총 284개.
그 위에는 베르니니 제자들이 만든
높이 3.2m 크기 성인상이 140개 있다.
또한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원래, 네로 전차 경기장에 있던 것으로
1585년에 도메니코 폰타나가 옮겨왔다.
이 오벨리스크는 전형적인 해시계 역할을 하기에
아직도 광장 바닥에 시간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분수가 두 개 있는데 광장 입구에서 성당을 볼 때
오른쪽에 있는 분수는 마데르노에 의해 1613년 제작
왼쪽의 분수는 베르니니에 의해 1675년에 제작되었다.
이 광장을 만든 베르니니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모형을 가져왔다.
바티칸 대성당에서 천사의 성으로
바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은
1950년에 만들어졌다.
바로, 화해의 길이다.
Via della Conciliazione.
광장을 돔에서 바라보면 광장 바닥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줄이 나있는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계산하기 위한 것.
<1번> 청동으로 만든 바티칸 대성당의 중앙 현관문.
실제 열리지 않는 대성당의 현관문이며 5개 문 중 중앙.
이 청동문은 1445년 만들었고 성당을 짓기 전부터 있었다.
이 문을 가까이 가서 보면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이 있는데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순교 장면.
<2번>5개의 문중에서 제일 왼쪽 끝문으로 ‘만추의 문’
‘죽음의 문’은 대성당 내 장례를 치른 시신이 나가는 문.
그런데, 이 '죽음의 문'이 가장 축복스러운 이유가 있다.
대성당 내에서 장례를 치를 정도의 인물은
가톨릭 문파 내에서 성인(聖人)이나 가능한 일
이 문을 통하여 나오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3번>중앙 현관문 바로 앞.
바티칸 대성당이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물이다.
앞으로 쭉 나가면
세계 성당 크기들이
차례로 표시되어 있다.
<4번>오른쪽 끝문은 25년을 주기로 열리는 성스러운 문.
50년 만에 문을 여는 것이 교리지만, 현재 25년마다 열린다.
1번과 4번 문들 사이에 있는 문을 통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가는 문에 있는 조개의 모습.
조개는 성당 안 주요한 모자이크 주제.
바로 이 조개가 순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조개는 새조개이다.
이 조개를 밟고 들어가면
정식으로 순례자가 되는 것.
바티칸 성당의 내부는 현관문까지 포함하면
길이가 총 230m(성당 내부 만의 길이는 187m),
직경이 42m(외부건축물까지 포함하면 58미터),
돔은 지상에서 136.5m
보통 15층 건물의 높이다.
따라서, 내부에는 상당히 볼 것이 많지만
개방 않는 곳이 많아서 다 보지는 못한다.
바티칸 내부는 입석시 6만 명 수용이 가능.
<6번 : 미켈란젤로 피에타 상〉
이 피에타 상이 있는 곳은
그리스도 죽음을 기리는 제단,
작은 예배처이며 이 조각은 1499년에
미켈란젤로가 만 24세 때 만든 작품이다.
성모마리아 왼쪽 어깨로 흘러내리는 띠에는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친필 서명이 조각된 이유는 당시 아무도 이 작품을
어린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을 믿지 않자 그가 새겨 넣었다고 한다.
‘피에타’라는 말은 ‘자비, 온정’이라는 뜻이며
보통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마리아 조각상이나 그림을 '피에타'라고 한다.
이 작품은 방탄 유리로 보관.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1972년 어떤 미친 사람이 머리,
코, 눈 언저리, 왼팔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은 그 이후에 복원 후 모습이다.
피에타 상 위를 자세히 보면
바티칸 대성당 내에서 유일한
프레스코 벽화 〈십자가의 승리〉
7번 레오네 12세 기념 조각물.
이 조각물 뒤로 교황 엘리베이터.
8번 :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기념비.
9번 : 피오 11세의 기념비
10번 : 성 세바스티아노 제단.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장면이다.
그림처럼 보이지만, '모자이크' 이며
모자이크가 훨씬 보존이 용이하기 때문.
성 세바스티아노 제단 그림 아래
인노센치오 11세의 실제 시신이다.
얼굴과 손이 부패방지 은으로 덮혔다.
