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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實體)도 없는 왕릉(王陵)을 UNESCO에 등재하자는 사람들
2023년 07월 24일
○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서 말하는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만년(半萬年) 세월(歲月)을 오직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人間) 무리가 사회(社會)를 이르고 ‘국가(國家)=나라’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구성원(構成員)들을 보호(保護)하고 삶을 함께 도모(圖謀)하는 일을 터득(攄得)하면서 그 체제(體制)가 발전(發展)에 발전(發展)을 거듭했을 것이고, 수많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은 길고 혹은 짧은 세월(歲月) 동안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겪으며, 이에 따라 이동(移動)하고 도주(逃走)하고, 숨어버리고를 반복(反復)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서(歷史書)나 유물유적(遺物遺迹) 등을 통(通)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구(地球)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 전무후무(前無後無)』라는 미사려구(美辭麗句)를 꼭 붙여야 하는 종족(種族), 민족(民族)이 곧 “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5,000년을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살았다”는 것은, 자랑이나 존경(尊敬)한다는 뜻이 아니라 “비웃고 비하(卑下)하는 이야기다” 즉(卽),
“구이(九夷)는 어디에서 살았는가?”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반도(半島) 땅에서 살았다는 말은, 『반도(半島) 땅이 :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대륙(中原大陸) 땅을 말하는 것이 된다.』
➨ 견이(畎夷)란 곧 서이(西夷)와 같고, ➨ 풍이(風夷)는 곧 ‘풍이(馮夷)=빙이(氷夷)’로 곤륜산(崑崙山) 하상(河上)에서 시원(始源)했다고 하잖은가! ➨ 우이(于夷)는 우이(嵎夷)요, 욱이(郁夷)로 우부풍(右扶風)이 고향(故鄕)이며, ➨ 양이(陽夷)는 양곡(暘谷)으로 해가 돋는 동쪽 땅에서 사는 이(夷)들을 일컫는 말이다. ➨ 방이(方夷)는 곧 도이(島夷)요, 또 ➨ 황이(黃夷)는, 또 ➨ 백이(白夷)는, ➨ 현이(玄夷)와 ➨ 적이(赤夷)는?
이러한 이들이 반도(半島)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 반도(半島)는,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대륙(大陸)의 땅”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또 주(周) 이전(以前)의 상(商)나라와 은(殷)나라 때도 존재(存在)했다는 구려(句麗)니, 부여(夫餘)니, 맥(貊)이니 한(汗)이니 하는 종족(種族), 부족(部族), 나라는 또 뭔가?
전국칠웅(戰國七雄)【戰國七雄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조(趙), 위(魏), 한(韓)나라의 일곱 나라의 제후(諸侯)】중의 하나였던 “한(韓)”의 유민들이 남(南)쪽으로 이주(移住)한 것이 ‘삼한(三韓)’이라는 사대부(士大夫)의 기록(記錄)은 엿장수 맘대로인가?
이때의 “한(韓)”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였던 “한(韓)ㆍ위(魏)ㆍ조(趙)” 씨(氏)가 서로 독립(獨立)하였는데, 이 가운데 “한씨(韓氏)” 나라를 뜻하는 것이며, “하남성(河南省)과 섬서성(陝西省), 산서일부(山西一部), 호북일부(湖北一部)” 등지(等地)에 둥지를 뜬 칠웅(七雄) 중의 하나였던 “한(韓)”을 말하는 것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 전국칠웅(戰國七雄)을 검색해 보면 : 『戰國七雄 : 중국(中國)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진(秦)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漢)나라의 일곱 제후(諸侯)』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여기에 『“한(韓)”은 없고』, 『“한(漢)”이 있다』 “한(漢)”이라는 나라 또는 제후(諸侯)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오류(誤謬)는 마땅히 수정(修訂)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삼한(三韓)’인들을 보면 : 진(秦)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뭐고, 연인(燕人)이나 제인(齊人)들이 몰려왔다는 얘기는 또 뭔가?
반도(半島) 땅을 벗어나지 못한 제후국(諸侯國)으로써 중국(中國)의 천자(天子)나 황제(皇帝)를 극진(極盡)하게 모시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환장(換腸)한 소국(小國)으로, 그 좁은 땅에서 지들 끼리끼리 치받고 싸우다가 수만(數萬)의 병사(兵士)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목을 베어버려(斬首) 핏물이 냇물을 이루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스스로 국가(國家)를 방위(防衛)하려는 생각은 없고, 황제(皇帝)에게 나라를 구원(救援)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올리자 “어떻게 니놈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니 “우리나라는 소국(小國)이라 그저 폐하(陛下)의 은총(恩寵)만을 원하옵니다. 폐하(陛下)께서 구원(救援)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하는 지상(地上) 최고최대(最高最大)의 무기력(無氣力)하고 나라답지 않은 나라로 묘사(描寫)되었으며,
내부(內部)의 일에는 천둥 번개처럼 민첩(敏捷)하게 잔혹(殘酷)하리만치 참혹(慘酷)하게 처리(處理)하면서도, 세자(世子) 책봉(冊封)까지도 황제(皇帝)의 허락(許諾)이나 승인(承認)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표본(標本)인 왕조(王朝), 무기력(無氣力)하고, 영토(領土)를 개척(開拓)하려는 정신자세(精神姿勢)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오직 평화(平和)(?)만을 추구(追求)하며, 오직 황제(皇帝)를 바라보며 은총(恩寵)만을 기다리는 웃기는 왕조(王朝), 비운(悲運)의 왕조(王朝)로 설정(設定)되어 있다.
