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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선정전입니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 는 뜻으로 이곳에서 임금은 신하와 국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사신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왕비가 이곳에서 경로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잠업을 권장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지요
선정전은 창덕궁에 남은 유일한 청기와 건물입니다. 청기와는 아라비아의 푸른 안료와, 중국의 기술을 이용한 비싼 건축 재료였습니다.
19세기 초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선정전과 경훈각이 청기와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정전만 청기와이고
경훈각은 동궐도에서는 이층인데 단층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 선정전의 龍머리 토수(吐水)
추녀의 끝에 목재가 비 바람에 훼손되는 것을 막기위해 쒸우는 기와.
✅길상과 사악함을 막는 ✅ 벽사의 의미와
✅화재 예방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 청기와 *......
⬆️ 취두(鷲頭ㆍ독수리 머리)
태조실록에는 없지만
위 세종임금의 말씀으로 봐선 처음 지을때부터 근정전은 청기와로 한 듯 합니다.
지붕 기와가 청기와니까 취두도 청기와로 만드려고 신하들한테 묻는 내용입니다.
근정전 짓고 40년후의 기록이니
그 40년안에 지붕을 다시 하진 않았을 것이니까요
✅ 문종 1년 (1450)
"근정전과 사정전만 청기와로 덮었을 뿐이고~~~"
✅ 성종 5년 (1474)
"근정문ㆍ홍례문ㆍ광화문에
청기와를 덮었다"
✅ 연산군 11년
"인정전과 선정전을 모두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
사찰도 청기와를 이은것이 많은데 하물며 王의 正殿이랴"
■ 세조 10년(1464)
仁山君 홍윤성을 불러 원각사 법당을 덮을 청기와에 대해서 의논하다.
모두 8만장(張)이라 구워서 만드는데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컸다.
■ 성종 19년 (1488)
봉선사의 청기와를 보수하다.
先王의 사당(종묘)에도 쓰지않은 청기와를 봉선사 ㆍ원각사 ㆍ장의사에도 쓰였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청기와로 보수하였다.
■ 광해군 10년 (1618년)
"영은문(迎恩門)의 청기와가 파손 되었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門이기에 격조높게 청기와를 장식했었네요.
중종 34년에 청기와로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광해군 시대에는 제작 기술이 끊어져서 만들기가 어렵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기와 점토에 염초를 넣고 모양을 빚은 후에
굽고 푸른 색이 나도록 유약을 한번 씌운 후
다시 한 번 구워야 완성이 됩니다.
염초는 화약의 재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비싼 값에 수입 해야 하고
푸른색 내는 과정이 까다롭다고 합니다.
https://naver.me/5X9JrbYi
⛔ <경복궁>에는
*근정전ㆍ*사정전ㆍ*근정문ㆍ*홍례문ㆍ
*광화문에.... (청기와 지붕)이 있었는데
임란때 불에 타고 19세기 후반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중건 될 때는
아마도
재료 구하기도 어렵고,
기술도 없고(기술이 없어 못 구운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옵니다)
비싸니까,
청기와를 얹지를 못했습니다.
⛔ 궁궐의 청기와 이야기도 흔히 듣지는 못하는 이야깁니다....⛔
보통의 절집에선
기와불사 한 장에 만원이던데.....
북한산 어느 절의 청기와 불사는 삼만원 받더라구여.....비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