이탈리아 성당의 용도는 예배 드리는 곳.
하지만 많은 성인의 무덤으로도 사용된다.
엄밀히 말해, 바티칸 대성당은 성 베드로 무덤.
11번 : 피오 12세 기념비
12번 : 인노센치오 12세 기념비
13번 : 기독교를 옹호한 마틸데 공작부인 기념비
14번 : 성체의 제단, 예배당이 나온다.
혹 가톨릭 신자라면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자면
이곳 중앙 황금색으로 도금된 성체를 담는 곳이 있다.
성 피에트로 광장을 만든 베르니니 작품이다.
제단 뒤에는 성당 내 유일한 유화 <삼위일체>.
15번 : 그레고리우스 13세 기념비.
16번 : 그레고리우스 14세 기념비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현재는 작품이 없다.
17번 : 그레고리우스 16세 기념비
18번 : 그레고리우스 예배당의 모습.
19번 : 그레고리우스 예배당 위.,구원 성모 제단
20번 : 성 지롤라모 제단. 성 지롤라모 제단 위에 있는 모자이크화
그림을 보다 보면 항상 하늘에 아기 천사들이 떠 있는 경우가 많다.
1900년 어린아이들을 끈으로 연결해 하늘에 떠 있게 하는 축제 관습.
21번 : 성 바실리오 제단
22번 : 베네딕토 14세 기념비
28번 : 클레멘스 13세 기념비
51번 : 베드로 상. 지금은 손대고 지나가지만
원칙은 발에다가 입맞춤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13세기 피렌체 출신의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작품.
52번 : 천개, 대성당의 중심.
천개 즉, 발다키노라 불리는
성 베드로 무덤의 덮개이다.
천개 아래 성 베드로의 무덤.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천개 아래에 성베드로 무덤.
천개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둥을 보면
꿀벌의 모양이 바르베리니 가문의 대표 상징.
이 꿀벌의 문양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친숙하다.
로마의 휴일에서 즐겁게 작은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스쿠터의 이름이 (벌) 모델이다.
로마 국립 회화관이 바르베리니 가문의 건물이며
이 건물 역시 군데 군데 꿀벌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
이 돔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제자 델라 포르타와 마데르노가 완성.
돔 높이 136.5m, 총 537 계단을 올라야 한다.
상당히 거대하지만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미켈란제로가 설계한 돔 아래에는 총 4명의 성인이 있다
바로 성경의 복음서 저자들이며, 그래서 펜을 들고 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 성경 속 저자들.
바로 성 마르코, 성 루카, 성 마테오, 성 요한의 모습이다.
성 마르코가 든 펜이 작아 보이는데,
그 펜의 길이만 해도 무려 1.65m이다.
그러니 돔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금박의 글자는 라틴어로 ‘너는 반석이며
이 반석 위에 나의 성당을 세우며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라’ - 베드로 - 말이다.
48번 : 성 베로니카의 상.
베로니카가 들고 있는 천이
예수의 시신을 덮은 것이는데
공식 문건에 의하면, 이 장면은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예수의 얼굴을 닦아 주는 모습.
49번 : 성 헬레나의 상
여인이 들고 있는 십자가는
예수가 못박혀 죽음을 당한 십자가.
50번 : 성 론지노의 상
이 사람이 들고 있는 창이
바로 예수님을 찌른 창이다.
론지노는 바로 예수를 찌른 로마 병정이다.
후에 개종하여 지금은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람은 비록 잘못을 했더라도 회개하면 새로운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강력한 종교적 메시지가 담겨져있다.
이 작품만이 유일한 베르니니 작품이다.
48, 49, 53은 베르니니 공방에서 만들었다.
53번 : 성 안드레아 상
베드로 동생 안드레아 성인.
네 부분이 같은 길이 그리스 십자가
이 형태의 나무 십자가에서 순교했다.
현재 안드레아 두개골이 보존되고
부활절에는 바로 안드레아의 두개골,
성 헬레나의 십자가, 성 베로니카의 베일,
성 론지노의 창 파편 등이 공개되고 있다.
35번 : 대성당의 주 설교단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들어가지 못한다.
