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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6~190)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86>아버지 장제스와 틀어진 장징궈 “그는 나의 적이다” |제187호| 2010년 10월 10일
◀조모 왕차이위(王采玉)의 품에 안겨있는 유아시절의 장징궈. 1911년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 김명호 제공
신해혁명 성공 후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됐다. 쑨원(孫文)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군대가 없이는 통일과 민주공화제의 실현이 불가능했다. 독일·일본·미국과 접촉했지만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소련 쪽으로 눈을 돌렸다. 10월 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동방의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쑨원은 국민당을 레닌식 정당으로 개조했다. 중공당원들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소련은 북벌(北伐) 성사를 위해 광저우(廣州)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고문단과 현대식 무기를 지원했다.
쑨원이 죽자 베이징과 모스크바에서 연일 대규모 추모행사가 열렸다. 소련은 중국혁명을 수행할 “정치간부”를 양성해 주겠다며 모스크바에 중산(中山)대학을 설립해 쑨원을 기념하고 양국의 우호를 세계에 과시했다.
노동자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하이 푸둥(浦東)중학에서 퇴학당한 장징궈(蔣經國)는 베이징에서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쑨원 추모행사를 참관하며 감동을 받았다. 1년 전 아버지 장제스(蔣介石)를 만나러 황포군관학교에 갔을 때 봤던 국·공 합작과 군벌타도에 관한 온갖 벽보들이 생각났다.
장징궈는 중공 설립자이며 쑨원과 함께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리다자오(李大釗)를 알게 됐다. 리는 소련대사관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장도 소련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자주 놀러 오는 15세 소년에게 소련 유학을 권했다. 장제스도 반대하지 않았다.
1925년 10월 19일 장징궈는 “혁명인지 뭔지 하는 괴물이 남편을 물어 가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잡으려 한다”는 모친의 한숨을 뒤로했다.
국·공 양당에서 선발한 유학생 90명은 블라디보스토크행 화물선에 오르자마자 국제가(國際歌)를 불러댔다. 장징궈는 배 안에서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를 탐독했다.
장제스는 완전히 좌경화된 사람다운 편지를 아들에게 자주 보냈다. “중국어와 영어 는 잠시 잊어라. 러시아어에 정통해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물상자를 열 수 있다. 정당 가입은 내가 간여할 문제가 아니지만 이왕 그곳에 갔으니 시세와 조류에 따르도록 해라. 우리의 가장 큰 임무는 국제 무산계급의 해방이다.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야 한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 절대로 낭만주의에 빠지지 마라.”
◀1937년 3월 귀국 도중 하바롭스크 중국영사관 문전의 장징궈.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2년 전 결혼한 부인. 부인 오른쪽이 장징궈. 처음 모스크바의 중국대사관에 나타났을 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중산대학에 유학온 중국인 학생들의 관계는 국·공 양당처럼 복잡했다. 서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충돌과 마찰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덩시셴(鄧希賢, 후일의 덩샤오핑)의 활동은 눈에 띌 정도였다.
장징궈는 항상 공산당 편에 섰다. 국민당 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장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의 아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장은 대연설가였고 청년단원이었다. 그의 연설이 있는 날이면 학생들은 참고서를 뒤져가며 경청했다. 학교 측에서 발언을 저지하면 항의했다.
1927년 3월, 중공은 상하이 총공회에 파업을 발동하고 무장폭동을 일으켜 장제스의 북벌군을 지원했다. 소식을 들은 중산대학 학생들은 “홍색장군 장제스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강당에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과 함께 장제스의 사진을 걸었다. 5월 1일 붉은광장에서 거행될 노동절 기념행진에 쓸 대형 초상화까지 준비했다.
장제스는 낮에 생각하고 밤에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국·공 합작 이후 점점 세력이 확대되는 공산당을 좌시하지 않았다. 4월 12일 새벽 4시를 기해 청당(淸黨)을 발동하고 상하이총공회를 공격했다. 다음 날 중공이 시위를 벌이자 국민당 부대에 발포령을 내렸다. 공산당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공개적으로 반공(反共), 반소(反蘇)를 선언했다.
