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인년(1662, 현종3) 정월 기행문
[DCI]ITKC_BT_0344A_0260_010_002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가리파(伽利坡)는 원주(原州) 치악산(雉嶽山) 남쪽 기슭의 큰 재인데 단구역(丹丘驛)에서 산골짜기로 15리를 간다. 재를 넘어 골짜기를 나와서 또 15리를 가면 신림역(新林驛)이다. 신림의 남쪽은 횡령(橫嶺)인데 호서 제천현(堤川縣)의 경계이다. 횡령 너머는 가령(椵嶺)이고 그 남쪽이 의림지(義林池)이다. 본디 영서와 호서의 애초의 경계는 큰 못이었으니 제천 너머의 고을에 호서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못 때문이다. 그 동쪽은 유령(楡嶺)인데 영월(寧越)의 경계이고 유령을 넘으면 용정(龍井)이다. 용정은 샘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아나와 그 가운데가 못인데 홍수나 가뭄에 기도를 올린다.
영월에서 노릉(魯陵)을 물어보니 군(郡)의 서쪽 큰길가에 있었다. 옛적 군의 아전 엄흥도(嚴興道)라는 자가 노릉을 거둬 묻어 주었다고 한다. 현재 군에는 아전과 백성 중에 엄씨(嚴氏) 성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 그 일족이 매우 많다. 오래전 일이라 그 대수는 모르겠지만 필시 후세 자손들이 끊기지 않았나보다. 태수 윤후 순거(尹侯舜擧)와 함께 금강정(錦江亭)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배를 타고 정자 아래 석벽을 둘러보았다. 상동(上東)의 골짜기 어귀부터 석령(石嶺)까지는 40리인데 모두 높은 절벽과 푸른 시내였으며 이따금 흰 자갈돌에 깊은 못이 있었다.
재를 넘으면 평창(平昌) 경계이고 또 30리를 올라가면 마차령(摩嵯嶺)인데 정선(旌善)의 경계이며 산골짜기가 깊고 험했다. 재를 내려오면 큰 시내가 골짜기 어귀를 지나가는데 이것은 태백산 살내(薩奈) 앞쪽 시내의 하류이다. 큰 시내의 산길을 따라가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데 깊은 산은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고 바위로 된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 모여 있어 한낮에도 해가 비치지 않는다. 석동(石洞)에는 이따금 깊은 못이 있고, 나무는 자단(紫檀)과 황양(黃楊)이 많으며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렸다. 역탄(易呑)에 이르면 삼척(三陟)의 경계이고 백전(栢田)이 있다.
울탄(蔚呑)을 오르면 큰 재인데 산에는 회나무가 대부분이어서 관동 지역의 배를 만드는 재목이 나는 곳이다. 울탄을 내려가면 평탄(坪呑)이다. 울탄의 물은 삼(蔘)ㆍ조탄(助呑)ㆍ갈전(葛田)을 지나 임계(臨溪)의 평탄에 이른다. 서남쪽 황지(黃池)와의 거리는 30리이다.
삼의 남쪽이 건의(巾衣)인데 삼의 남쪽에서 재를 오르기까지는 불과 1리 남짓이다. 재에 올라 내려다보면 그 너머는 수많은 골짜기와 중첩된 봉우리여서 굽어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서남쪽으로 태백산(太白山)을 바라보면 눈 덮인 산이 하늘을 막은 채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볼 수가 없다. 구름 아래로 유령(楡嶺)이 보이고 그 너머는 백석평(百石坪)이다.
역탄의 동남쪽부터 건의이고 건의의 동북쪽은 죽령(竹嶺)이니 그 곳이 두타산(頭陀山)이다. 그 가운데의 갈전과 삼은 산속의 매우 살기 좋은 마을로 장수하는 노인이 많다. 그곳 백성들은 자단으로 만든 활의 몸체를 위시하여 진기한 목재와 인삼ㆍ복령ㆍ무명ㆍ삼〔麻〕 등을 조세로 낸다.
8월에 낙산사(洛山寺)를 구경하며 경숙(京叔 강호(姜鎬)의 자)과 《주역(周易)》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경숙이 말하기를 “초연수(焦延壽)의 《역림(易林)》은 상(象)에 따라 말을 붙인 것으로 괘의 변화가 매우 괴이하다. 후세에 기이하다고 인정받고 싶었겠지만 그 문장은 사실 천근하여 알기 쉽다.” 하였다. - 이때 경숙은 양양 부사(襄陽府使)였다. -
저녁에 의상대(義相臺)에서 놀고 밤이 되어 월출을 구경하였는데 그날은 8월 18일이었다. 해상에는 항상 비가 잦아 구름이 감돌며 금세 걷혔다 다시 끼곤 하였는데, 달이 떠오르자 그 빛이 환히 비춰 바라볼 만하였다. 아침이 되자 날이 흐리다 잠시 갰는데, 바다 빛에 광채가 빛나더니 햇빛이 번쩍이며 자줏빛 기운이 뒤섞여 황홀한 광경이 매우 기이하였다. 예전에 내가 피난하여 관동 지역으로 왔었는데, 1월 15일에 금양(金壤 회양(淮陽)의 옛 이름)의 통자원(通慈院)에서 월출을 구경하였다. 그해 3월 우계(羽溪)에서 일출을 구경하였는데 광채가 불빛 같아 눈이 부시고 자줏빛 기운이 바다에 가득하여 이번에 구경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해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고 올해는 비가 많이 내렸으니 태양의 빛도 홍수나 가뭄에 따라 변하는 듯하다.
천후산(天吼山)은 설악산(雪岳山) 동쪽 기슭의 다른 산인데 수성(䢘城 간성(杆城)의 옛 이름) 남쪽 경계에 있다. 돌산이 신기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운데 아홉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너른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산이 크게 울면 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후라고 하였는데, 산에 풍혈(風穴)이 있다. 남쪽에는 석달마(石達麻)가 있고 북쪽에는 선인대(仙人臺)가 바라보인다. 선인대 위에는 선인정(仙人井)이 있다. 바닷가에서 영랑호(永郞湖)까지는 10리인데, 호숫가는 다 흰모래에 소나무 숲이고 이따금 기이한 바위가 있으며 그 너머는 바다이다. 바닷가에는 큰 못이 많이 있는데 영랑호의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
壽陵(수릉)예전에, 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에 미리 마련해 두는 임금의 무덤을 이르던 말
고전번역서 > 기언 > 기언 제27권 하편 > 산천 상 > 최종정보
기언 제27권 하편 / 산천 상(山川上)
성거산(聖居山)과 천마산(天摩山) 고사
[DCI]ITKC_BT_0344A_0290_010_001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7년 여름에 병으로 누워 인사(人事)가 없었으므로 두 산의 고사를 지었다. 오관(五冠)ㆍ송악(松嶽)ㆍ제석(帝釋) 등의 산들은 사실 두 산 주변의 다른 산이며 성거산이 그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한다.
옛 구역(九域)의 땅은 신라가 불교를 숭상했던 때로부터 고려를 거쳐 1500년 동안 인적이 통하지 않은 심산절경(深山絶境)에 불교의 고적이 또한 많은데, 예를 들면 개경(開京) 북쪽 50리에 있는 성거산과 천마산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산중에 부처를 섬기는 사찰이 무수히 건립되었는데 본조(本朝)에서는 유학을 숭상하고 고려가 망한 지도 300년이나 되어 고려 때의 사찰이 지금은 모두 황폐해졌다. 다만 7, 8백 년이나 오래된 사찰의 비석과 탑이 종종 훼손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석두산(石頭山) 수릉(壽陵)에서 성거산 수릉에 이르면 정상에 큰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성거산은 고구려의 구룡산(九龍山)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낙랑(樂浪 평양(平壤)의 옛 이름)의 평나산(平那山)인데, 산에 국조사(國祖祠)가 있어 성거산으로 불렀다.”라고 한다. 산은 남ㆍ북 두 개의 성거암(聖居庵)과 북ㆍ서ㆍ남 세 개의 상령암(桑靈庵)이 있는데 모두 난야(蘭若 사원)의 이름이며 산세는 여기에 이르러 가장 깊다. 북성거암 위에는 법달굴(法達窟)이 있는데, 법달은 옛 조사(祖師)의 이름이다. 그 위에는 철로 된 갈고리가 있어 이것을 잡고 정상에 오른다.
