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월산(584m)
1.산행구간 : 추원마을-모차골-황용약수-황룡석불암-수렛재-함월산-기림사
2.산행일자 : 2018. 03.11(일요일)
3.산행거리 : 10.17km
4.산행참가자 : 영알 산악회 16명+4명=20명
5.코스별 산행시각
◎ 추원마을 (10:00)
◎ 추원사 입구(10:20)
◎ 왕의길 주차장(10:25)
◎ 황용약수터(10:35)
◎ 황룔석불암/인자암(10:50)
◎ 이정표/용연폭포3.5km,수렛재1.0km,모차골0.4km(11:10)
◎ 이정표/용연폭포3.0km,수렛재0.5km,모차골0.9km(11:25)
◎ 수렛재/용연폭포2.5km,모차골1.4km(11:40)
◎ 함월산/584m(12:25~13:25)
◎ 용연폭포(14:30)
◎ 기림사(15:00)
◎ 기림사 주차장(15:20)
◎ 감포수협 활어 어판장(16:00~17:30)
6.산행기
지난 2월 25일
2월달 정기산행을 2주간 늦춰 진행 했었다.
목적은 시산제 산행으로 인한것인데 아무래도 3월정기산행시 시산제 산행은 너무 늦을것 같은 생각..
내혼자 생각인가?
해서 지난 1월 정기산행 하산주때 만장 일치로 설날 연휴 이후 가장 빠른 일요일 2월 25일 무룡산에서 시산제를 진행 했었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3월 정기산행을 공지 하게 되는데 .....
왕의길로 간다는 그리고
설여사 차량 24인승을 이용하게 할것이며 하산후 감포로 이동후 봄도다리로 하산주까지 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리고 산행지는 산책길 비슷한 왕의길 그리고 함월산을 둘러 하산 기림사까지라는 내용도 포함한다.
뭐 호응도 좋고 해서 차량좌석이 풀이 될거라는 흐뭇한 생각이지만 정작 달랐다.
여러가지 일로, 그리고 이런 저런 일때문에 빠지는 바람에 24인승버스 이지만 좌석 다 채우고는 갈런지 고민 거리가 되었다.
지난 토욜, 형제들간의 모임이 합천에서 있었다.
어머니 돌아가신지 세번째인데 세번까지 생일을 해줘야 좋다는 미신 때문인데 이를 말릴수도 없는 그런 행사이다.
토.일요일 양일간이지만 행사때문에 일요일 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토요일 행사를 치루고 일요일 아침 급하게 돌아오게 되는 강행군이다.
09시 조금 지난 시각..
늦게 도착한 두한씨 부부 입 막음용으로 곶감을 입에 하니씩 물고는 포항간 민자고속도로를 따라 달린다.
16명이다.
그래도 좌석은 비워 있지만 꽉찬 느낌이다.
경주-감포간 4번국도와 14번 도로의 공사로 뭐 헛갈리긴 했지만 나름 열심히 운행한 덕으로 예정지인 추원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바람이 분다.
더구더나 제법 차다.
따스했던 차에서 내려서인지 더더욱 그러했던것 같다.
서둘러 움직이면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에 모두들 분주하다.
팬션이 들어선 추원 마을
고주택과 새로운 주택이 썩 어울리지는 않은것 같다.
그리고
길머리 마다 왕의 길이라는 이정표도 세워 놓았다.
안내판을 빌려오면 왕의 길 내용은 이렇다.
왕의길은 신라의 시작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 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주던 길이다.
이길은 사람과 문화를 이어주던곳이기도 하지만 왜구가 침락하던 주된 통로이기도 하다.
특이 용성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신라로 잠입하던 길이며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장례행차길이며 신문왕이 용이되신 부왕인 뭄무왕에게 신라의 보배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위해 행차했던 길이기도 하다는 안내판이다.
추원사 들어 가는 길목이다.
나무 사이로 보이긴 하지만 ....
길...............
추원사 모습
왕의길 주차장이다.
10여대는 족히 주차할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많이들 오는 모양이다.
황용약수터이다.
돌로 덮어 놓은 약수...
마치 백숙집 주인이 인기척에 나오길래 먹으도 되나니 어제 청소 해놓아 마셔도 된다는 이야기에 한모급 입에 넣으니 탄산음료는 아니지만 달기약수처름 쏘는 그런 느낌의 탄산 약수이다.
황용약수백숙집 주차장이다.
음식점이 먼저 시야에 들어 오긴 하지만 화장실을 이용하자니 인자암 화장실을 이용하라며 강한 거부반응이다.
하기사 그도 그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겠는가.
그러니 개방해놓으면 여러가지 문젯점이 분명 있을것이고 그러니 아예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해는 한다 싶다.
모차골이다.
마차가 다니던 곳이라 하여 마차골로 불리다가 모차골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왕의 길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왜 모차골인걸까
모차골은 동해 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을 알현(謁見)하기 위한 신문왕의 마차(馬車)행렬이 다녔던 곳이라 한다.
뭐 마차가 다닐만한 그런 길은 아니지만 어쨌튼 설은 설...
그내용을 들여다 보자.
인자암
신문왕은 신라 31대 임금이다.
그러니까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681년 문무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신라는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안으로는 통일 후의 긴장과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삼국통일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데 그리 되지 못햇던 그런 시절...