프라우다 기자가 장징궈를 찾아왔다. 16세를 갓 넘은 소년은 몸을 어디다 둬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노동자들을 죽였다.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 부자지간이며 혁명의 동지였지만 지금은 나의 적이다.”
장징궈는 소련에 눌러앉았다. 같은 해 8월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도 장제스와 결별하고 모스크바로 왔다. 4개월 후 부친이 쑹칭링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모친과 함께 조모의 무덤을 찾아가는 꿈을 꿨다고 한다.
1936년 2차 국·공 합작을 성사시킨 장쉐량의 요구로 12년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 인질 비슷하게 억류당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187>장제스, 소련 코민테른 간부와 아들 교환 제의 거절 |제188호| 2010년 10월 17일
▲시베리아 시절 중기계창 동료들과 야유회를 나온 장징궈(앞줄 좌6)와 부인 파이나(앞줄 좌5). 파이나는 중국에 온 뒤 시어머니로부터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 이름을 받았다. 장의 오른쪽에 있는 모자 쓴 여인은 반세기가 지난 뒤 “니콜라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흘렀다. 우리는 그가 남을 원망하거나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장징궈를 회상했다. 김명호 제공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청당(淸黨)의 서막을 연 장제스는 혁명 근거지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쑤(江蘇)·저장(浙江)·후난(湖南)·장시(江西)·푸젠(福建)·광시(廣西)·쓰촨(四川) 지역의 중공당원들을 닥치는 대로 색출했다. 형장이 따로 없었다. 대로·골목 할 것 없이 유혈이 낭자했다.
3년간 계속된 1차 국공합작은 피비린내만 남긴 채 공염불로 끝났다. 목숨을 건진 중공당원들은 두더지 신세로 전락했다. 장제스는 소련인 고문 140여 명을 추방해 중·소 관계도 완전히 파열시켜 버렸다.
국공합작의 옥동자였던 중산대학의 중국인 학생들은 본국의 정변 소식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련은 학생들 중에서 국민당원들은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항상 중공 편에 섰던 장징궈는 소련을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잔류를 희망했는지, 후일 장제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스탈린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럴듯한 이유로 “한방에서 살다시피 했던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딸 펑푸넝(馮弗能)과 중산대학 여학생 중 가장 예뻤던 장시위안(張錫媛)이 바람둥이 쭤취안(左權·후일의 팔로군 전방총부 참모장)과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소련에 눌러앉았다”고 말하는 중국 할머니들이 많다. 당시 장징궈는 17세 소년이었다.
1년 후 장시위안은 덩샤오핑(鄧小平)과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펑푸넝은 “사람들은 청년단원인 네가 놀기 좋아하는 나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너의 친구나 동지가 될 자격이 없다. 그간 축낸 러시아 빵과 네게 미안하다. 아버지와는 화해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귀국해 버렸다.
장징궈도 귀국을 요청했지만 코민테른은 가타부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소련 홍군에 자원 입대했다. 어려서부터 호된 교육을 받았고 시련이 몸에 배다 보니 힘들어도 낯을 찡그리거나 한숨을 쉬는 법이 없었다. 항상 명랑하고 적응력이 뛰어났다. 2년 후 사단 최우수 사병에 뽑혔다.
소련 정부는 관례대로 장징궈를 레닌그라드 소재 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제 그의 이름은 ‘니콜라’, 유일한 지도자는 “스탈린 동지”였다. 정치공작이 뭔지를 제대로 배우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유격전술과 무장전복에 관한 논문은 소련인 교관들을 감탄시켰다. 이때 장의 나이 20세, 장차 중공의 지도자 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군정학교를 마친 장징궈는 발전소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손에는 물집이 생기고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달 45루블을 받았다. 빵은 배급제였지만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는 날이 많았다. 항상 배가 고팠다.” 장은 운명을 개선할 방법을 찾았다. 야간학교에 들어가 토목공정학을 배웠다. 중국과는 모든 연락이 단절된 지 오래였다.
