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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동지>(17회) 스승의 시선 수련에 다시 몰입하게 된 후 어느 날, 제자들을 지도하던 중에 동지는 문득 등 뒤에서 지켜보는 따뜻한 시선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저절로 그 시선의 주인이 이십 년 전에 죽은 스승님이란 걸 알았다. 마흔여덟의 스승은 촛불이 몸을 태워 불을 밝히듯 당신의 생명력을 연소하여 어린 제자의 소주천(小周天-선도 수련의 한 과정으로서 단전에서 생성된 양기를 독맥을 통해 등으로 돌려 정수리의 이환으로 끌어올리고 그것을 다시 임맥을 통해 이마에서 단전으로 내려보내는 기의 순환을 말한다.)을 뚫어준 뒤에 유명을 달리했다. 동지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지금의 동해와 같은 나이였다. 스승의 시선은 동지가 제자를 가르칠 때나 천단호흡 을 수련 중에 등 뒤에서 느껴졌다. 동지는 자신이 몰랐을 뿐 스승은 열한 살의 제자가 서른넷이 될 때까지 그렇게 지켜보았으리라 생각했다. -134- |
동지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일 년 넘게 스승이 수련에 소홀하던 동안에도 수련실을 떠나지 않았던 제자들은 더욱 수련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현서는 오후 수련을 마친 뒤에도 수련실에 남아 혼자 수련한 후 스승과 동해만이 함께 하던 저녁의 천단호흡 수련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용학은 하루의 전 시간을 수련에 투입하기를 원치 않았다. 현서가 저녁 수련에 동참하고부터 혼자 귀가하는 용학은 그런 현서의 변화가 탐탁하지 않았다. 타인이 보기에 수련의 겉모습은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내면의 모습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제자의 수련은 권(拳)에 머물렀고, 스승의 수련은 무(舞)에 속했다. 권이란 강과 유의 배합으로 무극권의 본을 수련함으로써 육신의 기량을 연마하는 것임에 비해 무란 삼성(三成)에 이른 권의 성취를 무의 기로 승화하는 도의 영역이었다. 수련의 과정은 스승이 먼저 제자들의 본을 점검하고 개별지도를 한 후에, 사제가 전 과정을 함께 시전함으로써 한 번의 수련이 마무리된다. 사제가 함께 권과 무를 시전할 때면 수련실의 공기는 극도의 긴장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한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이어지지만 때때로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본의 동작은, 깃털 하나만으로도 깨어지고 말 극정(極靜)의 움직임으로, 마치 사람 형상의 그림자가 중력의 힘을 거슬러 반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35 |
수련을 다시 시작한 일 년쯤 후부터 동지는 석 달마다 제자들의 수련 성과를 점검했다. 수련 성과를 점검하는 방법은 작은 과녁에 핀을 날려 꽂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수련실 한쪽 벽에 붙은 과녁을 향해 반대편 벽 앞에 나란히 선다. 과녁은 1cm 두께의 나무판을 가로세로 30cm 크기로 자르고, 그 한가운데에 지름 0.5cm의 동그란 흑색점을 그렸다. 핀은 가느다란 철사를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잘라 만들었는데, 보통의 다트 핀과는 달리 날개가 없는 단순한 핀이었다. 과녁판까지의 거리는 10m쯤 되었다. 그 거리에서 지름 0.5cm의 과녁은 보통의 시력을 가지 사람이 식별하기조차 어렵다. 거기에다, 짧은 핀은 양모처럼 가늘어서 강한 완력을 지닌 사람도 과녁판까지 던져 보내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그것을 과녁판에 꽂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지는 제자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과녁에 정확히 핀을 꽂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마음으로 과녁을 확대해서 보라 하였고, 손끝에 기를 모아 튕기듯이 밀어내라고 말했다.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인 동해가 먼저 투척 선에 섰다. 과녁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가 팔을 뒤로 빼서 힘껏 앞으로 내뻗었다. 핀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과녁판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를 남기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서의 핀 역시 동해의 것과 비슷했다. 용학의 핀은 과녁판을 맞추지 못한 채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동지가 핀을 들고 투척 선에 섰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호흡 -136- |
