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저마다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장려하는 세대 속에서 함께 만들어 갈 공동의 가치와 기준은 무엇일까? 이러한 시대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가치와 기준을 제시해야 할까? 모든 것이 다 허용되는 듯한 이때, 어쩌면 그래서 더 지켜야 할 가치와 기준에 대한 질문이 소중해지는 때이기도 한다. 다시 기독교 윤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기를 맞아 가치와 기준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세상을 향해 교회의 교회 됨 그 자체를 강조하는 학자가 있다. 진정한 교회 됨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제자도를 함양하고 사회를 품는 제자도의 영성을 사회적 영성의 개념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공감과 책임, 책임과 소통의 덕 함양이라는 제자도 형성으로 제시하는 문시영 교수다.
본지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 기독교 윤리학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소개한 문 교수는 현재 남서울대학교 교수이자 교목실장으로 섬기면서 어느덧 5년째 한국연구재단의 장기연구 프로젝트 지원 속에 관련 주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에 지난 5월 29일 천안에 위치한 캠퍼스에서 문 교수를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적 복잡성의 증대로 가치 기준의 모호성 내지는 갈등과 충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치와 기준에 관여하는 기독교 윤리가 다시 중요해지는 때인 듯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 윤리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기독교 윤리를 기독교인조차 희망 사항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싶지만 잘 안 되고, 그런 사람이 더 많으니까요. 사실 제가 기독교 윤리를 공부한 이유도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교회가 시민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등떠밀리듯 억지로 사회적 영성과 기독교 윤리적 책임을 말하는 상황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논쟁 이슈에 대해 목회자 심지어 기독교 윤리학자 사이에서도 기준이 없는 모습이 보입니다. 깊은 연구 없이 안타까운 마음이나 사회적 필요에 밀려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접근은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안락사, 기후 위기, 인공지능 등 복잡한 현안에 대해서 가치와 기준을 새로 정립해야 하는 이때 기독교가 답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단 두 가지에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그 길을 찾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로 먼저 무장되고, 교회가 참된 제자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윤리를 넘어서 제자 됨이 먼저 필요합니다. 사실 모든 윤리와 신앙의 결론이 ‘제자 됨’에 수렴돼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할 때 복음의 가치를 변화하는 오늘의 정황에 맞춰 해석하고 응답하는 힘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기독교계가 목소리를 낼 때 사회로부터 자주 듣는 소리 중 하나는 ‘너나 잘하세요’ 같은 핀잔입니다. 기독교 내부적으로 과연 윤리적이냐는 질책인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다시 세상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윤리 문제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인간을 향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을 드러냅니다. 기독교 윤리 학자로서 교수님은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십니까?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교회를 말하지만 저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중요한 질문은 ‘교회가 무엇인가’였습니다. 제게 교회는 실존적인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위험 요소였기에 기독교 윤리학을 하면서도 교회를 사랑할 것 같지 않았고, 비판을 제기하는 성향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보며 개인 구원만이 아니라 사회 구원, 즉 기구, 사회 구조, 시스템의 변혁을 중요시하게 됐고, 이를 진리라 여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가 아무리 선해도 개인이 거듭나지 않으면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던 차에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의 저작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하우어워스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덕(virtue)입니다. ‘덕’은 달리 말하면 인격 능력인데 이를 위해서 그는 인격의 행위보다 존재의 우선성을 강조했습니다. 행위(doing)보다 존재(being), 즉 내면의 변화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됨의 성품 함양, 즉 제자 됨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됨》에서 교회의 최우선 과제는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Community of Character(성품의 공동체)인데, 복음의 성품화는 그리스도인의 제자 됨뿐 아니라 교회의 교회 됨에도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제자 됨과 교회 됨, 그 존재 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제 윤리 방향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교수님은 최근 ‘사회적 영성’이라는 주제로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을 하시는데 설명을 부탁합니다.