1931년 6월 15일 국민당 정보기관은 코민테른 극동 지역 책임자 뉘란 부부를 체포했다. 6개월 후 소련은 쑹칭링(宋慶齡)을 통해 장징궈와 교환할 것을 제시했다. 장제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2월 16일 일기에 “어린 자식이 황무지에 내팽개쳐지고, 소련인들에게 잔혹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국가에 해를 끼친 범죄자들과 교환하지 않겠다. 후손이 끊기고 나라가 망한다 해도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운명인 줄 알고 받아들이겠다”고 적었다. 훗날 장제스의 부관은 “그날 밤 태연히 잠자리에 든 총통은 두 차례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장징궈는 농촌으로 쫓겨났다. 농민들은 “먹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중국인이 굴러 들어왔다”며 조소했다. 땅이나 갈아엎으라며 말과 농기구를 던져 줬다. 장은 온종일 밭을 일궜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결국 병으로 쓰러졌다. 고향의 기름진 농토가 그리웠다. 몇 개월이 지나자 농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장징궈를 행정위원회 부주석으로 추대했다.
2년이 흘렀다. 소련은 장징궈를 한곳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공장 중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시베리아의 우라마시 중기계창으로 보냈다. 이곳에서도 성실하고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뭐든지 시키면 다 해냈다. 부공장장으로 승진했고 중공업일보의 주편도 겸했다.
장징궈는 이웃 공장에 근무하는 러시아 여인을 만나 가정도 꾸렸다. 이 미래의 대만총통은 아들이 태어나자 소련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소련공산당에 입당원서와 장제스를 독하게 비난하는 입당이유서를 제출했다. (계속) <188>소련 머물던 장징궈 “내 조국은 소련” 어머니에게 편지 |제189호| 2010년 10월 24일
▲1935년 여름 신혼여행을 겸해 흑해 연안에서 피서를 즐기는 장징궈 부부, 같은 해 겨울 장남 샤오원(孝文)이 태어났다. 김명호 제공
장징궈가 소련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신청서 원본이 최근 발견됐다. “나의 아버지 장제스는 중국혁명의 반역자다. 현재 중국에서 자행되는 흑색공포의 두목이기도 하다. 1927년 나는 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적으로 대하겠다는 성명을 낸 적이 있다. 그 후로 장제스와 연락을 하거나 인연이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장제스와 조우하게 된다면 공산당원의 입장에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대하겠다.”
1935년 초 중공의 코민테른 대표 왕밍(王明)이 장징궈를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네가 소련 측에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중국에 파다하다. 고향에 있는 모친에게 안정된 직장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는 편지를 한 통 써라.” 두 사람은 ‘모스크바 중산대학’ 동기였다.
1936년 1월 레닌그라드판 프라우다지에 소련 공산당 후보당원 장징궈가 중국의 모친에게 보내는 편지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중국 중앙홍군이 창군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장징궈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전국적으로 펼치던 신생활운동과 홍군에 대한 포위 섬멸작전을 무자비할 정도로 비판했다. “어머니의 전 남편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수십만의 형제와 동포들을 도살했습니다. 중국인의 적이며 당신 아들의 적입니다. 듣자 하니 장제스는 효와 예의와 염치를 선전한다고 합니다. 항상 이런 수법으로 인민들을 속이고 우롱했습니다.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2층에서 집어 던지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할머니에게 야단맞자 버릇없이 대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장징궈는 장제스의 유일한 친 혈육이었다. 12년 만에 만난 장제스와 장징궈 부자(1937년 4월 후베이성 한커우).
