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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말씀 : 고전12:13
제목 : 성령과 하나됨의 사역
계속 이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성령의 오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말씀은 우리와 함께하심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의 결과입니다. 저번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지만 의미 전달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연합은 나의 노력과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능력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요란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가져다주는 실질적인 능력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깊이 뿌리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석처럼 끌어당겨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성령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인생이 낭비 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중심을 잡을 때(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펼쳐놓으신 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행여나 우리가 큰일을 하도록 성령께서 몰아가거나 감동을 주실 때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1:5-6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하시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담대함을 주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큰 약속과 계획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 왜 무거움을 느끼지 못합니까? 오히려 사역에 대한 긴장감과 두려움은 있을지 몰라도 무겁게 느끼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사역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거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가 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확인한다 하더라도 순종하면 이루어집니다. 즉 우리 안에 내주해계시는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인생을 ‘짐’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참 무겁고 버겁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상황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이론적으로는 알겠는데 실질적으로는 느낌이나 확신이나 체험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영적인 부분에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다는데 영적 감각이 둔해서 그런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 인내하시고, 기다리시고, 설득하시면서 계속 말씀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배울수록 내 짐이 가벼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분의 성품으로 빚어지면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가볍게 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짐을 대신 져주시는 것도 아니고 짐이 실제로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즉 환경과 여건과 상황은 똑같습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짐이 가벼워진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와 겸손’의 성품으로 변화된 나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즉 자신의 변화는 바뀌지 않는 환경, 여건, 조건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이는 곧 우리 안에서 나오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저번주 3부예배 시간에 하박국서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의 믿음은 ‘에무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에무나’는 ‘버티다’라는 뜻인데 이 버티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다듬고 빚어내시는 일, 즉 연단과 훈련의 시간으로 삼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즉 버팀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 있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너희 안에서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자의식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덮어씌우듯 감싸고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내주를 우리 안에 실제화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의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성령께 취해 있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엡5:18 말씀은 성령께 취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성령께 도취되어 있을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모든 영역에 내주해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실제하시며 우리의 혼적인 부분을 다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왜 혼적인 부분을 다루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다윗의 외침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성령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자아, 양심, 사고, 가치관 등을 흔들어 놓으시며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성령님의 일하심에 나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면 그분께서 내 삶을 주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를 반대하는 무리를 만날 수도 있고, 고난이나 아픔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느냐는 문제는 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면 늘 이김과 능력과 기적과 보상이 있어야지, 왜 성령께서 우리 편이시고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환경과 여건과 상황이 바뀌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여러 번 설명했지만 다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운명적으로 하나님나라에 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나라에서 이 땅을 한번 보십시오.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일하게 계십니다. 그 외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칭의 구원, 성화 구원, 영화 구원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칭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성화 구원인데 이를 위해, 즉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빚어지고,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녹아내리고, 다듬어지는 등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주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영명교회 성도들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껍데기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영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할 수 있는지 고심하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며 그분과의 사귐의 삶을 위해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님 안에 우리의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복된 영적인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매 순간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전폭적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주장하시며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순절로 돌아가봅시다. 요한복음14:20 말씀은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그곳에 가득 찬 성령의 충만함이 제자들에게 내면의 변화를 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도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이 시간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나는 분명한 예배의 결과는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나 ‘방언’과 같은 오순절의 외적인 현상에만 치중해서 ‘그날’에 내면적으로 어떤 영적인 역사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이 외적인 것만 갈급하며 기대할 뿐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깊은 생명의 연합에 대한 진리에 관해서는 무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당시 제자들의 자세를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분명히 남달랐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함께하셨던 주님께서 하나님나라에 가셨다는 증거를 얻었고, 그분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재림하실 주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령강림은 제자들에게 굉장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 안에서’ 하나를 이루셨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에서 그들과 함께하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됨의 실체를 방언으로 말미암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17:21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는 주님의 기도가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과 성령강림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성령 침례’를 받음으로써 영적인 해방을 받았고, 하나님 안에서 주님의 부활 생명과 하나됨을 입었으며, 더 나아가 성령께서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통로가 되기 위해 영의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고전12:13을 통해 오순절이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몸의 지체들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14:20은 오순절에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님 안에 들어간 것을 설명하고 있고, 고전12장은 주님과 연합된 치제들이 성령의 역사로 어떻게 하나의 살아있는 영적인 몸, 즉 교회를 이루었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2:13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한 성령의 침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연합된 것입니다.
고전12:13은 ‘성령으로’라고 말하고 있고, 요14:20은 ‘너희가 내 안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고전12:13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으사 그의 몸의 지체로 연합을 이루게 하시는 실제적인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오순절의 실제적인 의미를 외적이나 순간적인 현상이 아닌 (물론 이런 외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가운데 부으시도록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계획을 성취하시며, 약속을 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오순절의 능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1:8을 보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의 ‘권능’의 헬라어 ‘두나미스’는 ‘생동력 있다’, ‘다이내믹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사실 외적이 아닌 내적인 부분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내포’, ‘보유’ 즉, 내적 능력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역량’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이 말씀은 ‘지금은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도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 가능성’과 ‘무한 역량’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과 침례를 체험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 사역에서는 ‘무능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위해 섬기는 작은 봉사마저도 무능하게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무능한 교사들, 무능한 목사들, 무능한 봉사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같은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무한 가능성’과 ‘무한 역량’을 부여하셨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 Lewis)가 그의 저서에서 언급한 ‘무한 가능성과 역량’의 6가지 능력 중 오늘은 3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의 선포를 위해 부여된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이 능력을 부여받아 오순절에 강력하게 말씀을 전했고, 이로 인해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얼마나 많은 설교가 밀려오고 있습니까? 온라인(유튜브, 교회 사이트 등)과 책을 통해 엄청난 양의 설교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양의 설교나 성경공부가 무색하리만큼 ‘마음을 찌르는’ 능력이 상실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한 귀로 들어가서 마음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귀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목사들의 자세, 태도, 열심의 측면에서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들이 설교를 작성할 때 얼마나 정성을 들입니까? 저 같은 경우도 원고설교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설교노트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설교가 그의 생각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그가 더욱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들은 감동과 도전과 찔림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을 통한 능력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의 설교는 그의 머리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토해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날 분명 성령 충만함을 입었고 이로 인해 그의 마음에 명확한 이성과 판단력 그리고 기억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히 입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마음에 찔림을 받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고, 심령이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증거를 위해 부여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를 위해 부여받은 능력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전하는 자나 듣는 자들이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거나 듣는 말씀이 우리의 생각, 의견, 견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나 들을 때 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역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근거로 부여된 능력, 이 놀라운 무한 가능성과 무한 역량을 우리는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우리의 간증 속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셋째, 일을 하기 위해 부여된 능력입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여기서의 ‘일’은 개인의 일일 수도, 교회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가’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의 길을 두 번 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사역도 처음 가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동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에서의 일만이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시대에 성령과 연합하여 함께 사역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역 또한 성령과 함께함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나온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성령께서 임하시면 외부적인 변화가 아닌 내부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