➨ 『이런 비굴(卑屈)하고, 무기력(無氣力)했던 비운(悲運)의 왕조(王朝)가 “일천수백(一千數百) 년, 일천(一千) 년(年), 칠백(七百) 년, 오백(五百)년” 등등을 영위(榮位)하여, “천자국(天子國)이나 황제국(皇帝國)을 웃기게 만들며 화하(華夏)를 능가(凌駕)했다”는 것은, 또 뭔 말인가!』
○ 단군조선(檀君朝鮮) 그 이전(以前)의 조선사(朝鮮史)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문헌(文獻)이 없다고 하니 세세(細細)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단군조선(檀君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삼한(三韓)·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伽耶)·고려(高麗)·조선(朝鮮)”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라고 말한다.
말이 5,000년이지 그동안 이어지는 각각(各各)의 여러 나라의 세월(歲月)을 합산(合算)한다면 도대체 몇 명의 ‘왕(王)=군주(君主)’들이 그 땅을 통치(統治)했겠는가? 대략적(大略的)으로 살펴봐도 수백(數百) 명이 넘는 통치자(統治者) [왕(王) : 군주(君主)] 들이 그 땅을 다스렸을 것이다.
정확(正確)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군주(君主)=왕(王)’이 죽으면 순장제도(殉葬制度)까지 있어 그 무덤은 야산(野山)만큼이나 그 규모(規模)가 컸다. 그래서 ‘릉(陵)’ 자(字)를 “큰 언덕”이라고 부른 것이다.
➊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일부(一部) 땅’에 수백(數百) 개 이상(以上)의 왕릉(王陵), 그의 몇 배(倍)나 되는 왕족(王族)들의 무덤이 있어야 하고, 왕족(王族)들의 수십(數十) 배(倍)에 더하는 귀족(貴族)들의 무덤이 줄줄이 엮어져 있어야 하며』,
➋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온 왕조(王朝) 땅에서 :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그저 그런 모양(模樣)이었을 것이다. 산(山)은 그저 산(山)이요, 강(江)은 그저 그런 강(江)이요, 동서남북(東西南北)의 거리(距離) 또한 변(變)할 수 없는 땅이요, 기후(氣候) 또한 크게 변(變)할 수 없고, 그곳에 나오는 동식물(動植物)이나 각(各) 지방(地方)의 토산물(土産物) 또한 크게 바뀔 수 없는 땅이다. 반도(半島)라는 한정(限定)된 땅은,
‘동서(東西)=횡(橫)’의 거리(距離)가 : 일천(一千) 리, 이천(二千) 리, 육천(六千) 리, 1만리(萬里) 또는 수만리(數萬里)로 늘어날 수 있는 땅이 아니요,
‘남북(南北)=종(縱)’의 거리(距離)가 : 3천리(千里), 7천리(千里)∼1만리(萬里)∼1만 5천리 쯤으로 늘어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또 가장 중요(重要)하다고 판단(判斷)되는 지명(地名)은 또 뭔가? 상고사(上古史)를 빼고 말하더라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속에서만 골라도 수십(數十), 수백(數百)의 중요(重要)한 지명(地名)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누구도 모른다. 구전(口傳)도 없다. 뭐냐?
반만년(半萬年)을 똑같은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 이어오며, 그저 바뀐 것이라고는 군주(君主) 일가(一家)일 뿐이었을 한반도(韓半島) 왕조(王朝)에서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지명(地名)들을 나열(羅列)한다면 이게 제정신인가?
거기에다가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광활(廣闊)하게 펼쳐져 있었다고 하였고, 도성(都城) 남쪽으로 5 천리(千里)가 넘게 땅(地)과 땅(地)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도대체 미상(未詳)이라는 지명(地名)들이 왜 있어야 하지?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온 한반도(韓半島)의 백성(百姓)들은 너무너무 무지무식(無知無識)하여 글자도 몰라요, 쓸 줄도 몰라요, 말을 할 줄도 몰라요 ‘운운(云云)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수많은 고서(古書)와 왕조실록(王朝實錄)이라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記錄)과 사대부(士大夫)들이 남겨 놓은 그 수(數)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문집(文集)들은 어디에서 주워 담은 건가?
사가(史家)라는 학자(學者)들의 말은, 도무지 신뢰(信賴)할 수 없는 앵무(鸚鵡)의 타령(打令)일 뿐이다. 21세기 사가(史家)라는 자(者)들은, 인류(人類)를 사기극(詐欺劇)으로 몰아넣고 있는 자(者)들이라고 한다면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일까?
➌ 20세기(世紀)로부터 21세기(世紀) 오늘날까지 한반도(韓半島) 땅은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수탈(收奪)로 인한 천연자원(天然資源) 개발(開發) 및 도굴열풍(盜掘熱風)으로, 그 뒤의 부동산(不動産) 투기열풍(投機熱風)으로부터 산업화(産業化)까지에 이르는 동안 온 땅 구석구석이 파헤쳐지지 않은 땅이 없을 정도(程度)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땅에서 뭐 하나라도 건진 것이 있는가? 하다못해 무슨 묘지석(墓誌石) 한 개도 건져 놓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저 여기저기에 간판(看板)을 세워 놓고 설명문(說明文)만 붙어 있을 뿐, 그 ‘묘지(墓地)=무덤’ 속에 누가 잠자고 계시는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저 그렇게 한글로 만들어 놓은 간판(看板)만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다.