‘사회적 영성’은 전통적으로는 가톨릭에서 복지나 빈민 또는 정의 문제과 관련해 많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진보 신학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단어지만 저는 이것을 복음에 기초한 제자도에 근거해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교회가 최근 시민 사회로부터 요청받는 것은 네 가지입니다. 공적 책임이 부족하다, 시민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와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난민 문제를 포함해 사회적 환대의 가치에 인색하다입니다. 정리하면 ‘공공성’ 측면에서 공적 책임과 소통에 미숙하고, ‘타자성’ 측면에서 공감과 환대에 인색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이미 신학 안에 이를 위한 자원이 있고, 기독교적 기초 위에서 풀어낼 수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이것들을 담아 내지 못했습니다. ‘제자도에 근거한 사회적 영성’은 이런 취지에서 출발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제자 훈련을 강조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데 이를 좀 더 체계화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도 안에 다 품으신 것을 삶의 여러 층위에서 풀어내는 단계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한국연구재단의 10년 장기 연구 과제로 선정돼 현재 5년 차 연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연구의 열매들이 소중한 자원이 될 것 같습니다. 연구 흐름을 소개해 주십시오.
1년 차 연구에서는 사회적 영성의 개념을 정리했습니다. ‘공공성’과 ‘타자성’이라는 차원을 설정한 후 공공성을 공적 책임과 소통으로, 타자성을 공감과 환대로 정리하고,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강령,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풀어냈습니다. 특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제자도를 제안해 그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도에 담긴 사회적 영성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공감과 환대, 공적 시민사회의 이웃 되기,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등의 이야기를 제자도 정신에서 살폈고, 이를 성품 향상의 요소로 삼아 교회의 제자 훈련 방향으로 제언했습니다.
2년 차 연구에서는 바울의 제자도를 살폈습니다. 바울의 제자도는 교회 공동체로 확장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공적 소통, 공적 책임, 공감과 환대를 기독교를 식별하는 표시로 봤습니다. 이것들은 사회적 영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회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제자 공동체 안에 담아서 ‘교회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사회적 영성을 통해서 보여 주었다고 해석했습니다.
3년 차 연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제자 공동체를 살펴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는 순교의 시대를 지나 기독교가 공인되고, 더 나아가 기독교 왕국으로 이어지는 시대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동화되는 때입니다. ‘콘스탄틴적 결탁’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기독교의 황금기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걱정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오지만 과연 이들이 십자가의 순교적 신앙 앞에 진실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신국론》을 사회적 영성과 연결해,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이 지상의 도성에 사는 동안 사회적 영성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도를 연단해 가는 공동체가 돼야 하며, 교회는 제자도를 훈련하며 이를 구현하는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4년 차에는 중세의 베네딕투스에 주목했습니다. 한때 많은 사람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고 그 영향으로 수도원 복원 운동이 생겼고,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실제로 수도원을 제자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던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로 공공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약화된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으로 들어간 제자도, 사회적 영성의 퇴거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국내 수도원 6, 7곳을 찾아 수도사 및 수녀들과 대화 기회를 가졌습니다. 거기에서 그분들 나름의 사회적 섬김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고, 환대의 영성을 강조하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여기에 환상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재 5년 차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제자도를 수도원으로부터 다시 일상으로 복귀시킨 것으로 보고 연구 중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일상의 영성을 존중하고 그 속에서 공공성과 타자성을 실천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제자도를 복원시킨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연구물을 통해 한국 교회의 제자 훈련이 단순히 교회 일꾼을 양성하는 코스가 아니라 좀 더 성숙한 영성 함양을 담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수님의 사회적 영성 연구에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가 끼친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2010년에 듀크대학에서 하우어워스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박사님은 ‘사회적 증인’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증인의 입장에서 복음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우어워스 교수는 교회는 ‘산 위의 동네’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산 위의 동네처럼 세상에 제대로 보여지기만 하면 세상은 따라오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적 윤활유의 역할을 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일을 교회의 책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우어워스는 교회는 정책과 제도를 제안할 게 아니라 교회 자체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임을 보여 주는 것이 사회를 향한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사회적 영성’이라는 말로 한국적 상황에서 풀어냈습니다. 제자도에 근거한 사회적 영성인데, 하우어워스 교수는 미국에서는 ‘성육신적 제자도’, ‘정치적 제자도’, ‘영적 제자도’ 등 제자도 앞에 너무 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미 ‘제자도’ 안에 그것들이 모두 담겨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사회적 영성’도 제자도 안에 모두 들어 있는 성분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고 있는 제자 훈련에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사회적 영성이라는 덕 또는 성품을 함양하는 제자도를 제안합니다.
