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귤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소개받은 여인에 첫눈에 반한
백석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았던
통영 끝내 그 여인을 사랑한
동료 기자였던 친구의 훼방으로 만나지 못한
그 여인을 그리며 충렬사 계단에 밤새
앉아 마음을 써 내려간 백석이 잘 보이는
길 건너편 그의 시비가 있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란이라는 이 같고
란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 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넷 장수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 시 통영2-남행시초)
옛 장수 모신 충렬사 길 건너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명정골 들어가는 입구에 백석 시비가 있다.
백석이 란이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면 그의 인생은 그가 산 인생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선일보 동료 기자의 농간으로 만나지 못한 란(박경련)과의 인연에 대해 설왕설래 해 보지만 인생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원조를 본다는 등. 막장드라마의 한 편이라는 등,
기자는 그 때도 기레기 였다는 등 많은 말이 오갔지만 다 부질 없슴이다.
백석은 란과의 맺지 못한 인연에 슬퍼하다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함흥으로 떠나
그의 운명같은 여인 자야(김영한)을 만났다.
기생의 자식이라 란의 부모에게 버림받고 기생이라는 이유로 자야와의 인연을 끝내야 했던 백석의 삶.
란이도 자야도 백석도 모두 사라졌지만 그의 흔적은 여기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한다.
명정골은 서피랑으로 이어진다. 서피랑은 소설가 박경리여사가 태어난 곳이다.
이름 기념하여 서피랑 골목길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과 말씀이 벽마다 새겨져 있다.
결국 이번 여행길에 인연이 닿지 않은 동피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에겐 선생의 글귀들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켜 좋았다.
또한 이 골목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박경리 선생의 <나비야 청산가자>란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와 골목길은 나비 형상이 많다.
서피랑 공원에서 바라 본 통영 항.
강구안이라고도 불린다.
박경리 선생 생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선생의 생가
어는 순간 생가로 가는 길 안내를 놓쳐 오늘은 보지 못하겠거니 생각을 했다. 이미 지나쳤으리라 생각하며 세병관을 향해 가는 길
조그마한 그늘에 한무리의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어림하여 예닐곱분 조금이라도 사이를 띄우면 가의 두 분은 햇빛으로 나 앉아야 할 만큼 작은 그늘이다.
남극 찬 바람을 버티기 위해 빈틈없이 촘촘하게 서 있는 펭귄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분들에 끌려 다른길로 가려다 방향을 틀었다.
결국 이분들이 길안내자였다.
로렐라이언덕에 사이렌이 있다면 서피랑 골목길엔 할머니들이 있다.
박경리 선생 생가를 살펴 보는 일가족
마을 만들기를 한다고 벽화작업을 한 곳이 많은데
이곳은 동네와 관련한 인물을 중심으로 어지럽지 않고 품격있게
마을을 꾸며놓았다.
아마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역사성과 장소성 그리고 그곳 출신의 인물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만드는 것이 마을이라면
마을을 꾸미는 일도
마을을 만드는 일도
여기서 벗어날 때 천박해지고 난잡해지고 정체불명이 되는 것이 아닐까?
여백으로 남겨 둔 벽
색을 칠했으나
색이 드러나지 않고
그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의해 변화한다.
서피랑 골목은 세병관 담과 이어진다.
현재와 과거가 절묘하게 이어지는 통영의 골목길
첫댓글 여행의 맛은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감동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을 때 배가되는 듯 합니다.
자연은 눈에 세기고, 사람은 가슴에 들어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