그동안 투입(投入)된 국고(國庫) 예산(豫算)만 해도 모두 합한다면 “수백(數百)억∼수천(數千)억 원”은 능히 되리라! 그렇게 천문학적(天文學的)인 예산(豫算)을 투입(投入)해서 얻어낸 것이 고작 한글 해설(解說) 간판(看板) 몇 개뿐이냐?
○ 아래의 신문(新聞) 기사(記事)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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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일보 : '천년 왕조 신라 왕릉' 세계유산 등재돼야
선애경기자 violetta22@naver.com3697호
입력 2023/07/12 10:54 수정 2023.07.13 07:07
조선왕릉 40기는 이미 등록, 가야 고분도 등재 확실시
○ 조선왕릉 40기는 되고 신라 왕릉은 안 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 조선왕릉이 세계적 유산이 되면서 국민적 자긍심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지만 신라왕릉의 세계유산 등재가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주는 시조왕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해 1000년 동안 왕조를 이어가면서 한번도 천도를 하지 않은 도시다. 이 같은 예는 세계에서 경주가 유일하다. 천년 수도를 지켜오기는 중국 시안과 이탈리아 로마가 비슷하지만 그 도시들은 왕조를 바꾸면서 수도를 이어왔다.
신라왕릉은 신라 고고학, 역사 고고학적 맥락 속에서 당연히 신라시조 혁거세 거서간부터 경순왕에 이르는 계보가 엄연히 있다. 봄, 가을 왕릉대제에는 전국에서 후손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그런데 피장자 신원을 확인 할수 없는 가야 고분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지 않는가.
991년 동안 56명의 왕이 있었던 신라는 역사시대의 한국사 왕조 중 즉위한 왕이 가장 많은 나라다. 약 500여 년 존속한 조선 왕조 27명의 2배를 넘는다. 중대까지 평균 재위 기간은 고구려와 별 차이가 없는 23년이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여성 군주가 3명이나 존재했다. 그리고 특정 가문이 왕위, 왕족을 독점하는 게 상식이었던 동아시아 중요 왕조 중에서 특이하게도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면서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러모로 동아시아 왕조 중에서는 특이한 부분이 많았던 나라가 신라다. 박 씨 왕조가 232년, 석씨 가문이 172년이다. 경주 김씨 가문은 무려 586년으로 가장 오래 집권했다. 특이한 부분은 박씨 가문이 신라 말기에 왕위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최장기간 재위한 왕은 혁거세 거서간이 61년이다.
신라왕들의 무덤을 두고 견해를 달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엄연히 존재해 있고 기록이나 비석 등 고증으로 밝혀진 왕들의 무덤도 상당수에 달한다. 신라는 성씨의 뿌리이며 조상을 기리는 한국의 효 사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명당에 자리 잡은 왕릉은 둘레에 자연과 어우러지는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타리를 하고 있어 경이롭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기준인 완전성과 진정성의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해마다 숭덕전과 숭혜전, 숭신전 등 3전에서 시조 왕에게 올리는 춘향대제와 추향대제의 제례문화는 조상숭배사상에 기인하며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에 큰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조선왕릉 40기는 이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벌써 9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조선왕릉이 세계적 유산이 되면서 국민적 자긍심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조선왕릉은 서울지역에 8기, 경기도 일원에 32기가 18개 지역으로 나눠 분포돼 있다. 조선왕릉의 특성은 유교와 동양 전통사상의 조화 속에서 발전해 온 역사적, 정신적 유산이라는 점이다. 조선왕릉 역시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늦은 감이 있다.
그뿐인가. 가야고분군이 우여곡절 끝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최종관문을 통과해 등재가 확실시되고 있다. 왕릉의 주인공들은 그 시절 최고의 리더로서 청소년들에게 리더십의 체험 학습장으로 활용해 미래를 향한 교훈과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신라왕릉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견해가 다를 수도 있지만 원인을 찾아내 조속히 이견일치를 가져와 계보가 엄연한 신라 왕릉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릉을 더 친근하게 국민들에게, 세계인들에게 다가가게 해야 한다. 그 속에 내재된 시대정신과 인간 스토리를 발굴해 재미있고 유익하게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인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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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신문(新聞) 기사(記事)’를 보면서 아래의 옛 기록(記錄)을 살펴보자.
해동역사(海東繹史) 서목(書目)을 보면 : 조선지(朝鮮志)【저자(著者)는 미상(未詳)이며, 2권이다. 명(明)나라 때 조선인(朝鮮人)이 지은 것인듯하다.】를 인용(引用)하였다고 하였다. 원문(原文)을 찾아보면 이런 기록(記錄)을 볼 수 있다.【풍속(風俗) 편의 왕릉(王陵)에 대한 구절(句節)을 발췌(拔萃)한 것임】
➨ 『조선지(朝鮮志) 풍속(風俗)』 편에서 말하기를 :
조선지(朝鮮志)【저자(著者) 미상(未詳), 조선인(朝鮮人)으로 추정(推定)】 풍속(風俗) : 《前代新羅、百濟、高勾麗王陵,官禁田柴。: 전대(前代)의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駒驪) 왕릉(王陵)에서, 경작이나 땔감을 채취하는 일을 금지하였다.》라고 기록(記錄)하였다.