이어서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중국 홍군의 장정과 소비에트 정권을 찬양했다. “저는 군벌의 아들에서 한 사람의 공산당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장제스는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의 소비에트정권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홍군은 중국인민의 힘을 상징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죄악의 근원은 장제스입니다. 저의 조국은 소련입니다. 어머니가 중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계신 곳 어디라도 제가 달려 가겠습니다.” 뉴욕 타임스도 프라우다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에게서도 듣기 힘든 비난과 욕설을 아들에게서 들은 장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몰락한 소금장수의 유복자로 태어나 41세에 전 중국을 통일한 사람다운 일기를 남겼다. “역시 이 녀석은 살아 있었다. 그간 잠을 설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조상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모골이 송연했다.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 슬플 뿐이다.”
1936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됐다. 반혁명분자 장제스의 아들이며 한때 트로츠키 분자로 몰렸던 장징궈도 무사할 리 없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공산당 후보당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수입원이 끊어진 장징궈는 부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비밀경찰의 감시가 그치지 않았다.
12월 12일 장제스의 후계자였던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는 사건이 시안에서 발생했다. 소식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긴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장제스가 죽기라도 한다면 중국은 내전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다. 중국이 일본과 전면전에 돌입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소·만 국경을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듬해 3월 시안사변이 해결되자 소련공산당은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소련에 12년간 거주해온 장징궈의 귀국과 중국 국민정부에 5000만 루불을 지원할 것”을 의결했다.
스탈린은 장징궈를 모스크바로 불렀다. “소련에 12년을 있었지만 너는 중국인이다. 중국이 일본과 전면전을 준비 중이다. 귀국해서 국가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분투해라.”
장징궈는 난감했다. 마오쩌둥은 본적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스탈린이나 아버지 장제스는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사람들인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장징궈는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관을 노크했다. 중국을 떠난 지 12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원인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계속) <189>장제스 “아들이 한 달 후면 온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 |제190호| 2010년 10월 31일
▲장징궈(왼쪽)는 12세 때 모친(가운데) 곁을 떠났다. 15년 만에 러시아인 부인(오른쪽)과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았다. 1937년 가을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 김명호 제공
1936년 가을, 소련 주재 중국대사 내정자 장팅푸(蔣廷黻)는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의 호출을 받았다. “위원장은 장징궈의 귀국을 학수고대한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소련에 가거든 소재를 파악하고 귀국시킬 방법을 찾아봐라. 위원장의 유일한 혈육이다.” 소련 측과 협의해 장징궈를 귀국시키라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모스크바에 부임한 장팅푸는 소련 외교부 차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장징궈의 문제를 거론했다. 외교부 차장은 “장 위원장의 아들이 소련에 있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며 능청을 떨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정중하게 난색을 표했다.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수락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1937년 3월 23일 늦은 밤, 남루한 노동자 복장을 한 중국인이 중국대사관을 찾아왔다. 이름과 용건을 물어도 대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다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관원들과 한담을 나누던 장팅푸는 보고를 받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정문 쪽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귀국을 권고받은 장징궈는 부친의 심중을 헤아릴 필요가 있었다. 장팅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가 나의 귀국을 희망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장팅푸의 입에서 “위원장은 귀국을 갈망한다. 내가 확신한다”는 말이 나오자 장징궈는 “여권과 귀국할 차비가 없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아들이 하나 있다. 귀국할 때 입을 옷도 변변한 게 없다”며 고민을 털어 놨다. 장팅푸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모두 준비하겠다. 위원장은 며느리의 국적 따위를 따질 분이 아니다. 손자를 보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장징궈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대사관을 떠났다. 장팅푸는 대사관에 머물라며 붙잡고 싶었지만 말을 해도 들을 사람 같지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자살이라도 할 각오를 했다.
장팅푸의 급전을 받은 장제스는 “제 발로 대사관을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한 달 후면 상하이에 도착한다니 마음이 놓인다.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다”는 일기를 남겼다.
3월 25일 장징궈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다. 모처럼 일기를 썼다. “15세의 치기(稚氣) 어린 소년에서 27세의 청년이 되기까지 학교와 군대, 공장, 농촌을 오가며 온갖 애정과 증오를 경험하고 체험했다. 멀리 보이는 크렘린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다. 오후 2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추억의 모스크바를 떠났다.”
