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힘겨워하고 있고, 특히나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다. 정부로서도 불경기를 이겨내려고 경제 성장 또는 경기 부양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대기업들에게 엄청난 보조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아파트나 자동차 같은 값비싼 재고품을 빨리 처리할 수 있도록 세금도 깎아주고 있다.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규제들을 철폐해주며, 더 나아가 노동자들을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기업 활동을 도와주면 빠른 시간 안에 경제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고, 경제가 성장하면 모두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모든 이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무턱대고 신뢰할 수는 없는데, 그 믿음이 현실이 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믿음의 뿌리는 이익추구와 효율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윤리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익을 산출하는 모든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기에 윤리적으로 옳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게 되면 사회 전체의 수익으로 귀결될 것이라 믿는다. 즉, 개인선의 총합은 결국 공동선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이런 믿음은 시장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개인이 개별적으로 능력껏 재화를 생산하면 그 생산된 재화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소비와 분배를 조정해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격을 결정해주고, 모든 이에게 재화를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믿음을 채워주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시장 그리고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한 시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벤처기업이 사라져가고 대형마트의 위세에 골목상권이 위축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도 아닐뿐더러, 막연한 믿음처럼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현실이 보여준다. 오히려 오늘날의 시장은 약육강식의 밀림처럼 변해간다. 그러니 각 개인이 각자 자기 능력껏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수익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그 개인의 이익추구로만 멈추거나 때로는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인선의 총합이 공동선이 된다는 시장의 원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간추린 사회교리 164항 참조). 오히려 가톨릭교회는 “시장의 힘으로 생긴 이익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신념을 명백히 거부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시장의 힘의 최종 결과를 철저히 검토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자연법, 사회정의, 인권, 공동선의 이름으로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시장의 힘이 공동선의 이름으로 적절히 규제될 때, 선진 사회에서 자원과 수요를 조화시키는 효과적인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잉글랜드 웨일즈 주교회의 「공동선」 77, 78항).”
경제가 성장하거나 또는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소득이 높아진다고 곧바로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우리나라 경제가 보여주듯, 오히려 양극화가 더욱 깊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은 국가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체가 소득 분배, 일자리 창출, 진보와 복지를 향한 새로운 계획(「복음의 기쁨」 204항 참조)을 세우고 모두가 참여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선의 총합이 곧 공동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