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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무한창조
이종찬 장군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친일파 출신 중에 보기 드물게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으며, 6.25전쟁 당시 북한과 힘써서 맞서 싸웠고 또한 독재 정권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는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었으며, 제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여 '참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 이종찬 장군의 초기 생애에 대하여
이종찬 장군은, 1916년 일제강점기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조선귀족회 부회장을 지낸 자작 이규원(李圭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지울수 없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하영”으로 대한제국 외무대신까지 올랐으나, 서해 어로권과 내륙 항행권을 일본에 넘기고 자작 작위를 받은 것 뿐 아니라, 만년에는 한반도 최대의 고무신 회사인 “대륙고무 주식회사”를 창업한 국내의 거부 중의 거부였다.
이종찬은,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평양출신 채병덕과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해 1935년 3월 졸업했다.
일본 육군 보병 제3사단 아이치현(愛知縣) 도요하시(豊橋)의 공병대대에서 6개월간 실습을 거친 후, 같은 해 9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해 1937년 6월 제49기로 졸업했다.
그리고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임관하던 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제2차 상하이 사변에 파견되어, 전선의 공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조선 귀족인 “자작 이규원의 아들”로서 치열한 전선에 앞정서 참전하고 있다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친일적인 “매일신보” 1938년 9월 13일자에는 이종찬의 사진과 함께 그의 '진중시(陣中詩)'가 실리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한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전 도중이던 1938년 중위로 진급했으며, 약 3년간을 전선에 있다가 1940년에야 겨울 후방으로 복귀한 후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했으며, 훈 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어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등의 금치훈장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인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이종찬을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1942년 초 에는, 도쿄(東京)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敎)에서 수학했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뉴기니에도 파견되었다. 1942년 12월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 육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1943년 10월 전황 악화로 뉴기니 서부로 퇴각한 이래 종전할 때까지 남태평양 일대를 전전했으며, 12월에 그는 공병 소좌로 진급했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하다가 전쟁의 종전을 맞게 된다.
2, 이종찬 장군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
그는 육사 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또한 귀족 출신들이 꺼리던 공병을 지원하여서, 동기들은 졸업식 때에 가서야 그가 귀족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본군 시절 행적은 “홍사익”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나 그는 사실 민족정신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아무튼, 이종찬이 기본적으로, 일본 육군 시절에 “적극적 친일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과 “친일 반민족행위진상 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보고서에서 모두 동일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소위 이상의 군인'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한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지은 친일시와 금치훈장 수상을 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종찬 장군” 스스로도 이에대한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종찬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 자작 작위도 습작하지 않은 점만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전쟁이 점차 막바지로 접어들자 총독부에서도 습작 문제 따위로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별다른 독촉 요구는 없었고, 결국 습작하지 않은 채로 광복을 맞이했다. 만약 이때 습작했다면 이종찬은 대한민국 육군의 요직에는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3. 8.15 광복 이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패잔병 신세로 현지에 억류되어 있다가 겨우 1946년 6월 귀국하였는데, 그는 다른 일본 육군 출신 동료들이,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에 들어가 간부가 되었을 때에도, 자신은 민족의 죄인이니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여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 1949년 6월 입대하여 공병대령으로 임관한다. 이때 “반민족 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지만, 개인적 악질 친일 행위를 했던 것은 없었고, 무엇보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습작을 하지 않았던 점 등이 인정되어 특별한 처벌은 받지 않았다.
4. 이종찬 장군과 6.25 전쟁
6.25 전쟁 중에 이종찬 장군은, 제3보병사단장을 역임하여 영천 사수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또한 38선을 최초로 돌파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최대한 전쟁에서도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백일 군단장이 영덕군을 공격하고 있던 그의 부대가 읍내 시가지에 틀어박힌 북한군의 저항에 의해 고전하고 있자 '읍내에 직접 포격도 하고, 불도 지르고 해서 빨리 진입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런 마적단 토벌 방식을 같은 동포가 사는 곳에 어떻게 쓸 수 있느냐'고 항명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9월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북한 영내로 북진하고 나서도 북한 내 공산당원이나 인민군에 앞장서 협력했던 자들에 대해 휘하 지휘관이 즉결처분을 하려고 하자 '아무리 그래도 비전투원을 그렇게 재판도 없이 처형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저들이 인민재판으로 우리 양민들을 마구 죽인 것을 어떻게 비판하겠는가? 즉시 경찰에 넘겨 법에 따라 처벌받게 하라' 고 명하여 학살을 막기도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북한군 포로를 끌고 다니기 힘든 휘하 지휘관들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하자 역시 이를 막아 포로에 관한 국제법 규정대로 수용소로 후송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을 정도로 원칙을 철저히 지킨 인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건진 북한군 중좌 하나는 '아니, 남조선에도 너 같은 장군이 있느냐?'며 감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이종찬”은 병기행정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최전선을 떠나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복무하게 되었으며, 그 후 육군종합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51년 6월에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물러난 “정일권”의 뒤를 이어 제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됨관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때 이종찬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상대 여자의 집안이 형편없다는 것을 문제삼는 모친께 효자였던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습작을 거부한 친일파였던 이 집안이 과연 그렇게 잘났던가라는 식으로 항변하자, 모친이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5. 독재정권에 이종찬의 반대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좋게 평가받는 부분은 바로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그의 행적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대통령으로 재선되기 위한 시도를 하였는데, 이때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때 이종찬은 이른바 '육군 훈령 제217호'를 내린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줄이면 '군은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 는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 자체”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방장관이 육군본부측에 내렸던 파병 명령도 이종찬 장군은 거부하였다. 당연히 이승만은 대노했고, 심지어 당시 유재흥 육군참모차장에게 '이종찬을 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려다가 유재흥의 설득으로 그 명령을 철회했다고 한다. 이후 이종찬은 이 때문에 이승만의 미움을 샀고 결국 참모총장직에서 13개월만에 해임되었다.