빛이 들어오는 타원형 창 아래의 의자는 베르니니가
나무로 된 의자 위에 청동을 입힌 것이며 이 의자는 항간에
성 베드로가 앉았던 의자로 알려졌는데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875년 카롤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기념하여
교황 조반니 7세에게 증정한 것이다.
의자 아래로는 총 4명의 성인이 있다.
왼쪽에서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표인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 그 다음
성 아나스타시오와 성 조반니 크리소스토이다.
34번 : 우르바노 8세
베르니니에게 천개 및 기타 여러
조각품을 만들기를 원했던 교황이다.
이 교황은 바르베리니 가문 출신인데,
판테온의 천장과 동판을 뜯는 것을 묵과
그리하여 후대에 욕을 많이 얻어 먹었다.
36번 : 미켈란젤로를 존경하고
후견했던 바오로 3세의 조각이다.
40번 : 레오네 마뇨 제단
41번 : 지주 성모의 제단
42번 : 베르니니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를 아끼던 교황 알렉산더 7세는 베르니니가
죽기 전에 자신의 상을 만들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
이에 베르니니가 노구를 이끌고 힘겹게 손수 만든 마지막 걸작.
해골이 들고 있는 것은 모래시계인데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뜻이 담겼다.
베르니니가 죽음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으로 풀이되며 작품 오른쪽에
지구본을 밟고 있는데, 영국 성공회를 비난하는 뜻.
43번 : 성심 제단
44번 : 작은 예배당
45번 : 토마스 제단(왼쪽)
46번 : 성 요셉 제단(정면)
47번 : 성 베드로 십자가 제단(오른쪽)
54번 : 거짓의 제단
이곳에서 거짓말을 하면
큰 일이 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곳에서 중요한 일을 약속하기도 했다.
55번 : 피오 8세 기념비
이 밑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제의실과 보물실의 모습이 있다.
테조로 박물관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식스투스 4세
테조로 박물관(1471~1484)의 무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안토니오 델 폴라이오로 작품.
57번 : 성 그레고리우스 제단
58번 : 피오 7세의 기념비
유명한 비가톨릭 신자였던
덴마크 출신의 조각가,
토르발드센의 작품이다.
59번 : 예수 승천의 제단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카(회화관)
8번 방에 있는 라파엘로의 작품이다.
그가 이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것을
그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완성시켰다.
60번 : 레오네 11세의 기념비
61번 : 인노센스 11세의 기념비
62번 : 성가대의 예배당
63번 : 무염시태의 제단
마리아 무염시태(無染始胎)
단순히 처녀로 잉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구원 사업에 참여하도록
선택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일체의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무염시태
가톨릭 교리에서는 성(性)을 아주 귀하게 본다.
그림이나 조각에서도 성적인 부분은 가려진다.
따라서, 가톨릭은 비도덕적 성적 행위에 단호
예를 들어, 낙태와 같은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이를 인정할 경우 가톨릭 2000년 교리가 무너진다.
가톨릭은 교리에 목숨 바칠 수 있지만
숭고한 교리는 함부로 손 댈 수가 없다.
65번 : 인노센치오 8세 기념비
64번 : 피오 10세의 기념비
67번 : 동정녀 마리아에게 봉헌한 예배당
66번 : 요한 23세의 기념비
68번 : 베네딕토 15세 기념비
70번 : 스튜어트 왕조의 기념비.
세 사람은 가톨릭을 위해 왕좌를 거부.
69번 : 소비에스키 기념비
71번 : 세례당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
주로 여름철 배낭여행에서의 불편한 잠자리,
불편한 음식을 먹으며 움직이려면 힘이 든다.
특히, 로마의 한여름 바깥 온도는 40도에 육박.
바티칸 박물관 & 미술관
15세기초 이래 교황들이 수집한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은 18세기 교황 클레멘스 14세 건립
교황 피우스 6세 때 확장된 이곳에 교황 율리우스 2세 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교황의 고대 조각 소장품들이 전시돠어 있다.
19세기 교황 피우스 7세가 세우고
조각가 안토니오 카바노가 설계한
키아리몬티 조각관도 고대 전시관.
이것은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브라만테가 디자인한 미술관 안에 있는
전시관과 신증축관(브라치오 누오보), 뛰어난
고대 비명들이 소장되어 있는 전시관(라피데리아) 등.