을 다듬는 것과 동시에 뒤로 뺀 손목을 앞으로 쓱 내밀었다. 내민 손가락 끝에서, 철사의 굵기만큼 가늘고 예리한, ‘삥~’ 하는 파공음이 빠져나갔다. 네 사람은 과녁판 앞으로 다가갔다. 스승의 핀은 정확히 검은 점의 중앙에 꽂혀 있었다. 제자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에 동지는 과녁판을 뒤집어서 뒷면을 살펴보았다. 과녁판의 뒷면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핀은 과녁판을 관통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 선 것이다. 동지가 원하는 결과는 핀이 과녁 한가운데를 뚫은 뒤 벽에 자국을 남기는 것이었다. 동지가 다시 수련에 몰입한 이후의 2년은 시간이 극도로 축약되어 흘렀다. 시간은 어떤 망설임이나 곁눈질도 없이 무념무상의 마음으로 내리그은 선처럼 지나갔다. 수련 외의 행위는 오직 재희의 요양병원을 찾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행위마저도 수련의 일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동지의 일상은 물오른 선승의 화두 삼매의 경지를 닮아있었다. 2011년의 마지막 날에 동지는 음성을 찾아가 부모님과 하룻밤을 보냈다. 재희가 다친 후 3년 반만이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안고 있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흐르는 눈물로 대신한 듯 별다른 말이 없이, 아들이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호박 인절미와 녹두 부꾸미를 빚었다. -137- |
밤에 동지는 수련장으로 나가 스승의 묘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묘지 주변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발자국 하나 없는 숫눈 그대로 쌓여있었다. 섣달 초이레 상현달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고 수련장을 둘러싼 키 높은 적송들이 흰 눈 위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동지는 2011년의 끝날을 부모님, 스승님과 함께했다. -138 |
4 년 후의 그날 (2012년 5월 31일, 동지의 방) 동지는 방문을 열고 나가는 재희를 지켜보았다. 또 다른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재희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동지는 황급히 재희를 뒤따라 나갔다. 그녀는 ‘일묵서예의 현관문을 나가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동지는 지금의 상황이 뭐가 뭔지 혼란스럽지만, 무엇보다 재희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는 인사동길 양쪽에 늘어선 초롱 모양의 가로등 높이쯤에 떠서 재희를 따라갔다. 재희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었다. 재희는 연녹색의 얇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은회색 가방을 어깨에 멨다. 사 년 전 그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쇠사슬 모양의 은색 가방끈이 불빛 속에서 그늘에 가렸다가 보이기를 반복할 때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처럼 반짝거렸다. -139- |
오월인데도 비가 내리려는지 공기가 무겁고 후끈한 열기를 품었다. 늦은 저녁임에도 인사동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재희는 북인사마당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집으로 가려면 오른쪽 백 미트쯤의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야 한다. 왜지? 어디를 가려고? 시간은 조금 전 방에서 나올 때 10시 30분을 조금 지났으니까 지금은 10시 40분쯤일 것이다. 가로등 불빛에 작은 빗방울이 반짝거리며 떨어졌다. 가느다란 실비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길바닥에 깐 마천석이 어느새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우정국로를 건너는 첫 번째 건널목이 가까웠을 때 동지는 재희 앞에 내려섰다. 어딜 가느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재희야!” 그는 재희가 놀라지 않게 작은 소리로 불렀다. 재희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갔다. 마치 사막 한복판을 혼자 가는 사람처럼 걸었다. 재희와 마주 지나치는 사람이나 그녀를 추월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몸을 비틀며 지나갔다. 동지는 다시 재희의 앞을 막아서며 이름을 부르려다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다. 그 순간 불현듯 동지는 재희가 지금 가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안돼!’하고 소리쳤다. 재희는 동지의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람들에 섞여 건널목 중간쯤을 지나가고 있었다. -140- |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동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잠시, 짧은 시간(아마 이삼 초 동안) 묘한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경복궁의 담장과 화강석 구조물과 주변의 건물들과 은행나무 가로수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물속의 수초가 일렁이듯이 잠시 흔들리다가 애니메이션의 ‘흩어뿌리기’처럼 잘게 부서졌고, 부서진 파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구멍 속으로 휘말리듯 빨려 들어갔다. 세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모든 존재가 사라진 순간과 거의 동시에 동지는 등 뒤로부터 낚아채듯 한 강력한 힘을 감지하며 눈을 번쩍 떴다. ‘이런····, 내가 꿈을 꾸다니!’ 