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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이신 예수(요6:32-35)-2024.9.15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증거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증거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증거 하십니다. 성경이 증거 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증거 하십니다. 이렇게 수많은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시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 중에 불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증거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졌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감히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믿음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말입니다(마16:13). 어쩌면 그것이 제자훈련의 최종 코스를 통과하는 마무리 질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충분히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은 제자훈련 3년차를 맞이한 제자들을 향한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모든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을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저주저했을 것입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것 같습니까? 아마도 다양한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다들 자기 수준에 맞는 답을 하지 않을까요? 어떤 이는 어린아이 수준의 답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신학적으로 세련된 대답을 하고 싶어 고민할는지 모릅니다. 잘 정돈된 답을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번에도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한 대답이요, 매우 성경적이고도 신학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고백 속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 들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게 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칭찬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왜냐면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가 스스로 터득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깨달은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베드로의 입에서 그런 명품고백이 나오다니요. 하나님이 베드로의 입에 그런 고백을 넣어준 것이기에 가능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거든요. 로마서10장10절의 말씀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자기 선언
과연 예수님은 당신을 어떻게 선언하실까요?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자기를 스스로 증거하시는 신학적 선언이 7개 정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셀프선언인 셈이지요. 예수님의 자기선언은 헬라어로 ‘에고~에이미’입니다. 즉, ‘나는 ~이다’라는 것이지요. 가장 먼저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요한복음6장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8장12절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10장7절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며, 요한복음10장11절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1장25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14장6절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5장1절은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다양한 각도에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는 인간을 그만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어떤 증거를 통해서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기 위함이지요.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소품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증거를 제시해주셔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이 주어지면 이런 증거들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들어오지만, 믿음의 선물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이 모든 증거들을 다 보여주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엡2:8).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구원을 이루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그런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믿음에 대하여 자랑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본문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선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 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좋아하는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당신을 떡이라고 말씀하실까요?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나는 금이다’ ‘나는 돈이다’ ‘나는 보물이다’라는 말들도 많이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떡입니다. 떡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먹거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떡입니다. 떡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의 떡은 빵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떡이라는 단어는 우리 문화에 맞는 단어일 뿐입니다. 영어성경에도 bread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더 나은 떡을 먹기 위해 투쟁하는 것입니다. 매우 유치한 발상 같지만 인생은 떡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떡을 해결되지 않는데 돈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돈을 떡으로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떡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마찬가지지요. 결국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떡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며 투쟁하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떡의 문제를 가장 먼저 나타내 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떡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떡은 인생의 먹거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떡은 반드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인 것이지요. 떡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래서 결코 떡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떡이 필요치 않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4장4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잘 보십시오. 이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떡을 먹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떡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더욱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이 살려면 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로되 떡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육신의 양식이 영혼의 양식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말씀인 거예요. 육신의 양식은 떡이 필요하나 영혼의 양식은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떡은 떡이로되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이지요. 영생을 주시는 떡이라는 말씀이에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떡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떡이 있고, 영혼을 살리는 떡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생들이 육신의 떡이 없으면 죽겠다고 탄식하면서도 영혼을 살리는 떡이 없는데도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떡에 대한 어떤 갈급함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영적 배고픔이 있는 자는 영혼의 양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2) 생명의 떡이 필요한 사람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필요한 영혼들에게 생명의 떡을 가르치기 위해 오병이어의 표적을 동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부분 주변에 있는 모든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비유설교를 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신 후에 생명의 떡으로 이끌어 가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공생애기간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특별히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곁을 따라다녔습니다. 물론 대부분 눈에 드러난 표적을 보고 따라다닌 것이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디베랴 건너편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역시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주로 병을 고쳐주시는 표적을 보고 따라다닌 것이지요. 마침 그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관계로 유대 남자들이 모이기에 무척 용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닌 것이지요. 마침 끼니때가 되었습니다. 이 많은 무리들의 먹는 문제가 가장 큰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다니던 큰 무리를 보신 후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요6:5).