남성거암 아래는 원통사(圓通寺)로, 원통은 옛날 심적사(尋跡寺)의 승려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옛사람이 관음불(觀音佛)의 자취를 얻어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이 원통사를 지었는데 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지금은 부도석옹(浮圖石瓮)이 있는데 오래되어 연대를 알 수 없다.
정상의 서쪽 기슭에는 통성굴(通聖窟)이 있는데 옛날에 그 굴을 막았다. 굴 앞에는 샘이 있어 물새가 날아 모여든다.
정상 북쪽에는 국조사가 있으며, 동쪽 계곡은 복흥사(福興寺)로 지금은 쌍석탑(雙石塔)이 있다. 그 위는 일숙암(日宿庵)이다.
정상 서남쪽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에 원효대(元曉臺)와 의상대(義相臺)가 있다. 의상대는 원효대 남쪽에 있으며 다시 그 남쪽은 인달암(仁達庵)과 금신암(金身庵)이 있다. 그 아래는 사미천(沙彌川)의 발원지이며 금신암 아래에는 금신사(金身寺)가 있다. 다시 그 아래는 금신굴(金身窟)이 있으며 인달암 서쪽에 인달석탑이 있다.
정상 서북쪽 기슭에 길성(吉聖)이 있다.
금신암 동쪽이 오도령(悟道嶺)이며, 다시 그 동쪽이 영취산(靈鷲山)이고, 영취산 남쪽에 현화사(玄化寺)가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顯宗) 12년(1021) 3월에 현화사 북산이 무너져 옥이 나왔다. 8월에 왕이 현화사에 거둥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주저(周佇)에게 명하여 현화비문을 짓게 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채충순(蔡忠順)에게 비문의 글씨를 쓰게 하였으며 왕이 친히 전서(篆書)로 ‘영취산대자은현화비(靈鷲山大慈恩玄化碑)’를 썼다. 또 부도석탑이 있다.
박연(朴淵)은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에 있는데, 큰 폭포이다. 하연(下淵)이 하나 있는데, 물이 마르면 희생과 폐백을 쓴다. 오행지에 이르기를 “충렬왕(忠烈王) 19년(1293) 겨울에 박연이 고갈되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용사(龍祠) 아래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다. 박연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제석산(帝釋山) 밑을 지나 오조천(五祖川)이 된다.
의종(毅宗) 20년(1166) 3월에 왕이 금신사에서 부처에게 재(齋)를 올렸다. 다음 해 3월에 영통사(靈通寺)에 거둥하였다가 미행(微行)으로 금신굴에 이르러 재를 올리고 현화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현화사에는 청녕재(淸寧齋)와 중미정(衆美亭)이 있으며 남쪽 못에는 갈대와 물오리ㆍ기러기의 경관이 있다. 또 귀법사(歸法寺)에 갔다.
24년(1170) 봄에 낭성(狼星)이 남극 하늘에 나타났는데,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고 하여 서해도(西海道 황해도)에서 역마를 띄워 보고하였다. 당시 왕은 현화사에서 유람하고 있었는데, 여러 단에서 노인성을 크게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군신의 하례를 받았다. 그해에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곤원사(坤元寺)에서 왕이 시해되었다.
금신암 서쪽은 오관산(五冠山)이며 그 아래는 영통사이다. 지지(地誌)에는 마가갑(摩訶岬)이라 하였다. 지금은 그 북쪽에 사단(祀壇)이 있는데,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소사(小祀)를 지내는 것이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오행지(五行誌)〉에 이르기를 “인종(仁宗) 6년(1128) 겨울에 영통사의 동고(銅鼓)가 울었다. 12년 봄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이 영통사에 거둥하여 비를 기원하였다. 의종 1년(1147) 5월에 왕이 영통사에서 후사를 기원하고 화엄경(華嚴經)을 50일간 강하였다. 2년 여름에 산중에 큰비가 내렸는데, 하룻밤 사이에 영통천의 물이 넘치고 흙산이 무너져 백성들이 매몰되어 죽은 자가 많았다. 24년 정월에 왕이 영통사에 거둥하여 화엄회(華嚴會)를 열었다.”라고 하였다.
영통사에 이끼 낀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다.
영통(靈通) 계곡 입구는 화담(花潭)이다. 연못가에 옛날에는 은자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거처가 있었는데 지금은 화담 은자의 사당이 있다. 그 위에는 서(徐) 선생 무덤이 있다.
오관산 동쪽은 봉악(鳳嶽 보봉산(寶鳳山))이며 그 아래는 화장사(華藏寺)이다. 화장사에는 공민왕(恭愍王)의 도상(圖像)이 있다. 고려의 유민(遺民)이 비용을 모아 진전(眞殿)에 제사한 것이 수백 년이나 이어졌으니, 유민의 풍속이 오히려 대국의 유풍(遺風)이 있다. 승려가 전하여 지켜오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된 패엽경(貝葉經)이 있는데, 지공(指空)이 쓴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또 지공의 등신불(等身佛)이 있다.
自石頭壽陵。至聖居壽陵。絶頂有大澤。謂之天池。
원통비(圓通碑) [DCI]ITKC_BT_0344A_0290_010_002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원통사(圓通寺)의 승 해청(海淸)이 돌을 깎아 비를 만들고 그 제자 도은(道隱)을 통하여 나를 찾아와 명(銘)을 청하기를 “산중의 고사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옛 이야기를 많이 들은 데다 잘 기술할 수 있으니 당신의 명을 얻지 못하면 비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겠다.”라고 하고서 기록에 전하는 것을 간략히 서술하여 썼다. 부소(扶蘇송악) 남쪽 석두산 / 蘇南石頭
수릉은 푸르고 / 壽陵蒼蒼
천지는 깊기만 한데 / 天池泱泱
뭇 산들 울창하니 / 衆山嵺鬱
평나산이며 천마산 / 平那天摩
높고도 험준하여라 / 嶪嶪峨峨
국조를 제사 지내니 / 國祖是禋
신령께서 정하신 도읍 / 神靈所都
참으로 성거로구나 / 寔爲聖居
송악 시내 제사 드리니 / 嶽祠神川
신들께 정성스러워 / 百靈修虔
오만도 허물도 없어라 / 不瀆不愆
그 제단 공경스럽고 / 壇場祗肅
생폐에 법도 있으니 / 牲幣有常
귀신이 임하시는 듯 / 鬼神洋洋
융성하던 그 옛날 / 隆古之盛
훌륭한 덕치 이루시니 / 德洽顯位
서옥(瑞玉)이 나타났다네 / 玉璞呈瑞
높고 큰 송악이여 / 奕奕松嶽
먼 옛날 부소갑(扶蘇岬)은 / 扶蘇古岬
신령한 도읍의 진산(鎭山) / 鎭玆神邑
귀법사며 현화사 / 歸法玄化
금신사며 제석사 / 金身帝釋
왕의 발자취 없을쏘냐 / 亡王往跡
험한 절벽 인적 끊긴 곳 / 陰崖絶境
깎아지른 바위틈 사이로 / 巖曲崛岉
날다람쥐 굴을 오가네 / 往鼯攸窟
원통사 부도석옹이며 / 圓通石瓮
화장사 패엽경이요 / 華藏貝葉
마아갑 영탑이로다 / 摩阿靈塔
학사의 현화사 비명(碑銘) / 學士之銘
낙랑의 옛 기록들 / 樂浪之記
신기하고 이상하구나 / 瑰怪詼詭
고사가 전해 오니 / 古事流傳
사람들 얘깃거리요 / 衆人之譁
노인들 탄식이로다 / 而耆耈之嗟
산석에 이 일 새기니 / 刻之山石
앞뒤 얘기 얼추 들어 / 略擧終始
천년 후세에 고하노라 / 以告千祀
정미년(1667, 현종8) 곡우절(穀雨節)에 쓰다
백운산(白雲山) [DCI]ITKC_BT_0344A_0290_010_003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백운산은 기내(畿內)의 큰 산이다. 영평현(永平縣 경기 포천(抱川)) 치소(治所) 동쪽으로 20리 가면 수동(水洞)에 와룡대(臥龍臺)가 있는데, 수중 석대(石臺)의 길이가 수십 길이며 물이 깊고 바위가 많다. 시냇가는 온통 키 큰 소나무에 길게 뻗은 골짜기이며, 그 위는 사당(社堂)이다. 10리의 시냇물이 산에서 발원하며 양쪽 기슭에는 흰 자갈이 많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드문드문 반석과 험준한 바위가 많은데 30리가 모두 그러하다. 깊이 들어가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석장(石場)이 있다. 시냇물은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며 그 아래는 돌물굽이이다. 석장을 지나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맑아지며 계곡이 온통 소나무다. 여기에 이르면 못의 물은 초록빛으로 깨끗하고 피라미가 많다.