낮게 중얼거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명상 수련을 마칠 때와는 다르게 야릇한 한기가 몸을 조여왔다. 신체의 기능이 정지 상태로 들어간 것처럼 정상 체온보다 훨씬 몸이 식어있다는 걸 느꼈다. 벽시계를 보니 밤 10시 40분, 혼자 호흡 수련에 든 지 한 시간쯤 지난 시간이었다. 동지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명상 수행 중에 졸았던 적이 있었던가를 곰곰이 되짚어보았으나 그런 기억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물며 명상 수행 중에 잠이 들어 꿈까지 꾸었다고는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전 그가 겪었던 일은 꿈이라기에는 그 상황의 흐름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분명 꿈일 수밖에 없음에도, 꿈이 아닐지도 모 -141- |
른다는 강한 의구심이 드는 이유였다. 하지만 꿈이 아니고는 그 현상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 재희가 두 다리로 서서 걷는 모습을 다시 보다니····· 감동과 흥분이 너울 파도처럼 동지의 온몸을 휘감았다. 당장은 그것이 꿈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재희야!’ 동지는 눈을 도로 감으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큰 소리로 부르면 조금 전에 보았던 것들,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그것들이 기억의 방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꿈속 같았던 미완성의 단막극은 재희가 거실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을 시작으로 해서 세상이 모두 자잘하게 부서져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사 년 전 그날, 방문을 열고 나가는 재희의 뒷모습은 동지의 뇌리에 몸서리치도록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 동지는 재희를 잡고 싶은 자신을 붙들어두기 위해 두 손을 모아 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결코 문밖으로 그녀를 따라 나가지 않았다. 다만 재희가 떠나고 나서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혼자 광화문광장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오긴 했었다. 조금 전 대략 십 분 동안 보았던 장면들은 분명 재희 혼자만이 경험한 시공간이었다. 그런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동지는 사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개입하지 않았던 시공간을 꿈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르게 잠깐 엿본 것이다. -142- |
(그날 밤, 요양병원) 눈꺼풀이 무겁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너무 깊은 잠에 빠졌나 보다. 아니, 잠에 빠졌다기보다는 독한 약에 취한 것 같다. 그런데 정신은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몸이 깨어나지 않는다. 아니다, 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몸이 없다. 몸의 어디가 찌뿌둥하다든지 잠옷이 당겨져서 등을 쪼인다든지 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없다. 기지개도 켜지지 않는다. 잠든 사이에 지구의 내핵 깊숙이 잠겼다가 몸뚱이는 놔두고 정신만 빠져나온 건가? 무슨 잠을 이렇게 잤는지 모르겠다. 근데 천장이 내 방과 다르다. 온통 흰색뿐이다. 어, 저건 뭐야? 저건 바이털 사인 모니터인데···· 이런, 여긴 병원이잖아! 어머나! 내가····, 내 몸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 그리고 바이털 사인 모니터가 내 손목에 연결돼 있고, 뭔지 모를 튜브들이 팔을 감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크게 다쳤거나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온 건가? 도무지 모르겠다. 밤인가 보다. 희미한 실내등이 켜져 있고, 창문 밖은 어둡다. 하 -143- |
늘에 달은 보이지 않는데 어느 구석에 달이 떠 있는지 달빛을 머금은 하늘색이다. 층고가 높지 않은가 보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의 가지 사이로 건물들이 보인다. 건물들은 밤이 늦었는지 어두운 형체만 서 있고 불이 켜진 창은 드문드문 몇 개가 보인다. 내 몸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고····· 근데 너무 말랐네. 오늘이 며칠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오, 누군가 방으로 들어온다. 흰 가운을 입었으니 간호사겠다. 오십 대로 보이는 약간 살짐이 있는 여자다. 그녀가 모니터와 손목에 연결된 튜브를 확인한 뒤 내 등 밑으로 두 손을 넣어 누운 자세를 바꿔준다. 동작이 마치 숙련된 바리스타가 커피를 따를 때처럼 능숙하다. 그녀는 곁에서 지켜보는 내가 보이지 않는가 보다. 눈 한번 돌리지 않고 자기 일만 한다. 간호사가 나의 누운 자세를 바꿔줄 때 나는 그녀의 손을 느끼지 못하겠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의 손이 닿는 건 알겠다. 다만 그녀의 손이 너무나도 멀다.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면 그런 느낌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치과에서 잇몸에 마취 주사를 맞은 뒤에 혀로 잇몸을 만질 때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간호사가 병실을 나간다. 그녀를 따라가 봐야겠다. 좁은 복도를 이십 미터쯤 지났다. 이곳은 야간 당직 간호사실인가 보다. 초짜로 보이는 젊은 간호사가 하나 더 있다. 출입문이 없는 개방된 공간에 책상 둘이 놓였고 기역 자 파티션으로 경계를 지어서 개인 공간을 -144- |