183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세운(1924 개축)
그레고리아노 에트루스코(이탈리아 중서부 고대국가)
박물관에는 에트루스카 발굴물과 레골리니- 갈라시 무덤에서
발굴된 보석들과 유물들이 소장(→ 그레고리아노 에트루스코 박물관).
그레고리우스 16세가 세운 이집트 박물관도
1839년에 이르러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1932년부터 현재의 미술관(교황 피우스 11세가 세움).
이탈리아 종교화, 러시아와 비잔틴 회화들도 소장되어 있다.
1956년에는 근대 미술품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르누아르, 쇠라, 반 고흐, 루오, 마티스,
피카소 등 19, 20세기 화가들의 비종교적 작품 전시.
1973년 바티칸은 현대미술 박물관을 처음으로 개장했고
바티칸궁 65개 전시관에 유럽·미국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
관광객들이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대부분 바티칸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일 정도
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 시국에서 필수적인 관광지.
바티칸 박물관은 영국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걸작들은 최고로 손꼽히고 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1506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궁전 근처의
포도밭에서 라오쿤상이 발견되고,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조각상을 전시한 것이 시초가 되었으며 또한 율리우스 2세는
당대 최고 화가, 조각가들을 불러 바티칸 궁전 건축과 장식을 맡겨
바티칸이 지금의 최고의 박물관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티칸 박물관이 처음 일반에 공개된 것은
18세기 후반, 역대 교황의 궁전으로 사용되던
바티칸 궁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공개한 것이다.
소장된 유물만도 며칠 동안 봐도 모자랄 만큼 방대
바티칸 박물관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는 것이 좋다.
휴관일 : 일요일(마지막 주 제외),
1월 1일, 2월 11일, 3월 19일, 부활절 다음 월요일,
5월 1일, 6월 29일, 8월 14~15일, 11월 1일, 12월 25일, 12월 26일
로마 & 경주.
보물 624호.,유리잔
국립 경주박물관에 로마에서 들여온 유리잔이 있다.
신라 상류사회에서 금보다 귀중품들이었던 로만글라스.
당시 신라는 유리제작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귀중품들은 로마에서 유라시아를 건너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한반도로 들어왔다.
현재, 보물 624호로 지정된 나뭇결 무늬 유리잔은
유럽에서 유행했던 후기 '로만그라스'라고 부른다.
특히 천마총에서 나온 보물 620호 유리잔은
높이 7㎝ 크기 푸른 색상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이 작은 잔이 어떻게 해서 멀고먼 유럽 땅을 떠나
험난한 실크로드를 지나 신라시대 경주까지 왔으며
천년 세월이 흐른 뒤 국립 경주박물관에 놓여 있을까?
경주박물관에는 그 밖에도 서역 유물들이 많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국보 193호 봉수형 유리병은
신라시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실크로드 키질 석굴 벽화.,보검
이와 유사한 보물 635호 계림로보검,
서역인의 얼굴이 묘사된 상감유리목걸이,
수염 긴 문관상을 묘사한 토용, 괘릉 무인상 등
이 유물들은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를 대변해준다.
중국 시안 실크로드 상인들은 로마까지 왕래한 증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모든 길은 시안으로 통한다’
즉, 모든 길은 실크로드로 연결.
실크로드의 시작과 끝을 로마와 시안이라고 하기보다
로마와 경주라고 하는 편이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로마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신라는 반대편, 동쪽 끝.
일본인 유리공예가, 역사연구가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 집필.
‘로마문화왕국-신라’ 라는 연구서.
30년에 걸친 연구 결과로 두 나라 사이의 교류와
고대 신라에 유입된 로마문화의 비밀을 거론한다.
신라는 한때 당나라를 거치지 않고 로마와 직거래.
오늘날 대안탑 앞에는 광장이 있고
현장법사의 동상이 시가지를 바라본다.
당시 이곳은 불경들을 한자로 번역했던 장소.
법당 앞에 놓인 대형 향로에는
한자로 불경과 소원이 적혀 있는
큰 향들이 꽂혀 있는데 왕복 17년간
현장법사는 구법의 길을 무사히 왕래.
