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 선죽교(善竹橋)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
옛이름은 선지교(善地橋)입니다. 919년 태조가 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하면서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으로,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두고 별교를 세워 보호했다고 합니다.
고려말 포은의 굽힘 없는 충절이 1방원(李芳遠)의 칼에 숨진 곳으로 충절의 선조가 죽임을 당한 자리를 아무나 밟아 욕되이게 되는것이 안타까워 그 자리를 지나지 못하도록 돌 난간을 세워 보호하고 대신에 그 옆으로 돌다리를 새로 놓아 옆으로 비켜 다닐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리를 건너 보면 두 비각이 세워져 있고 2한호(韓濩)의 글씨로 씌어진 선죽교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서편으로는 두 암수거북의 어제어필의 표충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거북을 만지면 자식을 얻고 뜻한바를 이룰수 있다해서 두 거북의 코끝은 새까맣게 손때가 타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 대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등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교육발전을 위해 5부학당과 향교를 세우기도 합니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나고,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인 주자집주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강의 하니 그의 스승인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의 시조'라 불리웁니다.
포은은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조선창건에 반대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겠다 합니다. 포은을 떠 보기 위한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는 이때쯤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포은의 답글이 이어집니다. 단심가(丹心歌)이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하여가나 충절을 굳게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의 단심가. 왕조가 바뀌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에 지금의 상황이 비추어짐은 왜 일런지요. 과연 지금의 우리는 정몽주의 충절과 절개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태종의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할까요.
위화도 회군후 군정을 손에 쥔 이성계를 이방원, 조준, 남은, 정도전등이 새 왕조의 임금으로 추대하려 할때 정몽주는 혁명의 반대에 섭니다. 조선창건에 회유되지 않고 이미 저물어가는 고려에 충절을 바친 정몽주는 그의 호인 포은(圃隱 : 몸을 피할지언정 뜻은 굽히지 않는다)과 같이 1392년 4월4일 이곳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이 합니다.
포은이 이성계를 방문할때 그의 어머니는 포은에게 이 시를 들려줍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횐빛을 새오나니 청강이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사진 아래쪽의 붉은 빛이 포은의 혈흔이라 하는데, 아마도 상징성으로 해석하는게 속 편하겠지요.
선죽교 서편의 표충비입니다.
암수 거북의 코를 만지면 득남을 하고 소원을 이루준다 합니다.
노모는, 어떤 소원을 비시는지, 두손으로 곱게 문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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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길손의 旅行自由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旅客
첫댓글 맘대로 갈 수 없는 곳...개성 다녀오셨군요...우린, 언제쯤이나 관광할 수 있을런지요 부럽소이다...덕분에 앉아서 감하며 보았어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