삼국사기를 보면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 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니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다는 내용을
신문왕이 종묘에 제사를 지내며 조상들에게 바친 제문의 내용이다.
그만큼 통일 직후 귀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외부와의 전쟁 위험도 있어 나라를 다스리기에 어려운 시기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즉위 다음해인 682년에 아버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는 동해바다에 갔다가 용을 만나 만파식적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얻었다라고 되어 있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날이 개는 등 신비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의 평화와 안녕이 절실했다는 설명이다.
해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장례 행렬,그리고 신문왕이 아버지의 수중릉으로 행차하던 길,
그길이 추령의 고개를 피해서 만든길이 이곳 모차길이 아닌가 싶다.
충(忠)과 효(孝)을 근본으로 했던 신문왕 호국 행차길이라는 안내판을 지나 계곡쪽으로 이어지는길...
길은 완만하다.
여름철이면 하늘을 볼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무들
그리고 가을이면 단풍들로 가득찰 모차골...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길이 좋다는 이야기가 모두들 입에서 이구 동성이다.
잔뜩 쌓여진 낙엽길은 운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대론 방해꾼이다.
계곡마다 쌓여 길을 아예 없애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자칫 낙엽을 밟고 지나다 물에 빠지는 그런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경우다.
멏일전 그리고 엊그제 내린 많은 눈.비로 불어난 계곡물은 더더욱 조심의 대상이다.
잠시 쉼을 한다.
알아서들 막걸리에 커피에...
너무 많이 쉬어 간다는 이야기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산악회 한팀을 그냥 보낸다.
추원마을 입구에서 출발할때 대형버스로 온팀들이다.
수렛고개이다.
호미기맥길의 안부터인셈이다.
왕의 행차 때 수레가 넘어 다녔던 고개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때는 사람들이 메고 다니는 가마였을터 기림사에서 올라오는 고갯마루로 쉼터인것만큼 사실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함월산 방향이다.
그리 가파른 길은 아니지만...
지도상의 x549.8m이다.
양지쪽은 눈이 녹앗지만 음지쪽은 설빙이다.
다행이 습질이라 그리 미끄럽지 않은게 사실이지만 모두들 특히 여자분들 엉거주춤이다.
함월산 아래 안부에 양지바른 무덤가이다.
바람조차 막아주는 그런 명당터..
그주변에 둘레돌레 앉는다.
각자 가지고온 찬에 또 웅촌에서 참석은 하지 못햇지만 막걸리와 미나리 협찬을 하신 이경락 고문님...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특히 미나리가 압권이다.
거진 한시간 가량...
도시락 개그를 끝으로 함월산에 올라선다.
584m이다.
달(月)을 품은(含) 함월산 ..
그리고 이웃에 달(月)을 뱉는다(吐)는 뜻의 토함산이 마주하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형국인셈이다.
조망없는 봉우리에 나무들만이 서있는, 그리고 나무에 조그만한 팻말이 묶여져 있다.
참 오랜만에 올라왔다.
호미기맥때 지났던 기억이 있을뿐...
모두 모여 단체사진으로 인증삿을 마무리 한다.
하산길은 호미기맥과 반대 방향이다.
양지바른 능선이라 눈은 거진 다 녹았다.
우려했던 그런 아이젠을 필요 없게 생겼다.
x480.7m 올라가는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왼쪽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다.
준족 서너분이 x480.7m 로 향하다 길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 나온다.
수렛재로 가는 갈림길이다.
수렛재에서 곧장 오면 이곳으로 온다는 이야기이다.
용연폭포이다.
많은 비로 인해 물줄기가 장난이 아니다.
거진 여름 수준이다.
양쪽 문을 여닫는 형국인 용연폭포..
설에 의하면
용연폭포는 폭포 아래 웅덩이를 이룬 소를 일컫는 말로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 -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을 얻은 부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문왕은 용왕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어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는데, 이때 태자 이공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는 “이 옥대에 박힌 모든 장식은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는 용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왕이 옥대의 장식을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연못이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용연(龍淵)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만파식적은 신문왕의 왕권 강화와 정세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설화였을것이다.
기림사이다.
신문왕이 다녀갔다는 기림사는 달(月)을 품은(含) 함월산 바로 아래에 있다.
기림(祇林)이라...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기원정사와 죽림 정사라고 한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라 한데서 기림(祇林)이라 하여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천불전
또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는데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라고한다.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곧장 이곳으로 오신 김용근 고문님 일당(?)과 조우
폭포까지 다녀오는동안 곧장 기림사를 빠져 나와 감포수산물 어판장으로 향한다.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주차장
감포 수협활어 직판장
네비만 믿고 들어 갔다 다시 알바만 하고 새로운 건물로이동....
몇일전에 도다리에 대해 이런저런 통화 했던 6번 코너 태운 수산이다.
새꼬시, 포 할수 있는 도다리를 모두 합치니 12kg 이다.
10kg 으로 하고 kg당 30000원.....이건 흥정이 아니고 쥔장이 그렇게 하겠단다.
20명분이라니 모지랄것 같다며 덤으로 해산물을 얹어 주겠다며 걱정 말라시는 쥔장...
그렇게 2층으로 모여 3월 정기산행 총회와 하산주로 마감한다.
돌아오는 차량에서.....
180311 함월산.gp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