장징궈의 귀국이 확실해지자 장제스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식의 교육에 신중하지 못해 내 스스로 가풍을 무너뜨렸다. 비통하고 슬프다”고 일기에 적었다. 장징궈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상하이가 보이자 배에서 내리는 즉시 감옥으로 끌려갈까 봐 겁이 났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아버지에게 퍼부었던 말들은 되씹어 보니 내가 아버지라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이왕 하던 고생, 그냥 소련에 눌러 있을 걸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제스는 장징궈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동안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련에서 자신에게 퍼부어 댄 말들을 생각하면 그 입에서 또 무슨 엉뚱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했다. 좌파 인사들과 접촉을 금지시키고 관찰에 관찰을 거듭하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일기에는 참을 ‘忍’(인)자만 계속 써댔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장징궈는 국민당 조직부장 천리푸(陳立夫)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천은 “너는 아직 공산당원이다. 네가 아버지에게 한 일을 생각해 봐라. 좋은 방법이 있다. 이제는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편지를 아버지 앞으로 써라. 내가 전달하겠다.” 장징궈는 “부자간에 무슨 수속이 이렇게 복잡하냐”며 호통을 쳤다.
장제스는 국민당 원로 우쯔후이(吳稚暉)와 심복 천푸레이(陳布雷) 등으로부터 “천륜의 즐거움을 거역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하며 장징궈를 만났다. 12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장징궈는 무릎을 꿇은 채 세 번 절했다. 장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법도였다. 쑹메이링에게도 같은 예를 취하며 “어머니”라고 불렀다.
부자간의 첫 대화는 간단했다.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 “정치나 공업 중에서 하나를 택하겠습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고향에 가라. 네 엄마를 잘 모셔라.”
장징궈는 고향으로 떠나는 날 쑹메이링을 찾아가 다시 절을 했다. 만족한 쑹은 형부에게 꿔온 거금 10만원을 절값으로 건넸다. 장제스는 그제야 안도했다. (계속) <190>장제스, 귀국한 아들 몸에서 ‘붉은 물 빼기’ 작전 |제191호| 2010년 11월 7일
◀1945년 8월 말 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앞줄 가운데)와 마오쩌둥(앞줄 오른쪽) 사이에 열렸던 국공담판에 아버지와 함께 참가한 장징궈(뒷줄 왼쪽). 앞줄 왼쪽은 회담을 주선한 미국 헐리 특사. 뒷줄 가운데는 후일 장징궈의 정적이 된 우궈정. 김명호 제공
장징궈(蔣經國)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스물일곱 번째 생일날 고향으로 내려갔다. 소련 시절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나 변명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제스도 시시콜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생모 마오푸메이(毛福梅)는 법적으로 이혼한 상태였지만 저장(浙江) 지역의 관습대로 장제스의 본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당에서 족보를 뒤져 본 장징궈는 모친이 할머니의 수양딸로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 꾀는 당할 사람이 없다”며 빙긋이 웃었다.
장제스는 곤경에 처하거나 정치적인 결단을 내려야할 때마다 고향의 선영을 찾는 습관이 있었다. 정국이 요동치던 시대이다 보니 결단을 내려야할 일이 워낙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오푸메이는 자리를 피해 줬지만 해만 지면 먹을 것을 해 들고 찾아와 “도대체 아들을 어떻게 했느냐? 죽었는지 살았는지 솔직히 말해라. 소식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들들 볶아댔다.
쑹메이링이 옆에 있건 말건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한번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가 “우리 아들은 없는 말을 만들어 하는 애가 아니다. 부모 잘못 둔 탓에 흉악한 것들에게 얻어맞고, 굶다가 얼어 죽었을지 모른다”며 통곡을 하는 바람에 진땀을 흘린 적도 있었다. 오죽 시달렸으면 “발소리만 들려도 속이 철렁하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다”는 일기를 남길 정도였다. 제갈량을 뺨치고도 남을 당대의 재사(才士)들이 주위에 우글거렸지만 이 일만은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다들 모른 체할 뿐 입도 벙긋 안 했다.