【헌데 이 기록(記錄)을 보면 : 분명(分明) 『명(明)나라 때의 조선인(朝鮮人)이 지은 것이나 성명(姓名)은 미상(未詳)이다』라고 전해지는데,
➊ 그렇다면 『전대(前代)의 왕조(王朝)란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뿐만 아니라 “고려(高麗)” 또한 당연히 포함(包含)되어야 한다.』
➋ “고려(高麗)”는 최초(最初)로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루고 ‘천하통일(天下統一)=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룬 왕조(王朝)였기 때문에, 고려(高麗)를 제외(除外)한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무의미(無意味)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대(前代) 왕조(王朝)에서 고구려(高勾麗)란 “고구려(高句麗)+고려(高麗)”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理解)된다. 또 왕건(王建) 스스로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천명(闡明)했기 때문이다.
➌ 아니면 “고려(高麗)”는 『반도(半島) 땅이 아닌 대륙(大陸)의 땅에 존재(存在)했던 왕조(王朝)였다는 것일까?』】
조선지(朝鮮志)에 따르면 : 『당시(當時)에 영토(領土) 내에 왕릉(王陵)들이 그대로 상존(尙存) 또는 존치(存置)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記錄)이 존재(存在)하고 있을까?
(1) 동사강목(東史綱目) 제7상 / 丁巳年 顯宗 8년【AD 1,017年 : 宋 진종 天禧 元年, 거란 成宗 개태6】 : 《十二月, 命, 修三國諸王陵廟. : 12월 삼국(三國)【고구려(高駒驪)ㆍ백제(百濟)ㆍ신라(新羅)】여러 왕(王)들의 능침(陵寢 : 陵)과 사당(廟)을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令所在州縣修治禁樵採過者下馬 : 능(陵)과 묘(廟 : 사당)가 있는 고을에 명을 내려 수리하게 하고, ‘초채(樵採)=채초(採樵)’를 금(禁)하며,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고 하였고,
高麗史 4卷-世家 4 / 顯宗 8년(年) 12월(月) [1017년] : 《是月,敎 : 高勾麗新羅百濟王陵廟令所在州縣修治禁樵採過者下馬. : 이달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왕(百濟王)의 능묘(陵廟)를 모두 소재지의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보수하고 땔나무 채집을 못하게 하며, 그 앞을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리게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똑같은 기록(記錄)이 있고 더 상세(詳細)하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➍ 능침(陵寢) : 능(陵)을 말하는 것으로 ‘임금의 무덤’을 칭하는 말이다. ‘능침전(陵寢田)’이란 것이 있었는데, 『고려(高麗) 말엽(末葉) 왕릉(王陵)의 보호(保護)ㆍ관리(管理)를 위(爲)하여 나라에서 주던 공전(公田)의 하나이다. 34대 공양왕(恭讓王) 3(1391)년 토지(土地) 개혁(改革) 때에 실시(實施)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옛 왕조(王朝)는 전대(前代) 왕조(王朝)들의 능(陵)에 대한 관리(管理)와 보호(保護)를 위해 노력(努力)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정조실록(正祖實錄) 부록 / 정조 대왕 행장(行狀) : 《修檀君、箕聖、三國、高麗始祖王陵 : 단군(檀君)ㆍ기자(箕子)와 삼국(三國)ㆍ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正祖實錄 / 정조(正祖) 5년 12월 6일 갑술[1781년 청 건륭(乾隆) 46년] : 《次對。 飭檀君、箕子、新羅、高句麗、百濟、高麗始祖諸王陵修改之節。: 차대(次對)하였다. 단군(檀君)·기자(箕子),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고려(高麗) 시조(始祖)의 왕릉(王陵)들을 수개(修改)하는 절차에 대해 계칙하였다.》고 하였다.
➎ 서력(西曆) 1781년이면 오늘로부터 겨우 240년 전의 일이다. 이때도 이 땅에는 『”단군(檀君), 기자(箕子), 혁거세(赫居世), 동명왕(東明王), 온조왕(溫祚王), 왕건(王建) 태조(太祖) 왕릉(王陵)“들이 실제(實際)해 있었다』는 것이다.
(3)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종 15년 무인(1878) 6월 20일(무술) 흐림 : 가락국 수로왕릉에 전호(殿號)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대호군 허전의 상소 :
《蓋駕洛之於三國, 一體無間, 觀於聖敎, 可以仰認矣。 今者三國之崇靈·崇德·崇義, 旣賜殿額, 又設寢郞, 而獨於駕洛之納陵, 尙未蒙一視之恩, 此所謂天地之大, 猶有所憾, 而滿堂歡樂, 一人向隅者也。 : 대개 가락국은 삼국(三國)과 전혀 차이가 없는 일체이니, 이는 성교(聖敎)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삼국의 숭령전, 숭덕전, 숭의전에는 이미 전액을 내려 주고 또 침랑(寢郞)을 두었는데 유독 가락국의 납릉에 대해서만은 똑같은 은전을 입히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지(天地)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恨)하는 것이 있고, 집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여도 구석에 근심 걱정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凡在伽倻故都之民人, 孰不歎傷, 而況臣卽其遺裔也, 益不勝冤鬱之情, 不揆僭猥, 冒瀆崇嚴。: 무릇 가야의 고도(古都)에 사는 백성들치고 어느 누가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바로 그 후손이기에 더욱 원통하고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지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것이옵니다. 伏乞天地父母, 俯垂鑑諒, 駕洛國首露王納陵, 特降殿號, 竝置陵官, 如三國諸陵之例, 一以遵前聖之盛典, 一以慰故國之英靈。 : 천지 부모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굽어살피시어 가락국 수로왕릉에 특별히 전호(殿號)를 내려주고 아울러 삼국의 여러 능과 같이 능관을 두어 한편으로는 전성(前聖)의 성대한 법을 따르고 한편으로는 고국(故國)의 영령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臣無任云云。 答曰, 省疏具悉。 疏辭, 令廟堂, 稟處。: 신은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 하도록 하겠다.” 하였다.》고 하였다.