교수님은 공감과 환대, 책임과 소통을 제자도에서 품어야 할 성품으로 말씀하시며 이런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 ‘덕 윤리 방법론’과 ‘누스바움적 읽기’를 제안하셨습니다. 이 방법론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덕 윤리는 성품 함양을 위한 방법으로 이해를 위해서는 매킨타이어의 제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매킨타이어는 먼저 현재 서구 사회가 윤리적 위기를 맞게 된 원인으로 칸트를 지목해 비판합니다. 칸트는 유럽의 다양한 여러 민족이 각자 자기만의 특징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모두가 함께 지킬 수 있는 보편적인 행동 지침을 마련하고자 오직 이성에 의한 윤리를 정립한 철학자입니다. 보편타당한 윤리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런데 매킨타이어는 칸트의 이 윤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특정한 사회 속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으며, 또 특정한 자신만의 맥락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성장하며 부모와 그 형제자매,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나름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살아가는데, 이를 다 없애고 이성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는 것은 유령이라는 것입니다. 매킨타이어는 오히려 구체적인 역사와 맥락, 서사(내러티브)에 근거한 윤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라고 주장합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이것을 기독교 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인이 가진 내러티브를 ‘예수 내러티브’라고 말합니다. 예수 내러티브는 곧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알려 주시고, 보여 주신 제자도를 따라 공동체 안에서 인내, 소망, 용기 등의 덕을 함양하고 훈련받으며 성장해 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자들이 모인 제자 공동체입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미국 교회가 복음의 알맹이가 없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인을 예수 내러티브에 충실한 제자로 육성할 책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좀 더 그리스도인다운 덕과 인격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덕 윤리의 방법입니다.
누스바움적 적용이란 공감과 환대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이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우어워스는 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제자 훈련 과정에도 이를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내러티브 안에서 책임, 소통, 공감, 환대를 실천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는 방식으로의 제자 훈련 방향을 제언합니다.
현대는 덕과 성품, 인격 형성의 능력이 현저히 낮아진 때인 것 같습니다. 방대한 지식과 정보 학습 처리 능력은 향상됐지만 성품과 사람 됨의 형성 능력은 가정이나 사회, 심지어 교회에서도 더 약화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위한 제언을 부탁드립니다.
현재 교계의 윤리에 대한 접근 방식은 매우 안타까운 수준입니다.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그저 한 번씩 건드리고 지나가는 식입니다. 이슈에 대해 빠른 답을 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깊은 논의와 진중함이 필요합니다. 성찰 능력을 가진 교회, 깊이와 무게가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적 형성’은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제2의 천성이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이에 대해 자칫 ‘자기 의’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기독교 윤리란 하나님 은혜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의 빚어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십자가의 신앙을 바탕으로 덕과 성품을 함양하는 일은 결국 수동적입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나를 내놓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이고, 이는 제자 훈련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리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도록 내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적 형성에서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기도 가운데 경건하게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게 하는 수동성이 매우 소중합니다. 루터 당시 종교개혁이 가져다준 자유가 오히려 개신교 목사들에게 방종으로 이어진 모습을 보면서 루터는 교리문답을 강조했습니다. 매일매일 교리문답서를 읽으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라는 말이지요. 루터 자신도 그렇게 했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교회 됨을 보여 주는 것이 최우선이고, 교회가 사회윤리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교회가 사회윤리다’라는 말은 하우어워스의 《교회됨》에 있는 용어입니다. 하우어워스는 라인홀드 니버의 구체적인 제안과 정책을 보면서 그런 정책적인 제언으로 기독교가 할 몫을 다한 것인지 물으며 비평합니다.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해야 할 정말로 중요한 일은 정책 제공이 아니라 교회 됨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육성하고 함양하는 것이라고 하우어워스는 강조합니다.
특히 보편적인 답을 제공하려다가 정작 중요한 교회의 내러티브를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편성과의 소통을 추구하지만 교회의 고유한 내러티브, 복음의 이야기, 예수 내러티브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보편성과의 소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적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짜 교회 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 됨의 정체성,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형성 속에서 예수다운 성품으로 세상과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맞닥뜨린 진정한 도전입니다.
첫댓글 교회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육성하고 함양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