만들었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테이블 위에 뾰족하게 위로 솟은 선인장 화분과 노란 프리지어꽃 화분이 나란히 놓였다. 간호사가 책상 앞에 앉아 PC의 엔터를 두드려 화면을 연다. 그녀가 자판으로 뭔가를 기록한다. PC 화면을 보니 근무일지 같은 걸 기록하나 보다. 칸이 쳐진 양식이 보이고, 상단에 연도와 날짜가 있다. 2012년 5월 31일이다. 2012년이면 사 년 후의 미래다. 뭔가 착오가 있나 보다. 당직 간호사실에서 돌아와 보니 조금 전에 본 그대로 나는 침대에 누워있고, 크게 다친 사람 같지 않게 얼굴이 편안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의식도 없어 보이는데, 호흡은 스스로 하고 있다. 근데 살이 너무 빠졌다. 저만큼 형편없는 얼굴로 변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잘 모르겠다. 엄마가 안 보이는 게 이상하다. 엄마는 어디 계실까? 다치고 금방이라면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있어야 맞다. 그렇다면 나의 상태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웬만큼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늘 곁에 대기할 이유가 없어진 거다. 주위가 무서울 만큼 조용하다. 새벽인가 보다. 아, 졸음이 밀려온다. 근데 오빠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는 건가?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오빠의 마음이 변한 걸까? 그런데 그날 오빠는 왜 광화문광 -145- |
장으로 쫓아와 나를 찾았을까?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으며 인사동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니 딴사람이 된 게 아니라 빗물을 훔쳐내고 들여다본 오빠의 눈에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만이 삶과 죽음,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 어디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육신 속에 영혼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오빠를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으로 끌고 가 앉혀놓고 다시 세종대왕 동상으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 오빠는 그 자리에 없었다. 오빠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 불안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야. 하지만 오빠가 어떻게 잘못될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난 그렇게 믿는다. 만약 오빠가 아무 일 없이 인사동에 그대로 살고 있다면, 오빠는 나를 버린 걸까! 그 또한 막연하게나마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광화문광장으로 나를 뒤쫓아 올 이유가 없지 않겠나. 오빠는 나를 이 박사님에게 가라고 한 뒤에 혼자 괴로워하다가 급기야는 나를 찾아 뛰쳐나온 거야. 아차!···· 이상한 게 또 있었네! 오빠는 내가 안국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갔다고 생각했을 텐데 어쩐 일로 광화문광장으로 쫓아온 걸까?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일투성이잖아. 여기에는 분명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는 거야. 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어. 미스터리뿐이야. 확실한 것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 여기 누워있고, 아마도 다시 일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오빠 곁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함께 -146- |
걷는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된 건가? 그렇게 되고 만 건가? 엄마가 보고 싶다. 날이 새면 엄마가 오실까? 불쌍한 엄마, 이제 엄마에게 아무도 없다. 오래전 남동생을 사고로 잃었고,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아픔까지 겪으셨다. 아마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반 학생들은? 수업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재희는 뭔가 심각한 착오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영화나 TV 드라마에서처럼 우연한 기회에 타임머신을 타게 되었고, 그 결과 사 년 후로 이동하여 크게 다친 미래의 모습을 본 건가도 생각했다. 