그 위는 백운사(白雲寺)다. 앞의 누각을 오르면 높은 절벽이 계곡을 굽어보는 바위산 봉우리가 마주한다.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벽기(壁記)가 있다. 신라의 승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지금까지 800여 년이 되었는데, 숭정(崇禎) 연간에 오대산(五臺山)의 승 색름(賾凜)이 중수(重修)하였다고 하며 동쪽 모퉁이에는 서역(西域)의 승 석민(釋敏)의 부도가 있다. 영월대(迎月臺) 동쪽 창으로 섬암(蟾巖) 석봉(石峯)이 보인다. 9월 12일 밤에 달이 그 위로 나왔는데, 앞쪽 계곡 위아래로 놀 수 있는 반석이 많았다.
그 위는 조계폭포(曹溪瀑布)이다. 작은 고개를 넘어 5리를 가면 옛 선적사(禪寂寺) - ‘적(寂)’은 ‘적(積)’이라고도 쓴다. - 가 있는데 도선의 부도가 있다. 그 위는 상선암(上禪庵)이다. 산중 바윗골〔巖洞〕로 20리 들어가면 깊은 산에 길이 끊어진 곳에 있는데, 색름이 지은 것이다. 그 아래는 반야(般若)로, 자휴(自休)와 색름의 부도가 있다. 섬암 서쪽 기슭에 보문사(普門寺)가 있는데, 석민이 창건한 것으로 또한 아름다운 절이다. 종일토록 산을 보고 내려오니 나무 열매를 줍는 사람들이 계곡에 가득하였다.
지난해 동지에는 꽃이 피었으며, 섣달부터 정월까지 눈이 쌓이고 몹시 추워 큰 나무가 많이 얼어 죽었다. 3월에는 꽃이 피지 않았으며 2월부터 5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6월 하순부터 9월까지 비가 오지 않고 또 일찍 추워져서 온갖 곡식이 익지 않고 초목이 자라지 않았으며 산의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이 많았으니 ‘극무(極無)’라고 할 만하였다.
백운산 남쪽은 화악산(華嶽山)으로 경기와 강원 경계에 있는데, 수춘(壽春 춘천(春川)의 옛 이름)ㆍ동음(洞陰 포천(抱川)의 옛 이름)ㆍ가평(嘉平 가평(加平)의 옛 이름) 지역 주위 300리에 걸쳐 있다. 그 서쪽 기슭은 층층이 돌이 쌓인 가파른 바위인데 정상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다. 운무 때문에 낮에도 캄캄하여 사람들이 두려워 그 꼭대기에 선뜻 올라가지 못한다. 날씨가 가물면 군읍(郡邑)에서 사람들을 많이 보내 그 꼭대기를 밟게 하여 비를 얻는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큰 우레와 번개, 비와 우박이 천마산(天摩山)과 박연(朴淵)에서 시작하여 삭북(朔北), 과말(過末), 지장봉(地藏峯), 화적연(禾積淵), 삼부락(三釜落), 학재〔鶴嶺〕를 거쳐 백운산 정상에 이어지고 화악산에 이르러 그치기 때문에 산중 사람들은 이것을 ‘용의 이동〔龍移〕’이라고 부른다.
[주-] 와룡대(臥龍臺) : 물속에 있는 암석이 누워 있는 용과 같다고 하여 와룡암(臥龍巖)이라고 부르며 옛날에는 용곡소(龍谷所)라고 하였다. 《京畿道邑誌3 永平郡邑誌 古蹟》
[주-] 벽기(壁記) : 《기언별집》에는 〈산루기(山樓記)〉로 되어 있는데, 동주의 〈백운루기(白雲樓記)〉를 말하는 듯하다. 또 동주의 〈백운산백운사중수기(白雲山白雲寺重脩記)〉가 있다. 《記言 別集 卷9 白雲山水記》
[주-] 선적사(禪寂寺) : 《기언별집》에는 견적사(見跡寺)로 되어 있다. 《記言 別集 권9 白雲山水記》
[주-] 극무(極無) : 우(雨)ㆍ양(暘)ㆍ욱(燠)ㆍ한(寒)ㆍ풍(風) 다섯 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게 많은 것을 ‘극비(極備)’, 지나치게 적은 것을 ‘극무(極無)’라고 한다. 《書經 洪範》
감악산(紺嶽山)
[DCI]ITKC_BT_0344A_0290_010_004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9월 29일에 한산(寒山)으로 송 상사(宋上舍)를 방문하였는데 상사는 나이가 87세이다. 우리 인조 2년(1624)에 진사가 되었고 효종 때에 80세 이상인 사람에게 관작을 내렸지만 상사는 관작을 받지 않고 흰 수염에 호리호리한 체구로 산택에 은거하는 즐거움을 택하였다. 상사 집안은 3대가 장수하여 한산에서 대대로 장수한 집안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나와 함께 감악산을 유람하였는데, 저녁에 견불사(見佛寺)에서 유숙하고 새벽에 깎아지른 벼랑 정상에 올라 신정(神井)에서 물을 마셨다. 그 위는 감악사(紺嶽祠)다. 석단(石壇)이 세 길이며 단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었는데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었다. 옆에는 설인귀(薛仁貴)의 사당이 있는데 왕신사(王神祠)라고도 한다. 음사(淫祠)로서, 그 신이 요망하게 화복(禍福)을 내릴 수 있다 하여 제사를 받고 있었다.
산은 모두 석봉(石峯)이며 정상은 2300길로, 매우 멀리까지 훤히 보인다. 그 동쪽은 마차산(摩嵯山)이며 그 너머는 왕방산(王方山), 다시 그 너머는 화악산과 백운산이다. 동북은 환희석대(懽喜石臺)로 경기와 강원 경계에 있다. 그 너머는 고암산(高巖山)으로 옛 맥(貊) 지역이다. 서북은 평나산과 천마산이며, 남쪽으로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이 보인다. 그 북쪽은 대강(大江)으로, 오강(烏江)에서부터 아미천(峨湄川), 호로하(瓠蘆河), 석기(石岐), 임진강(臨津江)이 되어 조강(祖江)에 이르기까지 100리이다. 조강 서쪽은 옛 강화(江華)이며, 강화 서쪽은 연평(延平) 바다로 사실 연(燕)ㆍ제(齊)의 바다이다.