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삼국(三國)과 고려(高麗)를 별도로 나누었으나, ‘사대부(士大夫) 또는 대신(大臣)’들은 이를 모두 “고구려(高句麗)+고려(高麗)”을 언급(言及)하여 삼국(三國)이라고 표현(表現), 호칭(呼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더불어 삼국(三國)【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고려(高麗)】의 여러 왕릉(王陵)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 한반도(韓半島) 땅 어디에 전대(前代) 왕조(王朝)의 수많은 왕릉(王陵)이 묻혀있는가? 더불어 단 한 곳의 왕릉(王陵)에서라도 “왕릉(王陵)의 주인공(主人公)에 누구다”라고 확실(確實)하게 말할 수 있는 증거(證據)를 찾았는가?
미안(未安)하고, 죄송(罪悚)스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現在)까지 “단 한 곳도 없다” 그냥 그렇게 한글 설명문(說明文)만이 덩그렇게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다. 그럼 이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전대(前代) 왕조(王朝)의 왕릉(王陵)이 아니다』라는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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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서 말하고 있는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만년(半萬年)의 세월(歲月)을 오직 “반도(半島) 땅”에서 우물 안(內) 개구리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반도(半島) 땅을 벗어나지 못한 제후국(諸侯國)으로써 중국(中國) 천자(天子), 황제(皇帝)를 모시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환장(換腸)한 소국(小國)으로, 그 좁은 땅에서 지들 끼리끼리 치받고 싸우다가 수만(數萬)의 병사(兵士)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목을 베어버려(斬首), 핏물이 냇물을 이루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스스로 국가(國家)를 방위(防衛)하려는 생각은 없고, 황제(皇帝)에게 나라를 구원(救援)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올리자 “어떻게 니놈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니 “우리나라는 소국(小國)이라 그저 폐하(陛下)의 은총(恩寵)만을 원하옵니다. 폐하(陛下)께서 구원(救援)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하는 지상(地上) 최고최대(最高最大)의 무기력(無氣力)하고 나라답지 않은 나라로 묘사(描寫)되었으며,
세자(世子) 책봉(冊封)까지도 황제(皇帝)의 허락(許諾)이나 승인(承認)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표본(標本)인 왕조(王朝), 무기력(無氣力)하고, 욕심(欲心)없는, 오직 평화(平和)만을 추구(追求)하며, 황제(皇帝)를 바라보며 은총(恩寵)만을 기다리는 웃기는 왕조(王朝), 비굴(卑屈)한, 비운(悲運)의 왕조(王朝)로 설정(設定)되어 있다.
➨ 『이런 비굴(卑屈)하고, 무기력(無氣力)했던 비운(悲運)의 왕조(王朝)가 “일천수백(一千數百) 년, 일천(一千) 년(年), 칠백(七百) 년, 오백(五百)년” 등등을 영위(榮位)하여, “천자국(天子國)이나 황제국(皇帝國)을 웃기게 만들며 화하(華夏)를 능가(凌駕)했다”는 것은, 또 뭔 말인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은, 군주(君主)의 무능력(無能力), 무책임(無責任), 무정책(無政策)으로 인한 혼란(混亂), 부정부패(不正腐敗), 뇌물(賂物), 관리(官吏)들의 수탈(收奪) 만연(蔓延)으로 인한 국론분열(國論分裂), 백성(百姓)들의 항거(抗拒)는 끝내 무장투쟁(武裝鬪爭)으로 확대(擴大)되었다.
어리석은 군주(君主), 개인(個人)의 부귀(富貴)와 영달(榮達)만을 추구(追求)한 식자(識字)층인 사대부가(士大夫家)들, 그리고 관리(官吏)들의 행태(行態)는 끝내 국력(國力)의 쇠(衰)함에 이르렀고, 대신(大臣)들은 사적(私的) 욕망(慾望)을 채우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賣國奴)를 자청(自請)했고,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 행위(行爲)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일제 제국주의(日帝 帝國主義)와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이 합작(合作)한 전형적(典型的)인 반역행위(叛逆行爲)였다. 검색창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치면 ‘위키백과’에서 그 자세(仔細)한 내용(內容)과 내막(內幕)을 확인(確認)할 수 있다. 물론(勿論) 그것이 전부 다일 수는 없을 것이나, 아쉬운 대로 그 실체(實體)를 파악(把握)해 볼 수 수 있다는 것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乾淸宮)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암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출처(出處) : 위키백과]】
○ 역사통설(歷史通說)에 의하면 : 『대한제국(大韓帝國)은, 결국(結局) “미국(美國)과 일본(日本)”의 야욕(野慾)으로 인한 침탈(侵奪)을 넘지 못했다.』
➊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으로 인하여【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국권피탈(國權被奪)로 이어지고 36년 동안 강제점령(强制占領)과 강제통치(强制統治)로 이어졌고,
이러한 결과(結果)는 “미국(美國)과 일본(日本)”이 “필리핀[Philippines]과 한반도(韓半島)”를 가지고 빅딜 [Big Deal : 큰 거래] 한 결과(結果)다. 이때부터 미국(美國)의 한반도(韓半島)의 정책(政策)을 보면 : 결과적(結果的)인 설명(說明)이지만, 이게 과연(果然) 뒤의 혈맹(血盟), 동맹(同盟)의 나라일 수 있는가? 하는 합리적(合理的)이며 객관적(客觀的)인 의심(疑心)을 살 수 빆에 없는 행태(行態), 행동(行動)을 보여줬다.
