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를 만지며
화두라도 들면 고통이 좀 잊어질까 하고 앉아 있다가 이내 일어서고 만다.
이곳은 후박나무와 동백 숲 등 활엽수가 많아서인지 바람이 불면
저 멀리서 이쪽으로 그가 다가오는 것을 소리로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마치 소나기 떼가 멀리서 쏴아 하며 몰려오는 듯하다.
모처럼 바람이 문고리를 건드릴 정도로 시원하게 불기에,
문살 가까이 얼굴을 대고 무심결에
문 안쪽에 달려 있는 쇠로 된 동그란 문고리를 잡았다.
싸늘하게 와 닿는 쇠의 느낌. 순간 멈칫했다.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문고리를 잡아본 것이다.
출입을 못하니 문고리 잡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아! 내가 더 열심히 정진했더라면
꿈에도 그리던 '한소식' 하는 인연이 왔을지도 모르는데----.
문득 통도사 방장으로 계셨던 경봉 스님 일화가 떠올랐다.
큰스님이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큰스님을 모시는 시자가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가시면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후 열반에 드셨다.
이 기막힌 화두 한 자락을 남기신 선사의 모습은 부처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나는 삼경이 아니고 낮에 만져서 '한소식 '이 없었나?
큰스님의 속 깊은 화두를 어찌 알음알이로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가슴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감을 느꼈다.
더 열심히 정진하자. 암만 아파도 문고리 잡는 소식을 알 때까지.
하루 종일 머리에서 나오는 고름을 닦아내느라 정진은 아예 뒷전이다.
작년에 하도 심하게 항생제 부작용을 겪어놔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무문관 결제 ' 라는 이름 앞에서 왠지 주눅이 든다.
다른 선방 같으면 외출해서 치료도 받고,
심하면 입원까지도 가능할 텐데 여기서는 모든 게 통제된다.
그것 자체가 벌써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오후에 주지스님이 공양 문을 살짝
두드리기에 내다보니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보자고 한다.
이대로 놔두면 더 큰일 생기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난 버티는 데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지금 모든 업장이 녹아내린다 생각하고 오로지 정진으로 견뎌낼 생각이다.
음력 칠일이 되니 바닷물도 별로 변동이 없다.
아마 지금쯤이 보름기간 중에서 제일 움직임이 덜한가 보다.
오늘은 죽도도. 파릇한 간척지 논도. 후박나무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빨리 나아서 좌복에 앉아야 할 텐데' 하는 간절한 생각뿐이다.
다친 후 벌써 사흘째다.
이젠 좀 차도가 있어야 될 텐데 전혀 약을 못 쓰고 그냥 보고만 있으니 내심 답답하다.
또 하나의 향을 피우면서 제불보살님께 기원드린다.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한 줄기 향연을 보며 많은 중생들의 염원까지 같이 기원한다.
내 출가 서원인 몸 아픈 중생들을 위해 이 한 몸 할 수 있는 데까지 헌신할 수 있도록,
그 서원 결코 저버리지 않도록 또 기원한다.
오늘은 하루가 정말 길다.
저녁을 미역국에 몇 술 말아 먹고 오랜만에 양치를 하는데 입술에 뭐가 자꾸 걸린다.
수염이 길어서 그런가 하고 거울을 보니 윗입술이 허옇게 다 벗겨져 너덜너덜하다 .
참 여러 군데 고생한다.
혜안스님이 많이 늦는다. 늦어도 저녁예불 시간까지는 빈 그릇을 가지러 오는데
오늘은 사무장이 다시 가져가는 것을 보니 아마 목포까지 약 구하러 간 모양이다.
저녁 되니 손바닥, 발가락에까지 수포가 번졌다.
얼굴에도 하나씩 나기 시작하고-----.
다리 쪽은 며칠 피부 연고 발랐더니 조금 낫긴 하다.
서너 숟갈 먹은 저녁은 신경 때문인지 소화가 안 되고 더부룩하다.
문살로 들어오는 가느가란 바람 한 줄기가 그래도 위안이 된다.
밑이 아프니 앉는 것도 불편한데 억지로 좌복에 앉았다.
해제하면 곧바로 나에게 맞는 약부터 준비해서 상비약을 가지고 다녀야겠다.
혜안스님은 어디 가고 사무장이 소독약만 구해 들려 보내준다.
약은 역시 못 구했나 보다.
아, 걱정이다. 이것 갖곤 안 되는데-----.
우선 이것이라도 해보자 싶어 소독하고 가루약을 조금 발라봤다.
붕대을 두툼하게 포개 그 위에 덮어씌우고 끈을 길게 하여 목에 묶으니 참 가관이다.
열시가 넘었다. 오지 않을 잠을 청해보자.
6.17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