신사 옆 바위 사이의 석굴에서 노자(老子) 석상(石像)을 보았는데, 이마를 드러내고 머리를 풀어헤쳤으며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마치 신령이 있는 듯하였다. 이제 그 석기(石記)를 살펴보니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 연호) 4년(1468, 세조14)에 등신불을 세웠다고 한다. 그 서쪽은 석봉산(石峯山)이며 아래는 운계사(雲溪寺)인데 운계폭포가 보인다. 그 북쪽 계곡에 봉대(鳳臺)가 있고 봉대 서쪽은 옛날 은적사(隱跡寺)다.
백로주기(白鷺洲記)
[DCI]ITKC_BT_0344A_0290_010_005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경성 동북쪽에는 산과 물이 많은데, 영평(永平)의 창옥병(蒼玉屛)과 백운계(白雲溪), 청성(靑城)의 백로주가 가장 아름답다. 청성의 물은 칠리탄(七里灘)을 지나 휘돌아 심연(深淵)이 된다. 중류에 바위섬이 있는데, 오래된 소나무 수십 그루가 창연히 바위 위에 줄지어 서 있고 양쪽 기슭은 모두 짙푸른 기암절벽이다. 바위가 없는 곳은 모래로, 이것이 이른바 백로주이다. 나는 유양(維揚 충남 청양(靑陽))에서 돌아오는 길에 석문(石門)을 지나 용주공(龍洲公 조경(趙絅))을 손령정사(蓀嶺精舍)로 찾아갔는데, 큰 눈이 내려 이틀을 머물렀다. 작별할 때 공은 나를 백로주까지 전송하고 송별시를 지어 주었는데, 나는 백로주기를 지어 이것으로 이별을 기록한다.
백운계기(白雲溪記)
[DCI]ITKC_BT_0344A_0290_010_006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백로주를 보고 저녁에 백운계에 이르렀다. 영평 치소 서쪽으로 5리에 있는데, 물은 더욱 느리고 모래는 더욱 평평하며 암벽은 더욱 가팔랐다. 깊은 못과 긴 여울이 위아래로 아득하였고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과 눈이 녹아 있었다. 물새 수십 마리가 울면서 날아갔다. 계곡의 반석에 완상(玩賞)할 만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석각(石刻) 글씨가 있으며 못가에 옛날 김씨(金氏 김확복(金矱卜))가 지은 금수정(金水亭)이 있다. 아래로 몇 리를 내려가면 창옥병(蒼玉屛)이 있는데, 계곡을 따라 이어진 산면(山面)이 모두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박 승상(朴丞相 박순(朴淳))의 별업(別業)이 있으며 시냇가에 승상의 사당이 있다.
[주] 석각(石刻) 글씨 : 한호(韓濩)가 쓰고 박순(朴淳)이 명명한 11개의 석각 글씨가 있는데, 배견와(拜鵑窩), 이양정(二養亭), 백운계(白雲溪), 청랭담(淸冷潭), 토운상(吐雲床), 산금대(散襟臺), 청학대(靑鶴臺), 백학대(白鶴臺), 명옥연(鳴玉淵), 수경(水鏡), 와준(窪尊)이 이것이다. 《京畿道邑誌3 永平郡邑誌 樓亭 題詠》
[주] 옛날 …… 있다 : 우암(尤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의하면, 박순은 병술년(1586, 선조19) 8월에 휴가를 얻어 영평(永平) 백운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시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매일 촌민과 함께 자리를 다투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상(上)이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세 차례나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으며, 기축년(1589, 선조22) 7월 21일에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가 홀연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가 67세였다고 한다. 《宋子大全 卷155 思菴朴公神道碑銘》 여기에 공이 거처하던 이양정(二養亭)이 있으며, 옥병서원(玉屛書院)이 있어 박순, 김수항(金壽恒), 이의건(李義健)을 합향(合享)한다. 《京畿道邑誌3 永平郡邑誌 樓亭 壇廟》
유삼부락서(遊三釜落序)
[DCI]ITKC_BT_0344A_0290_010_007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삼부락은 동주(東州 철원(鐵原)의 옛 이름) 치소 남쪽 30리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아래 계곡 입구에서부터 돌 비탈길 몇 리를 가면 높이 솟은 바위산이 깊은 계곡을 가로막고 있는데 바위가 깎아 놓은 듯하다. 위에 솥 모양의 바위 웅덩이가 세 개 있어 계곡물이 여기에 모이는데, 물이 깊고 길이 끊겨 내려다볼 수 없었다. 물이 세 곳에서 넘쳐 세 개의 폭포가 되는데, 흰 물결이 열 길이나 된다. 바위 아래는 못으로, 못과 모래톱은 모두 흰 자갈이며 종종 앉을 만한 반석이 있다. 맥북(貊北 강원도 북쪽 지방)의 방언에 폭포를 ‘낙(落)’이라 부르기 때문에 ‘삼부락’이라 부른다고 한다. 초여름이 되어야 초목이 무성해지는데, 시냇가 바위틈으로 철쭉이 물에 비쳐서 매우 아름답다.
유삼부락서(遊三釜落序) : 미수는 갑진년(1664, 현종5) 3월, 70세 되던 해에 조경(趙絅)과 함께 삼부락과 화적연(禾積淵)을 구경하였으며, 서와 기(記), 수창(酬唱)한 시가 있다. 《記言 年譜 卷1 眉叟許先生年譜》 《記言 別集 卷1 同諸公遊三釜水石酬龍洲相公》
화적연기(禾積淵記)
[DCI]ITKC_BT_0344A_0290_010_008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체천(砌川)의 물은 청화산(靑華山)에서 발원하여 화강(花江)의 물과 합류하여 육창(陸昌 강원 철원(鐵原)의 옛 이름)을 지나 칠담팔만암(七潭八萬巖)이 되고, 영평 북쪽에 이르러 화적연이 된다. 동쪽 기슭은 긴 벼랑과 소나무 숲이며, 그 아래는 석장으로 모두 흰 바위들이다. 북쪽은 석봉으로 수중에 백 척 높이로 서 있다. 위에는 지극히 고요한 감료(甘潦)가 있는데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준다. 옆에는 용혈석(龍穴石)이 있는데 아래에 끝이 안 보이는 구멍이 있다. 시냇물은 굽이굽이 흘러 남쪽 기슭에 이르면 푸른 절벽이 화적연에 잠겨 있다. 바위 주위에는 소나무며 철쭉이 많다. 바람은 조용하고 날씨가 화창하니 물결이 잔잔하다. 석장은 사단(祀壇)이 되어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면 희생과 폐백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중사조(中祀條)에 실려 있다. 상류 고석정(孤石亭)까지는 15리이다. 용주공은 나와 삼부폭포를 구경하고 다음 날 화적연의 석장에서 노닐었다.
화적연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 청송곡(靑松谷)에 이르러 북쪽으로 백운계와 합류한다. 그 아래는 대탄(大灘)이며 다시 그 아래는 시냇가에 송림(松林) 절벽이 있는데, 송우(松隅)이다.
화적연기(禾積淵記) : 화적연의 옛 이름은 유석향(乳石鄕)으로, 군 북쪽 30리에 있다. 《京畿道邑誌3 永平郡邑誌 古跡》
절부우명(節婦隅銘) 정미년(1667, 현종8) 7월
[DCI]ITKC_BT_0344A_0290_010_009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호구협(壺口峽) 대천(大川) 물가에 소나무 숲 암벽이 있는데, 이것을 ‘송우’라고 한다. 병자년 난리 때 적군이 군대를 풀어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였는데, 어떤 부인이 암벽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었다. 어느 집 어떤 부인인지는 모르지만 그 절행(節行)이 전해지지 않을 것을 슬퍼하여 ‘송우’를 고쳐 ‘절부우’라고 하였다. 이곳은 협곡 중에 절경이라 불렸는데, 많은 사람이 도륙된 뒤로 들에 널린 뼈가 많고 새들이 날아들지 않으며 역병에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 지금 30년이 되었다.