➋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결과(結果)로 일제(日帝)로부터 내 손이 아닌 남의 손을 거쳐 해방(解放)되었으니 그 대가(代價)는 곧 ‘38도선’을 경계(境界)로 미군(美軍)과 소련군(蘇聯軍)이 진주(進駐)하면서 냉전체제(冷戰體制)가 본격화(本格化)되고, 신탁통치(信託統治) 뭐니 하면서 미국(美國)과 소련(蘇聯)의 대리전(代理戰) 격인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눠진 남한(南韓) 땅은 수많은 양민학살(良民虐殺), 폭동(暴動), 암살(暗殺) 등으로 인한 사회혼란(社會混亂)이 가중(加重)되어 백성(百姓)들의 삶은 날로 피폐(疲弊)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重要)하게 볼 사항(事項) 하나는 : 38도선을 경계(境界)로 분할(分割)된 원인(原因) 중에서 “항복(降服)한 일본(日本)의 역할(役割)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맥아더[MacArthur] 사령부(司令部)와 일본(日本) 간의 또 하나의 빅딜 [Big Deal : 큰 거래] 이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이다. 가능성(可能性)이 아주 많은 사안(事案)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부친(父親)은 미군(美軍) 장성으로 필리핀 군정(軍政) 총독(總督)을 지냈고, 또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전범국(戰犯國) 일본(日本)을 너무 관대(款待)하게 처분(處分)을 내렸기 때문에 지금도 일본사회(日本社會)에서는 맥아더[MacArthur]를 칭송(稱頌)하는 식자(識者)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전파(電波)를 많이 탄 말은 : 『나는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 필리핀의 국민들에게 : 내가 돌아왔다[People of the Philippines : I have returned]]』는 것 일게다.
미국(美國)과 일본(日本)이 “필리핀[Philippines]과 한반도(韓半島)”를 놓고 빅딜 [Big Deal : 큰 거래] 한 것을 확인(確認)시켜주는 대목이다.
➌ 여기에다가 또 “1950년 1월의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의 선포(宣布)로 인하여 “한반도(韓半島)가 미국(美國)의 극동(極東) 방위선(防衛線)”에서 제외(除外)되자 “스탈린과 김일성”은 적화야욕(赤化野慾)을 드러내고 6.26 전쟁(戰爭)을 일으켜 말 그대로 단군(檀君) 이래 최대(最大)의 비극(悲劇)인 동족상잔(同族相殘)이 벌어지면서 ‘수백(數百)만 명’의 희생자(犧牲者)를 불러왔다.
【애치슨 라인(Acheson line) :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 미국 신문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출처 : 나무위키】
➨➨➨ 이 ‘선언(宣言)’으로 인하여 『대만(臺灣)은 중국(中國)에, 한반도(韓半島)는 소련(蘇聯)에 할양(割讓)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이후(以後) 한국전쟁(韓國戰爭)의 발발(勃發)은, 미국의 은밀(隱密)한 용인(容認)하에 벌어진 전쟁(戰爭)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갖게 하며, 이후(以後)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전군(全軍)의 작전권(作戰權)마저 미국(美國)이 이양(移讓)받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의심(疑心)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일 수밖에 없다.
그 뒤로 2023년 7월 오늘까지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은 60만 대군(大軍)에, 국방력(國防力)은 세계(世界) 6위, 특히 탱크와 기갑(機甲), 자주포, 견인포 등의 기동군단(機動軍團)은, 러시아[Russia] 또는 중국(中國)군을 능가(凌駕)하는 형편(形便)이라고 ‘국뽕’들이 전할 만큼 강대(强大)해졌다.
