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스키의 본고장 알프스 대설원을 가다 글 | 정계조 사진 | 대한산악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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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14m의 피날봉에서 활강하는 산악스키 연수대원들. 뒤편으론 만년설의 설산이 펼쳐졌다. |
대한산악연맹은 산악스키 활성화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2002년 11월 17일부터 12월 2일까지 15박 16일의 일정으로 이탈리아 북부 볼자노 인근의 쿠르츠라스(Kurzras·3300m)지역과 쏠다(Solda·3250m)지역, 오스트리아의 스투바이(Stubaier·3340m)지역에서 산악스키 연수를 실시했다.
장봉완, 필자, 이의재, 이상록, 장금덕씨를 비롯한 5명의 연수팀은 11월 17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로마를 거쳐 18일 새벽 2시, 이탈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베우타노(Veutano)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엔 ‘꿈속의 알프스’의 저자인 임덕용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말총머리의 인상적인 헤어스타일과 유창한 이탈리아어가 그 동안의 이탈리아 생활을 보여준다. 3시간 동안 자가용을 타고 도착한 숙소는 알프스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컬트 하우스라는 작은 마을의 호텔이었다.
2층으로 된 콘도형 호텔인 숙소는 마음대로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다. 1층은 거실 겸 주방이며 2층에는 침실 2개와 욕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과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제공해 주었다.
18일 아침, 시차적응의 여유도 없이 스키 장비를 구입하러 볼자노(Bolzano)로 나갔다.
서울을 출발하던 날엔 첫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는데 월요일 아침인 이탈리아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임덕용씨가 확보해 놓은 하겐(Hagan) 산악스키 세트와 스카르파(Scarpa)신발을 구입했다.
화요일인 다음날은 온종일 흐렸다. 숙소를 출발해 커다란 저수지를 지나 도착한 리조트엔 많은 스키어들이 케이블카를 기다리고 있다. 50명이 탑승할 수 있는 케이블카는 주차장과 리조트 숙소가 있는 곳에서 3200m 고원 위까지 올려준 후 4인승 리프트를 연결해 슬로프까지 이어진다.
대설원 중간엔 2개의 T바가 운행되고 있었다. 길이는 3Km 정도였으나 프랑스의 한 스키장엔 무려 12Km나 되는 T바가 있다고 한다.
앞을 못 볼 정도로 흐리고 눈이 내렸지만 이곳의 스키어들은 익숙한 솜씨로 잘도 내려간다. 연수단의 대원들도 한두 번 반복해 타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슬로프를 구별하고 드넓은 슬로프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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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날봉에서 대설원지대를 활강한 후 활강자국을 보며 유한규씨가 자세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
개념을 바꿔야하는 카빙스키 기술
대원들끼리 서로를 격려하며 구간구간 나누어 조심스럽게 몸을 풀었다. 슬로프를 알리는 경계 말뚝엔 화살표로 방향을 지시해 놓았고 그 표시판 이외의 지역은 다져지지 않은 눈이었다. 푹푹 빠지는 눈에 들어서면 좌우의 리듬을 잃고 눈에 빠져 버린다. 슬로프가 아닌 곳에 나 있는 스키와 보드 자국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희망을 가져본다.
20일, 쾌청한 날이라 시야가 확 트이니 저절로 스키가 잘되는 듯하다. 카빙 스키의 스피드를 마음껏 활용하며 회전을 즐겨본다. 우리를 감싸듯 펼쳐져 있는 알프스의 연봉들은 정말 장관을 이룬다. 어쩌면 그 포근한 만년설이 주는 혜택을 우린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설원의 스키장엔 푸른색 유니폼을 차려입은 한 무리가 나타났다. 이들은 알파인보드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우리가 타던 슬로프에서 알파인 보드의 박진감을 보여준다. 저들의 놀라운 리듬을 읽을 수 있어야 신설에서 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푸른 하늘에 스프링처럼 튀는 푸른 유니폼의 젊은이들이 부럽다.
목요일엔 가스가 낀 날씨가 이어졌다. 우린 임덕용씨의 안내로 인근의 또 다른 스키장인 쏠다로 향했다. 숙소에서 1시간 20분 거리인 이곳은 12개의 스키장을 연계해서 하나의 시즌권으로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쿠르츠라스 리조트의 리프트권은 26유로인데 반해 이곳 쏠다 리조트의 리프트권은 18유로였다.
리프트 가격이 말해주듯 이곳의 스키장은 조금 작다. 이곳 역시 주차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스키장으로 올라간다. 눈이 오고 안개가 낀 상태라 2단계까지만 리프트가 운행했다. 맑은 날이라면 능선 위까지 설치된 리프트가 운행하겠지만 시야가 가려 중단까지만 이어진다.
회사일로 인해 오늘 새벽에 도착한 유한규씨는 시차적응의 시간도 갖지 못하고 우리의 스키 강습에 들어갔다. 눈보라 속에서 그는 그간 스키대회와 국제행사에 참가하며 익힌 카빙스키 기술을 초보에서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업(up), 다운(down)의 개념을 카빙스키에선 다운, 업의 개념으로 바꾸어 생각해야 하며 카빙이 되어 돌아갈 때 다리를 뻗어 주어 무릎과 무릎 사이에 주먹 2개가 들어가는 상태에서 회전이 되는 연습을 실시했다. 또 다음 회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오르막쪽 다리에 체중을 이동시켜 카빙을 유도하는 자세 등 기존의 스키 기술에 카빙의 새 기술을 받아들였다. 유한규씨는 핵심적인 부분을 짚어 주며 슬로프를 내려왔다.