징파도(澄波渡)
[DCI]ITKC_BT_0344A_0290_010_010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징파도는 연천현 서쪽 15리에 있다. 연천은 옛 연주(漣州)로, 지지(地誌)에 징파도는 연주에 있다고 하니, 사실 이물(伊勿) 서쪽 경계의 맥 지역이다. 서쪽 기슭 위아래 강의 벼랑이 가장 기이하며, 동쪽 기슭은 모두 흰 모래로 간간이 흰 자갈이 있고 이따금씩 고목이 있다. 교연(郊煙)에서 20리 상류에 있는 긴 여울을 귀탄(鬼灘)이라 하며, 다시 그 위는 송탄(松灘)이다. 하류는 산이 깊고 물이 휘돌아 가며 물가가 아스라이 멀다. 협곡 입구에 늘어선 봉우리가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마차산(摩嵯山) 정상이다.
징파도(澄波渡) : 장주천(漳州川)이라고도 한다. 《與猶堂全書 地理集 大東水經 浿水3》
귀탄(鬼灘) : 《읍지》에는 거탄(車灘)으로 되어 있다. 《京畿道邑誌3 漣川縣邑誌 山川》
앙암(仰巖)
[DCI]ITKC_BT_0344A_0290_010_011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징파도 하류 20리에 앙암이 있다. 강가에는 석봉(石峯)이 있으며 높은 절벽이 있고 중연(重淵)이 있다. 옛날 큰 종이 이곳에 빠졌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그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장마가 그치고 물이 맑을 때면 종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은 지가 백 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 말로는 나라에 어려움이 있으면 종이 운다고 하는데, 물건이 오래되어 신령스러워 그런 것인가. 강가는 모두 푸른 기암절벽이며 북쪽에는 고려의 왕사(王祠)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그 동쪽은 아미사(阿彌寺) - 앙암이 잘못되어 아미가 되었다고 한다. - 이다.
호로하(瓠蘆河)는 하류 노자암(鸕鶿巖) 아래에 있다. 옛 진루(陣壘)가 있는데 벼랑을 끼고 있어 견고하다. 그 여울을 호로탄(瓠蘆灘)이라 한다. 그 남쪽으로 강(江 임진강(臨津江))을 건너면 옛 칠중성(七重城) 동포(銅浦)로, 호로탄 가에 있다. 고려의 임춘(林椿)이 강가에 살았다고 한다. 그 아래 남쪽 기슭은 괘암(卦巖)으로, 높은 벼랑이 강에 잠겨 있는데 돌이 깎아 놓은 듯하다. 이 문정공(李文靖公)이 제명(題名)했다는 석각이 있는데, 지금은 이끼가 많이 끼어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아래에 ‘괘암’이라고 두 글자를 크게 새겨서 제명이 있었던 고적임을 표시하였다.
고랑도(庫硠渡)는 괘암 아래에 있다. 8월에 장마가 끝나면 바닷가 사람들은 배를 집으로 삼아 이곳에 모여드는데, 물고기와 소금을 팔아 교역하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다. 강 북쪽에 사현사(四賢祠)가 있으며, 조금 아래에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호로하, 용산(龍山), 석기(石岐)로부터 적운(積雲)계곡 입구까지 긴 벼랑이 10리에 뻗어 있다. 해 질 녘에 산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
중연(重淵) : 종연(鍾淵)이라고도 한다. 《읍지》에는 종담(鍾潭)으로 되어 있다. 여울이 매우 급히 흘러 수석(水石)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난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京畿道邑誌3 漣川縣邑誌 山川》
숭의전(崇義殿) : 숭의전은 마전강(麻田江) 기슭에 있다. 고려 태조가 궁예(弓裔)에게 벼슬할 때 송경(松京)을 왕래하면서 쉬었던 곳이라는 이유로 태조의 고택으로 삼고 전(殿)을 만들어 이곳에서 태조, 현종(顯宗), 문종(文宗)을 제사 지낸다고 한다. 《與猶堂全書 地理集 大東水經 浿水3》
칠중성(七重城) : 고구려에서는 칠중현(七重縣), 신라에서는 중성현(重城縣), 고려와 조선에서는 적성(積城)으로 불렀다. 《與猶堂全書 地理集 大東水經 浿水3》
괘암(卦巖) : 계암 또는 계암바위라고도 한다. 《한국지명총람18 경기ㆍ인천편 하 파주군》
고랑도(庫硠渡) : 고랑도(高浪渡)라고도 한다. 《與猶堂全書 地理集 大東水經 浿水3》
월악기(月嶽記)
[DCI]ITKC_BT_0344A_0300_010_004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9월이 되어서 비로소 탑산을 내려와서 월악산(月嶽山)에 들어가 도갑사(道岬寺)를 유람하였는데, 도갑사는 신라의 승 도선이 머물렀던 곳이다. 도선은 도를 배워서 신통력을 얻어 천 년 뒤의 일을 예언할 수 있었는데, 산중의 기이한 유적이 모두 도선에게서 나온 것이라 한다. 국초(國初)에 이르러 승 학조(學祖)가 이 절에 거주하였는데, 현재 그가 사용하던 불주(佛珠), 가사(袈裟), 포단(蒲團), 철학(鐵鶴) 등이 모두 이 절에 보관되어 있다.
또 용암사(龍巖寺)가 있는데 그 위에서 9층탑을 구경하였다. 그러고 나서 구정봉(九井峯)에 올랐는데 봉우리 위에 구룡정(九龍井)이 있었고, 운무(雲霧)를 만났다. 봉우리 위에 종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흔들어도 흔들리는 듯하고 열 사람이 흔들어도 또한 그 정도에 불과하였다. 고을 이름을 영암(靈巖)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돌이 세 개인데, 하나는 도갑사 아래에 있고 또 하나는 용암사 아래, 소년대(少年臺) 위에 있다.
운무가 옮겨간 뒤에 천성봉(天星峯)을 보니 더욱 신비롭고 수려하였다. 구정봉 아래에 구절폭포(九折瀑布)가 있고, 물이 고여 깊은 못이 된 것이 7개인데 다 기이한 절경이어서 유람할 만하였으며, 못 위쪽에는 칠지정사(七池精舍)가 있다. 구정봉 남쪽에 한 쌍의 석봉이 있는데, 그중 높은 것이 청청대(靑靑臺)이다. 그 남쪽에는 불정봉(佛頂峯)이 있고, 그 아래에는 백운사(白雲社)가 있다. 구정봉 북쪽 벼랑의 원효대(元曉臺)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는데, 도선옹의 산수기(山水記)에 이곳을 언급하였다.
용암 아래에 세 개의 석거(石車)가 있는데, 운거(雲車)라고 하는 것은 소년대 동쪽에 있고, 마거(馬車)라고 하는 것은 운거 북쪽에 있으며, 녹거(鹿車)라고 하는 것은 맨 아래에 있다. 모두 산중의 기이한 유적이지만 녹거가 가장 크기 때문에 이 골짜기를 녹거동(鹿車洞)이라고 한다. 그 동북쪽의 별봉(別峯)이 고산(孤山)으로 아래에 고산사(孤山寺)가 있고, 남쪽으로 구정봉을 마주하고 있는데 석벽과 기이한 바위가 많다.
도갑사 서북쪽 석봉 사이에 상견성암(上見性庵)과 하견성암(下見性庵)이 있고, 더 내려오면 봉선암(奉僊庵)이다. 청대(靑臺)를 따라 내려오면서 손을 잡고 눈을 맞으며 내려와 죽사(竹社)에서 쉬었는데, 이곳이 봉선암이다.
13년 맹동(孟冬) 초길일(初吉日)에 미수는 기록하다.