그가 가져온 소중한 경전과 불상을 보관하기 위해
탑은 652년에 세워졌고 이 향불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후 신라승 혜초도 사막에 뼈를 묻을 결심으로 떠났다.
그 옛날 인도로 떠나는 구법승들이
대안탑 앞에서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향을 올렸듯 혜초도 이곳을 들렀을 것.
혜초는 그후 '왕오천축국전'을 집필해 남겼고,
대안탑 향불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피어오른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돈황에서 혜초의 불교유적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면서 알려진 혜초.
혜초 & 서역 기행 경로.
신라인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승려.,혜초.
(704~787년) 경 인물로 추정되는.,밀교 승려.
그가 쓴 인도 기행기.,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1300년전 실크로드 육로 및 항로를 건넜던., 혜초
2013년 세계문명의 집합장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활.
세계적인 실크로드 연구가들이 동서교류 역사를 재조명
비록 혜초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기는 하나
아라비아 고대문서에 '신라가 세계의 끝'으로
간주되어 실크로드 연구 새지평이 마련될 전망.
그당시 신라 경주는 세계 2 대 문명 길인
초원길과 비단길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셈
따라서 '계림(신라)이 실크로드 하늘 끝 북쪽'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혜초 시).,당시 신라인 세계관
1300년 만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으로 해석할 만 하다.
"아라비아어 고대문서에서 '신라를 세계의 끝'으로 간주
'유럽~중국~신라'로 이어지는 육로와 초원길., 해상 무역로
그당시 실크로드는 모두 신라의 경주로 이어졌다"고 밝혀졌다.
동서양 해상을 잇는.,신라의 항해술과 조선술.
'이탈리아 로마 고대문화와 동서양 문화교류 흔적.'
"5세기 초, 경주 신라 왕족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 중
시리아 등지에서 생산된 유리 그릇만 보아도 사실을 입증.
동서양 육로를 잇는.,신라의 외교술과 무역 상품.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과 교역한.,신라.
하여, 혜초의 여행기를 재조명해볼 만하다.
동서양 문명 교류 역사에 큰획을 그은.,혜초.
신라 고승 혜초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세계인.
(704~787년) 16살 때 첫번째 중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19 나이에 신라에서 중국 광저우를 출발,
파라사국(인도네시아)~ 천축(인도) 석가모니 성지순례
그당시 천축으로 가는 길은 바닷길이나 육로 모두 험난했다.
당시 여러 문헌에는 중도 탈락자,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스님
'일연(一然)은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산인데,
가련하구나. 힘써 올라가는 유사들이여.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삼국유사 -
혜초를 전후로 수많은 신라 유학승들이 천축 행에 도전
그러나 혜초를 제외하고 귀환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혜초는 석가모니 성지 순례 4년간 천축국과 서역을 5회 여행
20살 혜초는 고국 귀환을 목적으로 4년간.,기나긴 여정
다섯 천축국을 비롯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동로마제국 등 40 여 나라를 여행했다.
인도~러시아~중국 장안 귀환길은 총 1만5000㎞.
비단길, 초원길과도 연결되며 눈 덮힌 파미르고원,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 천산 산맥 등을 통과했다.
추위와 굶주림, 호랑이나 늑대같은 맹수들,
끝없는 평원, 거친 산맥을 혼자 넘어야 했다.
그당시 혜초에게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었고,
오로지 정신력 만으로 길을 찾는 여정이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해 소식 전하리." -혜초 -
그당시 신라인 혜초의 세계관이
신라 경주가 동서문명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무덤 속 유리그릇과 유럽인 형상의 석상.
경주에 서양인들이 살았던 동서양 교류의 흔적.
로마 및 아랍문명이 신라에 도달했고,
또한 신라문명이 서역으로 전해진 증거
혜초가 간 초원길, 비단길, 동방해상로 등
그가 인도를 비롯한 해외를 다녀온 것도
이미 신라인들이 세계 경로를 파악한 증거.
혜초는 홀로 수만리를 걸어 인류 문명과 조우,
세계 국경과 사상, 인간, 종교의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기행문을 객관적인 필체로 담담히 적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 여행기',
'동유기'등 기록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