마오푸메이는 아들이 “아버지가 엄마 주라고 준 돈”이라며 쑹메이링에게 절값으로 받은 10만원을 건네주자 마을 주민 500여 명을 초청해 6일간 잔치를 베풀고 결혼식을 중국식으로 다시 올려 줬다. 장제스가 지어 준 소련 며느리의 중국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작명가를 불렀다.
장씨 부자의 고향 시커우는 수세기 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던 농촌이었다. 장징궈는 마을의 자그마한 서구식 건물 서재에 틀어박혔다. 장제스는 비명에 세상을 떠난 북양정부 참모총장 쉬수정(徐樹錚)의 아들 쉬다오린(徐道隣)을 교사로 내려보냈다. 행정원 부비서장이었던 쉬다오린은 이탈리아인 부인과 함께 장징궈의 거처에 머무르며 장제스가 선정한 중국 고전들을 지도했다. 마오푸메이도 마을 학교 국어선생에게 며느리와 손자의 중국어 교육을 맡겼다.
◀모친상 때 상복 입은 장징궈(1939년 시커우)
당시 마을 뒷산에는 시안사변의 주역 장쉐량(張學良)이 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징궈는 틈만 나면 장쉐량을 찾아갔다. 장제스는 두 애물단지들이 자주 만나는 것도 모른 체했다. 대신 수시로 사람을 보내 아들이 무슨 책을 보는지 철저히 살피게 하고 편지를 자주 보냈다. “고문은 많이 읽을수록 좋다. 읽고 또 읽어라. 적어도 한 편을 100번 정도는 읽어야 한다. 네 글씨가 반듯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어제 상하이에서 돌아왔다”는 등 간단한 내용들이었지만 아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철저히 결별시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장제스는 아들의 몸에서 붉은 물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자 쉬다오린에게 몇 자 적어 보냈다. 장징궈는 “12년 만에 나타난 자식이 그간 뭘 하고 지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부모는 세상천지에 없다”는 쉬다오린의 설득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소련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들의 소련 시절 보고서를 꼼꼼히 읽은 장제스는 그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써 놓았던 자신의 일기를 장징궈에게 보냈다.
항일 전쟁이 폭발했다. 장징궈는 가장 열악한 지역으로 보내 줄 것을 아버지에게 요구했다. 그날 밤 장제스는 철혈(鐵血)정치가 장징궈의 탄생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일기에 “이 애는 가르칠 만하다”고 적었다.
1년 후 마오푸메이가 일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장제스는 이틀간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장징궈는 시신이 발견된 자리에 “피로써 피를 씻겠다(以血洗血)”는 목조 비문을 세워 모두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88년 1월 말 타이베이 충렬사(忠烈祠)에서 총통 장징궈의 영결식이 열렸다. 시인 마허링(馬鶴齡, 현 총통 마잉지우의 부친)이 제문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엄부의 혹독한 교육을 받았고, 청년 시절 시베리아의 빙설도 그의 웃음을 앗아 가지 못했다. 구국전쟁과 타이완 건설에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던 사람. 이제야 휴식을 얻었다.” |
첫댓글 장제스의 고향은 샤오싱에서 한시간 정도 가면있는데,경치가 무릉도원을 연상케하는 절경을 자랑하는 고장이었다,소금장수아들이라고 대부호의후손을 칭하는 이유가 저변에있겠지만 전국의 소금을 장악한 중국 4대 갑부의후손이라는걸 장제스의본가에서,그리고 장세량을 감금해뒀던 딋산 사당에서 느낄수있었지요.봄에 복사꽃또한 별천지더군요.
복사꽃이 그렇게나 아름답게~ㅎ
옛적엔 소금장수덜이 한몫했더군!
장제스와 장징궈의 부자관계는 凡人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네. 장징궈는 애비의 음덕으로 총통 자리에 오른 인물로만 알고 있었는데 깡다구와 기개는 알아줄 만하군.
게메...
나도 아방 잘 만난 총통해신 줄만 알았주....
그 아방에 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