그러나 이게 무슨 소용(所用)인가? 그림의 떡일 뿐이다. 특정(特定) 상황(狀況) 발생(發生) 시에도 우리 뜻대로 북진(北進)을 할 수 있나, 국토(國土)를 침탈(侵奪)당해도 미국(美國)의 승인(承認), 허락(許諾)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군대(軍隊)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외국(外國)의 석학(碩學)들은 말하기를 : 북한(北韓)에 ‘긴급사태(緊急事態)=급변사태(急變事態)’가 벌어지면 : 또다시 북한(北韓) 땅은 4개 나라의 군대(軍隊)가 출정(出征), 주둔(駐屯)하고 식민통치(植民統治) 될 확률(確率)이 매우 높다고 진단(診斷)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등장(登場)하는 네 나라는 “미국(美國)∼러시아(Russia)∼중국(中國)∼일본(日本)”이다. 여기서 한국군(韓國軍)은, 미국(美國)의 승인(承認)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이게 문제(問題)다. 일본(日本)을 항상 주의(主意) 깊게 살펴야 한다고 늘 말하는 것은, 한반도(韓半島)에 일본군(日本軍)이 또 다시 주둔(駐屯)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指導者)의 정치(政治), 외교(外交) 능력(能力)이 가장 절실(切實)하게 요구(要求)되는 중요(重要)한 시기(時期)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韓國人) 유권자(有權者) 48.6%는 무능력(無能力)과 무책임(無責任)과 무정책(無政策)을 내세우는 ‘최악(最惡)의 지도자(指導者)’를 선택(選擇)했다.
오늘의 보수우익(保守右翼)계 언론(言論)들은 : 2년 전(前)의 보수우익(保守右翼)계 언론(言論)들이 작업한‘허수아비 영웅’만들기에 올인한 일을 지금쯤은, 그 실체(實體)가 다 드러났으니 맨땅에 헤딩하고 있을 것이다.
즉(卽) “한국(韓國) 군대(軍隊)”는 “한미연합사령부(韓美聯合司令部)가 전작권[戰時作戰統制權]”을 가지고 있으며,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육군 제2작전사령부, 그리고 육군 특수전사령부”만이 한국(韓國)에서 작전권(作戰權)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 제2작전사령부는 후방(後方)의 향토사단(鄕土師團)을 지휘(指揮)하는 부대일 뿐이다.
또 ‘수도방위사령부(首都防衛司令部)나 특수전사령부(特殊戰司令部)’는, 말 그대로 특수목적(特殊目的)을 가진 부대(部隊)일 뿐이다. 특히 특수전부대(特秀戰部隊)는 정규군(正規軍)이 아니다.
“나무위키”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 『한미연합사의 존재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국은 군사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으며, 미국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군사상의 결정도 못하는 식민지'라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한미연합사에 의한 전시작전통제권의 행사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한국과 함께 싸우는 연합작전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군사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는 분쟁에 대해서까지, 미국이 한국의 군사력 동원을 막거나 간섭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➍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한국군(韓國軍) 단독(單獨)? 누구 맘대로 한국군(韓國軍)의 단독(單獨)으로 전쟁(戰爭)을 수행(遂行)할 수 있나? 내침(來侵)은 내란(內亂)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외침(外侵)을 당했을 때 국가(國家)를 방위(防衛)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➎ 위에서 말하는 『“다시 말해서 한국(韓國)이 미국(美國)으로부터 아무런 군사적(軍事的)인 도움도 받지 못하는 분쟁(紛爭)에 대해서까지, 미국(美國)이 한국(韓國)의 군사력(軍事力) 동원(動員)을 막거나 간섭(干涉)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란(內亂)이나 기타(其他) 국내(國內)에서 벌어지는 것을 전제(前提)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전두환’의 광주(光州)사태에 공수부대(空輸部隊)를 동원(動員)하는 원인(原因)이 된 것이다. 그럼 우리가 단독(單獨)으로 북진(北進)해도 미국(美國)의 작전통제권(作戰統制權)과 관계(關係)가 없다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맞는 말인가?
그렇다면 전작권[戰時作戰統制權]이 없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닌가? 행성(行星) 내 200개가 넘는 국가(國家) 중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위상(位相)가 비교(比較)되는 나라 가운데에서 『자국(自國) 군대(軍隊)를 통제(統制)하는 작전통제권(作戰統制權)도 없는, 남의 나라가 우리나라 군대(軍隊)의 작전통제권(作戰統制權)을 가지고 있는 이런 희한(稀罕)한 경우(境遇)를 본적이 있는가? 그런 경우(境遇)가 있는가?』
이래서 다른 나라 식자(識者)층에서 “한국(韓國)을 미국(美國)의 식민지(植民地)와 같은 나라”라고 폄하(貶下)하는 것이다. 이게 식민지(植民地)가 아니면 뭔가?
➤➤➤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이지만 : 미국(美國)은 자국(自國)의 이익(利益)을 위해 한반도(韓半島)를 최대(最大)한 이용(利用)하기 위한 계획(計劃)의 일환책(一環策)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혈맹(血盟)? 혈맹(血盟)이란 ‘혈판(血判)을 찍어 굳게 맹서(盟誓)한 관계(關係)를 말하는 것이고, 서로 함께 피를 흘린 관계(關係)’란 뜻이다.
미국(美國)은 자국(自國)의 이익(利益) 극대화(極大化)를 원(願)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국(美國)이 자국(自國)의 이익(利益) 극대화(極大化)가 필요(必要)하면 한반도(韓半島)는 언제든지 포화(砲火) 속으로 던져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게 과연(果然) “혈맹(血盟)”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대만(臺灣)도 마찬가지다. 언제는 불필요(不必要)에 의해 던져버려 놓고, 이제는 필요(必要)하니 보호(保護)하겠다? ‘대만(臺灣)’의 ‘TSMC 등으로 대표(代表)되는 ’반도체(半導體) 왕국(王國)‘이 미국(美國) 측에게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未來)의 ‘전장(戰場) 터’가 되는 것은 첫 번째가 ‘대만(臺灣)’ 땅이 되는 것이다.