6. 이종찬의 쿠데타 설
그런데, 사실 이종찬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참군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문이 있다. 먼저 이종찬은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기 직전에, 주한 미 대사관의 앨런 라이트너 공사를 만나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대통령, 내무부 장관, 계엄사령관을 가택연금시킬 수 있다"고 사실상 쿠데타를 제안했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트너 공사가 국무부에 "이제 한국군 참모총장이 (이승만을 제거함으로써)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채택 가능한 방안인가에 대해서 숙고해볼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전보를 보낸 것 역시 확인된다.
7. 이종찬과 김재규와의 관계
아무튼 이종찬은,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이후에,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으로 1년간 유학을 다녀온 뒤 1953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김재규와 많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김재규와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이 때 김재규가 상관 송요찬과의 대립으로 전역을 생각하고 있을 때 이종찬이 감싸주어 육군대학 휘하에 편제 외 자리까지 만들어 주면서, 김재규를 데리고 온 것 이다. 또 김재규의 준장 진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10.26 사건이 터지자, 이종찬은 이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8. 이종찬의 정치적 행보
이종찬은 “조봉암”의 감형을 이기붕에게 탄원하는 등,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박정희 등 소장 장교 세력에게 쿠데타의 지도자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많았으나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에 장병들의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 표를 찍도록 독려하라는 지시가 고급 장교들에게 내려오자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사실 이종찬은 개인적으로는 이기붕과 꽤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국민방위군 사건당시 국방부 장관이 되는 이기붕, 국회쪽 관계자로 조봉암과 신임 육군 참모 총장 신분이 되었던 위치에서 만난 인연도 있다. 위에서 소개된 이종찬의 결혼도 이기붕이 이종찬의 모친을 찾아가 일국의 육군참모총장이 총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체면상 걸맞지 않다고 설득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명령에 정면으로 항명하고도 비록 한직으로나마 군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이기붕”과의 친분 관계가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종찬은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당시 육군대학 교관의 회상에 의하면 이강석이 1960년 3.15 선거 며칠 전 이종찬을 찾아왔을 때 '부정선거를 하게 되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지금 부정선거 지령이 내려와 있는데, 물론 나는 이박사와 네 아버지를 찍겠지만, 육군대학 장병들은 절대 자유 의사에 따라 투표를 하도록 하겠다. 이 따위 부정선거 지령을 누가 내렸느냐'고 말 했다고 한다.
9. 이종찬의 예편
1960년 최종 계급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같은 해의 4.19 혁명 발생 후에는 국방부장관이 되어, 친이승만 정치군인들을 군에서 몰아내는 일에 주력했다. 이때 그는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 1960년의 제헌절날 헌법 준수 선서식을 거행하게 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철저히 강조한다. 그러나 곧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였고, 그는 1961년부터 6년간 주 이탈리아 대사로 봉직하게 된다.
사실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 자체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5.16 자체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으나,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하고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 집권으로 향하자 박정희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76년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제9, 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는 김재규의 애원과, 유신 정부의 강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 정권은 참군인으로 이름높던 그를 유정회에 끌여들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군은 정치를 해선 안된다는 신념과 양심 때문에, 유정회 의원직을 늘 가시방석처럼 여겼고, 실제로 국회에서는 딱 한번 발언하고는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뱃지도 주요 공식 석상에만 달았다.
10.26으로 김재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군 원로로서 재야에 있다가 4년 뒤 1983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였다.
10. 이종찬에 대한 평가
친일에 대해서 만큼은 사실, 일본군 입대 경력 등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명백한 전과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자신의 죄를 대부분 부인한 사람들과 달리, 그것을 일생 그 친일선택을 부끄러워했으며,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소신을 지켰기 때문에 이종찬을 “참군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승만 정권 당시 이기붕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발췌개헌 당시 계엄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조봉암 사형 당시 재고를 요청하거나 했다는 점이 크게 평가받는다.
이러한 자신의 친일행적의 과거 때문에,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임 당시 광복군 출신을 가능한 한 기용하려고 애썼는데,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면서 초대 교장으로 독립군 출신의 안춘생당시 준장을 기용하면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군들도 능력상 뛰어난 인물은 많지만, 적어도 육사만큼은 독립군 출신이 교장이 되어서 민족정신을 세워야 한다고 말햇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잘못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 주류 인사이면서도 권력을 남용하거나 권력에 묻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양심적 군인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김수환 전 추기경처럼 소극적이지만 의미있는 저항을 했다고 볼 수 있다.