월악산 북쪽 벼랑에 혜초(蕙草)가 자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산중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알지 못하였다. 오직 시내의 돌 틈에 손초(蓀草)가 무성했는데, 줄기와 잎이 모두 향기로웠다. 남해의 여러 산에는 이 풀이 많이 있는데, 눈 위에서도 다 푸르다.
도갑사 아래에 입석(立石)이 있는데 ‘국장생(國長生)’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 황산(皇山)에도 입석이 있는데 ‘황장생(皇長生)’이라고 새겨져 있다. 부로(父老)들이 전하는 말로는 도선이 만들었다고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원수(元帥) 서평공(西平公 한준겸(韓浚謙))이 호남 지역을 순찰할 적에 이곳을 지나면서 ‘국장생’이라고 새겨진 입석을 파내고 그 아래에 돌을 새겨 사좌(四座)를 표시하려 하였으나, 돌이 깊이 박혀 있으므로 파내려고 하다가 무익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묻었다. 구림(鳩林)에도 입석이 있고 서호(西湖)의 석포(石浦)에도 입석이 있는데, ‘모년 모월에 향(香)을 묻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입석의 연월 글자는 마멸되어 볼 수 없었다.
청량산기(淸涼山記)
[DCI]ITKC_BT_0344A_0300_010_005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태백산(太白山) 동남쪽에 있는 것이 백석산(白石山)이고, 또 남쪽에 있는 것이 두타산(頭陀山)이며, 또 서남쪽에 있는 것이 청량산이다. 청량산은 안동부(安東府) 관아에서 북쪽으로 95리 지점 재산현(才山縣)에 있는데, 산이 높고 가파르며 뭇 산들 가운데 단연 높아서 창연히 우뚝 솟아오른 듯하며 기이하고 특출하므로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부른다.
최북단의 정상인 세 개의 석봉이 자란봉(紫鸞峯)이고, 자란봉 남쪽 기슭의 석봉이 선학봉(僊鶴峯)인데 아래에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서쪽으로 연화봉(蓮花峯)을 바라보면 푸른 석벽 위에 의상굴(義相窟)이 있으나, 길이 끊겨서 올라갈 수 없다. 연대사 동쪽 모퉁이에서 석벽을 부여잡고 진불암(眞佛庵)에 오르면, 그 위가 원효암(元曉庵)이다. 동보현암(東普賢庵)을 따라 돌아 서쪽으로 곧장 수백 길의 바위틈을 경유하여 원효정(元曉井)을 보고, 또다시 동쪽으로 조금 내려와서 원효암에 이르니, 전면 문미(門楣)에 ‘제명알봉집서주경유(題名閼逢執徐周景遊)’라는 아홉 글자가 쓰여 있었으며, 나머지는 먹빛이 바래서 볼 수가 없었다.
또 곧장 바위를 따라 만월대(滿月臺)에 올랐다. 만월대의 서대(西臺)가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데 선학봉 위 정상의 동쪽에 있다. 남쪽이 자소봉(紫霄峯)인데, 그 높이가 최고봉과 같다. 자소봉의 서남쪽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 백운암(白雲庵)이 있는데, 층층으로 된 산봉우리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있어서 연하(煙霞)가 많이 끼며, 고목과 청라(靑蘿)가 많다.
연화봉 서남쪽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가 향로봉(香爐峯)이고, 그 서쪽이 장인봉(丈人峯)이며, 장인봉 서쪽이 외장인봉(外丈人峯)인데, 모두 바위여서 초목이 자라지 않고 우뚝 치솟아 연하 밖에 아득히 있다.
자소봉 동남쪽은 경일봉(擎日峯)이다. 산속에서 바라보면 매년 중춘(仲春)에 밤낮의 길이가 똑같을 때 이 위로 해가 떠오르는데, 중추(仲秋)에도 그러하다. 경일봉에서 내려오면 산세가 조금 낮아졌다가 다시 서남쪽에서 솟아나 축융봉(祝隆峯)이 되었는데, 북쪽의 최고봉과 상대가 되며 다른 봉우리에 비해 유독 초목이 울창하여 짙푸르다. 그늘진 벼랑에 석련(石蓮)이 자라는데, 5월에 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 북쪽 기슭은 외장인봉과 마주하였는데, 산중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여 이곳을 지나간다. 축융봉 옆에 옛 성터가 있으며, 서쪽 계곡 입구와 동남쪽 단봉(斷峯) 아래에도 옛 성터가 있다.
경일봉 서쪽 기슭에 또 석봉이 있으며, 산의 바위가 벽처럼 서 있는데 한 층 위에 또 한 층이 있는 것이 세 개이고, 사이에 큰 바위 구멍이 있다. 바라보면 짙푸른 철벽(鐵壁)과 같으며 금탑(金塔)이라고 부르는데, 봉우리들 중 맨 가운데에 있다. 북쪽 벼랑을 따라 돌을 뚫어 길을 내었는데 위에 반야대가 있으며, 그 옆 바위굴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물이 매우 시원하다. 남쪽으로 10여 보쯤 나가면 요초대(瑤草臺)이고, 그 남쪽에 치원암(致遠庵)이 있는데 북쪽 벽에 ‘갑자년 청화절(淸和節)에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 제명하다.’라고 쓰여 있다. 또 남쪽으로 40여 보 지점에 극일암(極一庵)이 있다.
북쪽 모퉁이를 따라 돌아서 동쪽으로 가면 몇 길〔仞〕이 넘는 바위굴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이 고운굴(孤雲窟)이다. 굴에는 거의 천 년 된 목탑(木榻)이 있는데 고운탑(孤雲榻)이라고 부른다. 굴은 깊은 산속 석벽 위 높은 곳에 있어서 찌는 듯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 때문에 풍혈대(風穴臺)라고도 부른다. 그 남쪽 조금 아래에 안중암(安仲庵)이 있고 그 옆에 안중 등신상(安仲等身像)이 있다. 앞 계단 석벽 위는 채하대(彩霞臺)이고, 그 동쪽 조금 아래가 영산전(靈山殿)이다.
석벽을 따라 올라가다가 돌아서 동쪽으로 수십여 보 지점이 상청량사(上淸涼寺)이고, 그 동쪽 조금 아래가 하청량사(下淸涼寺)인데 본청량사(本淸涼寺)라고도 하므로 가장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돌아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경일암(擎日庵)이고, 골짜기 하나를 건너 또다시 북쪽으로 경일봉 서쪽 기슭을 넘으면 바위가 끊긴 곳에 당도한다. 여기에 나무를 가로놓아 사다리를 만들어 놓은 곳을 겨우 지나면 김생굴(金生窟)이 있다. 굴 위에 폭포가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산의 절반이고 굴은 또 폭포의 절반이다. 폭포수가 김생굴 앞 반석 위에 떨어지는데 그 아래가 또 절반이며, 돌이 모두 희다. 물결이 김생굴에서 일어 북쪽으로 우거진 숲 속의 반석 위에까지 이르는데, 이곳을 참란대(驂鸞臺)라 부른다. 그 옆에 상대승암(上大乘庵)과 하대승암(下大乘庵)이 있고, 또 조금 북쪽에 문수암(文殊庵)이 있는데, 석벽에서 폭포를 구경하였다. 그 서쪽에 있는 보현암(普賢庵)의 서쪽 바위를 환선대(喚僊臺)라 한다. 뭇 봉우리가 빙 둘러 서 있는데 모두 천 길의 푸른 암벽이다. 암석 위쪽과 아래쪽에 암자 열여섯 개가 있는데, 언제나 연하가 걷히기 시작할 때에 바라다보면 아스라이 더욱 기이하다.