물론(勿論) 한반도(韓半島) 역시(亦是) 100% ‘전장(戰場) 터’가 되는 것이다. 다만 그 시기(時期)가 언제냐? 하는 것일 뿐이다. 사대주의(事大主義)는 망국(亡國)의 지름길로 인도(引導)한다. 강대국(强大國)들로 둘러싸인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位置)에 서 있는 국가(國家)의 외교정책(外交政策)에서 “흑(黑)이냐, 백(百)이냐?”하는 논리(論理)는 자폭(自爆)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무능력(無能力)한 지도자(指導者)는 국가(國家)와 민족(民族) 파멸(破滅)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된다.
이런 무능력(無能力)한 지도자(指導者)는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게 국가(國家)와 구성원(構成員)들에게 보답(報答)하는 길이다. 즉(卽)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충정(忠情)이다. 무능력(無能力)한 지도자(指導者)가 이런 것을 알 수 있겠나? 그래서 항상(恒常) 국가(國家)에 망징패조(亡徵敗兆 : 亡兆)에 들면 꼭 이런 무능력(無能力)한 지도자(指導者)가 나오게 되고, 결국(結局)엔 폭망(暴亡)【갑자기 망(亡)하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걸 피할 수 있는 방법(方法)은, “7,700만 국민(國民)들의 단합(團合)된 힘이다” 미국(美國)이 정말 우리의 혈맹(血盟)인가? 이건 분명히 재정【再訂 : 재정리】가 필요(必要)한 부분(部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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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기록(記錄)에서도 보았듯이 이 땅에 수많은 ‘전대(前代) 왕조(王朝)들의 왕릉(王陵)’들이 산재(散在)해 있어 국가적(國家的)으로 관리(管理)를 했다는 것이다. 헌데 지금까지 어떤 왕릉(王陵)에서 그것을 확인(確認)할 수 있는 유물(遺物) 유적(遺跡)들이 발굴(發掘)되었는가?
단 한 곳도 없다. 그렇다면 이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명확(明確)한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에 대한제국(大韓帝國) 이전(以前)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없었다』는 뜻이다.
➨ ‘삼한(三韓)’을 예(例)를 들어 설명(說明)해 보자. 78개 나라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78명의 군주(君主)가 있었다는 뜻이자, 이들이 수대(數代)를 거쳤다면 수백(數百) 명의 군주(君主)가 존재(存在)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땅에서 삼한(三韓)의 수백(數百) 명의 군주(君主)들은 어디에서 잠들고 있느냐? 하는 질문(質問)에 답할 수 있는 자(者) 있으면 나와 봐라! 단 한 곳에서라도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거기다가 가야(伽耶)가 수백(數百) 년이요, 신라(新羅)가 일천(一千) 년을 영위(營爲)했다고 한다.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 땅에서는 개발행위(開發行爲)를 할 수 없다. 땅만 파헤치면 거대(巨大)한 무덤들이 쏟아질 테니 말이다. 현실(現實)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역사관(歷史觀)”은,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이다. 이럴진대 누가 국민(國民)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뼈대를 만들어 놓고, 하수인(下手人)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반도(半島) 백성(百姓)들을 강제통치(强制統治)하기 위해 살을 붙여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여과(濾過)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일백(一百) 년을 고아 먹고, 또 물을 부어 또 고아 먹고를 반복(反復)해 왔다. 진짜 징그러운 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이다.
여기에다가 맹목적(盲目的)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가 나타났다. 친일(親日)에 올인[Allin]하고 있다. 맹목적(盲目的) 친일(親日)에 몰두하는 것은, 그 대가(代價)가 클 수밖에 없으며, 큰 타격(打擊)을 입는 자(者)도 결국(結局) 본인(本人)일 수밖에 없다. 임기(任期)가 끝나고 난 뒤의 평가(評價)는 냉혹(冷酷)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없는 왕릉(王陵)을 어쩌란 말일까? 왕릉(王陵)도 아닌 왕릉(王陵)을 가지고 유네스코(UNESCO)에 등재하자고??? 웃어? 울어? 이게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실체(實體)다.
2023년 07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진짜 이제는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실록을 읽으면서 많은 의문점들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삼국의 그 많은 무덤들이 왜 이 땅에는 없는 것일까? 특히 백제는 거의 없잖아요. 최근에는 이사지왕 이라는 글자를 누군가 새겨서 한참 뜨더니만 조용해지고 참 답답힐 일입니다.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전혀 동떨어진 이런 기록들을 언제까지 후손들에게 남겨줘야 할런지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강단사학에서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하는데 시간이 해결을 해주겠지요. 이리 명백한 증거들이 나오는데요. 선생님 더운 날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무더운 날씨와 장마철의 호우로 인해 많은 피해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들립니다.
안녕하세요. "Romantic"님!
관심과 성원에 항상 감사 드립니다.
우리들의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오늘의 이런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를 남겨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결코 말입니다.
변화를, 개혁을 해야만 하는데....여기에는 첫째로 국민들의 발상전환과 관심, 두번째로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의 의지만 있다면 하나 하나 개혁시킬 수 있습니다. 허나 이런 지도자가 나타나기가 참 어려운 실정이겠지요!
결국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고 싶습니다만, 이게 또....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세대에서는 막막한 이야기가 됩니다.
허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고싶습니다.
무더운 날씨, 늘 건강하게 댁내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