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2:1-14)
지금 유다 백성들은
지독한 우상 숭배와 반역으로
스스로 징계와 고난의 시간을 자초한 상태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있고(약 2/3),
유다에 남은 사람도 있다(약 1/3).
민족은 비참하게 찢겨져 버렸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유다에 남은 사람들조차
제대로 깨어 있지 못해
자기 욕망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살인과 도주와 불신의 혼란을 반복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고통이 극한에 이르니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다.
그동안 경멸하고 외면하던 예레미야를 찾아와
살려달라, 인도해달라 간청한다.(2~3절)
그리고 그럴듯한 고백까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를 치소서.” (5~6절)
고난과 징계를 겪어야
비로소 겸손의 말과 신앙의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그들의 고백은 겉모습일 뿐
속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애굽이 더 안전하다’는
자신들의 판단과 욕망을 굽히지 않는다.
마치 방향키는 그대로 둔 채
말만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바꾸는 셈이다.
내일 본문에서 그 속내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애굽에서 멸망한다.
이 지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오늘 본문의 유다 백성들은
겉만 보면 이미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다.
말도 정확하고, 태도도 온유하고, 표현도 거룩하다.
그러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마음(=인격)이 변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마음이 바뀌지 않더라도
놀랍게도 99%의 싱크로율로
마치 변화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경건한 말투, 낮은 자세, 온유한 목소리,
심지어 “우리를 치소서”라는 문장까지도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지 않은
모든 행동은 결국
‘시늉’이고 ‘처세’일 뿐이다.
그 시늉은 언젠가 드러나고,
그 처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진짜 변화는 언제 일어나는가?
마음의 방향이 바뀔 때,
즉 인격 전체가 “변화를 선택”할 때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감동’과 ‘설득’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또한 본질적으로
‘감동’과 ‘설득’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선택을 돕는 사람이지,
선택을 대신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늘 유다 백성들이 겪어온
고난과 징계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긴 설득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변화된 척했을 뿐,
실제로는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초대를
스스로 밀어내고 만다.
애굽에서의 멸망은
하나님이 복수하신 사건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이 끝내 데려가는 자리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주는 거울 같다.
‘나는 지금 변화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화된 것처럼 보이는 길을 택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