예수님은 빌립의 믿음을 테스트해 보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역시 빌립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만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빌립의 그런 성품을 아시는 예수님이 왜 빌립에게 먼저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의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인간적인 생각을 깨뜨리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빌립은 상당히 영리하나 주님이 보실 때는 정말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옆에서 듣고 있던 안드레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한 아이의 손에 들려진 도시락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도시락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인 초라하고 볼품없는 도시락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 아이와 안드레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릅니다. 거기다가 안드레가 그 아이의 도시락을 확인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마 당시 어린아이들이 갖고 다니는 보통의 도시락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눈에 비친 아이의 도시락은 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호기심이 발동했을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안드레가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눈에 어린아이의 도시락이 포착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을지라도 배고픈 무리들의 떡 문제를 해결해주는 단초가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 때 안드레는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변변치 않은 것이었을지라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되고,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표적이 되기 때문이지요.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안드레가 아직 그 믿음의 눈이 열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손에 들려진 작은 도시락을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믿음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를 치고 말았습니다(9절하).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냐는 말이지요. 자기 생각으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을 제한하는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이른바 믿음을 연출할 수 있는 단서는 발견하면서도 믿음의 능력까지 연결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믿음의 능력을 제한해 버리는 것이지요. 자기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래도 빌립보다는 안드레가 더 진보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드레의 진보적인 생각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불쏘시개가 되었거든요. 예수님은 어린아이 손에 들려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무리들은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최소한 먹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최소한 그들의 먹는 문제만큼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무리들의 생각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신 것입니다. 혼자 산으로 피하신 것이지요(6:15). 예수님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고, 무리들은 무리들대로 흩어지고,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다음날 무리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난 무리들은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하듯이 반갑게 인사합니다(25절).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인사는 예수님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의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입니다(26절). 사실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표적 속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랑게’라는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나누어 주신 떡과 물고기 속에서 예수님의 표적을 발견하는 대신에, 그 표적 속에서 떡과 물고기만 발견했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영적 표적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소재를 떡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의 모든 대화를 복음을 증거 하는 소재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떡은 당시 무리들의 최고의 관심사였거든요. 물론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최고의 소재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효과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나 도구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전혀 엉뚱한 대화보다는 듣는 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가 복음을 전하는데 훨씬 더 용이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전도자의 지혜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전도법은 탁월하십니다. 요한복음4장에서도 수가성의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물을 가지고 접근하셔서 결국은 생수를 증거 하십니다. 육신의 물을 소재로 하여 영적인 생수를 전하신 것이지요. 상대방에게 어떤 거부감이나 부담감이 없었던 것이지요. 만일 공감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소재라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당연히 복음의 효율성도 떨어지겠지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떡을 소재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당시 떡만 보고 따라다니던 무리들에게 떡은 복음을 전하기 가장 좋은 소재였던 것이지요. 떡은 모든 무리들의 관심사요, 공감대를 형성하는 최고의 소재니까요. 예수님의 떡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귀를 쫑긋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는 떡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의 관심은 육신의 떡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영생의 떡이었거든요.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떡이었다면, 예수님의 관심은 저들을 생명의 떡으로 초대하여 그 떡을 먹여주시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3) 육신의 떡과 생명의 떡의 근본적인 차이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육신의 떡과 영생의 떡을 비교하며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32절에 ‘참 떡’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33절에는 ‘하나님의 떡’이 나오고, 35절에는 ‘생명의 떡’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으로는 다소 생소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육신의 떡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 떡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떡과 생명의 떡을 말씀하십니다. 그들로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떡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떡 이야기는 무리들에게도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상호간에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았다고 증언합니다(31절). 그래도 대단한 발전입니다. 떡이 만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그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는 떡을 먹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생명의 떡을 자기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 정도로 인식한 것입니다. 만나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그 정도의 인식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을 증거 하시기에 매우 편했을 것입니다. 전혀 엉뚱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속성의 떡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율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용이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율법으로 똘똘 뭉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고로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율법을 상징하는 만나를 꺼냄으로 인하여 생명의 떡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나의 한계와 참 떡의 차이를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나는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려주신 떡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만나를 매일 매일 계속해서 먹어야 했습니다. 마치 육신의 양식을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참 떡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 떡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떡이요, 하나님의 떡입니다. 그런데 그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떡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신 것이지요.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십니다(51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이 떡은 무리들의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라는 떡과는 전혀 다른 영생을 얻는 떡입니다(58절). 이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이십니다(51절).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을 위하여 내어주신 제물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54절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절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52절). ‘이 사람이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식인종도 아니고 말입니다. 육신 안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그래서 제자들마저도 수군거렸습니다(60절).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말씀을 육신으로 받아들이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말도 안되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러나 영으로 받으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남사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음식을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음식을 먹는 것은 음식들이 주는 영양분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먹으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만일 음식을 통해 몸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먹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몸에 독이 된다면 더욱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려 하심입니다(40절).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떡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떡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이 떡으로 존재하신다는 의미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먹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우리는 받아먹어야 합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하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수용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영의 양식으로 받아먹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살을 먹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을까요? 고린도전서11장에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1장 23절부터26절을 보십시다. 물론 요한복음6장53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의 의미한다는 말이지요.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함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내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성구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음으로 인하여 바뀐 현상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우리가 먹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지요. 내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번도 쉬지 않고 내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른바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불어넣어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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