스키장의 중간지점에 지어진 통나무집 레스토랑은 아늑하며 정겨웠고 점심시간에 몰려든 학생들은 동양인을 훔쳐보며 신비해한다.
다음날도 우린 쿠르츠라스 스키장의 신설 속에서 활강훈련을 실시했다. 안개 속을 헤치고 내려오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시각장애인이 된 듯했다.
주말인 토요일엔 이탈리아 산악 가이드가 참가했다. 하늘색 재킷과 배낭을 메고 나타난 허버트(Hubert)는 멋진 산악스키 가이드였다.
우린 쿠르츠라스의 3200m지점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후 T바 슬로프를 건너 자연설 지대로 들어섰다. 이어 스키를 벗어들고 장갑으로 스키 바닥의 얼음 알갱이들을 쓸어내린 후 스키 실을 붙였다. 11자 자세로 걸으며 대설원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며 맑은 날의 알프스의 영봉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오른 정상에서 내려다본 능선의 안부엔 만년설의 미라 오티(orti)가 발견된 것을 추모하는 돌탑이 빛나고 있었다.
그 옛날 자신이 만든 옷과 신발, 갈고리를 이용해 이곳까지 오른 그는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이제 진정한 산악스키 연수를 위한 다운을 시작했다. 급경사 지대를 오른 후 설원지대를 대회전으로 S자를 그리며 내려오는 즐거움은 알프스 스키 등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다음날은 오스트리아의 스투바이로 이동했다. 임덕용씨는 내일부터 일주일간 눈이 올 것이라며 맑은 날이 지속되는 동안 좀더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볼자노에 들러 임덕용씨 집에 여분의 장비를 맡겨두고 길을 재촉했다. 케이블카 탑승장엔 눈이 많이 내려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우린 곤돌라를 타고 스키장 내에 자리 잡은 산장으로 이동했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능선을 넘어 자연에서 활강을 마치고 돌아왔다.
첫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눈에 우린 산장을 출발하면서 실을 붙이고 설사면을 올라야 했다.
목표지점인 당코겔(Dankogel·3300m)의 안부까지 올라 능선 상에서 간식으로 주린 배를 채운 후 실을 떼어 배낭에 넣고 급경사면을 지그재그로 활강했다. 워낙 경사가 심해 체중을 중간에 실지 못하고 뒤쪽에 두다 보니 회전이 더욱 어렵다. 결국 대설원지에 이르러서야 쿠션과 리듬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산장의 차장 밖으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장비를 챙겨 곤돌라를 이용해 3000m지점까지 올랐다. 눈이 내리는 설원에서 우린 기존 슬로프를 벗어나 자연설 경험을 계속해 나갔다. 가이드인 허버트는 급경사면에서 점프턴을 연습시켰다. 서투른 자세지만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조금씩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프턴을 하던 장금덕 대원의 스키가 눈에 박히면서 무릎 부상을 입고 말았다.
스투바이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 X-Ray 촬영결과 십자인대가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결국 보호대를 하고 한 달간 요양을 해야 한다고 진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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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스투바이 리조트에 자리 잡은 산장. 연수팀은 이곳에서 5일간 묵으며 스키연수를 받았다. |
알프스 산악가이드의 필수품 ‘비브’
며칠 남지 않은 일정에 쫓기며 우린 다음날도 새로운 활강지로 이동했다.
맑은 하늘을 벗삼아 도착한 곳은 3406m의 슈거 피크(Suger Pick)를 등반했다. 곤돌라를 이용해 능선 위까지 올라선 후 능선너머 골짜기로 난 대설원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섰다.
아침 10시, 스키를 벗어 실을 붙이고 우리가 내려온 꿀르와르 반대편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바인딩 뒤축을 한 단 높이고 지그재그로 1시간 반을 오르니 능선 위에 오를 수 있었다. 능선 너머로 펼쳐진 넓은 설원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슈거 피크의 그림자가 설원에 드리워져 있었다. 눈으로 덮인 능선의 부드러움이 돋보인다.
슈거 피크의 정상 밑은 돌출 된 바위지대의 급경사라 바위 밑에 스키를 벗어 눈에 꽂아두고 킥스텝으로 오른다. 확보줄에 안전벨트를 걸었다. 정상에는 십자가가 세워져있고 눈꽃이 만발해 장관을 연출했다. 지중해에서 피어오른 구름이 알프스의 산자락을 넘지 못해 모여 있는 듯 이태리 쪽의 계곡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다만 오스트리아 계곡은 맑아 깊은 은은함이 묻혀 있는 푸르름을 느낄 수 있었다.
정상의 파노라마는 장쾌했다. 이제 11월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오전은 지난 이틀 동안 맑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함박눈이 내렸다.
곤돌라를 이용해 신설이 쌓인 곳까지 하산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다. 허버트의 마지막 강의는 눈사태에 속에 매몰된 동료를 찾는 것이다.
허버트가 강습기간 내내 가슴에 차고 다니던 ‘비브’라는 장비는 소리의 강약을 구별해 방향을 잡게 해주는 기구이다. 이 비브는 알프스 산악가이드가 꼭 챙겨야하는 필수품이다.
오전의 스키 강습을 모두 마치고 하산을 시작했다. 우린 모두 이탈리아 볼자노로 돌아왔고 성탄절 준비에 여념이 없는 볼자노의 밤거리를 걸었다. 지난 며칠 대설원에서 보낸 우리의 일정은 꿈속에서 찾은 알프스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