낙동강(洛東江)은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장인봉 아래에 이르러 휘감아 돌아서 계곡 입구를 지나가는데, 가파른 바위와 흰 자갈이 많아서 급류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축융봉 서쪽에 이르러서는 양쪽 기슭에 석벽이 마주 서서 석문이 되었는데, 이곳을 고산(孤山)이라고 하며 금씨(琴氏)의 옛 별장이 있다. 물이 여기에 이르면 더욱 느려지며, 이로부터는 평평하고 널따란 초지와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지다가 꺾여서 서쪽으로 5리를 흘러 단사협(丹砂峽)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세 차례 꺾여서 도산(陶山) 상덕사(尙德祠) 아래에 이르러 탁영담(濯纓潭)이 된다.
전면 …… 있었으며 : 고갑자(古甲子)에서 알봉(閼逢)은 갑(甲)이고, 집서(執徐)는 진(辰)에 해당한다. 곧 전면 문미(門楣)에 쓰인 글자는 “갑진년에 주세붕(周世鵬)이 제명(題名)하다.”라는 의미이다.
지리산기(智異山記)
[DCI]ITKC_BT_0344A_0300_020_002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백장사(百丈寺) 남쪽이 군자사(君子寺)인데, 지리산 북쪽 기슭에 있는 고찰(古刹)이다. 그 아래가 용유담(龍游潭)으로,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 희생과 폐백을 써서 제사 지낸다. 용유담의 물은 반야봉(般若峯)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골짜기는 돌투성이고 양쪽 벼랑에서 물이 흘러 돌 위에 석감(石坎)ㆍ석두(石竇)ㆍ석갱(石坑)이 있는데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규룡(虯龍)이 서려 있는 듯하여, 기괴한 것이 천태만상이다. 물은 짙은 흑색인데 솟구쳐 올라와 소용돌이를 이루고, 빙빙 돌며 하얗게 부서져 얕은 모래톱이 없는 곳이 1리가 넘으며, 그 아래 긴 여울이 또 1리가 넘는데 수잔(水潺)이라고 이름하니, 동쪽으로 흘러 마천(馬川)과 엄뢰(嚴瀨)가 된다.
군자사 남쪽 벼랑을 따라 백모봉(白母峯)과 제석봉(帝釋峯)에 올랐다. 그 위가 천왕봉(天王峯)이니 1만 4000길이어서 최고봉이 되는데, 몹시 추운 날이 많아 나무가 자라지 못하며, 8월에도 세 차례나 눈이 내린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동쪽으로 해 뜨는 곳까지 다하여 근해의 검매(黔魅)ㆍ욕지(蓐芝)에서 그림자가 끊어지고, 그 밖은 대마도(對馬島)로 일본(日本)의 왜(倭)이다. 그 서쪽은 연(燕)과 제(齊)의 바다이고, 큰 육지가 천 리를 뻗어 있다. 최남단은 탐탁라(耽乇羅 제주도)이고, 그 너머는 눈으로는 볼 수 없다.
。多苦寒。山木不長。八月三雪。其觀望東盡日域。近海黔魅,蓐芝絶影。其外馬島。爲日本之倭。其西燕,齊之海。大陸千里。極南耽乇羅。以外眼力不及。
덕유산기(德裕山記)
[DCI]ITKC_BT_0344A_0300_020_003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남쪽 명산의 정상 가운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니, 구천뢰(九千磊 구천동(九千洞)) 위에 칠봉(七峯)이 있고, 칠봉 위에 향적봉(香積峯)이 있다. 덕유산은 감음(感陰 안음(安陰)의 옛 이름)ㆍ고택(高澤 장수(長水)의 옛 이름)ㆍ경양(景陽 금산(錦山)의 옛 이름)의 여러 군에 걸쳐 있는데, 곧장 남쪽으로 가면 천령(天嶺 함양(咸陽)의 옛 이름)과 운봉(雲峯)이다. 지리산 천왕봉과 정상이 나란히 우뚝하며, 이어진 산봉우리에 연하가 300리나 서려 있다.
봉우리 위에 못이 있는데 못가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 자라는 나무는 특이한 향기가 풍기는 사철나무가 많은데, 줄기는 붉고 잎은 삼나무와 같으며 높이는 몇 길이 된다. 못의 모랫가엔 물이 맑으며, 깊은 숲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난다.
산을 오르는 데는 두 갈래 길이 있는데, 하나는 감음의 혼천(渾川)을 따라 구천뢰 60리를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양의 자갈길을 따라 사자령(獅子嶺)에 올라서 이르는 것이다.
오대산기(五臺山記)
[DCI]ITKC_BT_0344A_0300_020_005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오대산은 창해(蒼海)의 서쪽 140리 지점에 있다. 오대산 북쪽은 설악산인데, 옛 예맥(獩貊) 지역이다. 산이 높고 크며 골짜기가 깊어서 기운이 쌓인 것이 많은바, 상왕(象王)ㆍ지로(智爐)ㆍ청계(靑溪)ㆍ장령(長嶺)ㆍ기린(麒麟) 등 다섯 개의 산이 있고, 정상에 모두 대(臺)가 있어서 오대(五臺)라고 부르는데, 인적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바위 봉우리가 아득히 높다. 청계의 동대(東臺)에서는 붉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상왕봉 남쪽이 지로봉인데, 가장 깊은 산속에 있어서 맑은 기운이 많아 조수(鳥獸)가 살지 않는다. 도인(道人) 효례(曉禮)가 이곳에 부처를 모신 것이 없으니, 이곳이 가장 깊은 산중이라고 한다. 기린봉의 영감사(靈鑑寺)는 사책(史冊)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장령봉의 우통수(于筒水)는 영험 있는 샘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산중의 물과 합류하여 기린봉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반야연(般若淵)이 되고, 월정(月井) 아래에 이르러 금강연(金剛淵)이 되니, 한강의 발원지이다.
태백산기(太白山記)
[DCI]ITKC_BT_0344A_0300_020_006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태백산은 신라 때의 북악(北嶽)이다. 문수(文殊)ㆍ대박(大朴)ㆍ삼태(三台)ㆍ우보(虞甫)ㆍ우검(虞檢)ㆍ마라읍(摩羅邑) 백산(白山)이 모두 큰 산인데, 동이(東暆)와 진번(眞番) 지역을 점거하고 있다. 태백산과 문수산이 가장 높고 큰데, 북쪽으로 두타산(頭陀山)ㆍ보현산(普賢山)과 이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뻗쳐 있어 푸른 산이 6, 7백 리나 된다. 문수산 정상은 모두 흰 자갈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으니, 태백이란 명칭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맹춘(孟春)에 해가 영실성(營室星)에 있어 추운 날씨가 변하여 얼음이 풀렸으므로 건의령(巾衣嶺)에 올라 아득한 곳을 굽어보고 서남쪽으로 태백산을 바라보니 눈 덮인 산이 하늘을 막고 있으며 정상은 운무(雲霧)에 가려서 볼 수 없었다. 운무 아래 넓은 산기슭은 모두 깊은 산이어서 꽁꽁 얼어 있고, 그 아래는 백석평(百石坪)이다. 산 위에 태백사(太白祠)가 있으며, 태백사 남쪽 80리 지점에 각화사(覺化寺)가 있는데 사책을 보관하고 있다.
태백산에서는 인삼(人蔘), 복령(茯苓), 궁궁(芎藭), 당귀(當歸), 군약(群藥), 만생백(蔓生柏), 괴재(瓌材), 자단(紫檀), 세 치의 오디가 나오는데, 지리지(地理誌)에 동해의 삼촌심(三寸椹)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살내(薩奈) 정암(淨巖)의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태음강(太陰江)으로 들어가며, 우보 구사흘(九沙屹)로 내려와 아래로 흘러서 오십천(五十川)이 되고, 동쪽으로 백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황지(黃池)는 우보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산중의 물과 합하여 서남쪽으로 흘러서 백석평 20리를 지나고 산의 바위를 뚫고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의 근원이 되니, 이를 천천(穿川)이라고 한다. 옛날에 제전(祭田)을 두어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에 제사 지냈다.