사 년 동안 병실에 누워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은 그 후 여러 가지 생각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난 뒤였다.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쪽보다 사 년 동안 병실에 누워있었다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일 테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사 년 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현실적인 판단과 뇌의 방향감각 인지 시스템이 거꾸로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 현상은 내선을 타원형으로 순환하는 2호선에서 자주 겪는데, 일단 그런 혼란에 빠지게 되면 열 -147- |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본 뒤에야 비로소 방향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재희는 그때보다 훨씬 더 완강하게 사 년의 가능성을 거부했다. (이튿날 오전, 요양병원) 동지는 이른 아침에 재희의 요양병원으로 달려갔다. 재희의 호흡은 고른 것 같았다. 얼굴에 살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데도 표정은 편안했다. 동지는, 누가 해주지 않으면 돌아눕지도 못하면서 어째서 얼굴은 날이 갈수록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트 속으로 손을 넣어 재희의 손을 잡아본다. 손목과 손가락에 살점이라고는 만져지지 않는다. 그는 재희의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고 사 년 동안 지속한 일과를 시작했다. -148- |
재희가 잠에서 깼다. (아, 오빠구나! 오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다른 무엇도 생각할 틈도 없이 반가운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 (내가 얼마 만에 오빠를 보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 년 만인지도 모른다. 근데 오빠가 눈을 감고 내게 뭔가를 하고 있네. 바로 짐작이 간다. 오빠가 다친 나를 위해 뭔가를 한다면 그건 기치료를 하는 것이다. 오빠가 힘이 드는구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어) 재희는 동지의 이마에서 땀을 훔치려 시도해 보지만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한 시간쯤 기치료를 마치고 동지는 재희의 온몸에 마사지를 시작했다. 발가락부터 조물조물 만져서 종아리 무릎, 허벅지와 골반까지 온몸의 경락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재희는 맞은 편에서 동지를 바라본다. (어, 오빠 어디를 만져? 저런 야단났네!) 재희는 동지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동지의 손은 전혀 방해받지 않고 움직인다. ‘재희야, 내가 어젯밤에 뭘 봤는지 알아?’ (뭘 봤어요?) ‘네가 걷는 걸 봤어.’ (가엾어라, 꿈을 꿨나 봐요? 난 여기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걸?) -149- |
‘너무나도 예뻐서 울뻔했었어.’ (왜, 갑자기? 그런 말은 이상해, 오빠!) ‘그런데 재희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난 말을 붙일 수조차 없었어.’ (어머, 왜 그랬을까? 꿈이니까 그랬을 거야. 다음에 또 꿈을 꾸면 꼭 안아줘요. 그리고 와서 자세하게 얘기도 해줘요.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머나! 오빠는 지금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생각하는 거잖아! 근데 내가 오빠의 생각을 읽고 있어. 다 알아듣고 있다니까?)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어떻게든 얘기를 해볼 거야.’ (오빠도 내 말을 알아들어요? ····아니지?)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왔다. (아! 엄마!) 엄마, 하고 불러보는 순간 주먹만 한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목울대를 콱 틀어막는다. 사정없이 눈물이 흐른다. 엄마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를 끌어안는다. “동지 왔구나.” 희경은 딸의 얼굴을 살펴보고 나서 동지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네, 어머니!” “어미보다 낫다!” -150- |
첫댓글 어느덧 챕터가 2부로 넘어가는군요. 여전히 수련과정이나 기치료를 이해할 수 없지만 조만만 안개가 걷히기를 고대하면서 인내와 동시에 흥미를 가지고 읽고 또 읽어봅니다. 동지의 끈질긴 노력으로 4년만에 재희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으니, 다음 회가 더욱 더 기다려집니다.
재희가 곧 깨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듯하군요. 몽유병 환자와도 같았던 재희의 방황과 사고, 서서히 그 미스테리가 밝혀지겠지요?
소설을 쓰려면 그리고자 히는 소재에 직간접 경험이 풍부해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보는데 해암은 동지가 하는 수련을 직접 배웠는지? 아니면 독서를 통해 터득했는지? 너무 직설적인 질문인가? ㅋㅋㅋ 너무 묘사를 잘 하셔서....
재희가 깨어나야 하는데 ㅡ깨어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