풍악(楓嶽) 독지지(讀地誌)
[DCI]ITKC_BT_0344A_0300_020_007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내 일찍이 지지(地誌)를 읽어 보니, 기달산(怾怛山)은 동해 가에 있는 명산으로, 산봉우리가 뾰족뾰족하고 우뚝하게 솟은 것이 1만 2000개이다. 비로봉(毘盧峯)과 국망봉(國望峯)이 가장 높고 커서 해뜨는 곳을 내려다보는데 붉은 바다가 끝도 없고, 산수(山水)로는 만폭동(萬瀑洞)과 구룡연(九龍淵)이 가장 기이하다. 가람(伽藍)과 난야(蘭若 암자)가 108개소인데, 그중에 유명한 사찰로는 마하연(摩訶衍)이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보덕굴(普德窟)이 그 다음이며, 표훈사(表訓寺)가 또 그 다음이다. 장안사(長安寺)가 가장 아래쪽에 있는데, 1만 5053개의 부처에게 성대하게 공양을 드린다. 장안사와 표훈사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 처음 건립되어 고려 오백 년간 받들었는데, 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기 황후(奇皇后)가 복을 빌기 위하여 해마다 내탕고(內帑庫)에서 저폐(楮幣) 1천 정(錠)을 내어 증축하고 단장하였다.
정양사(正陽寺)는 산 중턱에 있어서 지대가 가장 높아 여러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들을 내려다보면 아득하여 끝이 없다. 유점사(楡岾寺)는 비로봉 동쪽 구정봉(九井峯) 남쪽에 있는데, 우리 혜장대왕(惠莊大王 세조) 12년(1466)에 예전에 있던 절을 증축한 것으로, 가장 큰 사찰이다. 앞 시내는 남석(南石)에서 나온다. 불교를 숭상하던 시기에 경고(京庫) 두 곳을 두어 동계(東界) 지역의 전조(田租)를 거두어서 승려를 공양하게 하였는데, 하나는 열산(烈山)에 있었고 또 하나는 백천교(百川橋) 밖에 있었다.
기달산은 풍악이라고도 하고 개골산(皆骨山)이라고도 하는데, 승려들은 금강산(金剛山)이라고 부른다. 불서(佛書)에 “담무갈(曇無竭)이 거주한 곳”이라고 하는데, 오차(烏次 장흥(長興)의 옛 이름)의 지제산(支題山)과 더불어 모두 설법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상으로 독지지 229자를 짓는다.
기 황후(奇皇后)가 …… 단장하였다 : 기 황후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비(妃)이다. 순제가 즉위한 지 7년 만에 원비(元妃)로서 황자(皇子)를 낳고 복을 빌기 위해 지정(至正) 3년(1343) 장안사에 내탕고의 저폐 1천 정을 내어 중수하게 하였다. 《東文選 卷118 碑銘 金剛山長安寺重興碑》
담무갈(曇無竭) : 보살(菩薩) 이름으로, 산스크리트어 다르모드가타(Dharmodgata ; 達摩鬱伽陀)의 음역이다.
동계(東界) 동유박물(東遊博物)
[DCI]ITKC_BT_0344A_0300_020_008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동계에 있는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과 금란굴(金幱窟)의 석문(石文)과 습계(習溪)의 천도(穿島)는 바위 구멍이 남북으로 통해 있어서 파도가 드나든다. 바람이 고요해지면 천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총석정에 이르기까지의 8, 9리와 총석정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금란굴에 이르기까지의 10여 리에는 바위굴과 기이한 암석들을 볼 수 있는데, 기괴한 모습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고성(高城)의 단혈(丹穴)과 삼일포(三日浦)에는 석감(石龕)과 단서(丹書)가 있고, 수성(䢘城간성)에는 세 개의 큰 호수가 있다. 열산(烈山)의 북쪽에 있는 명파(明波)의 해안은 모두 명사(鳴沙)로, 밟으면 모래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은 옛날 우리 익조(翼祖)가 이곳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설악산은 양양의 바닷가를 따라 서북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는데,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다. 중추(仲秋음8월보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하지(夏至)가 되어서야 녹는다. 설악산 서쪽은 한계산(寒溪山)으로 남쪽 봉우리는 아슬아슬한 절벽인데, 그 맨 끝이 정상이며 그 아래는 깊은 못이다. . 바위가 신기하고 수려하며 높게 이어져 있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으며, 폭포가 300척이나 된다. 시냇물이 구불구불 돌아서 원통(圓通) 계곡 입구를 나와 36개의 돌다리를 건넌다.
강릉(江陵)은 옛 예국(獩國)으로, 한(漢)나라 원삭(元朔 무제(武帝) 연호) 연간에 처음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고, 한사군(漢四郡) 때 임둔군(臨屯郡)이 되었다. 바닷가에 경포대(鏡浦臺)와 한송정(寒松亭), 한송정 아래에 술랑정(述郞井)과 석조(石竈)ㆍ석지(石池)가 있고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가 있다.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는 하나의 섬인데,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바다가 쾌청하면 산의 나무를 볼 수 있으며, 산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매우 멀리 뻗어 있다. 옛날 우산국(于山國)이 지형의 험고함을 믿고서 복종하지 않자 신라가 계략을 써서 항복시켰고, 고려에 이르러 백길토두(白吉土豆)가 토산물을 바쳤다. 이는 모두 동계의 고사이며 고적이다.
늙은 내가 일찍이 나그네로 유람할 적에 이 지역에 들렀으므로, 특별히 상세하게 알고 있기에 나열하여 기록해서 동유박물 287자를 짓는다.
▶하지(夏至)양력 6월 21일경으로, 북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다.
인용 한국고전종합DB 다음사전
북한산北漢山 837m - 서울 성북
2. 설악산雪嶽山 1,708m - 강원 속초
3. 오대산五臺山 1,563m - 강원 평창
4. 치악산雉岳山 1,288m - 강원 원주
5. 태백산太白山 1,567m - 강원 태백
6. 속리산俗離山 1,057m - 충북 보은
7. 월악산月岳山 1,094m - 충북 제천
8. 계룡산鷄龍山 845m - 충남 공주
9. 내장산內藏山 763m - 전북 정읍
10. 덕유산德裕山 1,614m - 전북 무주
.
11. 무등산無等山 1,187m - 광주 북구
12. 월출산月出山 809m - 전남 영암
13. 소백산小白山 1,439m - 경북 영주
14. 주왕산周王山 721m - 경북 청송
15. 지리산智異山 1,915m - 경남 산청
16. 가야산伽倻山 1,430m - 경남 합천
17. 한라산漢拏山 1,950m - 제주 제주
[출처] 전국 자연공원인 국립공원 도립공원 군립공원 알아보기|작성자 해드림출판사
1. 연인산戀人山 1,068 - 경기 가평
2. 수리산修理山 475m - 경기 안양
3. 칠갑산七甲山 561m - 충남 청양
4. 모악산母岳山 794m - 전북 김재
5. 대둔산大芚山 878m - 전북 완주. 충남 논산
6. 마이산馬耳山 685m - 전북 진안
7. 선운산禪雲山 336m - 전북 고창
8. 조계산曹溪山 884m - 전남 순천
9. 두륜산頭輪山 700m - 전남 해남
10. 천관산天冠山 723m - 전남 장흥
11. 불갑산佛甲山 516m - 전남 영광
12. 금오산金烏山 977m - 경북 구미
13. 팔공산八公山 1,193m - 경북 칠곡
14. 청량산淸涼山 870m - 경북 봉화
15. 가지산加智山 1,240m - 울산 남구
16. 연화산蓮花山 528m - 경남 고성
[출처] 전국 자연공원인 국립공원 도립공원 군립공원 알아보기|작성자 해드림출판사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